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7화 머나먼 땅으로 (11)
【제사장, 무슨 일 있었습니까?】
세르하의 족장, 에쿠아는 담소 전후로 미묘하게 달라진 마을 공기를 읽었다.
비가볼의 족장은 눈치채지 못한 듯하지만, 마을 토박이인 그는 달랐다. 무언가 일이 있었다.
【지금 말씀드리겠습니다.】
그는 비가볼 족장이 본인의 동행과 대화하는 틈을 타, 제사장에게 물었다.
그가 족장이 되기도 전부터 제사장으로서 존재해 온 여인이 허리를 살짝 숙여 밀어를 속삭였다. 티를 내선 안 된다는 걸 알지만, 저도 모르게 펄쩍 뛸 만한 내용이었다.
【뭐, 뭐라고요?】
【진정하시지요. 티 내시면 안 됩니다.】
【그, 그래야지요.】
에쿠아는 간신히 몸가짐을 바르게 했다. 그러나 벌렁벌렁한 가슴은 쉽사리 가라앉지 않았다.
아무렴, 까만 마력을 옷처럼 두르고 질풍처럼 숲을 뒤엎은 전사라니!
치바넝을 죽였다는 말을 듣고 외지인이지만 참 대단한 전사라 생각했던 차였다. 그러나 이 말까지 들은 이상 그 외지인은 고작 ‘대단한 전사’가 아니었다.
그 전사는, 그가 대삼림의 주민이었다면 ‘영웅’이라 불렸을 것이다.
【손님과 대화를… 대화를 하고 싶습니다. 물론 비가볼 족장도 그를 궁금해하니, 모두가 있는 자리에 초청해야겠지만… 그, 허락을 받을 수 있겠습니까?】
전 족장의 이른 승하로 어린 나이에 족장이 된 에쿠아다. 제 지위에 걸맞게 행동은 하고 있다지만 영웅에 대한 선망은 차마 지울 수 없었으니.
족장은, 오랜만에 소년으로서 작게 욕심을 내보였다. 비가볼 족장이 방문한 상태가 아니었다면 그는 제사장의 허리춤에 매달려 조르고 있었을 것이다.
사실, 지금도 비가볼 족장과 함께 봐야 한다는 것부터가 아쉽기 그지없었지만 말이다.
【그것이…….】
【어, 어렵습니까?】
【…일찍 떠나고자 하는 의향을 드러내셨습니다.】
【그런…….】
비가볼 족장이 이방인과 대화를 나누고 싶노라 의견을 드러낸 건 더는 중요치 않다.
이다지도 큰 은혜를 짊어진 이상, 비가볼 족장을 설득하는 건 그들의 몫이었다. 이 이상 손님의 배려를 끌어내는 건 몰염치다.
하지만, 하지만…….
에쿠아는 안타까움을 금치 못했다. 위대한 전사와 대화를 해 보고 싶었는데! 자타브의 전사들을 내쫓은 그 위엄 넘치는 모습을 보고 싶었는데……!
【무슨 문제라고 있습니까, 세르항 족장?】
【아, 아닙니다. 자 어서 가시지요. 대련장에서도 준비가 다 되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소년은 소년으로 남을 수 없었다. 에쿠아는 금세 족장의 얼굴을 하며 비가볼 족장을 응대했다.
【제사장, 은인이 떠나시기까지 부족함이 없도록 최선을 다해 보필해 주세요. 제사장을 믿습니다.】
【걱정 마시지요.】
친선대련장으로 이동할 차례였다.
* * *
“정말로 마력을 먹는군…….”
나와 아크메이지는 잡아 온 자후카야를 자세히 살폈다.
보다 정확히는, 아크메이지만 뱀을 관찰하고 나는 뒤편에서 시큰둥하니 자리만 지켰다.
참고로 뱀 네 마리 중 세 마리는 나무살을 엮어 만든 우리에 각각 가뒀다. 남은 한 마리는 사방이 막힌 방에 풀어 두어 현재 진행형으로 관찰 중이고.
