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0화 떠날 수 있다면 (2)
자고 일어나니까 다음 날 아침인 거 실화냐.
피로도가 0이 된 건 좋은데, 나 분명 1시간만 설정하고 자지 않았어? 혹시 알람 끄고 자는 느낌으로 계속 자 버렸나.
나는 언제 덮었는지 모를 털가죽 이불─누가 덮어 준 걸지도 모르지만─을 밀어내며 건물을 나왔다.
천장의 구멍을 통해 하루가 지나 버렸음을 알긴 했지만, 전체 풍경으로 보니 또 달랐다.
하루 만에 한여름의 그것처럼 변해 버린 햇빛이 눈을 찌르자, 꼭 구마당하는 기분이 되었다.
“아, 늦지 않게 일어났군.”
으으, 햇빛…….
태양 아래의 뱀파이어… 아니, 여긴 뱀파이어가 햇빛에 영향 안 받지. 뙤약볕 아래 얼음이 된 것처럼 살살 녹고 있을까.
아크메이지가 저편에서 다가왔다.
“배는 안 고픈가? 슬슬 식사 때가 되어 챙겨 오긴 했는데.”
어제 밥 먹고 잤는데 배가 고플 리가… 있지! 나는 정상적으로 하락한 포만감 수치를 두고 아크메이지가 건네는 것을 받아들였다.
향신료 잔뜩 들어간 채소볶음이었다. 어제 먹어 보니 이게 제일 맛있었는데, 어떻게 딱 이걸 챙겨 왔는지 모르겠다.
“안에서 먹겠나, 밖에서 먹겠나?”
안도 나쁘진 않지만, 날이 좋은 하루다. 대충 보니 밖에서 먹는 것도 흔한 일 같은데 나도 밖에서 먹지, 뭐.
나는 천막 근처에 마련된 모닥불과 나무 기둥을 잘라 만든 의자─욕실의자 높이였다─에 앉았다.
앞서 식사하던 사냥꾼들이 눈을 데굴데굴 굴리더니 말소리를 확 죽였다. 눈치 주려고 한 건 아닌데, 급 미안해졌다.
“부족하면 말하게. 얼마든지 내준다고 했으니.”
“…필요 없다.”
그러나 이미 앉은 상황이다.
나는 뻔뻔함을 가장하며 볶음 요리를 먹었다. 제사장이 바깥 사람들은 수저를 쓰지 않느냐며 어제 전용 수저를 깎아 왔기에 섭취 방식을 두고 불편함은 없었다.
밥 맛있다.
“…자네에게 음, 할 말이 있네.”
수북이 쌓인 채소볶음을 한 층 한 층 공략하자니 슬슬 바닥이 보인다. 그릇을 입에 대고 마지막 찌꺼기까지 입에 밀어 넣자, 약간의 양념만 남았다.
“일단 비가볼의 족장은 오늘 낮에 떠나길 희망했네.”
달그락.
나는 그릇 위에 수저를 내려놓았다. 아크메이지가 기다렸다는 듯 찻잔을 내밀었다. 어제 먹었던 그 차였다. 여전히 맛이 좋다.
“그렇지만 자네가 바란다면… 나중에 출발해도 되네. 족장은 자네의 동행을 절실히 바라고 있고, 자네의 의견을 존중하고자 하니.”
어라. 뭔가 먹을 걸로 회유당하는 기분이 드는데. 이거 맞는 건가? 그보다 아크메이지는 어떻게 안 거야.
“물론 이번 일에 참여하지 않아도 괜찮네. 마탑을 통해 인력을 요청했고, 자네가 거부한다면 그들을 대신 보내겠단 말도 미리 해 두었으니까.”
그러나 차에는 죄가 없다. 나는 찻물을 호록호록 마셨다. 온기가 온몸에 퍼지자 기분이 나른해졌다.
“어찌하겠나?”
아크메이지도 어제 살벌하게 끝난 마무리가 영 찝찝했나 보지.
