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주인공이 컨셉충이면 곤란한가요-119화 (119/389)

◈119화 떠날 수 있다면 (1)

“서해에 해룡이 있다면, 치리아 대삼림에는 육귀堉龜가 있네.”

내게 비가볼의 영역을 가 봐야 할 것 같다고 뇌까린 후, 아크메이지는 비가볼의 족장과 몇 마디 대화를 더 나눴다.

그러고 나서 하는 게 지금 설명이었다.

“태곳적 짐승 중 하나일세. 문헌에 따르면, 거북이를 뱀이 묶은 것처럼 생겼다더군. 물론 지금은 어디론가 사라져 볼 수가 없네.”

육귀라길래 육지귀신의 준말인가 했더니 땅거북이란 뜻이었나 보다. 거기에 거북이를 뱀이 묶은 모양새면 아무래도 현무 같은데.

“그러나 육귀가 없어도 육귀의 피를 이은 존재는 있네. 바로 산군이지. 대삼림 주민들이 숭상하고 존경하는 존재기도 하네.”

나는 그 즈음에서 묘한 감상을 받았다. 해룡─파란색이니까 청룡이라 불러도 될 거다─에 현무면 태곳적 짐승은 사방신이 모티브일 터.

문제는 여기가 남쪽이란 점이다.

아니이. 현무라면 당연히 북쪽에 있어야 하는 거 아니야? 설정 글러먹었네. 나중에 끼워 맞춘 것도 아니고 왜 남쪽에 현무를 배치해.

그렇게 치면 청룡, 그러니까 해룡도 방위 틀리긴 했지만.

“산군은 50년을 주기로 알을 낳고 죽으며, 알에서 나온 다음 대 산군은 제 부모의 살점을 뜯어 먹고 힘을 계승하는 걸로 알려져 있네.”

별개로 이거 어디서 들어 본 번식법인데. 태곳적 짐승들은 다 그렇게 대를 이어 가나?

대 끊기기 정말 좋은 생식 방식이다.

“그러다 보니 산군의 힘은 개체별로 유달리 강해지거나, 약해지는 경우가 없는데… 이번 산군은 특이하게도 ‘마력을 먹는 능력’이 생겼다는군.”

나는 그런 식으로 온갖 딴죽을 걸다가, 마지막 말을 듣고 사고를 멈췄다.

왜 갑자기 의견을 바꿨나 했더니, 이거였네.

“심지어 이번 대 산군이 태어날 때의 모습도… 이번에 우리가 맡은 의뢰와 비슷한 형식이었네.”

그사이 아크메이지는 ‘마기’나 ‘악마’란 단어를 뺀 채로 눈치껏 돌려 돌려 전달했다.

대화를 위해 다시 건물 안으로 이동한 상황이지만─족장들은 반역 뒤처리를 위해 일하는 중이다─, 말이 새어 나갈 위험이 있거니와 주민들이 산군을 숭배하는 것까지 고려한 처사 같다.

“그 말이 진실인지는 검증해 봐야겠으나, 이게 맞다면 결코 물러설 수 없네.

그러나 말 좀 돌렸다고 못 알아들을 내가 아니다.

“물론 사절단에 반역자가 껴 있던 만큼, 비가볼의 영역에도 이미 반란이 인 건 아닌가 싶긴 하네만… 일단 정당성은 이쪽에 있네. 반역 제압에 한 손 거들어야 한다는 걸 고려해도, 한 부족의 족장을 가교 삼아 정당한 명분으로 산군을 만날 수 있다는 건 충분한 이득이야.”

이 기회, 아크메이지의 말대로 놓쳐서 좋을 거 없다.

마탑에 다시 연락을 넣으랴, 반란 제압 도우랴, 산군 만나서 이것저것 조사하랴. 갈수록 휴델렌으로 돌아가는 게 요원해진대도 마찬가지다.

일행의 의심이야 마탑이 알아서 할 테고, 우린 우리만 할 수 있는 일을 하는 게 분명 효율적이다. 물론 효율과 별개로 의뢰 스케일이 또 커져 버리네 싶은 감상은 있다만… 그래도 이쪽은 정당한 보수를 주니까.

“반란의 원인은.”

