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5화 이야기가 아니기에 (3)
물이란 공간은 참 싸우기 힘들다. 물의 저항도 있고, 발판이랄 것도 없어서 힘을 제대로 싣기 불가능한 까닭이다.
그러나 이가 없으면 잇몸으로 씹으라고.
우리는 기어이 물에서 싸우는 방법을 터득했다.
퍼엉!
암, 발판이 없어서 문제라면 그냥 호수 밑바닥을 딛고 싸우면 그만이었다.
퍼엉, 펑!
호수 밑바닥의 풀들을 제거하느라 수면의 깊이를 파악해 둔 것이 신의 한 수였다.
나는 비교적 얕은 곳을 찾아 버서커와 손속을 나눴다. 마력을 두르고 공격하니, 공격할 때의 부위만큼은 물의 저항력이 0에 수렴하는 듯하다.
덕분에 바깥과 크게 다르지 않은 속도의 주먹과 주먹이 서로의 가드를 강타했다.
그때마다 공기 방울 터지는 소리와 함께 물이 밀려나며 약간의 틈을 만든 건 아마 기분 탓이 아닐 것이다.
포르르!
버서커의 팔이 나를 붙잡고 뒤로 던졌다. 공격할 때만 저항력이 줄어드는 것이지, 이때마저 공기 속처럼 굴진 못하기에 그다지 멀리 밀리진 않았다.
물론 이게 꼭 좋은 것만도 아니었다. 너무 밀리지 않은 탓에, 버커서가 내게 접근하는 시간도 짧았다.
나는 다소 둔한 형상으로 다가오는 주먹을 피해 그 명치에 발을 올리고 그대로 밀어냈다.
버서커가 둥, 하고 뒤로 밀리고 나 역시 반작용으로 물러났다.
지금이었다.
나는 마지막 숨을 뱉으며 위로 올라갔다. 이 빌어먹을 수중 무대는 다 참을 수 있는데 숨이 문제였다.
이럴 줄 알았다면 수중 호흡기를 반납하지 않는 건데! 짤막한 후회가 몸과 함께 표면으로 비상했다.
콱!
하나 버서커는 나를 쉬이 보내 주지 않았다. 발목을 붙잡고 아래로 끌어당긴 거다.
어슴푸레 보이는 얼굴에는 위로 올라갈 의지가 조금도 엿보이지 않는다. 나보다 폐활량이 좋다고 아주 자신만만해하는 꼴이었다.
쾅!
둔한 소리가 울려 퍼지고, 모래가 깔린 밑바닥과 다리가 충돌했다. 주변으로 후욱 퍼진 모래가 꼭 먼지구름처럼 보였다.
퍼억!
숨을 위해 볼을 부풀린 채로, 버서커가 주먹을 내질렀다. 긴급히 올린 팔뚝이 간신히 주먹을 막았으나 몸이 두 걸음 반 밀려났다.
팔뚝엔 미묘한 통증이 남았다. 경험상 이 정도 통각이면 멍이 들었을 것이다.
포르륵!
한 대 제대로 먹인 버서커가 낄낄 웃는 얼굴로 땅을 박찼다. 저쪽도 슬슬 숨이 모자란가 보다.
그러나 이 컨셉이 어디 당하고만 살던가?
나는 그녀의 발목을 냅다 잡고, 아까 그녀가 그랬듯 바닥에 처박았다. 숨은 이제 진짜 한계다.
하면?
숨 참고 저기까지 올라갈 자신이 없다면, 방해하는 물을 치워 버린다.
나는 손에 마력을 뭉텅이로 모아, 위로 쏘았다.
콰앙!
검은 기둥이 직선으로 솟아오르며 물들을 밀어냈다. 어찌나 위력이 강한지, 검은 기둥보다 더 많은 부피의 물이 밀려나, 나와 내 주변 땅을 물로부터 떨어트려 줄 정도였다.
물살에 의해 뒤로 밀려난 버서커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럼 알아서 잘 헤엄쳐 나와 보라지.
나는 순간적으로 드리워진 햇빛으로 인해 눈을 살짝 찡그리며 발을 굴렀다.
밀려났던 물이 소용돌이 형태로 다시 메워지려던 순간, 내 몸이 마력을 두른 채 위로 솟구쳤다.
후우. 밀려났던 숨이 가쁘게 폐에 들어참과 동시에 몸이 수면 위까지 상승했다.
“……!?”
그리고 내 몸이 다시 추락하며 입수를 시작할 때, 까만 그림자가 빠르게 치솟으며 나를 향해 달려들었다.
“크핫!”
퍼엉!
수면이 둥글게 뚫리며 버서커가 뛰쳐나왔다. 그 손엔 할버드가 들린 채다.
