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7화 이야기가 아니기에 (5)
“뭐랄까, 생각보다 처벌은 약하네요.”
“혈기 넘치는 이들은 종종 의견 차이만으로도 주먹다짐을 하지 않던가. 취객들의 난투극도 마찬가지고. 둘의 무력이 워낙 강고하여 사건이 커 보이는 거지, 본질 자체는 흔한 것에 불과하네.”
“하긴.”
“하면 그런 사건들은 원래 이렇게 끝납니까?”
“대부분 그런 편입니다. 두 사람 간의 일이니만큼 합의만 되면 처벌은 따로 하지 않지요. 제3자가 휘말려 피해를 입은 경우야 처벌로 넘어갈 때도 왕왕 있긴 합니다만, 이마저도 합의를 잘하면 넘어갈 수 있습니다.”
나는 이어지는 대화를 들으며 눈을 내리깔았다.
아크메이지가 우리를 변호해 준 것도 모자라, 변상 비용 일부를 부담했다는 걸 알아 버린 까닭이다.
물론 나도 내 잘못을 회피하기 싫어서 그리고 컨셉도 자존심이 있는 걸 고려해 자진해서 돈을 내긴 했다. 그것도 자그마치 3백만 갈이나.
그러나 아크메이지는 싸운 당사자도 아니면서 무려 2백만 갈을 냈다. 자기가 일행을 책임지지 못한 탓이니 본인에게도 죄가 있다는 이유로.
스스로를 책임질 나이이기에 성인 취급 받고─그것도 십 년 넘게─있는 나로선 비명밖에 안 나오는 일이었다.
아크메이지. 당신은, 당신은 정말로……!
“자, 그럼 어서 나가세. 감옥보단 낫다고 하나, 경비대 조사실에 오래 있어서 기분 좋을 것도 없잖나.”
내가 바란 것은 아니라고 하나, 폐를 끼친 건 끼친 것이다. 시간적 민폐뿐 아니라 재정적 피해까지.
하니 염치가 있다면 닥치고 따르는 것이 정답이라.
나는 얌전히 아크메이지의 뒤를 따랐다. 일행이 다 같이 움직이는 상황이라 그다지 티는 안 났다.
“으, 조사도 꽤 오래 걸립니다.”
“의외군. 네놈이라면 잘 알 거라 생각했는데.”
“제가 왜 경비대 놈들 일을 잘 알 거라 여기는 겁니까?”
“잡혀간 적이 있을 것 같아서?”
“뭐요, 샌님?”
“으하하핫! 바깥공기 시원하다!”
후, 좋아. 며칠간은 컨셉이 허용하는 한도 내에서 아크메이지의 개가 돼야지. 이미 개새끼 아니냐고 묻는다면 별로 할 말은 없지만, 그래도.
“허허. 그보다 벌써 해가 지려 하는군.”
한편, 경비대를 빠져나오자 저녁놀이 펼쳐졌다. 아크메이지의 말이 맞았다.
조사 잠깐 받았을 뿐인데 벌써 해가 지고 있다.
“어서 식사하는 게 낫겠네.”
“아, 그렇군요. 저녁 시간이 얼마 안 남았겠습니다.”
“밥 먹으러 가나? 잘됐다. 베르세르크 아까부터 배고팠다. 작은 친구도 밥 먹어야 한다.”
【저 불렀어요?】
“이 시간이면 주점밖에 안 열었을 것 같은데. 신전으로 가야 하는 거 아닙니까?”
그런데 신전? 신전은 조금 껄끄러운데.
나는 나와 버서커의 싸움으로 인해 이 하층까지 내려왔다가 빈손으로 저 상층까지 돌아간 인물들을 떠올렸다.
그들은 단지 만일의 사건을 대비해 달려온 것이고, 달리 힘쓸 구석이 없었던 만큼 보수를 줄 필요가 없긴 했다.
하나 이 세계에서 신전이 하는 일이 일이라 그런가. 약간 119 불렀다가 ‘아, 알아서 잘 해결했습니다’ 하고 돌려보낸 기분이 되어서 말이다…….
아, 즐겜한 대가가 이렇게 크다니. 다음부턴 절대로 마을 내에서 싸우지 말아야지.
“아니… 이곳은 그럴 필요 없네.”
그사이 아크메이지가 주변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와 동시에 거리에 세워져 있던 전등에 불이 붙었다.
“이곳은 밤도 제법 밝으니.”
“…아름답습니다.”
“뭐야. 와.”
“밝아졌다!”
【별님이 지상에 있어…….】
마법이었다. 현대 출신에게는 그냥 가로등 켜지는 모습에 불과했지만.
아니, 그보다 너희 여기서 며칠 보내지 않았어? 나야 첫날 냅다 출발해 버려서 제대로 경험도 못 해 봤지만, 너흰 볼 기회 있지 않았나.