나는 내 눈치를 엄청나게 보는 제안을 두고 눈꺼풀을 반쯤 내리깔았다.
“족장에게 전해라.”
산군의 존재를 인정할지, 혹은 죽여야 할 대상으로 여길지는 글쎄. 나야 벌써 납득했지만, 컨셉에겐 하루 만에 결론지을 수 있는 문제가 아니라 생각한다.
아무렴 오랫동안 쌓여 온 증오와 경멸, 혐오 일부를 뒤집고 가치관을 바꿔야 되는 문제가 아닌가.
“협조는 하겠으나, 명령에 따를 이유는 내게 없음을.”
그러나 하나 확실한 건 있다.
마기와 관련된 것에 한해 악마기사가 물러나는 일은 없을 거다.
죽이든 살리든, 반드시 제 눈으로 보고 판단을 내려야 직성이 풀릴 거란 이야기다.
“…알겠네.”
조건부 승낙에 아크메이지가 고개를 끄덕였다. 이 정돈 예상했다는 듯 표정이 심각해지거나 하진 않았다.
“하면 출발은 언제가 좋겠나?”
“한낱 알력 다툼에 낭비할 시간 없다.”
“알겠네. 그럼 가능한 빨리 출발하는 걸로 하지. 족장이 좋아하겠어.”
언제나처럼 잘 작동하는 번역기는 덤이다.
비가볼의 영역으로 넘어갈 때가 되었다.
【어제의 불미스러운 일은 미래의 돈독한 우정이 되어 돌아올 것임을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다음에 뵐 때까지 부디 건강하시길.】
【그럼요. 아타르트 족장님께서도 부디 카티나 때까지 강녕하시기를.】
떠난다는 말을 전하기가 무섭게 비가볼의 족장, 아타르트는 휘하 전사들─배신하지 않은 자들─을 재촉해 일행을 꾸렸다.
본거지가 어떻게 됐을지 모르니만큼 한시라도 빨리 출발하고 싶었던 모양이다.
“…다음에, 다시 한번, 저희 부족에 방… 방문해 주시기를.”
“부디, 전사님을 다시 모실 기회가 찾아오길 바랍니다.”
그러나 반대급부로 이른 출발을 아쉬워하는 자들도 있었다. 제대로 인사 한번 나누지 못한 세르항의 족장과 제사장이었다.
족장은 문장을 통째로 외워 버린 듯 어설프게 웃었고, 제사장은 노련한 솜씨로 사근거렸다. 둘 다 노골적으로 재방문을 권유하긴 매한가지였다.
심지어 그들은 거절했던 선물을 또 한 번 내밀었다. 하필 내가 마음에 들어 했던 그 찻잎이었다.
마음 같아선 받아 가고 싶다.
【제가 대신 들고 가지요.】
【아, 알겠습니다.】
【대신… 뱀을 부탁드립니다.】
【걱정 마십시오. 반드시 휴델렌 마탑 분에게 인계해 드리겠습니다.】
【허허, 감사합니다.】
그렇지만 악마기사는 그런 사람이 아니니까. 나는 눈물을 머금고 선물 건네는 손을 외면했다.
한데 그걸 또 아크메이지가 인터셉트하더라. 힝.
“잘 부탁하네.”
쪼끔 서럽고 얄밉지만 그래도 티는 내지 않겠다.
나는 아타르트의 인사를 두고 눈을 감았다. 각도와 방향 때문에 햇살이 계속 눈을 찔러서 도저히 뜨고 있기가 힘들었다.
【저놈이…….】
【그만. 외지인에게 우리의 법도를 강요하지 마라. 그에겐 자격이 있다.】
햇빛 으아아아.
* * *
“어쩐지, 나리가 너무 안 보인다 싶더라니 그새 의뢰를…….”
“어째서 말해 주지 않으신 겁니까? 말해 주셨다면 저도 도움을…….”