주먹으로만 싸우는 거 아니었어!? 아까 합의한 것에 무기 사용이 있긴 했지만, 주먹으로 덤비길래 오늘은 맨손 싸움만 하는 줄 알았는데!
나는 당혹감에 눈살을 찌푸렸다. 물론 그렇다고 대응을 하지 않은 건 아니었다.
내 손이 착실하게 트루 투헨더를 쥐었다.
까앙!
마력을 두른 두 무기가 충돌하며 사방에 충격파와 비슷한 것을 흘렸다. 수면이 둥글게 파이며 우리 둘의 몸이 정반대 방향으로 밀려났다.
촤아아악!
어찌나 실린 힘이 강했는지, 둘 다 물에 잠기는 대신 표면을 발로 갈랐다. 중력에 붙잡혀 낙하하는 속도보다 뒤로 밀려나는 힘의 작용이 더 커서 벌어진 일이었다.
쿵!
기어이 내 등에 무언가 닿았다. 슬쩍 보면 마탑으로 향하는 다리의 기둥임을 알 수 있다.
몸 전반에 마력을 두른 까닭인가. 나한테는 크게 충격이 안 오긴 했는데… 난간이 좀 많이 우그러든 것에는 죄책감이 살짝 든다.
더불어 이거 수리비, 얼마나 들지에 대한 경제적 고민도.
“미, 미친.”
그러나 지금 걱정해 봐야 달라지는 게 있을까. 나는 수리비에 대해 고민하는 대신 내가 어디서 날아왔는지 헤아려 보았다.
자국만 보면 분명 저쯤에서 싸웠던 것 같은데.
무기 한 번 맞댔다고 여기까지 밀려온 건가? 장난 아니군.
나는 내가 난리친 자국으로 하얀 포말과 소용돌이 자국이 남은 자리를 보며 다리에 팔을 걸쳤다.
시선은 당연히 버서커가 던져진 쪽에 고정했다.
나는 호수 중간을 가로지르는 마탑의 다리 쪽으로 밀려난 반면, 그녀는 건너편 물가로 던져진 상태다.
“사, 사람?”
어쨌거나 이 정도쯤 됐으면 싸움은 물 건너갔다고 봐도 되겠지.
나는 투헨더를 먼저 다리에 올린 후, 팔에 힘을 주어 몸을 끌어올렸다.
“거, 검!”
그로 인해 다리 위에 있던 사람이 히익 소리를 지르며 도망치긴 했는데…….
그, 미안합니다. 제가 위험한 사람은 아닌데. 이러려고 이런 것도 아니고.
그러나 이미 도망치는 사람에게 무엇을 말할까. 나는 굳이 변명하는 대신 물기를 털었다.
어쩐지 홀가분한 기분이었다.
이렇게 된 사유는 글쎄다.
캐붕 걱정 없이 상황을 빠져나와서?
울컥하던 감정은 황당함에 짓눌려 증발해 버려서?
혹은 눈시울을 붉혔던 흔적과 기어코 몇 방울 흘린 눈물을 시원한 호수가 가져가 버려서.
버서커를 후려 팰 때 괜히 화풀이하는 것처럼 사심을 잔뜩 담은 채 주먹질을 하는 데 성공해서.
싸움에 집중하다 보면 잡념이 들기는커녕 쓸데없는 생각마저 전부 사라져서.
그 다일 수도 있고, 어쩌면 아닐 수도 있다.
그 모든 것을 떠올리기 이전에, 아주 오랜만에 싸움을 두고 즐겁다는 느낌을 받았으니까.
뭐, 이상한 감정은 아니었다.
이건 합의하에 시작된─겉보기야 버서커에게 휘말린 거지만, 실상은 내가 허락해 준 쪽이므로 합의가 맞다─싸움이지 않나.
다른 말로 내가 버서커를 죽이거나 버서커가 나를 죽일 걱정 없이, 순수한 호승심으로만 임해도 된단 소리다.
마치 게임 한 판 하는 것처럼.
그렇다고 이 싸움으로 인해 우리 외 누군가가 죽는가? 내가 강박적으로 지켜야 할 무언가가 있나?
아니다. 이 싸움의 결과가 어떻든 누군가의 미래가 바뀌지도, 무언가의 판도가 달라지지도 않을 거다.
즉, 내가 스트레스 받을 요소는 단 하나도 존재하지 않는다.
오랜만에 즐겜하는 기분이 났다.
“─후.”
물론… 그래. 버서커로 보이는 백금색 인영이 뭍의 가장자리를 와다다 달리는 모습은 조금 어이없긴 했다.
속도가 제법 빠른 게 아무래도 싸움의 종결을 말하며 담소 나누고자 하는 것 같진 않거든.
나는 이걸로 싸움이 끝난 줄 알았는데.
