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2화 모든 것이 순리대로 (2)
나는 갑자기 뜨끈해진 손등에 잠시 의아해졌다. 기분 탓이라기엔 조금 명확한 열기였는데. 아닌가?
하필 건틀릿으로 싸고 있는 손등에서 느껴진 거라 확인하기도 어렵다.
나는 건틀릿에 붙어 있는 철편을 매만지다가, 일단 앞에 있는 것에 주목을 돌렸다. 당장 확인할 수 없다면 먼저 할 수 있는 것부터 하는 게 효율적이다.
“아마 질투 쪽 숭배자나 질투 본인일 거라 하셨지요.”
“예. 뱀과 고래를 상징으로 삼는 건 그 대악마뿐이니 아마 맞을 겝니다. 대악마 본인이 온 것인지, 그 숭배자가 온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말입니다.”
글쎄다. 용사나 내 감각을 뚫고 접근했다가 사라진 점을 고려하면 대악마일 가능성이 높다고 보는데. 파 에녹에서의 일로 대악마는 우리의 감각을 속일 수 있음을 알게 되었으니까.
아니면 그에 준하는 네임드─묘하게 비중 없는 72기사 같은─거나?
“하면 캄버러에서 이는 동물 사태도……?”
“그것은 잘 모르겠습니다. 문헌에 따르면 질투의 대악마는 동물을 부리는 능력이 없습니다. 애시당초, 대악마가 이곳까지 직접 걸음할 거란 생각도 잘 들지 않고 말입니다. 가능성이 없진 않으니 염두에야 둬야겠지만…….”
“그렇습니까.”
인퀴지터가 평소와는 전혀 다른, 만난 지 얼마 안 됐을 때나 보았던 이단심문관의 낯으로 고민에 잠겼다.
하필이면 그 악마(혹은 숭배자) 놈이 신전 안에 들어왔다는 것 그리고 자신의 근처까지 왔음에도 몰랐다는 것에 단단히 화가 난 모양이다.
여행하는 동안 살짝 그을린 얼굴이 섬뜩하리만치 무색으로 변했다.
“주교님, 모험가 길드에서도 아는 바가 없습니까.”
“도시 전체의 문제인 만큼 실시간으로 정보를 주고받고 있는 중입니다만, 그쪽도 알아낸 건 없습니다. 적어도 지금까지 전해져 온 바는 그렇습니다.”
원인을 모른다고 대처가 아예 불가능한 건 아니다 보니, 모험가를 보냄으로써 급한 불을 끄고 있노라 주교는 부연 설명을 더했다.
그러니까, 정석 진행은 아마 짐승을 잡는 쪽일 거란 말이었다.
“악마가 해당 사건에 개입했다는 증거가 없는 이상, 저는 이곳에 남아 그 빌어먹을 배교자를 수색하겠습니다.”
그러나 인퀴지터가 어디 신전에 침입한 악마를 두고 볼 자인가?
“나도 함께한다.”
그리고 그건 내 컨셉도 마찬가지다.
“그 빌어 처먹을 버러지의 사지를 자르고 혀를 뿌리 뽑기 전까진 물러나지 않겠다.”
나는 빠드득 소리가 다 나도록 이를 갈며 이번 퀘스트를 포기했다.
아무렴, 한낱 짐승보다 악마가 위에 있을 순 없었다. 동물 사태의 계기에 악마나 악마숭배자가 껴 있지 않는 이상은.
* * *
[이야, 우리 찾으려고 아주 작정을 한 모양인데.]
판데모니엄은 까마귀가 물고 온 쪽지를 펼쳐 내용을 읽었다.
그 앞에는 막 정보를 들고 온 신자가 머리를 조아리고 있다.
[정말 분노 아닌 거 맞아? 성질이 그대로잖아?]
[눈구멍 삐었어? 그놈이 정말 분노였다면 지금 저렇게 씩씩댈 게 아니라 저 도시째로 날렸어.]
[아, 하긴. 제대로 된 그릇이 있다면야 도시 하나쯤은 잘 마른 장작에 불과할 녀석이지, 그레트헨은.]
정보를 얻었으니 됐다.
판데모니엄은 신자에게 대충 손을 휘저어 주었다. 그러자 상대는 감읍해 하며 동굴을 빠져나갔다.
이제 동굴에 남은 건 그와 상처를 치유하기 위해 누워 있는 모비 딕─레비아탄뿐이다.
