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6화 머나먼 땅으로 (10)
【…그게 참말인가.】
【네. 다행히 결계 덕에 이곳의 위치는 찾지 못하는 것 같지만… 아마 사절단의 흔적을 따라온 것 같습니다.】
【…쓸데없이 예리한 놈들.】
【사냥꾼들로 하여금 흔적 대부분을 지웠으니 금방 찾진 못할 것입니다.】
퀘스트 냄새는 냄새고, 상황을 이해 못 하는 건 못 하는 거다. 아크메이지가 심각한 얼굴인 걸 보면 뭔가 터져도 단단히 터진 것 같긴 한데.
【전사를 내보내 처리하는 건 불가능한가.】
【수가 많습니다. 퇴치가 아니라 몰살을 목표할 경우 마을의 전사들 대부분을 내보내야 합니다.】
【…지금 계신 손님은 비가볼의 족장이시다. 전사들 대부분을 끌어낸다면 분명 눈치를 채실 터. 그분이 이 사실을 모르도록 해야 한다.】
【하면 어떻게 해야…….】
【족장님은 이 일을 아시는가?】
【손님과 담소 중이신지라 제사장님께 먼저 보고드리는 것입니다.】
【그렇군. 족장님껜 내가 전달하겠네. 너흰 마을 내 사냥꾼들을 모아 두거라. 전사들도 손님이 눈치채지 못할 선에서만 부르고.】
【예!】
아, 모르겠다 헤헤. 어차피 대화 끝나면 설명해 줄 텐데, 지금이라도 행복해야지.
나는 태연하게 차를 홀짝였다. 향기가 좋은 건지, 아니면 맛이 좋은 건지. 어쨌든 맛있다. 이거 나눠 준다고 하면 좀 받고 싶은데.
“자타브라. 일이 나도 단단히 난 듯하군.”
두 번째 찻물도 거의 바닥을 보일 즈음, 아크메이지가 작게 속삭였다. 당연히 모르는 고유명사─동사는 아닌 것 같아서─가 나왔다.
“자타브는 비가볼만큼이나 강대한 부족일세. 가장 많은 대족장을 선출해 낸 부족이기도 하네. 내가 알기로, 대삼림의 주민들이 폐쇄적인 성향을 보이는 것도 그들 때문이라더군.”
아크메이지가 매번 설명을 붙여 주는 건 정말 다행인 일이다. 나는 차마 리필하지 못한 채 멀뚱히 기반 지식을 뇌에 꽂아 넣었다.
“한데 그들이 지금, 이 타이밍에 부락 근처에서 발견되다니. 세력을 줄이고자 함이든, 동맹을 방해하려는 것이든 분명 카티나를 의식한 것이겠지.”
그러니까 눈치 깠든 아니든 간에 훼방 놓으려고 무력을 행사… 중이란 거지? 권력 다툼 치열하네.
“역시 일찍 마을을 나설 걸 그랬네.”
그 의견엔 나도 동의한다. 사람들 구한 거엔 여한이 없지만 뒤처리가 너무 귀찮다. 이들이 가엽지 않은 건 아니나, 남의 권력 다툼에 끼어들고 싶은 마음 또한 없다.
“다만 가장 문제는…….”
“……?”
나는 나를 물끄러미 보는 아크메이지를 두고 영문도 모른 채 일단 꼬나보았다.
뭐, 왜, 뭐. 제가 뭘 했다고요. 사람 구한 거 가지고 꼽 주지 않기. 사람 구한 것 가지고 꼽 주지 않기!
“더 마시게.”
오, 감사.
나는 눈치 보여서 차마 못 따라 먹던 찻물을 추가로 받아 마셨다. 맛있다.
“외지에서 오신 분들.”
그때 한참 외부의 사람과 대화하던 제사장이 우릴 돌아보았다. 퀘스트 왔구나. 너무 자주 겪은 일이라 덤덤한 심정으로 그녀의 한마디를 기다렸다.
“부디, 저흴 도와주십시오.”
간절하지만 비굴하지 않은 요청이 제사장의 구부러진 허리와 함께 흘러나왔다.