그러나 싫은 건 아니다. 그래. 싫지 않다.
애초에 나, 이런 식으로 치고받고 싸우는 걸 좋아해서 액션 RPG만 골라 하는걸.
합류할 때야 얽히면 귀찮아질 것 같아서 피했던 거지, 이미 얽혀 버린 지금은 눈치 볼 이유 하나도 없고.
“악─마─기─사!”
때문에 나는 늘여 놓았던 검을 제대로 붙잡았다.
버서커가 전의를 불태우는 이상 컨셉은 결코 물러나지 않고, 나 역시 피할 생각 없었다.
“덤벼라, 머저리.”
아, 근데 이거 살짝 친구랑 하는 PVP(플레이어끼리 대전하는 행위) 느낌 나지 않아?
진짜 즐겜하는 것 같게.
“격의 차이를 알려 주마.”
체온으로 인해 미지근해진 물줄기가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 * *
맹렬한 흰바람은 중요한 일을 마치자마자 소파에 드러누웠다. 대삼림을 오가며 쌓인 피로는 대마법사라도 어떻게 할 수 없기 때문이다.
똑똑!
그러나 세상은 어찌도 이리 잔인한지.
눈을 붙인 지 한 시간도 흐르지 않았을 때, 방음마법을 뚫고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코까지 골며 잠을 청하던 흰바람이 반쯤 깨어나 허우적거리다가, 소파 아래로 굴러떨어진 건 다소 필연이었다.
똑똑!
“어, 어어어.”
아이고 허리야. 흰바람은 골골대며 손가락을 까닥였다. 문이 덜컥 열렸다.
“…잤나?”
그러나 들어오려던 이는 어두운 방 안을 두고 잠시 머뭇거렸다. 들려온 목소리에 흰바람의 어이가 나간 건 당연지사였다.
“…그럼 그 난리를 겪고 안 자?”
오는 길에 두 번이나 노숙을 했고, 도시엔 낮에 당도했으니 물론 잘 시간은 아니긴 하다.
그러나 이틀에 걸쳐 대삼림을 빠져나오는 행로가 어디 쉬웠던가? 마법 덕분에 불편함을 덜었다곤 하나 노숙이란 게 피로가 완전히 풀릴 수 있는 것이고?
흰바람은 멀쩡한 얼굴의 아크메이지가 더 신기했다.
쟤가 더 젊고, 모험하느라 쌓인 체력도 있을 것이며, 마지막으로 인종 차이도 있다지만 이건 너무 심한 거 아닌가?
“음. 악마기사랑 다니다 보면 이 정돈 일상이라서 말일세.”
“대체 어떤 행군을 해 온 거야. 그보다 악마기사가 결정해?”
“그건 아니네만… 이번처럼 혼자 튀어나가는 일이 많은지라.”
용사가 파티를 주도하는 게 아니라 그 파티원이 끌고 가는 모양새라니.
그렇지만 악마기사의 성질머리를 고려하면 썩 이상한 그림은 아니었다.
용사도 싹둑싹둑할 성깔이 어디 가겠어? 용사님 자체도 어디 주도할 성격은 아닌 것─엄밀히 따지자면 세상을 덜 겪어서 아직 중심 잡기도 어려워 보이는 것─같던데.
“그래, 그래서 용건은?”
흰바람은 가여움에 혀를 쯧쯧 찼다.
쟤도 슬슬 지부 하나 꿰차거나 연구소 하나 차려서 놀아도 될 나이인데 괜히 고생만 하고. 하긴 그때 그 일을 생각하면 연구소를 다시 차릴 일은 없어 보인다만.
각설하고, 이미 깬 상황이다.
흰바람은 완전히 깨어난 정신에 쐐기를 박고자 불을 켜고, 물을 데웠다. 각성 효과가 있는 찻잎이 손짓에 맞춰 허공에 둥실 떠올랐다.
“그냥 사소한 부탁 좀 하려고 온 거였네. 심각한 것도, 길게 이어질 것도 아니니 차는 안 끓여도 될걸세.”
“아, 그래?”
그럼 사양치 않고.
흰바람은 찻잎을 다시 내려두고 꿀을 가져왔다. 데우던 물도 우유로 바꿨다. 꿀 탄 우유만큼 잠에 특효약도 없다.
“자네가 잘 줄 알았다면 좀 나중으로 미룰 걸 그랬어.”
“됐어, 이미 깬 건데. 그보다 네가 할 만한 사소한 부탁이라.”
흰바람은 엉망이 된 머리카락을 손빗으로 헤집으며 다른 쪽 손으로 탁자를 두들겼다.
“그건 내가 너한테 물어보려 했던 거랑 관련이 있으려나?”
