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8화 머나먼 땅으로 (12)
에쿠아는 친선 대련을 보며 비가볼의 족장, 아타르트와 대화를 나누었다.
그가 어리다고 얕잡아 보거나 그들 세르항의 세력이 약하다고 깔보지 않는 아타르트는 퍽 대화하기 좋은 상대였다.
【하하, 이번에도 훌륭한 경기였습니다.】
물론 약간… 기묘한 구석이 있긴 했다. 어조나 말뜻은 정중하기 짝이 없는데, 묘하게 싸한 기분이 치솟곤 한 것이다.
아타르트의 새까만 눈을 정면으로 마주할 때, 특히 더.
【이번에도 저희가 졌군요. 이것 참, 아타르트 족장님께 전사들 훈련법을 한 수 배워야 하는 거 아닌가 싶습니다.】
에쿠아는 그 껄끄러움의 원인이 자타브의 습격이 남긴 잔재인지, 아니면 다른 것인지 찾아 헤매며 전사들을 향해 손뼉을 쳤다.
대련을 마친 전사들이 서로에게 예의를 차린 후 결투장을 내려갔다.
【다음은 누구지? 아아, 사파르인가. 벌써 마지막이군요. 아쉽습니다.】
애초에 아타르트가 데려온 전사가 많지 않아, 친선 대련은 벌써 막바지를 향해 달려가는 중이다.
【저희 쪽은…….】
그러나 개인적으론 기껍기 그지없었다. 자타브의 추가 습격이 올지 모르는 이상, 전력은 아껴 두는 게 좋은 까닭이다.
【……?】
그런데 대화 도중, 무대에 오르던 비가볼 측 전사가 이상한 행동을 보였다. 동그랗게 뭉친 무언가를 던진 것이다.
【족장님!】
쾅!
이후 광경은 제대로 보지 못했다. 옆에 서 있던 전사가 그를 끌어안은 까닭이다.
그러나 갈음하듯 들리는 것은 많았다. 귀를 얼얼하게 만들 폭음과 칼부림의 소리, 누군가의 비명, 외침, 파육음.
【무, 무슨 일이…….】
덜 자란 육신만큼이나 무예에는 자신이 없다. 하물며 전대 족장은 자타브에서 보낸 걸로 추정되는 암살자에게 당하지 않았던가?
전사들이 그를 꽁꽁 감싸는 심정은 이해할 수 있다. 이해는 할 수 있다.
【놔라, 상황을 파악할 수 있게!】
그러나 그는 족장이었다.
에쿠아는 몸부림은 치지 않되, 사태를 이해하기 위해 고개를 빼쭉 내밀었다. 여덟 개의 눈이 단번에 주변을 훑고 판단을 내렸다.
【어떻게, 어떻게 네가……!】
【죄송합니다, 아타르트. 당신은 죽어야만 합니다.】
반역이다. 세르항이 아닌 비가볼의.
채앵!
에쿠아가 돌아가는 형편을 훑어보는 사이, 아타르트가 반역자와 대치했다.
족장 이전에 비가볼 최강의 전사란 위명은 과연 거짓이 아닌가 했다. 아타르트는 암습을 이겨 낸 것도 모자라 세 명의 전사들과 비등비등하게 겨루었다.
살짝 밀리는 감이 있다지만 외부의 도움이 있다면 얼마든지 이겨 낼 모습이었다.
【에쿠아, 저를 도와주십시오!】
【세르항의 족장이시여, 저흰 정당한 계승을 진행 중입니다. 우릴 적대해선 좋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도움을 명하려던 순간 반역자들이 경고했다. 에쿠아의 입술이 벌어진 채로 찰나간 굳었다.
【에쿠아!】
비가볼이 아타르트를 따라 개혁을 찬성하는 파와, 오래된 관습을 지키자는 파로 나뉜 건 알았다. 하나 대놓고 목을 노릴 만큼 골이 심한 줄은…….
심지어 반역을 일으킨 면면들은 아타르트가 제일 신임하는 자노라 천명했던 자들이다.
아타르트가 믿고 데려온 이 중 절반이 반역에 찬동했단 소리다.
그렇다는 건 반역자들의 세가 보통이 아니란 이야기니.
하면 아타르트가 잠시 자리를 비운 비가볼 본진은 어떠할까. 반역자들이 이미 장악한 것은 아닐까?