“심정은 알겠네만, 그건 불가능하네.”
“염치 없는 부탁임은 압니다. 하나 녹색강을 죽인 전사님, 당신의 힘이 절실합니다.”
“우린 외지인일세. 외지인이 카티나에 개입한다면 어떤 소리를 듣겠나.”
천만다행으로 아크메이지가 전부 방어해 주었다. 제사장의 입술이 흰 이에 잘근 씹혔다. 우리가 짜증나서가 아니라 초조해서 그런 거라고 믿어 본다.
“그건…….”
【제사장님, 자타브 녀석들이 자후카야를 동원했습니다!】
“……!”
또 한 명의 사람이 벌컥 들어오며 외쳤다. 제사장의 황색 피부가 백설기처럼 창백해졌다.
“빛을 먹는 뱀……?”
아크메이지도 표정이 미묘해졌다. 위험한 무언갈 들은 얼굴은 아니고 ‘그게 뭔가’ 할 때 얼굴이었다. 저 양반도 모르는 게 있긴 한가 보다.
“먼저 가 보겠습니다. 제 부탁은 잊으시고 이곳에서 편히 쉬시지요. 【마카카, 너는 이곳에 남아 손님들의 시중을 들거라.】”
제사장이 후다닥 사냥꾼들과 함께 물러갔다. 제사장을 보좌하던 소녀가 우리 앞에 퍼져 있는 찻잔과 구석에 내려 둔 찻잎 꾸러미를 두고 갈팡질팡거렸다.
“그, 차, 더 드릴까요?”
너도 이쪽 말 할 줄 알았냐.
“자후카야가 무엇인가?”
내가 반으로 줄었던 찻물을 더 받는 동안, 아크메이지가 질문했다. 소녀가 눈을 동그랗게 뜨더니 남는 손으로 본인 머리를 긁었다.
“그, 제가 이쪽 말에, 익숙지 않아.”
【이쪽 언어도 괜찮네.】
【그럼 말씀드리겠습니다. 자후카야는 이름 그대로의 뱀입니다. 빛을 먹지요.】
【빛? 광합성 같은 걸 하며 살아간다는 이야긴가?】
【아니요, 그 빛이 아니라…….】
소녀가 남는 손 하나를 활짝 펼쳐, 대지와 수평이 되도록 손바닥을 눕혔다. 곧 빛무리가 그 손바닥 위로 반짝 보였다.
【이런 빛, 즉 마력을 먹습니다.】
아크메이지가 벌떡 일어났다.
“악마기사, 잡아야 하네!”
저들끼리만 아는 언어로 쑥덕쑥덕거리던 주제에 뭐래. 저 양반은 내가 본인 같은 다개 국어 사용자인 줄 아나 보다. 아닌데.
* * *
듣자 하니 자타브 녀석들이 마력을 먹는 뱀을 사육한다고 한다.
오래된 건 아니고 몇 달 전부터라는데, 어떻게 저런 뱀을 사육하게 된 건지는 몰라도 우리 입장에선 땡잡은 거나 마찬가지다.
죽인 뱀의 대체제를 찾은 셈이니까.
“한 마리, 아니 다섯 마리만 낚아 오게.”
저기요. 한 마리 다음에 보통 두 마리가 나오지 않냐고요. 다섯 배로 부풀리기 있냐.
나는 그런 생각을 하면서도 이게 맞나 고민했다.
권력 다툼에 끼지 않는다고 해 놓고서 몰래 마력 뱀을 낚아 오는 게 맞는 건가? 그것도 암습이나 도둑질 전문인 데브가 아니라 정면 돌파가 전문인 나한테 시키는 게?
“자타브는 자후카야들을 굉장히 아낀다고 하네. 이번 기회를 놓치면 자타브의 본진까지 가야 할지도 몰라.”
그러나 아크메이지가 저렇게 구는 이유를 모르는 것도 아니다.
대화에 참여하느니 몸으로 때우는 게 편하기도 하고.