“이럴 줄 알았다면 밤에 한번 나와 볼 걸 그랬습니다.”
뭔가 싶었는데, 저 말을 들으니 대충 알 것 같다.
다른 도시에서 그랬듯 해 지면 건물에 박혀 있었나 보다. 정말 다들 쓸데없이 원칙적이다. 데브마저 그럴 줄은 몰랐지만.
“작은 친구, 저걸 봐라. 등이 움직인다!”
【우, 우와아아.】
“이런. 이렇게 좋아할 줄 알았다면 미리 알려 주고 갈 걸 그랬습니다.”
버서커가 아카타를 목마 태운 채 앞으로 뛰쳐나갔다.
나랑 똑같이 사고를 친 주제에 혼자만 근심 걱정 없이 해맑은 건 다소 얄미웠으나, 동시에 버서커다워서 웃음이 나왔다.
아카타와 정신연령이 어째 비슷해 보이는 지점도.
“너무 멀리 가진 말게. 거긴 공방거리일세!”
“공방거리?”
“예. 장인들이 주로 모여 있지요. 공예품을 파는 가게도 있어, 제법 볼거리는 있습니다.”
그렇구만. 그럼 내일 시간 남거든 여길 와 볼까. 그림만 하루 종일 그리는 것도 좀 그러니까, 아이쇼핑이나 하는 거지.
나는 그런 생각을 하며 계속 앞으로 뛰쳐나가는 버서커를 보았다. 아무리 봐도 아크메이지 말을 못 들은 모양새다.
“저, 법사 나리. 투사 나리가 애 데리고 벌써 저만치 가 버렸는뎁쇼.”
“음? 이런…….”
다만 알면서 침묵한 나 대신 데브가 꼬집어 주었다. 그 말의 진위를 확인한 아크메이지가 이마를 짚었다.
“쫒아갑세. 사고 칠까 두려우니.”
괜히 내 가슴이 더 뜨끔했다.
“작은 친구는 그런 게 좋나?”
【외지에선 이렇게 고운 색의 실을 쓰는구나.】
다행히, 버서커는 그리 멀리 가지 않은 상태였다.
아니면 아카타가 무언가에 관심을 보인 덕분에 그녀의 발목이 붙잡혔다고 해야 할까?
아무튼 별탈 없이 우리는 그들을 따라잡았다.
옷과 천, 실 등을 내부에 쌓아 둔 가게가 그들이 들어간 곳이었다.
“그렇게 갑자기 뛰어가면 어떡하나.”
“앗, 마법사.”
그리 큰 건물도 아니거니와 들어가기 좀 뭐해서 나는 바깥에 남았다.
반면 만두 두 마리는 옷 만드는 곳이 궁금했는지 안쪽으로 고개를 쑤욱 내밀었다.
“흠. 얼굴이 비치는 천도 존재한다는 말을 들어서 한번 보고 싶은데, 여기엔 안 보이는군.”
“대체 뭘 찾는 거예요? 그런 비단이 여기에 있을 리가 없잖아요. 여긴 일반인들을 상대하는 곳이라고요.”
“그게 비단인가?”
“예.”
“그런데 비단은 왜 일반인을 상대하는 곳에 없지?”
“비싸니까 그렇죠. 비단은 아주 돈 많은 인간들밖에 안 사요.”
“그렇군…….”
겸사겸사 사회 공부도 좀 하고.
“아이에게 실을 사 주고 있었나?”
“아니다. 사 주려고 했는데 아이가 싫다고 했다.”
“그랬나. 【그녀는 자네에게 실을 사 주려고 한다는데, 거절한 게 사실인가?】”
【아… 네. 사고 싶을 정도로 가지고 싶은 것도 아니고, 더는 신세 지고 싶지도 않아서요. 그냥 외지에는 이런 실도 있구나 싶었을 뿐이에요.】
【이런 것까지 신세 진다고 여기지 않아도 되네만… 자네가 그렇게 생각하면 그런 거겠지. 좀 더 보겠나?】
그보다 아카타는 뭘 저리 보는 걸까. 나는 아이가 보는 실을 유심히 관찰했다. 빨갛게 물들인 실이었다.
실팔찌를 만들어 준 것도 그렇고, 이런 걸 좋아하는 걸까?
【아뇨, 괜찮아요.】
나는 아이가 만지작거리던 실을 내려놓는 걸 확인했다.
“안녕히 가세요.”
“구경 잘했네. 많이 파시게.”
그리고 모두가 나오던 사이, 내 시선이 잠시 가게 표지판에 닿았다.
“그럼 이제 밥 먹으러 가세.”
여기, 아침 몇 시에 열려나?
“베르세르크는 술이 맛있는 집이면 좋겠다!”