【족장님, 명령을!】
【어떻게 할까요?】
에쿠아는 반역자들과 손을 잡는 것이 세르항에게 좋은 것인지, 아니면 아타르트를 믿는 것이 미래에 도움이 될지 빠르게 고민했다.
제사장이 있었으면 좋았겠으나, 그녀가 있었더래도 판단을 하는 건 그였을 것이다. 결국 그가 지금 결단을 내려야 했다.
【…아타르트를 도와 반역자들을 처단해라!】
그리고 결론이 내려졌다.
아타르트는 세르항에게도 호의를 품었지만, 아타르트를 밀어내려던 기존 세력─고리타분한 옛 사상가들─은 그들을 얕잡아 보니 이긴다면 아타르트가 좋다. 그런 사고가 포함된 판단이었다.
【에쿠아!】
【기어코 독배를!】
함에도 세르항의 족장은 명령을 내린 직후 지독한 의심에 시달렸다. 이게 맞나? 이게 정말 옳았나? 제 선택을 향한 의심이었다.
“이게 뭐야.”
그러던 찰나, 알아들을 수 없는 언어가 장내에 울려 퍼졌다.
그다음으로 눈에 들어온 건 음울하고 사뭇 지쳐 보이는 회색 눈동자였다.
“반란?”
반역자의 칼날이 그에게로 날아갔다.
* * *
“이게 뭐야.”
진짜 이게 뭐다냐.
나는 개판이 된 상황을 보고 저도 모르게 약한 한숨을 뱉었다.
하. 피곤한 와중에 지들끼리 싸우는 걸 보니까 정말 오만 감상이 다 든다.
“반란?”
진짜 반란이라면 골치 아픈데.
왜 내란이 인지도 모르는 와중에 무턱대고 한쪽 손을 들어 줄 순 없잖아. 나중에 무슨 화를 입으려고.
거기에 한국인은 역사적으로 폭군 및 독재자를 워낙 많이 겪어 봐서 말이다…….
솔직히 ‘반란’이란 소리를 들으면 반사적으로 기득권층 먼저 꼬나보고 ‘Hoxy?’ 이러게 된단 말이지. 정당한 혁명이 아니라 권력 쟁탈을 위한 쿠데타면 이제 머쓱해지지만.
【죽어라!】
그러나 내게 선택권은 없었다. 누군가가 나를 공격하려 든 탓이다.
【손님을 지켜!】
공격하려 든 이를 단번에 처리하니, 다른 이들이 접근했다.
적인가 하고 훑어보면 다들 내게 등을 보이며 호위 진영을 펴려고 하고 있다.
문제는 얘네가 반란 쪽인지 당하는 쪽인지인데.
공격이 안 들어오니 생각할 시간이 있다. 나는 사태 파악을 위해 서둘러 족장이라고 들었던 얼굴들을 확인했다.
시간을 두고 찬찬히 살피니 반란을 일으킨 자들은 비가볼 소속 같았고─옷이 그러했으니─, 비가볼 족장은 웃기게도 가장 치열하게 목이 노려졌다.
세르항은 글쎄. 비가볼 족장을 돕고, 반역자들 진압을 목표로 하고 있는 것 같은데.
참고로 나를 지키는 이들도 세르항이다. 아까 날 공격하려던 놈은 겉보기엔 비가볼이었고.
하면 내 적은 자동적으로 정해졌다.
혁명이고 쿠데타고 간에, 민간인까지 건드리는 시점에서 결코 좋은 놈일 리는 없잖아? 그렇지?
“후.”
나는 한숨과 함께 마력창을 형성한 후, 그대로 쏘아 보냈다. 검기는 아군이 휘말릴까 차선으로 고른 스킬이다.
여러 사람을 한꺼번에 공격할 수 있다는 장점도 있어서 꽤 좋은 선택이기도 했다.
【크악!】
비가볼 족장의 적들이 단번에 나가떨어졌다.
이어 호위 진영을 빠져나가 세르항 전사를 공격하던 다른 놈을 걷어찼다. 비가볼 vs 비가볼은 구분 못 해도, 세르항 vs 비가볼은 피아를 구분할 수 있다.
【이방인 주제에!】
그때 누군가가 내게 검을 치켜들었다. 내 손이 허리춤의 검을 뽑아 그것을 튕겨 내었다.
