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3화 떠날 수 있다면 (5)
특정 관계에 있다는 이유만으로 연대책임을 무는 연좌제. 그리고 그 제도에서 비롯된 것이 대역죄인의 삼족을 멸한다는 형벌이라.
야만적이고 잔혹하다 생각하지만 이해 못 하는 건 아니다.
특히 반역죄 같은 대역죄의 경우, 경고의 의미와 정치적 의도, 보복을 막기 위한 절차 등으로 삼족을 멸한 것 아니던가.
심지어 연좌제를 시행하던 시대는 인권이나 감수성이 현대처럼 발달한 것도 아니다. 해서 좋아하진 않더라도 제도 자체는 납득… 비스므리하게 하고 있던 차인데….
“…조금 당황스럽습니다만.”
“아, 미안하네. 갑자기 들어온 것은 사과하지. 좀 급해서 말일세. 처형, 정말 안 볼 텐가?”
삼족을 멸하는 것까진 세계관 배경상 어쩔 수 없다고 보자. 그런데 그걸 나한테 보자고 제의하는 연유가 뭐냐?
내가 그런 거 즐길 것처럼 보였나? 물론 컨셉 성깔상 사람 하나 죽어도 눈 하나 깜짝 안 할 것 같고, 어지간하면 그러는 게 맞긴 한데……!
“외지에선 이런… 연좌제로 인한 처형을 자주 볼 수 없어서 말입니다. 죄 없는 자들이 죽어 가는 건 개인적으로 보기 꺼려지는군요. 저나 이 사람이나 말입니다.”
“그런가. 그거 아쉽게 됐군.”
가정 폭력범이란 걸 알고 나니 재수 없는 걸 넘어 보기만 해도 짜증나는 면상이 힐끗 웃었다.
반사적으로 ‘왜 쪼개냐. 쪼개 버리고 싶게.’라고 외칠 뻔했으나 겨우 참았다. 컨셉은 이런 식으로 천박하게 말 안 한다. 간지가 안 나니까.
“귀하가 온다면 아이들은 살려 볼 수 있었을 텐데.”
근데 이 새끼가 이렇게 나와?
“…그것이 무슨 뜻입니까?”
아크메이지의 물음에 아타르트가 어깨를 으쓱였다.
“별 뜻은 아니고, 약간의 연극을 하려 했을 뿐이네. 반역자의 삼족을 멸하는 것이 우리 비가볼의 법도이나 이번 처형 대상에는 어린아이들도 많이 껴 있거든. 그 아이들까지 다 죽이자니 안타까워서 말일세. 해서 오거든, 손님들에게 잔혹한 인상을 남기긴 싫다며 아이들만큼은 빼돌려 보려 했지.”
말은 아주 청산유수였다. 결국 ‘네가 오지 않으면 아이들은 죽는다’란 협박이 아닌가.
“하지만 그대들이 싫다 하니…….”
참고로 이건 결코 상대가 가정 폭력범이란 이야기를 들어서 가지는 편견이 아니다. 물론 그것이 완전히 포함 안 되진 않았겠으나, 그보단 다른 것이 판단에 영향을 끼쳤다.
“어쩔 수 없지.”
아무렴, 정말 아이들이 안타깝고 구하고 싶었다면 저 새끼가 지금 웃고 있겠는가? 간곡하고 간절히, 무릎이라도 꿇고 우리에게 부탁했겠지.
“그럼 식사들 맛있게 하게.”
한데 저 새끼가 왜 저렇게 나오는지 모르겠단 말이지. 내 약점이 아이들이라는 걸 확인받고 싶었나? 그걸로 이용해 먹고 싶었어?
그런데 그것치곤 쪼개는 면상이 너무…….
‘죽여 버리고 싶네, 진짜.’
재수 없는데?
날 이용하려는 음험함보다, 나를 당연히 이용할 수 있을 것처럼. 내가 저보다 낮은 사람인 걸 확신하는 양 오만하게 웃는 게, 진짜로.
“…족장님. 급하신 건 알지만, 용건만 내놓고 가시는 건 다소 당황스럽군요.”
