◈145화 모든 것이 순리대로 (5)
“신성력을 먹으면 죽는 것 같네.”
밤을 지새운 만큼 몇 시간 정도 눈을 붙였을까.
깨어난 우리에게 아크메이지가 해당 사실을 통보했다.
해당 짐승은 대삼림의 자후카야와 동일한─종이 다를 뿐, 마기 없이 마력을 먹는 점에서─개체이고, 신성력도 먹을 수 있지만 그 대가로 사망한다는 점이 주 내용이었다.
“자후카야의 개체 수가 워낙 적고, 마탑까지 옮기는 데 시간도 걸리다 보니 그쪽도 이틀 전에야 해당 실험에 착수했다는데… 거기도 신성력을 먹인 것들이 싹 다 죽었다지 뭔가.”
안 그래도 몇 마리 없는 것들이 이 실험으로 죽었다라. 나는 비명을 질렀을 마법사들의 명복을 빌어 주었다.
그들의 희생 덕에 이것이 새로운 적은 아니며 신성력까지 무력화할 수 있는 건 아님을 알게 되었다. 천만다행이었다.
“하지만 그게 중요한 건 아니지. 정말 중요한 건…….”
“이것들이 어디서 태어나냐는 거겠죠?”
“자네 말이 정확하네.”
“하면 동물들이 오는 방향을 조사… 할 수 없겠군요. 사방에서 몰려드는 것이라 했으니.”
그사이 데브와 인퀴지터가 차례로 아크메이지와 의견을 주고받았다. 버서커? 자리에는 있지만 꾸벅꾸벅 졸고 있다.
“크어어어.”
“…베르세르크는 더 재우는 게 나을 걸 그랬네.”
“제가 방에 데려다드리고 올까요?”
아니, 그냥 퍼질러 자는 중이다. 대화가 시작될 때부터 어렵다, 이해 안 간다 그런 표정이더니 결국 뻗었군.
쾅!
“크어─ 어엉?”
“……?”
“누구…….”
한데 우리가 있던 식당의 문이 벌컥 열렸다. 누군가가 발로 차듯 문을 열어 버린 것이다.
“뭐야, 이곳에 묵는다고 들었는데?”
기척이 다가오는 속도가 빨라서 새로운 소식이라도 오나 했더니만, 태도로 보아 아무래도 아닌 것 같지.
근데 저놈은 정체가 뭐길래 우리 숙소 문을 발로 차냐? 차림새로 보아 교단 사람은 아닌데?
이 도시엔 마탑 지부가 없거니와 마법사 같은 차림새도 아니니 그쪽 소속도 아닐 테고.
“당신은…….”
“잠시만, 잠시만 기다려 달라 부탁드리지 않았습니까!”
“아이고, 도련님!!”
잠시간 어리둥절해했을까. 아크메이지가 무어라 말하려던 차에 새로운 인물들이 난입해 왔다.
사제 몇 명과 직원─세계관을 감안하면 하인쯤?─을 연상시키는 차림새의 사람들이었다.
“야.”
그들은 최초의 침입자를 연행하려는 듯이 양쪽에서 붙잡았다. 일부는 열린 문을 닫으려고도 했다.
그러나 그 모든 걸 이겨 낸 이는 삐뚜름한 시선으로 우리를 응시했으니.
“여기 용사가 왔다던데, 혹시 너희냐?”
우리에 대한 정보를 아는 건 둘째 치고, 부유한 옷차림값 제대로 하는 인성이었다.
“아이고, 도련님!”
“죄송합니다. 저희가 조속히 해결할 테니, 부디 대리자님께서 관대한 마음으로 넘어가 주시면…….”
“너흰 저리 가고. 내가 묻잖아! 너희 용사냐고!”
나는 제자리 뛰기 하면서 봐도 부잣집 자제일 이를 응시했다.
컨셉 인성도 쟤보다 더하면 더했지 못하진 않을 것이므로 뭐라 할 생각은 없는데…….
“벙어리 새끼들이야? 대답 안 해?”
“도련님!!”
“그만하십시오! 이 이상은 성주님의 아드님이라 해도 참지 않겠습니다!”
