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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인공이 컨셉충이면 곤란한가요-124화 (124/389)

◈124화 떠날 수 있다면 (6)

【참 불쌍해. 외지인만 아니었어도 반란이 성공했을 텐데.】

【미친놈아! 입 밖으로 그걸 내뱉는 게 어디 있어……!】

【여긴 애들밖에 없잖아. 괜찮아, 괜찮아.】

【조용한 숲이 제일 위험하다는 말도 몰라?】

【괜찮대도.】

기이할 정도로 잠이 오지 않는 밤. 아카타는 간수들이 떠드는 소리에 입술을 잘근잘근 씹었다.

분하고, 서러웠다. 모두가 잠든 밤이라 고즈넉해야 할 귓가는 몇 시간 전 처형당한 가족들의 비명 소리로 먹먹하다.

【그러고 보니 외지인, 타포샤카의 집에 머문다지? 허, 반란자라곤 하나 족장 다음가는 권세가의 집을 단번에 내줄 줄이야. 외지인을 어지간히 아끼시나 봐.】

【…전사도 전사지만, 그 허연 털뭉치가 제사장이라잖아. 마을의 제사장이 죄다 반란에 넘어갔는데, 그럴 만하지. 심지어 카티나도 얼마 안 남았는데.】

【설마 이방인을 카티나에 데려가시려는 건가?】

【설마…….】

타포샤카는 그의 아버지 이름이었다. 그 가증스러운 외지인은 소녀의 가족들을 전부 죽게 만든 것도 모자라, 그들의 보금자리마저 강탈한 것이다.

【죽여 버릴 거야. 죽여 버릴 거라고.】

소녀는 입술을 꽉 깨문 채 복수를 다짐했다.

외지인 주제에 그들의 일에 끼어들어 가족을 죽게 만든 놈들도, 삼마르 언니를 죽일 것처럼 때린 주제에 족장 자리에 오른 아타르트도. 전부 말이다.

【…그래도 난 족장님이 외지인을 데려온 게 다행이라 생각해. 정말 카티나에 데려가실 생각이든 뭐든 간에.】

【뭐?】

【아니, 그. 너도 알잖아. 타란바 녀석… 오늘 아들 빼앗겼던 거. 만약 외지인이 아니었다면…….】

【아…….】

【급하니까 애를 인질로 잡는 놈이 반란에 성공해서 족장이 되면 어떻게 굴겠어?】

【그건 의외긴 했어. 그 타포샤카가 설마 아이를…….】

【타포샤카를 지지하던 사람들도 일부 돌아섰잖아. 하마터면 끌려간 애들이 죽을 뻔했으니까.】

그러던 중, 간수들이 이상한 소리를 지껄였다. 그녀의 아버지가 아이들을 데리고 인질극을 벌였단 헛소리였다.

【개소리를……!】

그녀의 자랑스러운 아버지가 그랬을 리 없다. 그런 치졸한 일을 벌였을 리 없다.

그래! 애초에 반란을 일으켰다는 것도 다 거짓부렁이다! 비가볼을 가장 위하는 그녀의 아버지가 왜 반란을 일으킨단 말인가! 결국 그 가증스러운 아타르트가 제 권력을 위해 씌운 누명일 것이다!

소녀는 그런 식으로 간수들의 모든 말을 모함으로 치부한 채 스스로를 다독였다. 제 부모님의 밑바닥을 직시할 자신이 없는 아이의 발악이었다.

【그런 점에서 외지인 전사도, 좀… 마음에 드는 것 같아. 말도 안통하고 손도 적은 게 좀 낯설긴 하지만, 애들한테 친절한 사람치고 나쁜 놈은 못 봤으니까.】

【그랬나?】

【투바 막내딸이 공 쥐고 노는 것 못 봤어? 그거 외지인 전사가 울지 말라고 준 거라잖아. 그 외에 이번에 잡혀갔던 애들도 조금씩 조금씩 받아서 가지고 놀던데.】

【근데 외지인이 가져온 거면 외지 물건 아니야? 좀 찝찝한데…….】

【나도 처음엔 그랬는데, 애들 노는 거 보니까 별거 아니더라. 그냥 좀 예쁜 장식품 같던데. 오히려 신기한 것들도 있고. 외지에선 그런 게 유행인가?】

같은 이유로 외지인에 대한 칭찬도 듣지 않았다. 전부 아타르트에게 넘어간 놈들의 사탕발림이었다.