그러나 아무리 좋은 기회라도 이건 확실히 해야 한다.

반란자들이 나한테 선빵 친 건 맞지만, 그게 그놈 혼자만의 실수인지 단체 전체의 기조인지 어떻게 알아.

내 인생 경험을 토대로 보면, 이럴 땐 ‘저놈이 쳤어’라고 길길이 날뛰기보다, 날 대한 이만 미친놈인지 그 단체 전체가 미친놈인지 빠르게 파악하는 것이 나았다.

그래야 귀한 기회를 날리지 않거나, 나중에 절대 피해 가야 할 곳을 미리 학습할 수 있거든.

“음? 아아. 내가 정당성만 있다고 말하고 원인은 안 알려 줬나.”

옙. 그러니까 어서 말해 주세요.

“별거 아닐세. 쇄국을 풀고 바깥과 교류해야 한다는 의견에 반대한 기존 세력들이, 저 사상이 더 퍼지기 전에 젊은 족장을 미리 죽이려 한 것뿐일세.”

아, 이념 싸움.

“그런 점에서 산군과의 대면을 빼더라도 한 손 거들 만한 일이긴 하네. 대삼림은 너무 오랫동안 폐쇄적인 태도를 고수해 왔어. 그들을 존중하기에 대삼림의 쇄국을 배려해 주었지만… 미래는 아무도 모르는 일 아닌가? 그들이 전통을 지키는 마음은 이해하네만, 최소한의 기술과 지식 교류는 되어서 나쁠 게 없네. 전통도 힘이 있어야 지킬 수 있는 법이야.”

확실히, 알아야 대비할 수 있다는 건 맞지. 쇄국만 유지하다가 외국이 저만치 발전한 걸 모르고 된통 당한 나라도 있는 판에.

그러나 변화가 시작되면 전통의 맥이 끊기기 쉬워지는 것도 사실이니까…….

그런데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사람을 주장과 근거 대신 칼로 설득하려 드는 건 좀. 인권이 덜 발달된 세상이니 어쩔 수 없다 싶긴 하지만…….

으음. 음.

아, 모르겠다. 내가 젊어서 그런가. 개방이 더 낫지 않나 싶긴 하지만, 미래에도 그럴지는 모르잖아.

그런 점에서 이런 이념 문제는 제3자, 즉 외부인이 끼어들면 안 되는 거 아닌가 싶기도 하고?

그렇지만 이렇게 방관하다가 피해가 나는 것도 분명 문제라서…….

거기에 나, 이미 엮여 버린 상황이고. 모든 역사에서 이념 간 갈등은 필수 불가결 한 흐름이고.

“그건 내 알 바 아니다.”

별개로 하필 내가 거기에 끼인 거랑 선택지가 없는 거 진짜 열받네.

“하긴, 자네의 일은 아니니까.”

“산군이 악마일 땐 어떻게 할 거지.”

결국 나는 이념 다툼에 끼어드는 불편함을 외면한 채, 다른 부분으로 시선을 돌렸다.

이 또한 중요한 부분이었다.

아무렴 마력을 먹는 것도 모자라, 마탑에서 부화한 악마와 거의 동일한 탄생 과정을 거쳤다? 그거, 이번 산군이 악마일 수 있다는 거잖아.

한 지방의 신앙이라고 해도 타락한 이상 컨셉은 절대 용인하지 않을 거다. 나는 애써 아크메이지가 말 돌린 노력을 무위로 만들며, 나직이 그녀를 노려보았다.

“…상황에 따라 대처가 달라지지 않겠나.”

컨셉이 만족할 만한 반응은 아니었다. ‘죽여야지’랑 ‘상황 봐 가며 결정하자’는 분명 다른 뜻이지 않나.

“장난하나?”

“아니, 진심일세.”

“지금 악마를 용인하겠단─!”

“태어나기를 그리했을 뿐인데, 그를 빌미로 죽어야 한다 단정 짓는 건 너무 원통하지 않은가.”

오, 도덕적인 말.

“…하, 갑자기 성인군자라도 되고 싶어졌나? 악마에게 연민을 품고?”

그러나 이건 세계관에 어긋난 발언이다.