쟤는? 무슨 깡으로? 근 2m의 거구 둘(버서커와 아크메이지) 앞에서 저러지?
키 재는 도구가 없어서 정확하게 모를 뿐, 나도 190 어림쯤 되는 입장이고.
정말이지 보통 배짱이 아니다. 내가 쟤 입장이면 쫄아서 ‘문 잘못 열었습니다’라고 말한 뒤 90도 인사 날리고 튀었을 것을.
“베르세르크 신기하다! 사람이 저렇게 동그래질 수도 있나?”
“푸흡.”
“그렇군요. 저도 신기합니다.”
“인퀴지터…….”
와중에 눈치없는 버커서가 진실의 아가리를 털고, 순수한 인퀴지터가 동조했다.
나는 비만을 두고 놀릴 생각 없으므로 굳이 말을 더 얹지 않았다.
친구 중 한 놈이 스트레스성 폭식으로 한때 살이 엄청 쪘던지라… 응. 걱정은 해 줄 수 있어도 놀리고 싶진 않다. 걔가 그때 너무 고생했어.
“뭐, 뭐라? 멍청한 근육 덩어리가……!”
“제발 가요, 도련님!”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이쯤 하시고 가시지요.”
별개로 쟤 유도나 씨름 하면 잘하겠다. 보통 저렇게까지 찌면 몸에 힘주기도 버거워하던데, 쟨 버티는 힘이 장난 아니네.
“놔! 내 발로 갈 거니까! 빌어먹을, 괜히 힘들게 왔네.”
물론 그러기 위해선 인성부터 먼저 고쳐야겠다만.
“새파랗게 어린 여자랑 허여멀건 짐승 새끼, 지저분한 반짐승 따위가 있을 줄 알았으면 용사고 뭐고…….”
“도련님!!”
그런데 방금 뭐라고? 새파랗게 어린 여자? 허여멀건 짐승 새끼? 지저분한 반짐승? 장난해??
“…지금, 신의 대리인과 그분의 동료들을 모욕하신 것입니까?”
“뭐, 했으면 어쩔 건데?”
“도련님, 제발……!”
내가 듣기에도 심한 모욕이다. 하면 이 세계관에 익숙한 이들은 어떻겠는가.
성주의 아드님이랍시고 어떻게든 온건한 방식을 쓰려던─아마도?─교단의 인사들이 붉으락푸르락해졌다.
“감히 아크메이지님을……!”
“오… 반짐승이라니. 오랜만에 듣는 멸칭인데…….”
“으음.”
우리 일행도 비슷했다.
악마와 관련된 게 아니면 항상 순둥순둥한 인퀴지터는 표정을 확 굳혔고 짐승이라 모욕받은 두 사람은 낯빛이 서늘해졌다.
“저거 죽여도 되나?”
하물며 태평하게 하품이나 하던 버서커도 그랬다. 안색을 바꾼 게 아니라 말이 엄해진 수준이긴 했지만.
“지금 저 근육 덩어리가 뭐라고─!”
“신의 대리자를 모욕한 것은 신을 모욕한 것과 다름없는 일. 더는 대우하지 않겠다. 끌고 가!”
“잠, 잠깐만요!”
“뭐, 뭐야! 이 자식들이!”
다행이랄지 아쉬운 일이랄지.
일행이 본때를 보여 주기 전에 교단이 먼저 움직였다. 노성과 함께 본격적으로 힘을 쓰기 시작한 것이다.
“놔, 놓으라고! 난 다음 대 성주가 될 몸─ 아, 아파! 놔!!”
“허, 신을 모독한 것도 모자라, 적법한 후계자가 따로 있건만 스스로 다음 대 성주를 칭해? 성주께 반역에 대한 죄도 전달하겠다!”
“마, 망했다…….”
다른 말로는 힘 조절을 포기했다고 봐도 될 것 같다. 신성력까지 끌어낸 걸 보면.
내가 인퀴지터 힘 쓰는 걸 봐서 아는데 저러면 100% 멍든다. 심하면 뼈도 부러질 수 있고.
“놔, 놓으라고!”
“데려가, 감옥에 처넣어!”