통통.

한데 그렇게 한참을 잠 못 든 채 이만 바득바득 갈았을까. 감옥의 벽 너머에서 기척이 느껴져 왔다. 소녀가 벽에 몸을 기대지 않았다면 알아채지 못했을 만큼 작은 소리였다.

【쉬잇. 조금만 기다려.】

누군지 모를 상대는 그녀를 조용히 시킨 상태로 바닥을 긁기 시작했다.

그리고 달이 머리를 넘어갈 즈음, 소녀의 바로 옆쪽 바닥이 들썩였다.

【나머진 네가 알아서 해.】

누군가 개구멍을 파 준 것이다. 비록 빠져나가려면 그녀도 조금 파야겠지만 말이다.

【넌 누구야.】

혹시 함정일지도 모른다. 아카타는 그것을 의심하며 작게 물었다. 그러나 상대방은 이미 자리를 떠난 듯, 대답이 돌아오지 않았다.

그렇다면 이대로 있을까? 아니, 그건 싫었다.

아카타는 간수의 눈치를 보며 흙을 조심스럽게 파냈다. 맨손으로 흙을 파는 과정에서 손톱이 깨지고 살갗이 터졌지만, 그래도 심각하진 않았다.

상대가 대부분을 해결해 준 덕에 오래 걸리지도 않았다.

소녀는 금세 감옥을 빠져나왔다. 같은 방의 아이들? 깨우지 않았다. 깨우는 과정에서 소란이라도 일었다간 간수들에게 들킬 수 있었다.

무엇보다 이게 함정이라면 그녀 혼자 당하는 것으로 족하다. 그녀와 같은 방을 쓰는 아이들은 다섯 살배기들로 너무 어렸다.

【이제 어떡하지.】

그러나 정작 나오니 무엇을 해야 할지 모르겠다. 그녀는 우두커니 서 있다가, 이내 고개를 붕붕 돌렸다.

살아서 탈출하는 건 어차피 글렀다. 밤의 대삼림은 그녀를 쉽게 보내 주지 않을 테니까.

하면, 어차피 죽을 거라면, 복수라도 한 후에 죽고 싶다.

『급하니까 애를 인질로 잡는 놈이 반란에 성공해서 족장이 되면 어떻게 굴겠어?』

…그녀는 가족들의 복수를 해야 했다.

아카타는 서둘러 자리를 옮겼다.

【흰목거미다!】

그 과정에서 효과적인 무기도 얻었다. 그녀는 겁도 없이 거미를 낚아채, 그 몸체를 분해했다. 흰목거미의 독은 꽤 효과 좋은 마비독이었다.

【개자식들…….】

아타르트를 죽일까, 외지인을 죽일까. 아카타는 고민 끝에 후자를 택했다. 전자는 경비가 너무 삼엄한 까닭이다.

증오심의 크기를 재라면 당연히 아타르트를 향한 것이 더 크나, 그녀에게 주어진 기회는 한 번이었다. 그것도 시도한 순간 성패에 상관없이 소녀의 목이 날아갈 기회.

그럴 거라면 차라리 하나의 복수라도 성공하는 길을 택하리라.

아카타의 작은 발이 밤을 틈타 그녀의 옛집에 접근했다.

스윽.

【무슨 문제라도…….】

한데 하필 그 타이밍에 누군가가 밖으로 나왔다. 금방이라도 밤에 녹아들 것 같은 검은 코트와 저게 가능한가 싶은 머리색, 결정적으로 한 쌍뿐인 팔.

직접 본 적은 없으나 정체를 확신하기란 어렵지 않다. 외지인 전사다.

【끄응, 우리 마을엔 외지 언어를 쓸 줄 아는 사람이 족장님뿐이시니.】

【그, 산책 가시는 건가? 따라가 봐야 하나.】

외지인 전사는 어딘가로 가려는 듯 건물로부터 멀어졌다. 건물 호위를 서고 있던 전사 하나가 따라가려 했지만, 전사는 손짓으로 거부했다.