“저도 용사님께 도움을 청할까 하긴 했는데… 악마랑 관련된 것도 아니고 단순 재료 채집이었는걸요. 하물며 용사님이 새로운 경지로 나아가시는 중이라는데 그걸 방해하긴 좀.”
“하면 아크메이지님은 어째서…….”
“마법재료란 게 채취가 까다로워서요. 마법사가 아닌 이들한테 맡기면 하품이 될 확률이 높은지라 부탁 좀 했죠. 더구나 이번 채집 재료 중 일부는 산짐승이라 추적마법 같은 게 필요한데, 추적마법이란 게 보통 쉬운 일이 아니거든요? 대기 중 흩어져 있는 자취를 포착해 색을 입힌 마력을 붙이고, 연결된 자취를 따라 마력이 퍼지도록 유도할 줄 알아야 하는데 이게 대현자나 메이지쯤 되어야 가능한 거라.”
“그렇군요…….”
“하하! 베르세르크는 뭔 소린지 모르겠다!”
“그런 거라면 저도 안 부를 만한가…….”
맹렬한 흰바람의 설명에 세 사람은 각자만의 반응을 보였다.
그들 뒤에는 학구파만 가득한 휴델렌 지부 소속 중 그나마 신체가 멀쩡한─일단 3시간 이상 걸을 수 있단 의미로─마법사들이 있다. 만일을 대비해 데려온 고위 사제들은 덤이다.
“그런데 이렇게 함부로… 숲 주민들의 영역에 들어가도 되는 겁니까? 그들은 허락 없이 들어온 자들을 굉장히 싫어한다 들었습니다만.”
“여기까진 변경이라서 괜찮아요. 약초꾼들도 여기까진 자주 오가는 걸요. 거기에 세르항 부족이 정식으로 허락했는데 뭐가 문제겠어요.”
그런가. 데스브링거는 대현자의 말을 들으며 뒷머리를 긁적였다.
마법사가 직접 채취해야 한다는 건 알지만, 그래도 추적 과정에서 활약할 자신은 있다. 한데 그런 그를 빼놓고 가다니.
약간의 아쉬움과 미묘한 박탈감이 은은하게 마음을 채웠다. 제가 쓸모없는 듯 느껴지며 드는 박탈감이었다.
“그보다 슬슬 마중 나온 사람이 있어야 하는데…….”
그래도 파 에녹에서 나름 활약하며 가치를 증명했다고 여겼는데. 역시 저들 눈엔 부족한 걸까.
“저기, 누가 있는 듯한데.”
그사이 그보다 먼저 베르세르크가 외부인의 존재를 감지했다. 그녀가 가리킨 곳엔 인적 없는 숲이 있다.
수풀 아래, 나무 위, 나무 뒤. 사람이 숨어 있을 만한 지점을 치밀할 정도로 샅샅이 살펴도 마찬가지였다. 사람이 보이지 않는다.
“아무도 없는 것 같은데요?”
“아니, 있어. 당신, 마법사도 아니면서 감이 탁월하네. 은폐에 치중된 결계를 어떻게 눈치챘담.”
그러나 있었다. 마법이란, 그가 넘볼 수 없는 기술로 숨은 사람이.
“이쪽이 우리와 접선하는 쪽이려나.”
대현자가 앞으로 나아가 팔짝팔짝 뛰니, 인적 없던 숲 사이에도 변화가 생겼다. 허공이 일그러지고 이지러지더니 사람의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휴델렌 마탑에서 오신 분들이십니까?】
【네에. 맞아요. 아크메이지가 불러서 왔지요.】
【실례지만, 부디 증거를.】
데스브링거는 얼굴을 와락 구겼다.
마법은… 정말 사기다. 마력을 다루며 신체를 강화하는 전사들은 응용법이 정해져 있고 그나마 개인에 한하기라도 하지, 마법은 정말로…….