각설하고, 그 옆에서 필사적으로 말리던 하인들만 불쌍하게 됐다. 이도 저도 못하고 발만 동동 구르네.
“나서지 마십시오. 베르세르크, 자네도 할버드 놓게.”
“하지만! 아크메이지님을 모독한 자를─.”
“정말 죽이면 안 되나?”
“스스로의 모욕에 화난 것이라면 모를까 저를 위해서라면 필요 없습니다, 인퀴지터. 베르세르크 자네도 안 되네. 어차피 잡혀갈 사람, 굳이 죽여서 범죄자가 될 필요는 없잖은가.”
반면, 상대가 끌려가는 동안 아크메이지는 한숨과 함께 관자놀이를 꾹꾹 눌렀다.
“죄송합니다. 저희의 불찰로…….”
상황 정리랄지, 사죄를 위해 한 명 남은 사제가 머리 박을 기세로 사과해 왔다.
저 발언이 그들의 죄는 아니므로, 초장부터 막지 못한 걸 사과하는 것일 테다.
“괜찮네. 성주의 자식이 밀고 들어오는 걸 자네들이 어찌 막았겠나.”
“아니요, 저희의 불찰이 맞습니다. 저런 분임을 알았던 만큼 좀더 주의를 기울였어야 했는데…….”
“사과는 됐다지 않나. 그보다, 자네는 괜찮은가? 자네도 모욕받았거늘 내가 임의로 처리해 버려서…….”
“예? 아아. 저야 뭐 익숙하니까 괜찮습니다요. 유야무야 된 게 아니라 제대로 잡혀가기도 했고. 오히려 법사 나리야말로 괜찮으십니까?”
“…나도 괜찮네. 내 젊었을 적엔 차별주의자가 훨씬 더 많았으니까.”
“오…….”
“다 바보 같은 것들이다. 인종이고 뭐고 목을 꺾으면 다 죽는데.”
두 사람의 발언에 괜히 울분이 차오르려 했을까. 버서커의 한마디에 나는 반사적으로 딴죽을 걸 뻔했다.
솔직히 그렇잖아. 목을 꺾어 버리면 인종이고 뭐고 어지간한 생물은 다 죽는다고.
“모욕에 익숙해지지 마십시오. 망종, 네놈도 마찬가지다. 그 어떤 사람도 타고난 것을 두고 멸시받아선 안 되며, 그것에 친숙해져서도 안 된다.”
“…본인은 새파랗게 어린 여자 소리를 무디게 넘겼으면서 그런 말 하깁니까?”
“내가 어린 것도 맞고, 여자인 것도 맞는데 뭘 무디게 넘겼단 말이지?”
심지어 이쪽은 욕을 욕으로 못 알아들었나… 웃기달지, 차라리 이게 승리자랄지.
“…이해 못 했으면 됐습니다요. 그보다 멸시받아선 안 된다면 댁, 예전에 절 범죄자 취급 하던 건 뭡니까?”
“그건……! 내가… 내가 섣부르게 판단한 거긴 하지만……! 그래도 네놈이 도둑처럼 굴어서 도둑놈 취급 받는 거랑, 태어나길 큐어티족일 뿐인데 반짐승 취급 받는 건 전혀 다르지 않은가!”
도리어 이런 쪽에 눈치 없는 사람이 인생 살긴 더 편할지도 모르겠다.
내가 그렇게 생각하는 동안 인퀴지터가 버럭 외쳤다.
“참 나. 편 들어 주는 건지 욕하는 건지. 결국 도둑놈으로 생각했단 거잖습니까.”
그러자 데브가 헛바람과 함께 몇 마디를 중얼거렸다. 어이없어서 투덜거리는 거라기엔 글쎄다. 기분 나빠 보이진 않았다.
아크메이지가 흐뭇하게 웃었다.
“아, 그렇지. 이봐요, 사제님. 성주의 아들이란 건 들었는데, 이곳엔 왜 왔답니까?”
미묘해진 분위기가 간지러웠는지, 데브가 주제를 다시 돌렸다. 확실히 나도 의문인 부분이었다.
걘 진짜 왜 우릴 찾아온 걸까?
“그, 음. 저도 확실히는 모릅니다만…….”