【젠장, 보고하고 올게.】

결국 외지인을 따라가기도, 그렇다고 남아 있기도 애매했던 호위 하나가 자리를 떠났다. 소녀에겐 더없는 이득이었다.

전사보단 제사장이 상대적으로 죽이기 쉽지 않은가.

【아차차, 밟으면 안 되지.】

그러나 소녀의 꿈은 금세 숲에 떨어트린 나뭇가지로 화했다.

병사가 안쪽에 조금만 걸음을 내디뎠다고 유난을 떠는 걸로 보아, 건물에 마법이 둘러진 것 같았던 까닭이다.

【젠장.】

반역죄로 제사장은 전부 잡혀갔으나 아마 외지인 제사장이 건 마법일 터.

이러면 제사장을 죽이기란 불가능에 가깝다. 그녀가 저 금을 넘어가는 순간 경비병은 이상을 눈치채고 달려들 테니까. 제사장도 자고 있건 아니건 깨어나서 대비할 테고 말이다.

하면 역시 그녀가 노려야 할 건…….

아카타의 시선이 떠나가는 이를 향했다. 가능성은 한없이 낮으나, 동시에 높았다. 외지인답게 밤의 숲으로 가고 있는 까닭이다.

독충과 온갖 맹수가 가득한 저 삼림으로 말이다.

【…할 수 있어.】

기습 같은 건 바라지도 않는다. 맹수들이 저 전사를 발견할 수 있게만 하면 된다.

소녀는 이를 악문 채 전사의 뒤를 밟았다. 사박, 사박. 적막 속에서 아주 작게 풀 짓이겨지는 소리가 났다.

그그극.

그때 무언가가 나무를 할퀴는 소리를 내었다. 반사적으로 소녀의 몸이 낮아졌다.

그그극.

소리는 정기적으로 났다. 아카타의 눈이 가늘어졌다가, 손으로 소리가 났던 자리를 짚었다. 칼자국이었다.

왜 자국을 남기는 거지? 그녀는 이게 함정은 아닌가 하는 생각을 다시금 떠올렸다.

그러나 소녀를 유도한다기엔 외지인 전사의 걸음걸이는 너무 거침이 없었다. 지금도 잠깐 망설였다고 열 걸음 가까이 벌어지지 않았나.

아카타는 전사를 놓치지 않기 위해 발을 재촉했다.

점차 마을로부터 거리가 벌어졌다.

* * *

【족장님. 아카타가 손님을 따라가는 것을 확인했습니다.】

【그래?】

아카타가 마을을 나서는 시각, 보좌관의 보고를 들은 아타르트는 눈을 가늘게 떴다.

【예. 손님 중 전사쪽이 마침 밤 산책을 나간 덕에…….】

【운이 좋았네.】

그래. 정말 운이 좋았다. 실패해도 그만 성공해도 그만이라 생각은 하지만, 그래도 보초 때문에 아이가 원하는 대로 움직여주지 않는다면 아쉬웠을 것이기 때문이다.

아이가 탈출한 시점에 벌할 명분은 충분하다지만, 그것을 빌미로 처형하기엔 역시 이방인의 협박이 걸리기도 했고.

그래서 보다 확실한 핑계를 만들어줬으면 했는데….

【머리가 좋아도 애는 애야.】

【…그렇죠.】

【의심 하나 없이 그걸 곧이곧대로 물다니.】

손님을 노린 시점에서 명분은 차고 넘치도록 생겼다. 그러나 아타르트는 기왕이면 그 이상을 바랐다.

아타르트의 눈 여덟 개가 가늘어졌다.

【이대로 손님 손에 죽어주면 제일 그림이 좋은데.】

아이들을 살려준다던 제안이야 손님을 살살 옭아매기 위해 던져본 것에 불과하다. 제 평판을 챙기기 위함도 있고 몇 가지 쏠쏠하게 챙길 것도 있긴 하지만, 가장 큰 이유로는 손님이 아이를 위해 어디까지 할 수 있는지 알고자 한 거란 말이다.

연좌제에 죽을 아이들에게 선뜻 손을 내미는 자임을 안다면, 더 많이 이용해먹을 수 있을 테니까.