저런 말을 할 거였다면, 진즉에 했어야지. 지금까지 악마는 죽어도 싸다 마인드였으면서 왜 이제 와서…….

“내가 분명─.”

“마기를 품고 태어났으니 죽여야 마땅하다면. 나는 자네도 죽여야 하나?”

“……!”

반사적으로 말문이 막혔다. 악마기사의 설정을 완벽히 저격하는 말인데 어떻게 함부로 입을 놀리겠나.

“악마는 죽여야 하지. 그래, 응당 그러는 것이 맞네. 그렇지만 마기를 품은 모든 것이 악마라면, 산군뿐 아니라 자네도 악마가 되네.”

심지어 아크메이지는 그 말을 하며 내 오른팔에 시선을 주기까지 했다. 나는 반사적으로 오른 어깨를 뒤로 물렸다.

“그렇지만 우리나 지금까지 겪어 온 모두는 자네를 악마로 여기지 않네. 자네가 마기에 휘둘리지 않고 올바른 길을 걷고 있기 때문이지.”

확실히… 그건 맞는 말이지. 그렇다면 상황을 보자는 말은…….

“내가 하고픈 말이 바로 그것이네. 산군이 이성을 잃고 주위에 피해를 주고 있다면, 그건 해룡과 마찬가지로 해결해야 할 문제가 될 걸세. 하나 내 듣기로, 이번 산군은 주변에 피해를 끼치긴커녕 전대 산군들처럼 이성으로 땅을 다스린다더군.”

그렇네. 공생의 가능성을 확인하고 결정하자는 거였네.

“하니 공존이 가능한지 알아보는 것 정돈 괜찮지 않겠나.”

이건 컨셉도 컨셉이지만, 본체 또한 염두에 두지 못한 지점이다. 지금까지 마기를 품고 등장한 애들이 죄 적이었다 보니 무의식적으로 편견을 가졌다고 할까.

당연히 이번 산군도 보스몹이겠거니 했지.

근데… 으음. 이렇게 되면 아닐 가능성이 분명 있다. 아니, 오히려 아군일 확률이 더 높나?

어쨌거나 인정할 수밖에 없는 의견이다.

“혹시 아나? 어쩌면 산군이 품은… 그것을 제거할 방법이 있을지? 그리고 그게 있다면 자네에게 도움이 될지도 모르지.”

단지, 컨셉이 문제다.

여기서 ‘그래도 죽여야 한다’라고 말한다면 나부터 먼저 죽어야 하고, ‘납득했다’라고 하면 캐릭터 붕괴니까.

“…인정하기 힘들 건 아네. 그러나 공존의 가능성을 먼저 알려 준 건 바로 자네임을… 부디 알아주게나. 산군을 너무 적대시하지 말게.”

아, 진짜 큰일 났다. 이거 어쩌냐.

“네가, 네가 감히…….”

나는 내가 취해야 할 반응을 쉽사리 고르지 못한 채, 분노에 젖은 양 씩씩거렸다. 진퇴양난이었다.

똑똑.

【저, 족장님께서 저녁 식사에 초대하셨는데…….】

다행히 타이밍의 신이 나를 도왔다. 내가 대답 없이 뭉개고 갈 수 있도록 도움이 내려온 것이다.

무슨 뜻인진 모르겠지만.

【나가겠네.】

아크메이지가 들려온 목소리에 가볍게 답하고, 나를 돌아보았다.

“벌써 시간이 이리 흘렀군. 저녁 먹을 때가 되었나 봄세.”

그녀의 하늘색 눈동자엔 이를 지르문 내가 비치고 있다.

“…족장들이 자리에 초대했네만, 자네가 원한다면 이곳에서 먹어도 괜찮네. 내가 대신 가면 되니.”

아, 그. 혼자 있긴 좀 싫은데.

나는 명백히 ‘생각할 시간을 주겠다’란 뜻의 말을 두고 숨을 쌔액쌔액 내쉬었다. 응하면 캐붕이기에 결정권은 없었다.

“하면, 그렇게 하겠네.”

에라 모르겠다. 그냥 밥 빨리 먹고 자야지.

아크메이지가 홀로 건물을 나갔다.

* * *

흰바람은 아크메이지로부터 온 연락을 두고 한숨을 내쉬었다.