마력은 먹어도 가죽이나 흙, 나무는 못 먹으니 탈출할 염려는 없었다. 아크메이지를 공격할 걸 대비해 내가 이 자리에 있는 거기도 하고.
─이게 무슨 일이야.
“아, 드디어 확인했나.”
─무슨 일 생겼어?
“일이 생기긴 했네만, 이걸 좋은 소식이라고 해야 할지 나쁜 소식이라고 해야 할지 모르겠군.”
─뭔데?
아크메이지는 수정 구슬처럼 생긴 것으로 흰바람과 대화를 시작했다.
거기서 풍겨 오는 마력 때문일까. 아크메이지가 만들어 둔 마력구를 빵 조각 주워 먹는 비둘기처럼 낼름낼름 먹던 뱀이 아크메이지 쪽으로 다가왔다.
콱.
“자살 희망자였나.”
아니, 이 양반아. 뱀이 오는 걸 보면 움직이세요. 가만히 있지 말고.
식겁해서 발로 뱀 밟았잖아.
“자네가 구해 줄 걸 아는데 뭐 어떤가.”
이 인간이??
─뭐야, 저 뱀은?
“마력을 먹는 뱀일세.”
─…뭐?
“죽인 뱀과 동일한 방식으로 만들어진 건진 모르겠네. 그러나 마력을 먹는 건 내 두 눈으로 확인했네. 아, 참고로 4마리나 포획했으니 이번엔 잃어버릴 걱정 없─.”
─당장 데리고 와! 마력을 먹는 거 확인했다고 했지?! 그거 혹시 한 번 더 보여 줄 수 있─.
나는 흰바람이 비명에 가까운 소리를 와다다다 내뱉는 걸 흘려들으며, 내 발에 밟힌 뱀을 확인했다.
급해서 세게 밟았는데 머리 터진 거 아니지? 아, 아니네. 살아 있네.
나는 혀를 낼름대는 뱀을 조심스럽게 잡아 전용 통에 넣어 주었다. 뱀이 쉭쉭 소리를 내며 얼굴을 계속 바깥으로 빼려 들었다.
이것도 보다 보니 귀엽다.
─마력 먹는 뱀을 양산하고 있다고!? 미친 거아니야미친거 아니야?!
“자네 띄어쓰기 실패했네.”
─뭐라는 거야!
마력을 먹으면 내 것도 먹나.
나는 마력창을 형성하는 기분으로 손가락 위쪽에 마력을 뭉쳐 보았다. 까만 마력이 동그랗게 모여들었다.
여기서 길쭉하게 늘이고 쏘아 보내면 마력창이 될 거다. 그럴 생각으로 만든 건 아니지만.
텁.
뱀이 내 손가락과 마력을 동시에 물었다. 야.
“자네 뭐 하나?”
동물이랑 놀고 있는 거 들키면 컨셉 망하죠?
나는 태연히 뱀의 입으로부터 손가락을 빼내고─건틀릿 쪽을 물린 거라 아프지도, 빼내기가 어렵지도 않았다─뚜껑을 덮었다.
아크메이지를 등지고 있던지라 내가 손가락 물린 건 못 봤을 거다.
─나도 사람 보낼 테니까, 어서 귀환해 줘!
“알겠네.”
뚜껑만 덮으면 또 불안하니까 다른 애들 해 둔 것처럼 끈으로 한 번 더 묶었다. 마탑에 줄 선물 보따리가 완성되었다.
“자, 그럼 연락도 했겠다 어서 가세.”
어, 인사 안 하고 가도 되는 거야? 족장이나 제사장이나, 비가볼 족장이나? 대화 안 하고 가면 결례라서 못 떠나는 거 아니었어?
“자네가 이렇게까지 해 줬는데 더 요구하진 않을걸세. 동맹이 어찌 되든 세르항도 우리 탓은 못 하겠지.”
음, 뭔가 알 것 같으면서도 모르겠다.
나는 아크메이지의 말을 들으며 보따리를 들었다. 평소였다면 동행자가 다 들도록 했을 텐데, 하필 함께하는 사람이 아크메이지여서 그냥 내가 다 들었다.