『주제를 알아라.』

한데 지금 꼴은 어떤지.

【…빌어먹을.】

아타르트는 떠올리기만 해도 스산해지는 목소리에 괜히 목덜미만 문질렀다.

감히. 감히 그를 협박하다니. 다른 누구도 아닌 그를. 이곳의 최고 권력자인 자신을.

『너희가 지금 살아있는 이유는 순전히 너희가 먼저 내가 원하는 제안을 했을 뿐이며.』

그러나 미친 듯이 치미는 불쾌함에도 차마 손쓸 자신은 없다. 손님이 내놓은 말엔 거짓이 한 점 없는 까닭이다.

『내가 쓸데 없이 검을 피로 더럽히기 싫었을 뿐임을.』

그래. 부족 최고 전사라 불리는 실력이기에 더욱 확신할 수 있다. 그 사내가 그들을 적대하기로 마음먹는다면 그로선 대항할 방도가 단 하나도 없다.

새싹과 나무, 횃불과 태양. 자갈과 태산만큼이나 그들 사이는 격차가 심했으므로, 결코 저항이 불가능하단 거다.

【삼마르! 삼마르를… 아, 죽었나. 쓸모없는 놈.】

그러니 부디, 탈출한 아이가 그 사내의 기분을 밑바닥으로 처박기를 바란다.

아이가 그 사내를 죽일 것은 바라지도 않아. 애초에 그런 걸 의도하고자 풀어놓은 것도 아니고.

【그럼 어쩔 수 없지.】

다만 그저, 불쾌함을 선사하길 바랄 뿐이었다. 아이를 아끼는 주제에 아이의 피를 손에 묻히도록, 그것으로 약간이라도 불쾌하도록.

항거할 수 없는 대상에게 할 수 있는 복수는 놀랍게도 그딴 것뿐이니까.

【네가 대신 맞으면 되겠네.】

그러나 남은 앙금을 구태여 가지고 갈 필요 또한 없다.

암, 상대가 너무 강인하여 화를 풀 수 없다면, 화가 난 대상이 아니라 그보다 약한 이를 골라 풀면 그만이지 않은가.

【이 악물어.】

하여 그는 아까부터 식은땀을 줄줄 흘리던 보좌관의 머리채를 잡았다. 기다리던 게 왔다는 양, 보좌관이 눈을 질끈 감은 채 이를 지르물었다.

퍽, 퍽, 퍽!

【…또 시작하셨군.】

【조용히 해. 너까지 맞고 싶지 않으면.】

【…아타르트 님이 훌륭한 지도자긴 하지만, 이때만큼은… 삼마르가 그런 선택을 한 것도 이해가 간다니까.】

구타로 인한 소리는 꽤나 오래 갔다. 그러나 그곳엔 방관이 일상이 돼버린 공범들밖에 없었으므로 아무런 소요 없이 밤이 흘러갔다.

* * *

【너무 멀어졌는데…….】

한편, 아카타는 약간의 난처함에 빠졌다. 이 숲에서 살아왔다곤 하나, 밤의 숲에서 길을 거뜬히 찾아낼 정도의 노련함은 아직이었던 까닭이다.

외지인 전사가 남긴 자국을 되짚어 간다면 그래도 길을 찾을 수 있겠지만…….

소녀는 뒤를 돌아보았다. 울창한 수림은 달빛과 별빛마저 대부분 막아 세워, 어둡기 그지없다.

아카타의 목울대가 움직였다.

【젠장, 어디까지 가는 거야…….】

숲이 더욱 깊어짐에 따라 상대의 모습도 보기 힘들다.

하물며 발소리는 진즉 놓쳐 버렸으니, 자국을 남기지 않았다면 따라가는 것도 불가능했을 것이다.

소녀는 초조함에 이를 깨물었다.

쏴아아아.

그러다 잠깐, 폭포 소리가 들렸다. 그러자 머릿속 지도가 일을 했다. 소녀가 아는 곳이었다.

【저쪽인가?】

외지인이 폭포는 어떻게 알고 온 걸까. 아카타는 그런 생각과 함께 걸음에 힘을 주었다.