조금 더 더한다면 바닥에 무수히 깔린 광물까지.
[그 제대로 된 그릇 하나 구하지 못해서 여태껏 비루먹은 개 꼴이었지만.]
[흥.]
[그러고 보니 걔도 짜증나겠어. 기껏 버틸 만한 그릇을 찾았더니 제대로 장악도 못하고. 뭐, 그렇게 치면 녀석 때문에 일을 몇 개나 그르친 우리도 똑같나?]
판데모니엄은 여전히 객혈하는 이를 보며 쪽지를 불태웠다. 짤그랑. 타오른 쪽지는 재가 아니라 반짝이는 광석이 되어 떨어졌다.
아주 곱고 아름다운 붉은색의 보석이었다.
[하, 짜증? 오히려 달가운 일이지. 이참에 그릇을 죽여 버리면 그만인데.]
[그릇을 죽인다고 그 녀석이 죽진 않아. 알잖아.]
[…그건!]
[아니면, 육신을 노려 보려고?]
동굴에 산처럼 쌓인 수많은 광물이 그러하듯.
[아서. 그분이 괜히 녀석을 내버려 두고 있는 게 아니잖아.]
판데모니엄은 그 보석을 주워 색과 빛의 굴절을 확인했다.
타오르는 화염의 진홍. 지금까지 만든 것 중에서 제일 괜찮았다.
[오히려 육신을 노렸다가, 죽이지 못하고 봉인만 깨 버리는 꼴이 되면… 알지? 왕은 널 가만두지 않을 거야.]
[빌어먹을!]
[차라리 그릇째로 사로잡아 사육이라도 해 보는 건 어때? 그 그릇, 분노의 힘을 잘도 다룬다잖아. 그레트헨 걔에 비하면 손색이야 있겠지만 썩어도 준치라고, 웬만한 상위 악마 수준은 되겠지.]
그러나 과거에 접했던 어느 불꽃을 떠올리거든, 이 붉음 따윈 무가치해진다.
판데모니엄은 그것을, 그리고 바닥에 깔린 모든 보석을 부수었다.
적석은 역시 마음에 드는 게 없다.
[사육? 헛소리를. 그따위 제안을 할 거면 사라 놈에게나 해.]
[까칠하긴. 기껏 은신처도 마련해 줬더니.]
[흥. 누가 보면 네놈이 공짜로 내준 줄 알겠군. 이건 내 혀와 바꾼 것일 텐데?]
[그건 그렇지만.]
[난 네놈들과 달라. 귀찮다고 포기한 듀크 놈처럼 놓아 주지도 않을 거고, 네놈처럼 가지려 들다가 놓치지도 않을 거다.]
그런가. 판데모니엄은 가만히 제 형식적 동료를 보았다.
[반드시 놈을 죽인다.]
그리고 그 끝에서 결론을 내렸다.
[그래, 가능하다면… 놈이 그리도 얕보던 인간의 손으로 죽도록 할 거라고.]
질투는 결국 질투였다.
[마침 놈의 곁에 마땅한 인간도 있던 참이니.]
열등감에 눈이 멀어 찬란하게 빛나는 것을 진창에 박아 버리려 하다니.
[뭐, 그래. 마음대로 해. 난 좀 더 간을 봐야겠으니까.]
그래도 그 꼴이 재밌긴 한지라, 판데모니엄은 그냥 구경하기로 했다. 어차피 저치가 실패해도 그에겐 아직 많은 수가 남아 있었다.
* * *
데스브링거는 백묘 능선과 도시 사이에 위치한 숲으로 발을 내디뎠다.
“나리는 오늘도 맹수 토벌에 참여할 생각이 없으신가 봅니다요.”
목적은 맹수 토벌이었다.
“어린 사냥꾼아, 어서 가자!”
“예에.”
물론 그가 자처해서 맡은 일은 아니었다.
암, 그에게 선택권이 있었다면 이 일을 고를 리 있겠는가? 그는 동물을 쫓을 순 있어도 잡을 능력이 안 되는 사람인데.
단지, 그래. 인퀴지터와 악마기사가 강경히 악마수색을 선언한 이상, 아크메이지와 그가 취할 수 있는 행동은 얼마 없었다.
사고를 몰고 다니는 베르세르크가 혼자 외부로 나돌 상황이라면 더 그렇다. 그녀는 조사가 재미없다며 하루 만에 토벌로 눈을 돌려 버렸다.