“그건 그냥 주점이잖아요.”
“저는 주점도 크게 상관은 없습니다만…….”
“안 돼요. 주점에선 고기 요리밖에 안 판다고요.”
나는 주변의 풍경을 완벽히 외운 후 조심스레 일행의 뒤를 따랐다.
“…생선 요리를 파는 곳으로 가지요. 휴델렌은 민물고기 요리도 꽤 유명하니, 나쁘지 않을 겁니다.”
“오.”
“물고기는 씹는 맛이 별론데.”
“고기는 고기잖아요. 투사 나리가 양보해요.”
【민물고기 요리를 먹으러 갈 건데, 괜찮겠나?】
【전 상관없어요.】
와중에 오늘 저녁은 생선 요리로 결정된 모양이다. 나쁘지 않았다. 민물고기는 잡내가 심하다지만 여긴 애초에 모든 요리가 그래서.
“우와. 식당가로 들어오니까 사람 장난 아니야.”
“하늘이 검어졌는데도 사람들이 이렇게 돌아다닐 수 있다니… 마법이란 건 참 신비하군요. 이런 게 더 많이 설치되면 좋겠습니다.”
“글쎄요. 아직까진 설치 비용이 커서, 그게 가능할지 모르겠습니다.”
그보다 여기 진짜 사람 많다. 나는 북적북적한 사람들로 인해 일행을 놓치지 않도록 조심했다.
“야, 거기 맛없어.”
“내가 잘못했어, 다신 딴 사람한테 눈 안 돌릴게. 진짜야.”
“나이 먹으면 다른 거 다 필요 없고 입맛 없어서 밥이 안 넘어가는 게 서럽다니까.”
“파샤!”
그러다 문득, 사방에서 들려오는 소란을 두고 아침과 비슷한 경로로 제가 본래 살던 세상이 떠올랐다. 눈꺼풀이 아래로 내려갔다.
“나리, 여깁니다!”
【사람 많아…….】
“맛있을까요?”
“이렇게나 사람이 많은데 맛이 없진 않겠지요.”
“고기다!!”
그러나 다시 떴을 때, 적어도 들어 올린 무게가 서럽진 않았다.
그거면 충분했다.
아직, 나는 더 견딜 수 있다.
* * *
데스브링거는 지붕 위에서 꾸벅꾸벅 졸다 말고, 들려오는 기척에 눈을 퍼득 떴다.
귀를 재빨리 기울이면 일반인보다 조용하고, 걸음걸이가 일정한 발소리가 들려온다. 단련된 전사의 것이다.
한데 그들이 머무는 숙소에 전사라곤 단 둘뿐이라.
그중 베르세르크는 체구로 인해 좀 더 투박하고 무게감 있는 소리를 낸다. 날이 밝기도 전에 기상해, 단련하러 나갔으니 애초에 그녀일 수도 없고 말이다.
하니 저 소리는 응당 악마기사의 것이다.
데스브링거는 몸을 바짝 낮췄다. 감이 예민한 그를 쫓으려면 평소보다 더 심혈을 기울여야 했다.
동료를 미행한다는 죄책감? 악마기사가 혼자 있을 때 자해를 하지 않을 것이란 확신이 든다면 그만둘 것이다. 그 전까진 그를 혼자 두지 않을 것이다.
그가 할 수 있는 건 이런 것뿐이므로.
물론 이게 걸린다면 악마기사가 굉장히… 굉장히 화를 내겠지만, 설마 죽이진 않을 거라 믿어 본다. 그는 의외로 관대한 구석이 있으니까.
…정말 안 죽이겠지?
데스브링거는 흔들리는 믿음을 두고 걸음을 빨리했다. 동이 막 트려는 시점이라 사람이 별로 없는 거리다. 장애물을 이용해 몸을 잘 숨겨야만 저 예민한 기사에게 걸리지 않을 수 있다.
“어제 그 애를 본 것 같아.”
“뭐?”
“…아냐. 기분 탓이겠지. 그보다 준비는 다 됐어?”
“어, 어어.”
그나마 이 도시가 미행하기 편한 편이라 다행이다. 그는 여관의 지붕을 밟은 뒤, 조심스럽게 다음 건물로 넘어갔다.
“간지러워!”
“하하, 미안.”
그 과정에서 대화를 나누는 여행자무리, 아침부터 사랑을 확인하는 부부 등 온갖 사람의 대화를 엿듣게 되었지만……. 뭐, 그건 그가 항상 하던 일이었으므로 그다지 죄책감은 안 들었다.
대화 소리 새어 나가는 게 싫었다면 방음 잘되는 집을 샀어야지.
“응?”
각설하고 그의 미행은 순조롭게 이어졌다. 악마기사가 공방거리에 들어서는 순간까지 들키지 않고 따라온 것이다.
