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2화 떠날 수 있다면 (4)
“어디 불편한 점, 없다 합니까?”
데스브링거는 그를 졸졸 따라다니며 일일이 보좌하는 이를 두고 부담을 느꼈다. 하필 그를 담당하는 자가 제사장의 직속 보좌관이라 더 짐스러웠다.
심지어 이 호사를 누리는 건 그 혼자였다. 베르세르크는 ‘전사는 몸으로 대화한다’는 둥 얼토당토아니한 문장만 남기고 떠나갔고, 벽창호는 배정받은 건물에서 명상 중인 탓이다.
교단 샌님이랑 단둘이 방에 남아 있긴 싫어서 산책 겸, 구경 겸, 귀한 독 좀 얻을 겸 나온 거였는데… 이럴 줄 알았다면 그냥 나오지 말 걸 그랬다.
세심하게 챙겨 주는 건 고마운데 정말로 부담스럽다.
“그, 저 혼자 다닐 수 있습니다요.”
“안 됩니다. 제사장님 명령. 부족함 없이 보필해야 한다입니다.”
이게 도움 이외의 의도가 있었다면 차라리 받아들일 수 있었을 것이다. 예컨대 감시라든가, 관리라든가.
그런데 아무리 봐도 호의에서 우러나온 보좌 같아서 말이다.
그는 결국 터놓고 말하기로 했다. 대삼림 사람들은 이방인에게 적대적이라는데 당신네들은 왜 이렇게 물렁하게 구는지.
“구함받았습니다. 검은 뱀 전사님한테.”
“예?”
“은혜 갚고 싶었습니다. 모두들. 하지만 전사님 가셨다. 비가볼 부족의 급한 일을 돕는다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어째, 아는 사람 이야기가 흘러나오는 것 같다. 데스브링거의 표정이 오묘해졌다.
【자타브와 비가볼의 사이라는, 지리적 요건은 우리의 인연을 번번히 방해해 왔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한편, 흰바람은 세르항의 족장과 얼굴을 마주 보았다. 대삼림에선 흔하나, 대삼림 밖에선 금보다 귀한 찻잎이 그녀 앞에서 한가득 우려지고 있었다.
【그러나 이번 카티나엔 바깥과의 교류에 긍정적인 이가 나올 예정입니다. 그리고 그가 대족장이 된다면…….】
【우리의 인연이 완전히 이어지겠네요.】
하나 그보다 더 귀한 것은 상대하는 말들이었다.
【물론 그이가 대족장이 되려면 약간의… 도움이 필요할 겁니다. 오랫동안 고수해 온 태도를 한 번에 버릴 수 없는 자들이 이 숲엔 많아서요.】
어리긴 하지만, 나쁘진 않다. 흰바람은 의도가 뻔히 보이는 말에 기분 상하기보다 흡족함을 느꼈다. 상대가 너무 멍청해도 거래하긴 어려운 법이었다.
【하면 저희는 이렇게…….】
【말씀은 감사하지만 그건 좀…….】
흰바람은 치열하게 세르항 족장과 미래를 논의했다. 마력 먹는 뱀을 노리고 온 상황이나, 대삼림과 더 많은 거래를 틀 수도 있는 기회를 놓칠 순 없었다.
어차피 전자는 아크메이지와 악마기사가 잘해 주고 있어서─마탑에서 연구 결과 보고가 오려면 멀기도 했고─별로 신경 쓸 것도 없었다.
【마탑주님과 이리 말이 잘 통할 줄은 몰랐습니다. 다음에도 이런 기회가 또 찾아왔으면 좋겠습니다.】
【초대해 주시면 기꺼이 응할 거랍니다?】
별개로 궁금한 것은 있다. 흰바람은 세르항이 왜 이렇게 외지인에게 관대해졌는지 의문을 품었다.
본래도 외지인에게 각박한 인사들은 아니었지만, 이렇게까지 호의적이거나 교류를 향한 열망이 큰 편도 아니었다. 무언가가 있다.
【…아, 이유요.】
궁금한 건 참을 수 없다. 배려해 줘야 하는 부분도 아니겠다, 흰바람은 냅다 질문을 던졌다.
온화하고 차분히 응대하던 족장의 얼굴이 잠깐 동안 평범한 소년의 것처럼 발그레해졌다.
【…머리에 두 개의 색을 품은 외지인 전사님이 부족에 큰 은혜를 입히고 가셨습니다.】
악마기사네. 흰바람은 사정 들을 것 없이 바로 답을 내렸다. 흰바람이 알기로 머리에 두 가지 색을 품은 사람은 세상에 딱 둘 뿐이었다.