쉬면서 절반가량을 회복한 마력이 검위에 사르르 얹혀, 예리함을 부가했다.
서걱!
상대의 검이 잘려 나갔다.
푸욱!
“…….”
한데 내가 너무 사지 달린 상대만 상대했나 보다. 이쪽은 팔이 여섯 개인 걸 깜빡했네.
나는 뒤늦게 들어온 공격을 피하며 네 번째, 다섯 번째 검격을 쳐 냈다. 그러면서 한 발짝 뒤로 물러났다가, 오른손에 마력을 담았다.
촤악!
네 갈래 손톱 자국이 적의 상체를 찢어발겼다. 신체가 조각 나진 않았으나 상처가 깊으니 운신은 힘들 것이다.
【무슨!】
네 발자국 거리에서 당황하고 있는 저건 적일까, 아닐까. 그 뒤의 것은?
나는 말이 안 통한다는 게 생각보다 더 많은 불편을 초래함을 깨달았다.
【아타르트!】
그러나 적 구분이 안 되면 뭐 어떤가. 내가 아닌 다른 사람들이 구분해주겠지.
중요한 건 내가 아군이라 확신할 수 있는 이들을 지키는 행위다.
나는 단걸음에 비가볼 족장의 곁으로 향했다. 내가 세 명의 어깨에 구멍을 뚫어 줬음에도 그는 적으로부터 풀려나지 못한 상태였다.
【자네는…….】
혹시 문제가 될 수 있으니 죽이는 건 자제할까.
나는 족장을 공격하던 이의 뒷덜미를 잡고, 마력을 담은 손으로 바닥에 내던졌다. 인형을 패대기치듯 가볍게 휘둘린 적이 땅이 울리도록 내동댕이쳐졌다.
잘은 몰라도 허리는 좀 아플 거다.
이어 다른 한 놈의 칼을 쳐 내며 그 명치를 후려쳤다. 오랜 실험 끝에 갈비뼈는 뽀개도 절명은 안 시키는 힘 세기를 알아냈기에, 허공으로 붕 뜨며 날아간 적도 죽지는 않을 것이다. 아마도.
“누가 적이냐.”
그보다 진짜 답답해. 옷차림이라도 다르면 좀 좋으련만. 내가 제압해야할 애들이 대체 누구야?
“【모르는… 아.】 저자와, 저자가 적이다.”
이 사람이 내 쪽 말을 할 줄 아는 건 신의 한 수였다. 나는 그의 지시에 따라 반란자(추정)들을 하나하나 때려눕혔다.
그것들이 나를 보고 뭐라 소리지르긴 했는데, 그냥 무시했다. 꼬우면 너도 두 개 국어 하든가.
퍼억!
별개로 이게 맞는 일인지 모르겠다.
나는 적을 걷어찬 후, 이제서야 헐레벌떡 달려오는 아크메이지와 제사장을 보며 검을 내렸다.
우습게도 검에는 피 한 방울 묻어 있지 않다. 검으론 남의 육신을 베지 않았으므로, 당연했다.
“어떻게 된 건가!”
“내게 묻지 마라.”
알겠냐고.
나는 부족 사람들이 알아서 정리하는 걸 보며 적당한 기둥을 찾아 몸을 기댔다. 마음 같아선 그대로 주저앉고 싶은데─이상하게 힘들어서─그건 캐붕이니까 찾은 대안이었다.
팔이 여섯 개라는, 세 사람을 동시에 상대하는 것과는 또 다른 전투로 인해 입고 만 상처들이 그제야 아려 왔다.
통각 수치가 낮아서 정말 있는 둥 없는 둥 하는 아림이지만, 어쨌든.
“자네 괜찮나?”
아크메이지가 그런 나를 두고 걱정을 건네왔다. 대부분 생채기에 불과하지만, 맨 처음 난 상처는 제법 깊이가 있어 그 부분을 두고 염려하는 것 같다.
“치료를 해 주겠네.”
거절할 이유 없다. 나는 그녀가 옆에서 치료하건 말건 눈을 감은 채 멍을 때렸다. 사고가 이상한 쪽으로 튀면 골치 아프니 차라리 뇌를 비울 요량이었다.