데브의 질문에 사제가 조금 당황했다.
그러나 끝까지 모른다고 잡아떼지는 않았다. 사과는 됐다고 하나 외려 그 때문에 죄책감이 더 남은 모양이다.
아주 죽을 힘을 다해 답을 짜내려는 게 보였다.
“아마… 맹수의 토벌을 재촉하려 하신 걸 겁니다. 맹수들이 급증하는 바람에 소성주님의 결혼식이 밀려 버렸거든요.”
그렇지만 답이 좀 의외긴 했다.
소성주와 둘째 도련님을 구분해 말하는 걸 보면 소성주는 아마 첫째일 것 같은데.
무뢰한이어도 가족은 아낀다는 건가? 이상한데? 아까 다음 대 성주가 될 사람은 자기라지 않았어?
“제가 뭐라고 우릴 재촉하나 싶지만… 용사님이 계시니까 도와 달라고 하는 건 그렇다 칩시다. 근데 결혼식은 대관절 무슨 상관인데요?”
“그… 하. 소성주님의 결혼 대상이, 에드니엄의 소성주님이십니다.”
“예?”
“…소성주끼리 결혼이라. 드문 일이군. 정략결혼이라도 보통 후계자끼리 잇진 않을 텐데.”
“아, 정략결혼은 아닙니다. 연애결혼입니다.”
“오, 연애결혼.”
“하면?”
“…소성주님이 혼례를 올리시거든 후계자 자리를 내려놓고 그 도시로 가실 거라 생각한 듯합니다.”
나는 그제야 납득했다. 굉장히 낙관적으로 봤을 때의 일이긴 하지만, 아예 불가능한 경우의 수도 아니긴 했다.
“멍청인가?”
“어리석군요. 저따위로 굴면서 성주가 될 수 있다고 믿다니.”
“결혼이랑 후계자를 내려놓는 거랑 뭔 상관인지 모르겠다.”
“그것참… 놀라운 판단이군.”
그래도 그렇지, 상대가 올 가능성은 아예 생각 안 해?
“…꼭 결혼식 때문만은 아닙니다. 성주님과 소성주님의 사이가 소원한 데 비해 둘째 도련님은 성주님의 총애를 받고 있거든요.”
“저게요??”
데브가 척수반사적으로 되물었다. 그러나 사제는 그것을 무례라 받아들이기보다 고개를 주억이며 동의를 표했다.
“저희도 의문입니다. 소성주님은 어머님을 닮아 참으로 지혜롭고 현명하시거늘, 성주님은 어째서… 아, 죄송합니다. 신의 종으로서 험담은 해선 안 되는데.”
“괜찮습니다. 신께서도 용서하실 것입니다.”
아니, 이 정도는 험담 축에도 안 끼지 않나. 남의 가정사를 함부로 말하고 다니는 건 물론 안 좋긴 한데… 그래도 이 정도는? 경고 수준이 아닌가?
“나 참. 하여간 인간들은.”
“그래도 이번 기회에 제대로 벌을 받겠지요. 이 정도 모욕죄면 수도원에 보내질 테니, 소성주께서 다른 도시로 떠나도 저치가 성주로 추대될 일은 없을 테고 말입니다.”
내가 고민하는 동안 인퀴지터가 안도했다는 듯 조잘거렸다. 저놈이 성주가 되는 꼴은 절대 못 보겠다는 심기가 목소리 아래서 드글거렸다.
사제의 표정이 미묘해졌다.
“아마 수도원엔 안 갈 것입니다.”
“예?”
“성주님이 총애하는 자식이니까요. 어떻게든 무마하실 겁니다.”
“…신전 내에서, 다른 누구도 아닌 제 동료들을 모욕한 죄입니다. 그걸 무마한단 말입니까?”
“…전적을 고려하면, 성주님이나 소성주님께서 직접 신전으로 와 무릎 꿇고 사죄하시면서 백만 단위의 금액을 기부하실 게 뻔한지라. 그 돈이면 도울 수 있는 사람이 수천이다 보니 지금까진 눈감아 드렸… 지만 이번엔 용사님의 의견을 전적으로 따를 겁니다. 예.”