우리 법사님 골병 들면 안 되지.
“버, 벌써 가십니까?”
그런데 그럴 필요 없더라.
우리가 간다는 걸 안 세르항 쪽에서 짐꾼으로 쓰라며 사람을 붙여 주었다. 내가 치비넝으로부터 구해 줬던 사냥꾼이었다.
【이렇게라도 은혜를 갚아야죠. 아, 변경까지의 길도 맡겨 주세요! 최단거리로 안전하게 모시겠습니다!】
【길잡이 능력만큼은 부족에서 제일가는 사냥꾼들입니다. 부디 거절치 마시지요.】
묘하게 나를 보는 눈들이 부담스럽다만, 어딜 가든 활약하고 난 후엔 다 그랬으니 금방 익숙해졌다.
나는 사냥꾼 두 사람이 짐을 떠맡는 걸 보며 고요를 즐겼다.
아무도 접근하지 않거니와 말이 안 통해서 대답할 필요도 없다 보니 적막을 씹기 딱 좋았다.
온갖 잡념이 들기 좋은 적막이었다. 집중할 것도 없고, 방해하는 사람도 없으며, 앞으로 할 일도 간단한 것뿐이었으니까.
괜히 주변 눈치 보며 분위기로만 궁예질 할 필요 없었단 소리다.
하여 나는 그것을 마음껏 누렸다.
이곳의 퀘스트는 정말 이것으로 끝인가 하는 얼떨떨함. 이 지역도 메인퀘가 있다면 분명 이들 권력 다툼이 연계될 것 같다는 예감. 자타브가 마력 먹는 뱀을 키워 냈는데 그게 악마랑 연관된 건 아닌가 하는 의심 따위를 가볍게 키워 본 것이다.
‘퀘스트창이 있었으면 좋았을 텐데.’
그러다 잠깐, 생각이 한쪽으로 틀어졌다. 퀘스트창. 미뤄 둔 고민이 기어코 사고의 틈새를 비집고 들어온 것이다.
그 순간 사위의 모든 소리가 먹먹해졌다. 삐이이. 먹먹함 사이로 들려오는 이명은 더없이 선명하다.
손이 제멋대로 올라와 귀를, 관자놀이를 손바닥으로 짓눌렀다. 차마 양쪽은 누르지 못해, 오른쪽만 꾸욱 누를 수 있었다.
“자네, 괜찮나?”
그렇게 2초, 3초.
아크메이지가 나를 보았다. 손바닥으로 머리를 눌렀다곤 하나 골치 아픈 사람처럼 굴진 않았는데, 왜 내게 저런 말을 하는지 모르겠다.
혹시 내가 표정에서 티를 냈나?
“뭐냐.”
그래선 안 되지. 나는 서둘러 상념을 잠갔다.
적어도 내가 혼자가 될 때까지. 어떤 감정을 토해 내도 목숨을 걱정할 필요가 없는 장소까지 잠가야 했다.
“아니, 표정이…….”
오 마이 갓. 나 진짜 표정 관리 못했나 본데.
쓰읍. 캐붕이라고 뒤통수를 치는 건… 아니겠지? 진짜 아니겠지??
필사적으로 구애의 춤을, 아니 악마기사인 척하는 재롱을 그렇게 떨었는데.
아크메이지님, 뭘 눈치챘든 한 번만 봐주자. 한 번만 봐주자. 앞으로도 열심히 악마기사 컨셉질 할 테니까.
“자네.”
나는 손을 내리며 아크메이지에게 집중했다. 그녀의 말을 하나라도 놓치면 안 됐다.
“무슨 문제 있으면 제발 말해 주게.”
하나라도 놓치면… 그보다 또 이 소리냐고.
나는 ‘몸 상태 괜찮냐’와 ‘봉인구 떠벌떠벌’ 러쉬가 또 시작되는가 하며 표정을 구겼다. 연기보다는 진심이 더 섞인 행동이었다.
“네 알 바 아니다.”
“악마기사.”