【저, 그, 고맙네.】
그러던 와중 아이 하나가 다가왔다. 세르항 쪽 족장… 이었지 아마.
대충 초등학생 고학년쯤? 요즘 애들은 성장이 빨라서 확신할 수 없지만 대충 그쯤 되어 보인다. 내 가슴팍보다 조금 더 온다.
【그대가 아니었다면…….】
아이가, 아, 족장인데 아이라고 부르면 무례겠지. 세르항 족장이 상기된 얼굴로 나를 힐끗거렸다.
제사장은 어디다 두고 여기 있나 싶으면, 그녀는 전사들에게 명령을 내리며 상황을 정리하고 있다.
“나도 감사를 전하지.”
내가 뭐라 하기도 전 조금 어색한 어투가 말을 전해 왔다. 다리를 다쳤는지 살짝 절며 다가오는 비가볼 족장이었다.
“자네가, 귀하가 도와주지 않았다면…….”
그는 끝까지 말을 잇지 않았다. 그러나 말이 완성되지 않아도 알 수 있는 게 있는 법이다. 하물며 내가 끼어들기 전, 그가 밀리는 모습을 보았음에야.
“…….”
상대는 말하다 말고 감상에 빠진 양 침묵에 빠져들었다.
그의 낯엔 복잡한 심정이 고스란히 드러나 있다. 배신감, 분노, 독기… 반란이 일어난 게 사실이라면 이상한 감정은 아니었다. 슬픔은 어디로 갔나 싶지만.
“이 빚은 어떻게 갚아야겠나?”
그래도 그는 오랫동안 감정에 잠식되어 있지 않았다.
선이 굵고 뚜렷한 이목구비가 나를 똑바로 직시했다. 샤기족이 아닌데 나와 눈높이가 맞는 사람은 오랜만이다.
“필요 없다.”
그러나 내가 할 수 있는 답이라곤 하나뿐이다. 의뢰를 받고 움직인 게 아닌데 어떻게 대가를 받아.
나는 언제나처럼 거절 의사를 단호히 표했다. 상대도 보편적인 이들이 그러하듯 애석한 얼굴을 했다.
“하지만…….”
【그는 진정 대가를 받지 않을 것입니다.】
내 어깨를 치료한 아크메이지가 손을 떼었다. 좋은 참견이었다. 나 사유하기 싫어. 대신 상대해 주세요.
【하니 두 족장님께서도 가벼운 호의로 받아 주시지요.】
그렇다고 내가 알아들을 수 없는 언어로 하지 말고. 나 유리된 기분 든다고.
【그런.】
【…가벼운 호의인가.】
【예. 가벼운 호의입니다.】
외국인 2명과 외국어 사용자 1명 사이에 껴서 왕따 당하는 썰 푼다.
나는 담배가 심히 당기는 걸 느끼며 세 사람을 꼬나보았다. 물론 세르항의 족장님은 절대 사납게 보지 않았다.
족장님으로 존중하는 건 존중하는 거고 아이로서 보호하는 건 보호하는 거다. 둘은 양립할 수 있… 을 거다, 아마.
【하면 내가 구은의 대가로 비가볼에 초대해도 받아 주지 않겠군?】
【부디 이해를.】
그래서 나 언제 보내 줄 거야. 나 어색해…….
【굉장히… 안타깝군.】
나는 방금 전까지만 해도 일방적으로 감사 인사가 오가던 분위기가, 묘한 신경전으로 변하는 걸 보며 대체 무슨 대화를 나눈 건지 궁금해졌다.
왜 아크메이지랑 비가볼 족장님이랑 눈싸움하고 있는 거야.
“자네 몸 괜찮나?”
그때 아크메이지가 내게로 시선을 돌렸다.
“괜찮다면 지금 출발하는 게 좋겠네. 마탑에서 일찍 와 달라고 당부하지 않았는가.”
…아까 쉰다며.
아니, 안 쉬어도 괜찮긴 하지만. 줬다 뺏김 당한 기분이라 좀 묘하다.
정말 무슨 이야길 나눴기에 쉬겠다는 말을 철회하는 거야? 아크메이지 혹시 저쪽이랑 사이 안 좋나.
“…….”
그렇지만 제 동료는 아크메이지니까요. 초면인 족장님 배려해 줄 이유 있나.