인퀴지터와 데브의 표정이 동시에 구겨졌다. “역시 죽이는 게 맞았다.” 배경으로 은은히 흐르는 한마디는 버서커의 것이다.
* * *
“죄송합니다.”
불운하게도, 사제의 예상은 정확히 맞아떨어졌다.
1시간도 채 되지 않아, 소성주가 어마어마한 액수의 돈을 들고 방문한 것이다.
“동생을 제대로 돌보지 못한 제 잘못입니다. 부디 관대한 자비를.”
심지어 그녀는 다짜고짜 무릎을 꿇었다. 본인의 잘못이 아닌데도 망설임 따윈 없는 눈치였다.
어쩌면 그게 동생의 잘못을 제 잘못으로 여겨서라기보다, 그냥 이 행위에 너무 익숙한 걸지도 모르지만 말이다.
“…일어서십시오.”
인퀴지터의 말에 소성주는 우아한 몸짓으로 일어섰다. 그녀의 검정색 머리카락이 비단인가 싶을 정도로 매끄럽게 찰랑였다.
“저희는 이런 사과를 바란 적 없습니다.”
“…죄송합니다.”
“이 일에 연관이 없는 소성주님의 사과는 더욱 그렇습니다.”
김치만두의 말에 소성주가 눈을 질끈 감았다. 두 눈꺼풀에 벚꽃 같은 눈동자가 가려졌다.
“저는 제 동료를 모욕한 자의 사과를 그리고 합당한 벌을 바랍니다.”
인퀴지터의 요구에 소성주가 다시 눈을 떴다. 골치 아프게 됐다. 그런 시선이 잠시간 눈동자에 떠올랐다가 가라앉았다.
“…감히 청하건대, 신의 대리자시여. 부디, 제 체면을 보아 사과를 받아 주시면 안 되시겠습니까.”
“제가 당신의 사과를 받는 것이 어째서 당신의 체면을 올리는 것이 됩니까?”
나왔다. 돌려 말하는 걸 해석할 줄 몰라서 곧이곧대로 알아듣고 직구를 던져 버리는 인퀴지터의 버릇.
그로 인해 상대는 그대로 굳어 버렸다. 표정은 은은하지만, 아마 속내는 치열하게 할 말을 고르고 있을 것이다.
“그건…….”
“내가 왜 사과해야 하는데!”
그러나 그녀가 찰나간 굴린 머리는 곧 아무 소용 없게 되었다. 사건의 원흉의 조금의 자기반성도 하지 않고 나와 버렸거든.
소성주의 고운 눈동자가 얼핏 싸늘하게 식어 버렸다.
“용사라고 해 봤자 어차피 악마에게 죽어 나자빠질─.”
더불어 저놈이 기어코 선을 넘어 버림에 따라 내 컨셉 역시 칼을 잡았다.
쾅!
“커헉!”
“으악!”
“악마기사!”
안 그래도 벼르고 있었는데, 차라리 잘됐다.
폭력이 옳지 않다는 건 알지만 그래도 머리 한 대 콱 박아 주고 싶었거든? 그런 마당에 컨셉이 나설 수밖에 없는 발언을 해 줬으니.
“다시, 말해 봐라.”
나는 상대의 바로 앞 대지를 발로 짓이기고─말 그대로 짓이겼다. 균열이 쩍 일어 크레이터가 일도록─70cm도 채 되지 않을 간격 속에서 검을 뽑았다.
“누가 악마에게 죽는다고?”
“으…….”
내가 대지를 뒤흔든 충격 때문인지 뒤로 풀썩 넘어가 버린지라, 머리 하나 차이 나는 상대를 힘겹게 내려다볼 필요는 없었다.
내 검이 풍만한 배 위를 찌를 것처럼 추켜세워졌다.
“도, 도련님!”
“누가. 악마에게. 죽느냐고. 물었다.”
그 흉흉함 때문인지, 상대는 결코 시선을 돌리지 않았다. 나쁘지 않았다.
“도련님께 위해를 끼치시면─.”
“난 네놈에게 묻지 않았다.”
좋아, 좋아. 마침 내가 광원을 등지기까지 한 각도니까, 이 정도면 저 무뢰한도 제대로 겁먹지 않을까?