“검은 아직 안 부러졌을 텐데…….”
하지만 들키지 않은 것과 별개로 의문은 좀 들었다.
그는 악마기사가 검을 바꾸러 왔나 고민했다. 달에 하나씩 깨 먹은 전적을 고려하면 이상할 건 아니었다.
“마력 사용자라고 다 좋은 건 아니구만.”
처음엔 뭐 저리 자주 부수나 싶었지만, 지금은 마탑의 마법사에게 들어서 안다.
검이 박살 나는 게 악마기사의 탓이 아니라, 마력의 성질 때문임을.
그러니까, 대충 물질의 결합 구조를 풀어 버리는 성질 때문에 그런 거랬지? 자가 회복이 가능한 신체와 다르게 철 같은 물질은 수복이 안 돼서 결국 깨지게 된다고.
물론 보통 마력 사용자는 한 달 주기로 깨먹진 않는다며, 악마기사는 마력이 너무 강대해서 그런 거란 소리도 듣긴 했다.
이러나저러나 악마기사 입장에선 귀찮을 수밖에 없는 구조였다.
“…잠깐.”
한데, 그쯤 되니 찾아오는 의문이 있다.
“그럼 나리가 쓰는 투헨더는 대체 뭘로 만들어진 거지……?”
마법사는 분명, 마력으로 인해 결합 구조가 약해진 건 마법으로도 되돌릴 수 없다고 했다. 그러니까 수복마법을 걸어도 소용이 없다고.
하면 저 검은, 대체 어떻게 지금껏 버텨 온 걸까?
대체 무엇으로 만들어졌기에?
“설마 저것도 용린으로 만들어진 건…….”
그래서 그나 샌님에게 망설임 없이 용린을 쾌척한 게 아닐까… 라는 생각도 잠시 들었다. 당연히 그럴 리는 없었다. 용이 잡힌 건 이번이 처음이었으니까.
…아마도 그럴 거다.
악마기사라면 그들을 만나기 전에 어디 태곳적 짐승 하나둘 더 잡았어도 이상할 게 없는 사람이지만, 설마.
덜컹.
그때, 악마기사가 어느 건물에 들어섰다. 삼천포로 빠지던 데스브링거의 사고가 퍼득 돌아왔다.
“아, 무엇을 사러 오셨─.”
“어제, 팔이 여섯 개 달린 아이가 본 실을 사고 싶다.”
악마기사가 입장한 가게는 어제 베르세르크와 아이가 발견된 그곳이었다.
“여러 개를 보았는데… 그중 어떤 걸……?”
“다.”
실, 사러 나온 거였구나.
데스브링거는 만일을 대비해 풀지 않았던 긴장을 드디어 놓았다.
악마기사는 정말이지, 사람을 괜히 불안하게 만드는 재주가 있었다. 그렇게나 강함에도 불구하고.
“다 사겠다.”
그러나 그건 결국, 그가 걱정하고 싶어질 정도로 상냥한 사람이기 때문일 테다.
그가 진정 악마사냥에만 미쳐 남을 짓밟고 비정하게 살아갔다면, 악마기사를 찬미할지언정 인간적으로 대할 사람은 없었을 것이므로.
“괜히 바깥에서 밤을 새웠나…….”
온갖 가정을 한 게 무색하게도 악마기사는 스스로를 해하려 나온 게 아니라 타인을 위해 외출한 것이었다.
데스브링거는 그 사실을 두고 머쓱함을 느끼며 발길을 돌렸다. 악마기사가 신전으로 돌아오기 전에 먼저 들어갈 요량이었다.
밤에 제대로 못 잤으니, 낮잠을 자도 좋을 것이고 말이다.
[거기.]
다만 그가 신전으로 발을 돌렸을 때.
[거기 녹색 머리.]
“응?”
누군가가 그를 불렀다.
[인상이 좋네. 가능성이 보여.]
목에 희고 푸른 뱀을 두르고, 물고기 비늘을 연상시키는 은색 비단 자락을 겹겹이 두른 이였다.
“뭔 소리를─.”
난생처음 보는 얼굴이거니와 초면부터 가능성을 운운하는 게 썩 좋게 느껴지지 않는다.
데스브링거는 별 이상한 놈이 다 붙었다고 생각하며 몸을 다시 돌리려 했다.
[혹시, 강해지고 싶지 않아?]
사르륵.
하나, 어느새 상대는 그의 옆까지 다가와 있었으니.
[원한다면 도와줄 수 있는데.]
뱀처럼 갈라진 혀는 참으로 까맸다. 하얗기 짝이 없는 겉껍데기와 다르게.
우웅.
품에 넣어 둔, 부정검이 가늘게 떨려 왔다. 저 하늘에는 있어선 안 될 고래가 보이는 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