【물론 그분께 갚지 못한 빚을 여러분에게 대신 갚고자 하는 건 아닙니다. 다만…….】
소년은 금세 족장의 얼굴로 돌아갔다. 침착히 숨을 들이켠 얼굴이 곧 본래의 빛깔을 되찾았다.
【전 그렇게 강한 사람이 존재할 수 있다는 걸 그분을 보고 나서야 알게 되었습니다. 그분이 이 숲에 무기를 겨눈다면 우린 속절없이 당할 수밖에 없다는 사실도. 하나, 외지 사람들은 다르겠지요. 알고 있다는 건 대비할 시간이 있다는 것과 진배없으니 말입니다.】
음. 사실 악마기사는 평균을 벗어나도 너무 벗어난 사람이라, 안다고 대비할 수 있는 부류가 아니지만… 흰바람은 그 사실을 굳이 말하지 않았다.
악마기사를 바깥의 평균으로 오해하고, 그를 대비하기 위해 바깥과의 교류를 튼다면 어쨌든 마탑에는 이득 아니겠는가?
【물론 변화는 우리의 많은 것을 바꾸겠죠. 그것이 파괴적으로 느껴지는 순간도 오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생각해 보면 저희가 모시는 이 숲도, 산군께서도 느리게나마 계속 변화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저도 더는 겁내지 않고 변화에 순응해 보고자 합니다.】
【마침 대족장도 바뀔 타이밍이고 말이죠?】
【예.】
【그럼 저희가 사람을 파견해 드릴까요?】
【말씀은 감사하지만, 괜찮습니다. 급격한 변화는 반발을 일으키니까요. 비가볼 부족이 그러하듯. 하니 저는… 지금처럼, 딱 지금처럼만 서서히 변화하고 싶습니다. 그 과정에서 저희가 반드시 지켜야만 하는 것들도 선별할 참이고요.】
외지인이 마을에 상주하는 건 불편을 초래할 수 있으니, 오는 손님만 조금씩 받아 보겠다는 태도인가.
참 느려 터진 방식이지만 차라리 그게 나을지도 몰랐다. 낯선 문물에 지레 질겁하여 거북이처럼 다시 등껍질 안에 숨는 걸 보느니, 몇 번에 걸쳐 길들이는 게 낫겠지.
【흐응. 좋은 말씀 감사합니다.】
흰바람은 그것으로 제 의문을 정리했다. 이제 마지막으로 알아야 할 건 딱 하나.
저 소년족장이 밀고, 아크메이지가 어쩔 수 없이 돕기로 했다는 비가볼 족장의 인품이다.
그가 개혁적인 성향인 것과 별개로, 대족장이 돼서 어떤 정책을 펼치냐에 따라 교류를 터도 더 안 좋은 상황으로 변할 수 있으니까.
“대화는 끝나셨습니까?”
“응. 알아본 건?”
“…이상한 이야기를 하나 들었습니다.”
“응?”
“마탑으로 귀화한 비가볼 출신 마법사가 하나 있잖습니까. 걔가 전하기를…….”
그리고 흰바람이 보기에, 비가볼 족장은 썩 아니었다.
“곤란하게 됐네.”
아무리 완벽해 보여도, 가족과 연인에게 폭력을 휘두르는 자는 믿을 게 못 된다.
암, 가장 소중해야 할 인연에게마저 손을 올리는 자들이 타인은 얼마나 깔보고 있겠는가?
* * *
【머무시는 동안 이곳을 쓰시면 됩니다.】
【허어. 이리 좋은 곳을 저희가 누려도 될는지 모르겠습니다.】
손님으로서 초청받았고─반란이 일 걸 알았고, 대가도 약속받았던 만큼 고용 형식에 더 가깝지만─사람을 구하는 데 지대한 공을 끼쳐서일까.
아크메이지와 나는 호화스러운 대접을 받았다. 족장의 집 다음으로 좋은 집을 배정받은 것이다.
【감히 족장님을 위협한 배반자들을 처단하는 것도 모자라, 그들이 남기고 간 삿된 것들을 없애는 데 도움을 주시지 않으셨습니까.】
참고로 나 때문에 아크메이지가 덩달아 호사를 누리는 건 아니다.
마법을 다루는 아크메이지 특성상, 그녀는 제압 이후에 진가를 드러냈다. 결계 파훼나 마법 장치 제거, 무너진 건물 일부 재건 같은 것들.