나무가 조금 트이고 놓쳤던 전사의 모습이 드디어 보였다. 그는 폭포 근처 바위에 앉아 있었다.

물가 근처는 맹수가 많은데. 아카타는 불안함에 주먹을 쥐락 펴락 하면서도 조용조용히 외지인에게 접근했다.

쏴아아.

폭포 소리가 점차 가까워졌다.

흐윽.

어렴풋이, 우는 소리가 섞여 드는 폭포의 잔향이었다.

【……?】

그리고 전사와 몇 미터의 거리만 남았을 때. 아카타는 상상치도 못한 광경을 보았다.

“집에 가고 싶어.”

울고 있었다, 그 외지인은.

“제발, 제발 집에 보내 줘…….”

쏟아지는 달빛 속에서 그다지도 서럽게, 물 자국이 더없이 선명하도록 성열했단 말이다.

“외면하는 것도 더는 힘들단 말이야…….”

정말 울고 싶은 건 그녀였는데.

“날 이딴 세계에 내버려 두지 마…….”

하얀 얼굴 아래로 은빛 낙루가 끊임없이 흘러내렸다. 장갑마저 벗은 손이 그것을 계속 닦아 내고 손등으로 문대도 그치지 않았다.

“너무 힘들어, 엄마, 나는. 나는 이제 진짜…….”

다만, 그는 세상이 끝나 갈 것처럼 오열했다. 부모님을 잃은 그녀가 그리 통곡했듯, 그 외지인도 모든 걸 상실한 사람처럼 목메어 울었다.

“남을 죽여 가며 살아남기 싫어…….”

알아듣지 못할 말이 참 절절했다.

“아무리 봐도 진짜 현실인데, 내가 어떻게 사람을…….”

원치는 않았으나 원수의 밑바닥을 보는 건 참 기묘한 감정을 가져왔다.

선연히 전해지는 슬픔에 너 따위가 무슨 자격으로 우느냐는 울분과, 어쩔 수 없이 가지고 마는 동정이 교차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럼에도.

저 외지인은 그녀의 원수였다. 그녀의 부모를 죽게 만든 사람이었다.

『타란바 녀석… 오늘 아들 빼앗겼던 거. 만약 외지인이 아니었다면…….』

그녀의 부모님을 죽인 사람이다.

『타포샤카를 지지하던 사람들도 일부 돌아섰잖아. 하마터면 끌려간 애들이 죽을 뻔했으니까.』

그녀의 부모님을…….

아니야. 다 헛소리야.

소녀는 약해지려는 마음을 다잡고 오는 동안 마련한 돌칼들을 쥐었다. 다섯 개의 칼 중 두 개에는 흰독거미의 독을 묻혔으니 잘만 하면 저 외지인을 죽일 수 있을 거다.

스윽.

그러나 상대에게 너무 집중했던 게 문제였던 모양이다. 기척을 눈치챘을 땐 이미 늦었다.

커허엉!

【아악!】

표범이 소녀를 덮쳤다. 가까스로 목덜미를 물리는 것은 면했으나 가운데 손 팔뚝이 물렸다. 팔이 뜯어져 나갈 것 같다.

【놔, 놔!】

소녀는 무의식적으로 모든 팔과 쥔 돌칼을 마구 휘둘렀다. 통하지 않았다. 그녀의 팔뚝을 문 표범의 눈은 형형하게 빛났고, 살갗을 꿰뚫은 이빨과 몸을 짓누른 채 할퀴는 발톱은 너무도 아팠다.

죽음이 이런 것인가 했다.

서걱!

그러던 찰나, 바람이 거세게 읾과 동시에 그녀의 몸을 흔들던 표범이 동작을 정지했다. 멈추는 걸 넘어 옆으로 넘어가기까지 했다.

튄 피가 얼굴 전반을 적시며 뜨뜻하게 몸을 데웠다.

“다친 데는……!”

아파, 너무 아파. 소녀는 처음 겪는 고통에 엉엉 울었다. 그러자 뜻 모를 언어가 그녀를 다독이기 시작했다. 그래, 그건 다독임이었다.

“조금만 참아라. 마을로 데려다줄 테니까.”

서투르고, 다정하고, 상냥한.