“혀가 뽑히고 싶은 게 아니라면, 다물어.”
“…….”
별개로 이놈도 참 웃긴 녀석이다. 시종과 호위를 둘둘 두르고 있는데, 그중 하나도 목숨을 걸고 구하려 들지 않는 거 보면.
정말이지 인망이란 게 없구만.
“이런. 이번에도 전우에게 순서를 뺏겼다.”
“…댁도 나설 참이었냐고요. 참으십쇼.”
“그렇지만 저건 살아 있을 가치가─.”
“으아악. 맞는 말이지만 조용히 말해요! 듣잖아요!”
와중에 버서커도 일 치려고 했던 모양이다. 그것도 나처럼 전후 사정 고려해서 움직이려는 게 아니라 완전히 죽일 의도로.
“나, 난, 서, 성주님의 아들…….”
“그건 내 질문의 답이 아니다.”
“나, 날 해치면…….”
이렇게 되면 내가 나선 건 차라리 최선인가. 난 적어도 협박에만 그칠 예정이거든.
아무렴, 상대는 성주의 총애받는 아들이잖아?
협박 정도는 저쪽의 사과랑 맞물려서 흐지부지 넘어갈 수 있겠지만 상처까지 내면 무리일 확률이 크다.
그리고 우리가 아무리 용사를 빽으로 뒀다지만 성주와 척을 져서 좋을 건 없다. 이게 합법도 아니고 불법에 가까운 행위라면 더더욱.
“그건, 내 질문의 답이 아니라 했을 터다.”
“히익!”
하여 나는 검을 찌를 것처럼 세우기만 했다. 진짜 찔릴 거라 생각한 건지 놈이 가드를 올린 건 의도된 오해다.
쉬이이.
…그렇다고 이거까지 의도하진 않았다.
나는 누군가의 바지가 짙은 색으로 얼룩지는 걸 보며 볼 안쪽을 티 안 나게 씹었다.
누군가의 체면과 맞바꿔, 내가 빠지는 그림이 더 자연스러워진 것 같다.
“…네놈 같은 버러지의 피를 검에 묻히는 것도 모욕이다. 다신 내 눈에 보이지 마라.”
나는 휘두르지 않은 검을 다시 검집에 넣었다. 그러곤 오줌이 내 신발에 이르기 전에 서둘러 물러났다.
자동 세탁 기능이 있는 것과 묻히지 않아도 될 분뇨를 묻히는 건 별개였다.
“…이것으로 대충 넘어가는 것으로 하지요, 인퀴지터.”
“하지만…….”
“죄를 저질렀다곤 하나 목숨의 위협을 가할 권리 또한 우리에게 없지 않습니까. 여기서 일을 마무리 짓는 것이 우리 모두에게 나은 일 같습니다. 어떻습니까?”
덩달아 길어질 것 같은 실랑이도 이걸로 끝이다. 나는 방을 나가며 뒤쪽에서 오가는 이야기를 힐끗 엿들었다.
“전 상관없습니다요.”
“푸흐. 베르세르크도 상관없다. 저런 한심한 걸 더 보고 싶지도 않다.”
“…말씀이 그러하시다면, 그렇게 하지요. 대신 가져온 돈은 그대로 기부하도록 하겠습니다. 그리고 너희. 책임은 가서 묻겠다. 헤이든을 성으로 데려가라.”
“…예! 소성주님!”
“미, 미친, 미친 거야… 어떻게 날… 날 어떻게…….”
역시나, 퉁치는 것으로 일이 마무리되었다.
“…본래라면 여러분과 보다 가치 있는 이야기를 하려 왔는데 말이지요.”
“글쎄요. 그 이야기가 모두를 위한 것이라면, 이 일에 어찌 영향을 받겠습니까?”
“…하면, 결례를 무릅쓰고 제가 대화를 청해도 되겠습니까?”
“어떤 이야기인지에 따라 다르겠지요.”
“에드니엄에서 보내온 전서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또한 마무리된 일은 새로운 전개를 들고 왔다.
단서 없이 막막하던 상황이 드디어 풀릴 거란 예감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