결국 누구 한 명은 베르세르크를 커버해 줘야 했고, 남은 사람 중 보다 적합한 사람은 말할 필요도 없다. 그였다.
“…댁은 망설임 없이 맹수에게 덤빌 수 있어서 좋겠습니다요.”
하물며 그가 사람을 수색하는 데 특화된 이란 이유로 빼기엔, 도시에 대체할 인력─이곳에도 정보 길드는 존재하고, 신전과 모험가 길드도 나설 테니─이 너무 많은지라.
그래, 그를 갈음할 사람은 이다지도 많았단 소리다.
용사님이나, 그에 필적하는 기사 나리나, 사고를 쳐도 퇴출보단 관리할 사람을 붙여 주는 베르세르크와 다르게.
“응? 뭐라고 했나?”
…맹수가 나타나도 사냥당하기보다 사냥하는 입장인 저들과 다르게.
“별거 아닙니다요.”
데스브링거는 이틀째 베르세르크의 뒤꽁무니만 쫓아다니는 제 신세를 두고 자조했다.
자기혐오라기엔 가볍고, 자괴감이라기엔 조금 무거운 감정이었다.
예컨대… 그가 제 자신을 약자라 여기진 않지만, 당신들 사이에 낄 적이면 한없이 새들한 사람이 되는 것 같다는.
그런데 그게 또 틀린 말은 아니라서, 허탈해진다는 감정들.
“표정이 안 좋은데. 정말인가?”
그러나 그가 품은 감정은 감히 드러낼 게 못 된다.
사는 세계가, 살아가는 방식이 다르니까.
“별거 아니라니까요.”
저들이 언제나 바닥을 기고, 그늘에 숨어야만 목숨을 부지할 수 있던 그를 이해할 수 있을 리 없으니까.
“알았다.”
따라오지 말 걸 그랬나. 아크메이지가 도시에 남아 있어도 된다고 했을 때, 이게 제 역할이 제게 더 맞노라 효율이 좋노라 고집부리는 대신 그 말을 듣는 게 더 나았을까.
데스브링거는 뒤돌아 다시 나아가는 베르세르크를 보며 오랜만에 후회란 걸 해 보았다.
아니, 사실 오랜만은 아니었다. 그는 자주, 굉장히 종종 과거를 반추하며 추한하곤 했으니까.
가족이나 다름없던 친우를 구하지 못한 것, 너와 그 자리에서 함께 죽지 못한 것, 너를 두고 살아남아 계속 살아 있는 것. 모든 이의 대행자가 되겠다고 했으면서 제대로 한 일은 얼마 없다는 것.
…한 번의 충동으로 이들을 따라와 하잘것없는 일만 하고 있는 것.
사실 이런 일은 제가 아니어도 누구든 할 수 있을 텐데.
“…젠장. 뭐 하고 있는 건지 모르겠네.”
베르세르크를 따라가야 하지만, 갑작스럽게 무기력이 찾아온다. 오래 품어 온 고민이었던 만큼 탈력감은 더욱 극심했다.
『나의 피를 마지막으로 바치고자 했는데…….』
『네놈이 관여할 일이 아니다.』
『너무 경계할 필요 없어. 난 그냥 도와주려는 것뿐이야. 솔직히 짜증나잖아. 그 맹한 사제가, 답답하기 짝이 없는 아이가 너보다 더 쓸모 있는 사람이란 건.』
거기에 최근 들어선…….
“하…….”
결국 데스브링거는 자리에 주저앉았다. 안개가 꽤 짙은 숲인지라 서둘러 쫓아가지 않으면 놓칠 가능성도 있지만, 그건 결국 생각으로만 그쳤다.
대신해서 뇌리에 차는 건 벼랑 아래로 떨어지길 바라지 않는, 그러나 무능으로 인해 손을 뻗어 구할 수도 없는 사람이다.
그의 동경이고, 그의 거울이며, 그의 미래였다.
“진짜 여기서 뭐 할 게 있다고…….”
그가 복수할 수는 있어도 무언갈 구할 사람은 될 수 없다는 증거였다.
“떠날까.”
데스브링거는 숙고 끝에 또 다른 대안을 제시해 보았다. 어차피 할 수 있는 게 없다면, 아예 떠나 버리는 것도 나쁘지 않을 거란 사고였다.
“여기 있어 봐야 시간 낭비고…….”