아크메이지가 마침 시간을 벌어 주었다. 해서 나는 치미는 분노 사이로 빠르게 사고를 굴렸다.
화는 차라리 냉정함을 찾기 좋았다. 저 새낄 족치다 못해 엿 먹이고 싶다 생각하니까 머리가 빠릿빠릿 돌아갔거든.
그러다 보니 저놈이 가정 폭력범이란 사실에도 다시 생각이 닿았다.
보다 정확힌, 가정 폭력 가해자의 심리에.
“아, 혹시 마음이 바뀌었나?”
가정 폭력의 원인 중 하나는, 권력을 얻거나 우월감을 느끼기 위한 수단으로 폭력이 채택된 경우다. 열등감을 폭력성으로 표출했단 소리다.
하면 저 새끼가 뜬금없이 아이들을 인질로 잡고 자신만만하게 구는 것도 설명이 된다.
우월감을 느끼는 수단으로 가족에게 폭력을 휘두르는 놈이 아이들을 수단으로 나를 협박 하나 못 할 리 없고, 지금껏 이런 수단들로 자신의 위치를 인지해 온 놈이 이번 협박으로 우월감을 안 느낄 리도 없다.
힘으론 쨉도 안 되면서 나를 협박한 시점에서 자기가 더 잘난 놈이라고 여겼을 거라고.
“당장 참여하겠다는 건 아닙니다만, 조금 더 이야기해 볼 여지는…….”
다만 짜증나는 것은, 정말 애들 목숨이 걸린 일이라 함부로 무시할 수 없다는 건데.
‘그냥 죽이면 안 돼?’
나는 수저를 들기 애매해서 잠깐 쥐었던 찻잔을 내려다보았다.
“그대들이 직접 오지 않으면 아무 효과가 없을 텐데.”
“족장님.”
“안타깝지만 그러한 걸 어쩌겠나. 나는 분명 노력을─.”
저 새끼가 우위를 점했다 생각하고 있다면, 다시 끌어내려야지.
그래야 대화가 될 거니까.
“내가 우습게 보였나 보군.”
와드득.
나는 쇼맨십용으로 맨손으로 찻잔을 박살 냈다. 나무로 만든 찻잔이라 그런가. 유리잔과는 다른 느낌이었다.
잔이 결대로 으스러졌다.
아크메이지와 아타르트의 입이 단번에 다물어졌다.
“…그럴 리가 있나. 나는 그저─.”
그래도 꼴에 족장이라고, 입 다시 털려는 것 봐라.
나는 찻잔을 완전히 으스러트린 후, 가루와 함께 조각들을 털어 냈다. 물론 마력을 두르지 않고 찻잔을 박살 낸지라, 손에는 상처가 새겨졌다.
장갑을 끼고 있었으나 그것마저 일부 뚫고 들어간 조각들이 살갗을 후비고 기어코 피를 본 것이다.
피와 물이 섞여서 흘렀다.
‘본때를 보여 줘.’
한데 그게 아픈가?
그다지 아프지 않다.
‘철저한 공포를…….’
아픈 건, 정말 아픈 것은…….
【으아아아앙!!!】
‘어째서?’
아이의 울음소리를 들을 때마다 쿵쿵 울리는 심장 어림이다.
‘어째서 기어오르는 것을 향한 화보다 죽어 가는 것을 향한 슬픔이 먼저일 수 있어?’
나는 말이지, 세상에서 아이가 우는 소리가 제일 싫다. 관련해서 트라우마가 있는 것도 아니고 과거에 무슨 사건이 있던 것도 아니지만 그냥 싫다.
어린아이부터 성인을 목전에 둔 미성년자까지, 그냥 다 행복했으면 좋겠다.
“그렇게 말하면 내가 득달같이 자리에 나서 줄 거라 생각했나?”
순전히 내가 어른이니까, 내가 저 애들보다 더 많은 세월을 살아왔으니까. 그게 옳은 일이라 여기니까.
“네까짓 것이 나를 이용할 수 있을 거라고?”
나는 그저 아이들의 행복을 빈다.