도시로 돌아와 마력 먹는 뱀을 전달할 수 없는 상황이 되었으니, 너희가 와서 받아 가란 말엔 불만이 없다.

추가 요소가 발견되어, 그걸 조사하느라 도시로 못 돌아오는 건데 어찌 불만을 품겠나. 그에 대한 추가금을 요구받은 것 역시 마땅히 지급해 줘야 하는 부분이고.

한데 마력을 먹는 걸 넘어, 부화한 악마와 탄생 과정이 일치하는 존재를 발견했다라.

“대삼림에 대한 정보를 가져와. 산군에 대한 정보는 특히 더.”

그것도 하필이면 산군이다. 하필 산군.

“산군이요?”

“그래.”

아크메이지가 말한 것처럼 긍정적인 방향─악마기사가 그러하듯 이성을 토대로 사리 분별을 할 줄 알고, 옳은 일을 행하는─이면 더할 나위 없다. 산군은 인간과 말이 통하고, 말이 통하는 대상이면 조사하기가 한결 수월해지니까.

그렇지만 아니라면? 아니라면 어떻게 될까.

“겨우 뚫어 둔 거래처 다 날아가게 생겼네.”

대삼림에서만 구할 수 있는 재료들이 얼마나 많은데, 참 불행은 한꺼번에 닥친다.

재료도 재료지만, 신전과의 충돌 가능성이 있는 마당에 대삼림의 주민들과 불화를 일으켜서 좋을 일 또한 없는데.

“용사님에게 둘러대는 것도 이제 한계고.”

신성력 분석과 기술 개발에 도움을 준다며 시간을 끄는 것도 하루 이틀이다.

보이지 않는 두 얼굴에 용사 일행도 슬슬 위화감을 느끼고 있다. 못해도 내일 아침이면 그들의 행방을 추궁하러 올 터.

“이제 어쩔래?”

그녀는 잠시 꺼 뒀던 연락책을 켜며 발언했다.

─…어쩌긴 뭘 어째. 말해야지.

─안 그래도 신전이 사사건건 간섭하려 드는 와중에 빌미를 먼저 내주자고? 난 반대야!

─영원한 비밀은 없죠. 당장만 해도 이 현상을 이용하는 자들이 있는데, 다른 곳이라고 없을까요? 이 문제는 숨긴다고 되는 게 아니에요.

─나도 부수는 호미에게 동의해. 차라리 지금 말하고 결백함을 증명하는 게 낫지.

역시 그런가. 맹렬한 흰바람은 눈을 가늘게 접어 내렸다.

마탑을 둘러싼 풀도 거진 정리했겠다, 둥지와 둥지에서 부화한 악마도 처리했겠다, 그들 휴델렌 마탑 지부가 저지른 실수─세월이 빚어낸 결과물을 그들의 실수라 퉁쳐도 될까마는─는 묻을 여지가 있다.

여기에 대삼림의 산군 이야기까지 꺼내면 신전은 휴델렌 지부가 무엇을 덮었는지도 모를 거다. 아크메이지나 악마기사야 귀한 재료 채집 때문에 보냈다고 대충 둘러대면 그만이니까.

하니 숨기는 것 자체는 이제 문제가 없는데…….

─저기이… 신전에 말하는 건 상관없지만… 마탑 내부 자료로는… 남기면 안 될 것 같은데……?

─왜? 공표해야지 대비할 수 있잖아.

─아, 나는 인정. 넌 우리 애들을 믿냐?

─아.

“다들 똑같은 걱정 하네에.”

저게 문제였다.

이 사실이 알려지는 순간, 마탑 내부의 누군가는 실험으로 손을 댈 거다. 대비한다는 명목이 아니라 그 자신의 흥미를, 또는 욕망을 해결하기 위해.

─애초에 그걸 고려해서 전체 소집이 아니라 우리 일부만 부른 거잖아.

─그런 거였어?

─…속죄하는 요정, 당신은 사람의 행동을 두고 좀 더 깊게 사유할 필요가 있어요. 나이를 그렇게 먹고도 아직 유아 수준의 인과 유추밖에 못 하나요?

─죽을래? 나와, 이 자식아.

─네가 오세요.