【하물며 번거로우셨을 텐데도 임시봉인구까지 넉넉히 만들어 주셨으니… 부디 사양치 마시고 마음껏 쓰시지요.】
제사장이란 제사장이 전부 반역에 가담한 이상, 그녀의 가치는 더욱 귀했다. 마법을 이용한 도움도 도움이지만, 같은 마법사인 그들을 봉인할 수 있는 건 그녀뿐이었다.
【배려에 참으로 감사드립니다. 한데 저희가 그리 오래 있을 수 있는 처지가 못 되어서 말입니다. 저희가 약속받은 것은 언제쯤 받을 수 있는지…….】
물론 대우가 좋다고 해도 우리와는 아무 상관 없는 일이다. 잠자리가 편하고 식사가 잘 나오는 거야 분명 반가운 일이지만, 우리 입장이 입장이지 않나.
어쩌다 보니 한 부족의 미래를 결정지어 버렸지만─반란이 성공했다면 권력 잡은 사람이 바뀌었을 테니─우리의 본래 목적은 이것이 아니다.
우리는 산군을 만나러 온 사람들이다.
그 존재가 악마인지 아닌지, 나아가 마력 포식 생물의 원리를 찾기 위해 온 사람들이란 거다.
그러니만큼 지금은 호화스러운 대우보다 산군이나 빨리 보여 줬으면 좋겠다.
여기 더 있으면 카티나인지 뭔지 대족장 뽑는 일에도 참견해야 할 것 같아 싫다. 선악이 분명한 싸움이 아닌, 정치 싸움은 질색이다.
【죄송합니다. 이 부분은 제가 함부로 대답해 드릴 수 없을 것 같습니다. 대신 족장님께 전해 드리겠습니다.】
【그것으로 충분합니다.】
【답은 식사와 함께 가져올 수 있도록 하겠습니다. 조금만 기다려 주시지요.】
나는 우리를 여기까지 안내해 줬던 이가 떠나가는 걸 힐끗 보고 벽에 기대 앉았다. 등의 투헨더는 대충 옆에 뉘었다.
“식사를 가져온다는군. 조금만 기다리면 될 것 같네.”
무슨 대화를 그리 나누나 했더니 식사 이야기였나.
하긴, 이동할 때 잘 챙겨 먹은 것도 아니고 여기 도착해서 먹을 시간이 있던 것도 아니다. 보편적인 식사 시간과 거리가 있더라도 무언갈 입에 넣긴 해야겠다.
“흰바람이 끌고 온 무리는 아무래도 늦을 것 같네. 올 때 우리가 그러했듯 그들도 자타브가 길목을 막고 있어 섣불리 움직이기 힘들다는구만.”
나는 내 포만도를 체크하며 아크메이지가 하는 말을 적당히 들었다.
흰바람이 데려오는 인력이야 조사를 위한 것이지, 실질적으로 내 할 일을 줄여 주진 않을 거라 별 관심은 안 갔다.
“음? 경고도 하나 해 왔군.”
그러다, 연락책을 확인하던 아크메이지가 미간을 살짝 좁혔다.
“비가볼 부족에게 무슨 문제가……?”
쿵쿵.
머물던 건물의 문으로부터 둔탁한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아크메이지가 연락책으로부터 시선을 뗀 후 헛기침을 했다.
【크음. 들어와도 괜찮습니다.】
목을 가다듬은 끝에 나온 목소리는 어딘가 가라앉아 있다는 느낌을 준다.
【저녁 식사를 가져왔습니다.】
그러나 먹는 것을 가져왔다는 말에 그녀의 속삭임이 잠시 끊겼다.
곧 차례차례 음식을 담은 나무 그릇들이 이송되었다. 수가 어찌나 많은지, 아무리 생각해도 우리 둘이 다 먹을 양이 아니었다.
【…이건, 너무 과한 듯합니다. 호의엔 감사하지만 양이 너무…….】
은인에게 아무리 최선을 다해 대접을 한다지만, 반란이 일어났던 마당인데 이렇게 해 줘도 되나. 식량 창고는 멀쩡하니 이래도 된다는 거야?
【은인을 대접하는 데 결코 모자람이 없도록 하란 족장님의 명이 있으셨습니다.】
【으음…….】
나는 긴가민가해하되 일단 침묵을 꾸욱 삼켰다.
아크메이지가 알아서 하겠지. 조별 과제 절망편이라면 반드시 나오는, ‘남에게 미루기’였다.
【아, 물어보셨던 부분에 대한 답신도 가져왔습니다. 족장님께서 이르시길, 산군님은 모든 부족이 공통으로 모시는 존재이며 하필 카티나 기간이라 쉽게 대면의 기회를 얻기 어렵다고 하셨습니다. 약속을 지키기 위해 노력할 것이나, 시간이 걸리는 것은 부디 이해해 주시길 부탁한다 하셨습니다.】
그런데 뭐, 아크메이지는 원래 이런 거 잘하잖아? 내가 몸 쓰는 일에 앞장서듯이.