“…내게 물어볼 게 있었나? 자네가?”
“응.”
우유가 다 데워졌다. 흰바람은 꿀을 크게 퍼 하얀 액체 속에 그대로 담갔다. 금빛 액체가 백색에 잠겨 들었다.
“별건 아니고, 내가 악마기사한테 준 물건이 하나 있단 말이야? 근데 이게 조오금 위험한 거라, 일반인들 피해 입지 말라고 마력 사용자 외엔 물건에 손 대기 꺼려지는 술식을 적어 놨단 말이지?”
“…그래서?”
“한데 놀라워라! 부상으로 앓아누운 사이 그게 감쪽같이 사라져 버렸다지 뭐야. 정말 신기하지 않아?”
“…….”
다 녹았다. 흰바람은 숟가락을 건져 냈다. 팅. 스푼과 찻잔이 살짝 부딪치며 맑은 소리를 내었다.
“너지? 네가 가져간 거지?”
그에 맞춰, 아크메이지도 데운 우유에 꿀을 넣었다. 퐁당. 우유가 파문을 일으켰다.
“알면서 왜 묻나.”
“아하하하!”
대답이 귀에 들어오는 순간, 흰바람은 웃음을 터트렸다.
암. 전사라면 그것의 가치를 못 알아볼 테고, 마법사라면 폭탄을 굳이 가져갈 필요 없다. 하여 의심해 본 것인데 이게 정말일 줄 누가 알았겠나.
하물며 얼마 전까지만 해도 악마기사에게 다소 박하게 굴던 사람이.
“대삼림에서 조금 유해졌나 싶긴 했는데 정말이었구나. 내가 한 말이 그렇게 신경 쓰였어?”
“그럼. 그게 안 신경 쓰였겠나?”
“하핫. 그러면 이번에 부탁하려는 것도 그거 관련이겠네.”
“악마기사가 가슴보호구 제작을 다시 부탁했다면, 그래. 비슷하네. 거기서 폭발 마법을 제거해 달라고 온 것이니.”
“아하핫!”
흰바람은 또 한 번 크게 웃었다. 정말이지 어느 날은 예상을 빗나가고, 어느 날은 한 치도 예측에서 벗어나지 않는 사람이었다. 아크메이지는.
“근데 어쩌지. 이번 건 선물이 아니라 계약의 대가여서 내가 함부로 빼기 좀 그런데.”
“그런가? 그럼 내게 하청을 맡겨 주게.”
“그럼 마탑은 납품도 제대로 확인 안 하는 집단이 되어 버리잖아. 신용으로 먹고 사는 입장에서 그건 어려운 일이라고?”
그렇지만 그런 사람이라 좋다. 지성의 첨탑이라 불리는 마탑에는 저런 인의가 제일 절실했다.
“원칙에서 비롯하는 신용. 물론 중요하지. 그러나 그것이 진정 한 생명 위에 있는가?”
아무렴 지식은 눈이 없는 칼이요, 자아 없는 힘이니.
“그게 폭주하면?”
“안 할 걸세. 난 이번 일로 그것을 확신했네. 그게 나의 믿음일세. 원칙보다 우선하고자 하는, 사람 간의 신망 말일세.”
아크메이지같이 인애를 아는 자가 지식을 휘두르지 않는다면, 그 칼날은 어디로 향하겠는가?
“네 신망을 위해 내 신용을 포기하라니. 너무하네.”
“미안하네.”
“하지만… 나쁘지 않아. 사람에 한해서 네 안목은 믿지 않기로 했지만, 까짓것 한 번 더 믿어 보지, 뭐.”
무엇보다 가슴보호구 문제는 계약서를 따로 작성하지 않았다. 악마기사가 따져 봤자 증거는 세상에 존재치 않는단 소리다.
그러니 받아들여도 손해가 없다. 흰바람은 지극히 이해득실적인 사고로 친구의 바람을 들어주었다.
“대신 가져간 거 돌려줘. 분해해서 다시 써먹게.”
“얼마든지.”
더불어 재료비도 절약했다. 완벽한 이득이었다.
쾅쾅쾅!
“……?”
하나, 세상엔 업보란 게 존재하는 듯했으니.
“노크를 그따위로 하는 버릇은 어디서 배웠을까?”
“죄송합니다, 대현자님. 그만큼 심각한 일이라서…….”
“이번 일만큼 심각한 게 아니면 네 부서 연구비 삭감해 버릴 거야. 말해.”
“그, 그으… 악마기사랑 그 동료분이…….”
“그들이?”
“마탑과 마을을 잇는 다리를 잘게 쪼개 버리셨는데.”
계약서 안 썼다고 사기 치려던 흰바람은, 들이닥친 재해에 머금고 있던 우유를 주륵 뱉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