─저 #@$#@#-

“둘이 싸우는 건 개인 회선 가서 하고.”

그뿐인가? 마탑 내부에 악마의 간자가 있을 확률이 있다. 아니, 100% 있다.

악마들이 이 사실을 알고 있는진 모르겠으나, 모른다면 공인하는 순간 전해질 터. 악마들이 이걸 이용해 먹는다 생각하면 벌써부터 끔찍하다.

─젠장. 마력이 오래 밀집되어 있으면 악마가 탄생한다고? 마계화랑 다를 게 뭐야. 안 그래도 바닷속은 탐사하기 힘든데.

─마계화라. 그거 괜찮은 발상인데. 마계화랑 같은 원리로 악마를 발생시키는 거 아닐까?

─그게 정말이라면 마계화의 원리를 밝힐 수 있겠는데.

─오?

더구나, 이들에게 미처 알리지 않은 사실이 하나 있으니.

“미리 알려 둘 게 있어. 확실하지 않아서 잠시 미뤄 둔 이야긴데, 밀집된 마력에서 탄생한 것들은 마력을 먹을 수 있는 능력이 있는 것 같아.”

─미친?

마력 먹는 뱀이 어떻게 태어났는지 모르고, 산군이 태어난 곳이 어떤 모습인지 모르는 만큼 확신할 순 없다.

그러나 아마 높은 확률로… 마력에서 태어난 것들은 마력을 먹을 수 있을 것이다.

“더불어 마기를 마력으로 바꿔 숨는 능력도.”

─빌어먹을, 야. 처음부터 선택지가 없잖아!

하하. 우리 망했어.

흰바람은 깔깔 웃으며 대현자들의 비명을 들었다. 아크메이지에게 소식을 전해 들은 후, 자신이 한번 거쳐 온 단계였기에 지금은 그저 웃기기만 했다.

“저, 대현자님. 인퀴지터께서 대화를 청하셨습니다. 아크메이지님과 악마기사의 행방을 아느냐 물으시는데… 어찌할까요?”

이 방문 소식에마저 웃을 순 없었지만.

“…올 게 왔네.”

─뭐, 인마? 우릴 놀린 대가가 벌써 왔다고?

“나 잠깐 자리 좀 비울게. 대책 좀 대신 마련해 줘.”

─저, 저 양아치-.

뚝.

맹렬한 흰바람은 연락책을 끊어 버린 후 몸을 일으켰다.

신전에게 알리든 알리지 않든 간에, 용사에게만은 진실을 고백할 때다.

아크메이지와 저들에게 알리고 데려와 달라 요청까지 한 이상, 어차피 더는 숨길 수도 없기도 하고 말이다.

* * *

포만감을 100% 채운 직후, 완전히 비거나 조금 남은 그릇들을 입구 옆에 두었다. 손발로 다 먹은 후 여기다 두면 된다고 뜻을 전했으니 이러면 될 거다. 아마도.

이후엔 글쎄.

잘까 하며 벽에 기대 앉았다. 먹고 바로 자는 건 안 좋다지만 알 바 아니었다. 그렇게 치면 앉아서 자는 것도 건강에 좋지 않다.

「 ▲ 1시간 00분 자기 ▼ 」

그렇지만 지금은 잠이 절실하니까. 물론 저번처럼 수마가 몰려와서 눈 감는다고 잠이 올 정도로 피곤한 상태는 아니지만.

그래도 피곤함과 별개로 자고 싶은 순간들이 삶엔 있다. 그런 점에서 바로 기절시켜 주는 시스템이 고장 나지 않은 건 정말 행운이라며, 나는 스스로를 다독였다.

그리고 자고 싶은 시간을 결정해 버튼을 누르는 순간.

칠흑이 물감처럼 흘러내리며 시야를 덮었다.

‘왜 외면해?’

세상에 전부 어둠에 잠겼다.

‘시스템이 먹통이 된 시기와 봉인구 착용 시기가 완전히 일치한다는 사실을, 이미 알고 있으면서.’

어둠에, 잠겼다.

떠오른 모든 잡념을 덮어 버리는 어둠에.

‘슬슬 한계야.’

아, 그래도 30대를 함께한 침대가 그리운 마음은 가릴 수 없어. 그렇지?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