그러니까 괜찮지 않을까. 물론 착한 사람은 절대 그러면 안 되겠지만.
【그런 거라면 어쩔 수 없지요.】
【이해에 감사드립니다.】
나는 어벙하게 대화를 흘려들으며 음식의 면면을 살폈다. 아주 단 과일과 고기가… 참 많았다. 힝이었다.
【──!】
【──라!】
어쨌거나 이야기가 끝났는지, 사람들이 하나둘 물러갔다. 뒤를 보이지 않고 뒷걸음질로 물러나는 게 좀 신기했다.
【바깥이 조금 소란스럽군요. 무슨 일 있습니까?】
【별것 아닙니다. 반란 주동자들의 처형을 준비하고 있을 뿐입니다.】
【…그런 것치고 아이의 목소리가 들리는 것 같은데.】
【아… 그건 반란이 일어날 경우 주동자의 삼족은 전원 사형 대상이기 때문입니다.】
그럼 이제 먹으면 되나. 근데 아크메이지가 아직 밥상 앞에 안 앉았는데.
노인공경이 아니라 노인공격만 하는 컨셉이라도 밥상만큼은 어르신 먼저 드시게 하고 싶다고.
【아! 혹시 구경하고 싶으시다면…….】
【절대, 사양하지요.】
와중에 아크메이지 표정 더러워진 거 실화냐? 나 저분이 저런 얼굴 하는 거 처음 봐.
【…네에. 그래도 마음 바뀌시거든 언제든 말씀해 주십시오. 자리를 마련해 드리겠습니다.】
【호의에 감사드립니다.】
평상시 화를 안 내던 사람이 화를 내는 것만큼 무서운 것도 없다.
나는 쫄은 속내를 숨기며 팔짱 낀 채 눈을 감았다. 꼬로록. 뱃가죽이 나만 들리게 울었다.
“이곳이 폐쇄적인 곳이라는 걸 내 깜빡했네.”
다행히 아크메이지는 늦지 않게 앉았다. 나는 자연스럽게 눈을 뜨며 언제 수저를 들면 될까 곁눈질을 했다.
“반란이 중죄라곤 하나 삼족을 멸하는 것은 옛저녁에 금한 일이거늘…….”
근데 뭐라고요?
“…반란 주동자들과 그 가족들을 처형한다는데 혹 보러 갈 생각 있나?”
미쳤어?!!?
“그럴 줄 알았네. 자네가 보러 갈 사람은 아니지.”
나도 모르게 표정으로 화답하자, 아크메이지가 혼자 고개를 끄덕끄덕거렸다. 나는 지금 삼족을 멸한다는 말에 정신을 못 차리겠는데, 본인만 ‘에잉 쯧’ 하고 다시 태연해진 거다.
나만, 나만 또다시 이 야만적인 시대에 버려졌다.
“아, 그렇지. 자네에게 굳이 경고할 필요 없는 말이긴 하네만, 조심하게. 알아보니 비가볼 족장은 가족들에게 폭력을 휘두른다더군. 동생은 학대로 인해 다른 부족으로 도망쳤다고 하고. 겉으론 온화해 보여도 속은…….”
그러나 끔찍한 소식은 하나로 끝나지 않았다.
가족들에게 폭력을 휘두르거나 동생이 도망칠 정도로 학대했다는 건 가정 폭력범이란 소리고, 난 지금 그런 새낄 도왔다는 뜻이지 않은가.
살인은 차라리 나아! 여긴 죽이지 않으면 죽는 세계관이니까! 근데 가정 폭력? 가정 포옥력??
그것도 신고할 경찰도 공권력도 없는 세계에서?
정신 나갈 것 같다. 진짜 정신 나갈 것 같아.
통통.
그때 내 얼빠진 정신 속에서 노크 소리가 정중히 울려 퍼졌다. 멸망한 정신에 맞지 않게 가볍고 경쾌한 소리였다.
“처형 구경을 거절했다기에 다시 물으러 왔네. 보러 갈 생각 없나? 정말로?”
이어 허락을 구하는 말도 없이 문이 벌컥 열렸다. 상대의 직급을 생각하면 항의하긴 애매한 일이나, 분명 무례한 행위였다.
“봐도 나쁠 것은 없을 텐데.”
뒤에서 아이 울음소리가 소름 끼치도록 높게 퍼져 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