【걔가 뭘로 증명하면 된다고 했을지 모르겠네. 이거면 되나요? 아니면 이거? 아, 이거려나?】
【…여러 개를 보여 주신 시점에서 증명되셨습니다. 더 꺼내실 필요 없으십니다.】
【에이. 김새게.】
데스브링거들은 흰바람이 대표로 대화 나누는 걸 보다 말고 시선을 돌렸다.
밤에 가까워진 숲은 정말로 어둡지만, 마법 아이템이 하나 있으면 내용물을 보는 건 어렵지 않다.
참 자괴감이 들 정도로 편리했다. 역시 마법은 사기다.
“하암. 나는 슬슬 지루하다. 강한 자는 없나?”
“강한 자가 없진 않겠지만, 함부로 무기를 맞대시면 안 됩니다. 대삼림의 주민들은 이방인에게 엄격합니다.”
“대삼림의 전사들을 기대했건만, 그러면 재미가 없다…….”
“…무기를 먼저 꺼내는 것은 안 돼도, 허락을 구하시고 대련을 하시는 건 괜찮을 거라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의 심정이 어찌 되었든, 상황은 시시각각 흘러간다.
그들은 예정대로 뱀을 인도받은 후, 일부 인원에게 뱀을 떠맡겼다. 저들은 도시의 마탑으로 돌아가 연구를 시작할 것이다.
그리고 데스브링거 자신과 흰바람을 비롯한 샌님, 베르세르크, 몇 마법사와 사제는 안내를 따라 세르항의 부락으로 이동했다.
여기서 밤을 보낸 후 악마기사와 아크메이지가 향했다는 비가볼 부족으로 향할 것이다.
* * *
【배신자 놈들… 나를 죽이려고 작정했군.】
돌아가는 길은 그렇게 순탄치 않았다. 자타브의 전사들이 귀환 경로에 자리 잡은 까닭이다.
【족장님이 직접 사절로 세르항에 다녀온다는 사실을 팔아넘긴 것 같습니다. 그렇지 않고서야 딱 저 길목에 있을 수는…….】
【마땅히, 그러하겠지.】
나는 비가볼 사냥꾼들의 손짓을 따라 나무와 수풀에 붙었다. 정글 수림처럼 나무 사이에도 작은 나무와 풀들이 빽빽하게 껴 있어, 몸을 숨기기엔 어려움이 없었다.
단지 나아갈 방도가 없을 뿐이지.
“…세르항에서 있었던 자타브의 습격 말일세. 아무래도 정보가 새어 나간 건 이쪽인가 봄세.”
그때 아크메이지가 살며시 밀어를 속삭였다.
아니 뭐. 내가 신경 쓸 부분은 아니긴 한데, 알고 나니 안타까운 마음은 좀 든다. 세르항은 결국 덤터기 쓴 거였으니까.
아무렴, 회담 장소가 우연히 습격받았을 때 대처 못 하면 회담 장소 주인이 잘못한 거지만, 방문자의 원인으로 습격이 든 거면 그건 방문자 잘못이지 않나.
【돌아서 이동이 가능한가?】
【어렵습니다. 요소요소에 사람을 배치해 놔서…….】
【정면 돌파는.】
【수가 너무 많습니다. 가능은 하겠지만, 피해가…….】
그보다 저쪽이 계속 움직이는데 우리 여기 있어도 되는 거야?
나는 산개한 채 이쪽으로 서서히 걸어오는 이들을 살폈다. 누가 우리 노리는 거 아니라고 할까 봐, 하나같이 무기를 들고 있다.
“시작부터 난항이군. 타 부족과 어지간하면 마찰 빚고 싶진 않건만.”
아크메이지 역시 곤란한 눈치다.
“가능하면 우리의 존재를 들키지 않고 지나가면 좋겠는…….”
그러다 잠깐. 아크메이지의 시선이 나를 향했다.
“자네.”
부려 먹힐 것 같단 예감이 퍼뜩 들었다.
“…어제 자타브를 내쫓으며 썼던 그것. 다시 한번 가능한가?”
어김없이 맞아떨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