예예. 제가 설마 댁이 뭘 걱정하는지 모르겠어요. 당연히 알죠, 아는데.
제가 남의 잔소리를 걱정이라 받아들일 수 있는 나이긴 하지만, 그래도 이만큼이나 들으면 성질 나와서요.
컨셉도, 제가 악마를 담고 있는 이상 어느 정도 제지를 허용하겠지만─그래서 지금까지 견딘 거고─그것도 한계가 있는 법이잖아? 성깔이 보통 성깔이어야지.
“나는─.”
“슬슬 내가 우습게 보이나 보군.”
아 씨. 그러고 보니 봉인구에 대해 말하는 거 또 까먹었어. 아. 환멸.
근데 여기서 말하는 건 좀 그렇지? 그래. 조금만 더 미루자. 뭣하면 그냥 아크메이지에겐 말하지 않고 흰바람에게만 여분 더 받아 가는 수도 있고.
“나는 네게 많은 걸 허용해 주었다. 정말 많은 것을.”
나는 대신 그녀에게 한 발짝 다가갔다.
삐이이. 이명은 아직 가시지 않았다. 그게 조금 짜증났다. 화는 아니고, 그냥 약간의 거슬림. 그로 인한 미묘한 짜증.
“더 이상, 넘어오지 마라.”
…그러니까 이건 화풀이가 아니다. 아닐 거다.
아니어야 했다.
본인 감정을 못 이겨 남에게 화풀이하는 사람이라니, 너무 꼴불견이잖아.
그러니 이건, 이건 그냥 컨셉질이다. 컨셉도 슬슬 빡칠 시기가 됐어.
악마를 제일 경계하는 건 자기인데, 심지어 그를 두고 스트레스 제일 많이 받는 것도 본인인데 거기다 대고 남이 깔짝거리면 얼마나 화나겠냐고.
“…나는.”
내가 이렇게 나올 줄 몰랐는 듯, 아크메이지가 말을 더듬거렸다.
“…미안하네.”
그래도 끝내 사과는 했다. 듣고 싶지 않았다. 그녀의 잘못이 아니었다.
“다 준비된 마당에 이야기하긴 좀 그렇지만, 조금 쉬고 가는 게 어떤가.”
“필요 없다.”
악마 안 터진다고요. 진짜. 그냥 가도 되는데 왜 그래. 아크메이지 갈수록 안전에 강박증 생기는 것 같아. 나 같아도 그럴 것 같긴 한데, 그래도.
“내가 힘들어서 그렇네.”
아, 강박증이 생긴 건 아크메이지가 아니라 나인 듯. 머쓱.
난 나 때문에 미룬 줄 알았잖아.
“…나약하긴.”
나는 보이는 진실을 부러 덮었다. 어차피 내게도 시간이 필요했다. 내 감정과 컨셉을 분리해 낼 시간이.
…섞이면 그때부턴 재미가 없으니까.
【…무슨 문제라도 있으신지요.】
【아니, 아닙니다. 그보다 출발을 조금 미뤄도 되겠습니까? 저이가 자존심이 세서 티를 잘 안 내려 합니다만, 어쩐지 독의 후유증이 남은 듯 보여서 말이지요.】
【물론이지요. 다시 자리를 마련하겠습니다. 하면, 치료사도…….】
【치료사는 괜찮습니다. 분명 화내며 거부할 테니. 대신… 제사장께서 주셨던 약차 말입니다. 조금만 더 받을 수 있겠습니까.】
【당연히 드리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아, 근데 얼마나 쉬려나. 좀 오래 쉴 거면 눈 좀 붙여도 되나. 피로도 수치가 좀 애매해서.
쾅!
【……?!】
【후, 훈련장이!】
아, 그래. 안 된다고.
【저긴 족장님이 계신 곳인데……!】
【당장 사람을 보내! 달려!】
나는 폭음이 들린 마을 한편을 보며 눈을 질끈 감았다.
나는 분명 퀘스트창이 없을진대, 퀘스트가 왜 이렇게 선명하게 느껴지는지 모르겠다.
슬슬 힘에 부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