“주제를 알아라.”
그런데 이 XXX 같은 XXX이 감히 애를 인질로 잡아? XXXX도 아니고 이게 뒈질라고, 콱 XX를 XXX해서 XXX해 버릴까 보다, 진짜. 다짐육 되고 싶냐?
“너희가 지금 살아 있는 이유는 순전히 너희가 먼저 내가 원하는 제안을 했을 뿐이며.”
나는 몸을 천천히 일으켜, 아타르트에게 다가갔다. 키가 비슷한지라 고개를 숙일 필욘 없었다. 시야가 직선으로 맞닿았다.
“내가 쓸데없이 검을 피로 더럽히기 싫었을 뿐임을.”
그리고 뇌까렸다.
남보다 월등한 위치에 있고자 약자를 깔아뭉개는 놈들은, 결국 절대 이길 수 없는 것을 맞닥뜨리거든 고개를 조아릴 확률이 높기에 행한 협박이었다.
“…….”
혹시나 했더니 역시 정답이었다. 나는 키도 비슷한 주제에 쫄아서 눈을 슬그머니 돌리는 새끼를 내려다보았다.
마음 같아서는 ‘자, 따라 해 보세요, 인권!’ 하면서 놈의 머리를 도덕책에 처박고 싶건만, 도덕책이 없다는 게 천추의 한이다.
내 눈이 놈을 집요하게 꼬나보았다.
“명심하는 게 좋을 거다. 지금부로, 아이들의 목숨은 너의 목숨과 동일한 가치를 가질 것이니.”
젠장. 가정 폭력범인 걸 알면서도 내가 개입할 방도가 없어서 내버려 둬야 한다는 것만으로도 짜증나건만. 감히 애들 가지고 협박을 해?
개자식. 관습을 왜 따르지 않느냐고 남은 놈들이 반발을 하든 말든 이젠 네가 알아서 해라. 내가 끼어들 핑계가 없던 상황에서 스스로 개입할 틈을 내준 건 너니까.
애들 손끝 하나라도 다치게 했다간 너도 같이 뒈질 거라고. 알아들었어?
“나가라.”
나는 불쾌함과 혐오, 경멸을 한 점 숨기지 않은 채 축객령을 내렸다. 그제야 아타르트가 얼굴을 화악 붉히며 모멸감을 드러냈으나, 끝내 반박하진 않았다.
전형적인 강약약강이었다.
“가, 보지.”
문이 닫히고, 다시 평화가 찾아왔다.
“잘했네.”
언제 내 근처로 다가온 건지, 아크메이지가 박수를 툭툭 쳤다. 그녀의 손뼉이 맞닿을 때마다 하얀빛이 퍼져 나가며 벽에 맞닿도록 공전을 시작했다.
“정말로 잘했어.”
아크메이지는 이어 공전하는 빛의 경로를 따라 마력으로 무언가를 적기 시작했다. 아마 마법을 거는 것 같다. 무슨 마법인지는 모르겠지만.
“아무리 관습이라곤 하나 아이들은 무슨 죄를 지었다고 죽어야 하나 싶었는데, 자네 덕분에 아이들만큼은 살 수 있게 되었군.”
나는 바깥의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뜻은 못 알아들어도, 아이들 울음소리가 멀어지는 건 느낄 수 있다. 조금만 집중하면 아이들의 기척이 떼거지로 어딘가에 이동되는 것도.
어른들의 기척이 모이는 곳과 다른 방향인 걸 보면 아마 처형에서 빠지는 것일 확률이 높다. 어떻게든 살렸다.
“문제는 족장이 이번 일을 좋게 넘기지 않으리란 점인데… 살아남은 아이들의 처우가 어찌 될지 모르겠군.”
뭐, 아크메이지의 말마따나 이걸로 끝은 아니다. 생존했다곤 하나 부모는 다 처형감이다. 하물며 본래라면 죽었어야 하는, 대역죄인의 자식들.
고아가 된 것도 삶을 팍팍하게 만들기 좋은데, 죄인의 자식이란 꼬리표까지 붙으면…….