아무렴 이 파티에서 그가 해내는 일은 다른 사람도 할 수 있는 것이다. 반면 그에겐 그만이 할 수 있는 일─복수─이 있었고.
그러니 이 파티는 다른 사람에게 맡기고 떠나 버린다면, 그런다면.
“어린 사냥꾼아!”
거기까지 생각이 닿은 순간, 우렁찬 목소리가 숲을 갈랐다. 안개를 뚫고 내린 볕뉘에, 그녀의 백금발이 유독 선명하게 빛났다.
“이거 받아라!”
“에?”
더불어 한 움큼 건네지는 산딸기도.
“어린 사냥꾼은 단 걸 좋아하는 게 아니었나?”
“아니, 좋아하긴 하는데.”
그래도 그렇지, 다짜고짜?
“그럼 문제없다. 받아라!”
당혹스럽긴 했으나, 일방적으로 건네진 산딸기를 거부할 수 있는 근력은 그에게 없었다. 결국 데스브링거의 손바닥 위는 산딸기로 가득 찼다.
가져오는 과정에서 좀 뭉개 버렸는지 몇몇 개는 망가져서 즙을 흘리고 있었다.
“…이건 어디서 구했답니까?”
“베르세르크에겐 다 방법이 있다!”
얼떨떨하지만 이미 받은 것, 안 먹을 이유가 없다.
데스브링거는 떨떠름한 얼굴로 산딸기를 낼름 입에 넣었다. 농익은 과실은 달고 산뜻했다.
“힘이 났나?”
“예, 뭐…….”
너무 황당해서 그를 무기력하게 만들던 상념이 죄 날아가 버렸다.
그걸 과연 힘이 났다고 할 수 있는진 모르겠지만, 그래도 힘 빠지게 하던 것이 사라진 시점에 꼭 틀린 말도 아닐 것이다.
0에서 1이 되는 것도 +1이고, -1에서 0이 되는 것도 +1이긴 하지 않나.
“그럼 됐다. 가자!”
데스브링거는 등짝이 얼얼해지도록 호탕하게 쳐 대는 베르세르크를 망연히 보다가, 끝내 피식 웃었다.
악마기사는 싫어하겠지만, 이렇게 단순한 사람이 파티에 있는 것도 나쁘진 않겠다 싶었다. 컨트롤하긴 어렵더라도.
“아, 그렇지.”
“또 뭡니까? 사냥감 귀 자르는 거 까먹었습니까?”
“그건 아니고, 어린 사냥꾼아.”
“네.”
“가능한 베르세르크의 곁에서 떨어지지 마라.”
“……? 새삼 당연한 말씀을. 안 그래도 법사 나리가 당부했습니다요. 댁 혼자 두지 말라고.”
신전의 침입자가 그에게 접근한 전적이 있던 만큼, 또 접근할 가능성이 있다는 이유에서도 떨어지지 못한다.
물론 그렇게 치면 단둘이 나온 것만으로도 충분히 위험하긴 한데…….
상대는 아무도 모르게 신전에 들어왔다 나갈 능력이 있지 않나. 그걸 고려하면 어디에 숨든 위험하긴 똑같다. 첫 번째 만남조차도 상대가 그를 죽이려 마음먹었다면 그는 저항도 못한 채 살해당할 것이므로.
애초에 아크메이지도 그걸 알고 숫제 베르세르크를 따라가라 한 게 아닌가? 무력은 현저히 떨어져서 저항의 의미가 없고, 계약 쪽도 결국 제 마음에 달린 것이니 숨겨 봐야 소용없어서.
어쨌거나 이런 사유로 그는 절대 베르세르크에게서 떨어지면 안 된다.
방금 무기력해져서 잠시 혼자 있던 거? 그건 어쩔 수 없던 것이니 노 카운트로 쳐야 한다.
파티 탈퇴의 경우야 뭐, 그의 가치는 이 파티의 일원인 점에서 나왔던 것이니 나간 후는 굳이 안 건드릴 거란 계산이었고.
“그런가? 그럼 됐다!”
됐고, 이 사람도 실없는 말을 다 하네.
데스브링거는 머리를 긁적이며 베르세르크를 따라갔다.
다만, 그래.
눈높이가 머리 하나 차이 나는 바람에 그는 미처 보지 못했다. 베르세르크의 호박안이 뒤쪽 하늘을 슬쩍 보며 경계하듯 할버드를 움켜쥔 것을.
우우우우.
구름 사이에 숨어 있던 고래가 다시 위로 올라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