“피가 너무 나는데… 팔을 묶을 거니까 조금만 가만히 있어. 움직이면 안 돼.”

가증스러운.

아카타는 자신의 몸이 들리는 걸 느꼈다. 그리고 차갑게 식은 품이 그녀의 몸 절반과 닿는 것도.

참으로 치욕스러웠다. 소녀가 이 자리에 선 것은 이 남자를 죽이기 위함이었는데, 정작 죽이는 건 실패하고 이렇게 도움이나 받고 있다는 게.

그리고 안긴 품이 지독할 정도로 그녀의 아버지와 닮았다는 사실이.

“조금만 참아.”

더욱 분한 것은 귓가에 속삭여지는 말들이 그녀를 안도케 한다는 것이었다. 그녀는 원수의 상냥함에 위안을 얻고, 죽음을 향한 공포를 덜어내고 있었다.

마치 아버지에게 안겨 있을 때처럼.

【싫어…….】

그건 싫었다. 도움받은 입장이지만 그래도 싫었다. 이렇게 도와줘도, 다정하게 굴어도, 결국 그는 그녀의 부모님과 형제들을 전부 죽인 사람이다.

“……!”

아카타는 휘두를 수 있는 모든 팔들을 휘둘렀다. 외지인은 팔이 두 개밖에 없으니 한 대 정도는 맞지 않을까 싶었다.

그러나 하나는 볼을 스치고, 하나는 어깨를 스치는 것으로 끝난 채 단번에 내팽개쳐졌다. 그녀의 몸이 바닥을 굴렀다.

아. 진짜 전사들에겐 이런 기습마저도 통하지 않는구나. 강한 전사들은 팔의 개수가 적어도 기습에 대처할 수 있구나.

소녀는 바닥을 구르는 순간의 아픔보다, 이것마저 성공하지 못했다는 패배감에 고통스러워졌다. 무력감과 억울함이 전신을 지배하는 기분이었다.

하나 동시에 이대로 끝내기 싫었다. 그녀는 던져졌을 때 놓친 돌칼들을 대신해 돌이나 나뭇조각을 쥐었다.

“아!”

던져서 맞히는 식으로라도 분을 풀고 말 것이다.

“위험해!”

한데 그녀의 공격에 당했던 이는 이상하게도 그녀에게 먼저 다가와 주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자신이 공격한 걸 알 텐데도 품으로 끌어들였다.

왜?

아니, 이유는 중요하지 않다.

소녀는 직감적으로 이번이 마지막 기회일 것을 확신했다. 분노로 젖어 버린 정신은 상대와 주변을 살피기보다 제 성만을 채우기 급급했다.

【죽어, 죽어!】

첫 번째 칼이 가슴, 혹은 어깨 그 사이에 파고들었다.

【죽어어!!】

두 번째, 세 번째 칼날은 심장께에 내리찍혔다. 돌을 깨어 만들었을 뿐인 칼은 예리하게 살갗을 파고들진 않았으나, 억지로라도 가죽을 뚫어 냈다.

퍼엉!

일순, 엄청난 굉음과 강한 돌풍이 그녀의 귀를 때렸다.

【……?】

반사적으로 고개가 돌아갔다.

“큽.”

그러자.

“커헉.”

그녀를 삼키려 들었을 것으로 사료되는.

“다, 다친 데는.”

아주 거대한 아나콘다가.

“없, 어?”

목덜미에 커다란 구멍이 난 채로 죽어 있는 게 보여서.

“쿨럭.”

그녀를 안고 있던 이가 토해 낸 핏물이 소녀의 어깨를 적셨다.

『외지인 전사도, 좀… 마음에 드는 것 같아. 말도 안 통하고 손도 적은 게 좀 낯설긴 하지만, 애들한테 친절한 사람치고 나쁜 놈은 못 봤으니까.』

아, 아빠.

원한은 두 배로, 은혜를 열 배로 갚으랬는데. 이럴 땐 어떻게 해야 해요?

* * *

“쿨럭.”

와. 이 애, 참. 에임 좋네.

나는 쓸데없는 생각이나 하며 걸음을 옮겼다. 나를 공격했던 아이는 이후 한 번 더 맹수의 습격으로부터 구해 주자, 더 이상 반항을 하지 않는다.