“족장에게도 저 아이들을 마을에 남겨 두긴 부담스러울 터. 그렇다고 다른 부족에 보내는 것이 가능은 할는지.”
하, 남에게 도움을 줄 때 대책 없이 막 도와주는 것도 안 좋은데. 아, 이거 어떡하냐. 내가 애들 데리고 다닐 수도 없고.
“이에 대해선 차차 고민해 봐야겠네. 당장 답 나올 성질의 것은 아니니.”
누구 아이들 대거 맡아 줄 수 있는 사람 없나.
* * *
아타르트는 분을 참지 못해, 달아오른 얼굴로 걸음을 내디뎠다. 밖에서 대기하고 있던 이들은 그의 눈치를 보며 슬쩍 따랐다.
【무슨 문제라도 있으셨는지…….】
그러나 표정을 드러내는 것도 잠깐이었다. 그는 가까스로 감정을 수습하교 표정을 평소의 것으로 되돌렸다. 속으론 쌍욕을 해도 겉으론 웃어야 하는 게 이 자리였다.
【손님들께서, 특히 검은 뱀의 전사가 아이들이 죽는 건 바라지 않는다더군. 하하. 아까도 생각했지만 아이들을 참 아끼는 사람이야.】
발언 한 번에 주위의 사람들이 얼굴빛을 달리했다. 그런 강대한 힘을 쥐고서도 아이에게 너그럽고 자비로운 손님의 도량에 감탄하는 것이다.
【은혜를 입은 마당에 잔인한 부족이란 인식을 전할 필요는 없지. 10살… 아니 12살 아래의 아이들은 살리게.】
【알겠습니다.】
【한데, 족장님. 12살 아래라 함은, 1살부터 12살까지만 허용하시는 겁니까……?】
【문제 있나?】
【엊그제 13살 된 아이가 하나 있습니다.】
【…그럼 그 애까지만.】
【네.】
그러나 아타르트에겐 짜증나는 일에 불과했다. 이용이라도 해 먹을까 했더니, 도리어 부족 내 불온의 씨앗만 남기게 된 까닭이다.
하물며 아이라는 뭉뚱그린 단어로 협박을 받아, 사리 분간도 못 할 나이만 살려 둘 수도 없었다. 14살, 15살짜리보단 낫지만 12살, 13살도 복수심을 품기엔 충분한 나이다.
【대신 살려 두되 당장 마을에 풀진 말고, 격리한 상태로 상태를 봐 가며 풀어 주지.】
【예.】
【너희, 1살부터 12살까지의 아이들을 선별해 본래 감옥으로 옮겨. 엊그제 13살이 된 아카타도 함께. 자비를 베풀라는 명이시다.】
그는 평온을 가장한 채 처형식에 참여했다. 온 주민들이 보는 가운데, 반란자들이 처형대 근처로 내동댕이쳐지고, 아이들은 일부 이송되었다.
【내 아이를 어쩔 셈이냐!】
【아카타!】
【어머니, 아버지!!】
갓 13살이 된 아이가 타포샤카의 딸, 아카타였나? 괜히 살려 뒀군.
아타르트는 13살치고 덩치가 크고 근육이 고르게 발달된 아이를 슬 보았다. 눈동자가 홧홧히 불타는 것이 결코 이 날을 잊지 않을 게 뻔했다.
배반의 싹이다. 죽이는 게 맞다.
하지만 이미 살려 두라 명을 내렸는데 어떻게 할까. 이 자리는 말을 번복해선 안 되는 자리인데.
【빌어먹을, 죽여 버릴 거야. 죽여 버릴 거라고! 너도, 네가 끌고 온 이방인도!!】
그러다 문득, 아타르트의 귀에 발악과도 같은 외침이 천둥처럼 다가왔다.
【그래. 마침 둘에게 내준 곳도…….】
【예?】
【아니다.】
감히 그의 제안을 거절하다 못해 역으로 그를 협박한 이방인에게 경고도 할 수 있고 저 노란 싹도 죽일 수 있는, 아주 좋은 계획이 생각났다.
아타르트의 입가에 서늘한 미소가 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