도와줘야 하는 거 아닌가. 라고 여기기엔 또 피해가 그다지 크지 않다. 사상자가 나오긴 했으나 소수에 불과하고, 또 내가 그들을 치료할 능력이 있는 건 아니잖는가. 그렇다고 내가 잡아야 하는 대상이 남은 것도 아니고.
재산 피해도 고작해 봐야 경기장 조금 부서진 수준이라 이 정도면 그냥 모른 척하고 가도 되지 않을까 싶다.
해서 나는 기둥으로부터 몸을 떼며 그녀의 말을 따랐다. 짐은 지금 후다닥 달려오는 사냥꾼들이 어정쩡하게 들고 있으니 아까 거기로 돌아갈 필요는 없을 듯하다.
【비가볼 족장님, 반역자들의 처우를… 잠깐, 가십니까?】
그때, 어느 정도 정리를 마친 듯한 제사장이 창백한 안색으로 달려왔다.
첫인상만 따지면 흔들림 없이 고목나무처럼 매양 차분하게 지내실 사람 같던데.
자타브의 침입에, 초청한 사절단 일부가 반역도 저지르고. 차분하려야 할 수 없는 일들로 인해 첫인상 다 까먹은 걸 보고 있자니 참 고생 많은 분이다 싶다.
【도움에 감사드릴 시간만은…….】
【괜찮습니다. 이런 상황에 어찌 저희가 시간을 뺏을 수 있겠습니까. 아, 붙여 주신 사냥꾼도 거둬 가시지요. 손 하나가 귀한 상황 아닙니까.】
뭐, 그래도 알 게 뭐야.
나는 아크메이지가 살짝 속삭인 말─뱀은 우리가 알아서 들고 가야 할 것 같네─을 토대로 사냥꾼들에게 뚜벅뚜벅 걸어갔다.
귀한 뱀을 차마 두고 오기도 그렇고, 정작 들고 오니 양손이 차 있어서 주변을 돕지도 못하는 사냥꾼들이 나를 구원자처럼 보았다.
【…외지인 전사가 받아 가는 건 무엇입니까?】
【아… 자후카야입니다. 아마 마력을 먹는 것에 관심을 가진 것이겠지요.】
가방처럼 어깨에 멜 수 있는 끈을 달아 줘서 참 다행이다. 나는 두 개는 한쪽 어깨에 메고 두 개는 다른 쪽 손에 들었다.
더 이상 저쪽과 할 말 없는지, 아크메이지도 내 뒤에 바로 따라붙었다.
【…마력을 먹는 것?】
【자후카야를 콕 집어 포획한 이유는 보통 그것뿐이지 않겠습니까?】
“나도 하나 들겠네.”
“꺼져라.”
다 필요 없고 길만 잡아 주세요. 맵도 먹통이겠다, 나침반도 없겠다, 나 여기서 길 못 찾아.
【잠깐, 잠깐!】
그때 비가볼 족장이 우리를 붙잡았다. 이야기 다 끝난 거 아닌가, 정말 끈질기네. 내 미간이 구겨졌다.
【만약, 마력을 먹는 것에 관심이 있는 거라면 이건 어떤가.】
【족장님, 저희는…….】
【이건 비밀이지만… 산군님께서도 마력을 드시네.】
그러나 내겐 발언권이 없다. 나는 비가볼 족장이 세르항의 눈치를 보며 아크메이지에게 발언하는 것을 지켜보았다.
【……! 그, 무슨.】
【내 초대를 받아 주면 산군님을 만날 수 있도록 자리를 마련해 보겠네. 산군님의 말을 번역해 줄 제사장 또한 붙여 주지. 아, 참고로 이건 비밀일세. 산군을 모시는 늪의 제사장들을 포섭하는 건 암묵적으로 허용할 뿐, 원칙적으론 안 되거든. 아무튼, 어떤가?】
별개로 이번 대화는 아무래도 아크메이지가 한 방 먹은 듯하다. 충격받은 얼굴로 입을 뻐끔거리던 아크메이지가 나를 돌아보았다.
“…악마기사.”
“뭐냐.”
“우리… 아무래도 비가볼의 영역에 가 봐야 할 것 같네.”
…대체 무슨 대화가 오갔기에 이런 결론이 나는 거야? 내가 더러워서 말 배우고 만다, 진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