덕분에 움직이긴 한결 수월했다.

“큽.”

문제는 피가 계속 흐르면서 머리가 핑 돈다는 건데.

나는 괜히 멀리 나왔다고 생각하면서도 악착같이 걸음을 움직였다.

칼에 찔린 곳이 둔탁한 통증과 함께 계속해서 피를 흘렸으나 처치할 자신은 없었다. 압박 및 지혈이야 이미 안에 찬 붕대가 하고 있고… 여긴 포션도 뭣도 없어서.

그렇다고 내가 의료 지식이 있어서 자상을 치료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왜, 왜…….】

그사이, 품에 들린 아이가 계속 중얼거렸다. 뭐 충격이라도 받은 모양이다.

공격받았음에도 본인을 구해 주고, 데려다주고 있는 게 좀 경악스러운가 보지.

그래. 사실 나도 내가 좀 호구새끼 같긴 하다.

그런데 어떡해. 고작해봐야 중학생 정도 되는 아이를 내가 어떻게 버려.

“괜찮, 다.”

무엇이 아이보고 나를 공격하게 만들었는지 모르겠다. 그런데 내가 구해 준 뒤로 기습을 그만둔 걸 보니까… 그냥, 이대로도 충분하지 않을까 싶다.

무언가가 분해서, 도저히 참을 수 없어서. 이게 잘못된 걸 알면서도 행할 수밖에 없던 거겠지.

이 나이대 아이들은 해 보기 전에는 멈추기 힘들어하잖아. 그런 마당에 멈춰 줄 보호자가 주변에 없기까지 하면 더욱 그렇고.

그러니까…….

“괜찮아.”

네가 감정적으로 실수를 저질렀을지언정, 잘못됐다는 걸 깨닫고 멈출 수 있는 아이니까.

난 널 용서해.

내가 한때 요리하다 집에 불낸 적도 있고, 야구 하다가 야구공으로 타인의 머리를 깬 적도 있지만, 그럼에도 피해를 입었던 어른들의 관용과 배려로 이렇게 어른이 된 것처럼.

나도 어른이란 이유로, 네가 죄책감에 울 수 있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널 용서할 거라고.

그러니 괜찮아. 정말 괜찮아.

나는, 널 원망하지 않아.

“그러니 울지 마라.”

【왜, 왜…….】

“울지 마라, 아이야…….”

품에 안긴 아이를 다독이며 걸었다. 시야가 더욱 어지러웠지만 그래도 아직은 걸을 수 있었다.

【아, 마을이…….】

그러다 아주 희미하게, 뿌예진 시야로도 놓칠 수 없는 주홍빛이 보였다. 아마 횃불일 것 같은데.

그렇다는 건 마을에 도착했단 뜻이겠지? 아, 다행이다. 흔적 더듬어 오는 것도 힘들어서 반쯤 운에 맡겼는데.

이게 어떻게든 되네.

【조금만, 조금만 더 가면 되는…….】

그런데… 나, 더는 못 걷겠어. 죽음 1회 무효 스킬도 이미 써져서…….

【아, 안 돼요! 다, 다 왔는데!】

아. 마지막 걸음이, 마지막 걸음이 도저히 뻗어지질 않는다.

나는 결국 ‘털썩’ 하고, 무릎을 꿇었다.

【내, 내가 잘못했어요. 내가 잘못했으니까…….】

으음. 나 이대로 죽게 되려나. 처음으로 리트라이 하게 되는 거야?

하. 리트라이는 별로 하고 싶지 않은데…….

【사, 살려 주세요!】

아.

그래도 애가 멀쩡해서 다행이야.

【사람이 다쳤어요!! 여기, 사람이, 사람이!!】

정말 다행이야…….

【제발!!】

일순, 시야가 뚝 떨어져 내렸다.

어렴풋이 하얀 천장과 가족들의 얼굴이 비치는가 했다.

* * *

「미안해요, 미안해요, 미안해요…….」

젠장, 저번에도 그러더니 이번에도인가. 고정이 헐거워졌잖아.

「정말 미안해요…….」

봉인구 때문에 일이 귀찮아졌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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