나는 결국 코트를 벗고, 마카카─제사장이 남기고 간 소녀─가 건네주는 가죽 판초와 후드를 둘렀다.
팔의 개수로 인한 종족 차이는 들킬 수밖에 없어도, 얼굴까지 굳이 보일 필욘 없던 까닭이다.
특정될까 봐 무기도 다 내려놓았다. 여기서 내어준 마체테가 내 유일한 무기가 될 거다. 손에 안 익어서 이걸 쓰게 될까 싶다마는.
“그, 제, 제사장님의 옷이니 가능하면 아껴 주심이…….”
옷을 내어준 마카카가 울기 직전의 얼굴로 부탁했다. 정작 제사장은 뱀만 처리해 줄 거란 말에도 흔쾌히 내줬는데 말이다.
모시는 입장이라 신경 쓸 게 많나 보다.
“부탁하네.”
아이가 아껴 달라니 아껴 줘야지.
나는 외벽 근처에서 대기하고 있는 전사들을 지나쳤다.
그들의 움직임으로 하여금 되레 마을의 위치가 특정될 수 있는 만큼, 마을을 가리는 결계 안에서 최악의 상황을 대비하고 있는 자들이다.
사냥꾼들? 사냥꾼들은 뒷길로 빠져나가는 중이라 들었다. 유인을 할 거라나.
이 또한 그들의 위치를 알릴 위험이 있지만 어쩔 수 없다. 미래만 고려하다가 현재를 놓치는 건 어리석은 행위다.
【거길 나가면 결계가!】
그러나 그건 그들 사정이고. 나는 내가 뭘 할 수 있는지 끝없이 고민하다가, 결정을 내렸다.
그리고 경계선으로부터 대략 10m 남았을 때, 나는 발에 힘을 주었다.
내 다리에 마력이 모였다.
【뭘 하려는─!】
쾅!
대지가 살짝 울며 내 몸이 허공으로 부웅 떴다. 짙은 색의 판초가 마치 매의 날개처럼 좌우로 펼쳐졌다.
【……!】
참고로, 며칠 전의 이야기지만 아크메이지의 신성력과 마력의 차이점 특강을 두고 아이디어를 얻은 건 인퀴지터뿐이 아니었다.
나 역시 꽤 아이디어를 얻었다. 활용법보다는 본래 가지고 있던 기술이 왜 그런 형식으로 나왔는 건지 깨달은 쪽이라도 말이다.
그렇다고 그게 의미 없는 건 아니다. 확실히 인지하고 나니까 보다 쉽게 만들 수 있더라고.
【검은… 궤적이 허공에…….】
덕분에 이런 것도 시도해 볼 수 있게 되었다.
예컨대, 육체에 마력을 펴 바르는 것으로 그치지 않고 주위에 나선의 마력을 치는 거?
【이봐, 어디서 소리가 들리는 것 같지 않아?】
【그럼 정말 이 근처에 세르항의 본거지가─.】
【저게 뭐야!】
이게 좋은 사용법이냐면 글쎄. 그건 아닐 거라고 본다.
쉬워졌다곤 하나 이 정도 규모는 여전히 머리 아프게 계산해야 하고, 마력을 외부로 표출한 만큼 실질적인 신체 능력엔 영향을 끼치지 않거든. 즉, 신체 능력을 올리려면 마력을 또 써야 한다.
거기에 사용한 마력만큼의 공격력을 내는 것도 아니었다. 마력 소모는 봄바드 수준인데 위력은 스팅거와 크게 다르지 않다면 대충 설명이 될 거다.
그렇지만… 그래도 괜찮다. 몸을 마력으로 강화하다 못해 몸 외부에도 두를 방법이 생긴 게 아닌가.
방어 성능은 아직 시험 안 해 봤지만, 일단 방어막처럼 보이는 걸 만들었다고. 그것도 공격형으로 사용이 가능한.
예전에 한번 해 보려다가 안 만들어져서─그땐 면 만들기가 어렵다는 걸 모르고 면 형식으로 시도했었지만─때려치운 것보단 훨 낫다.
뭔가를 만들어 내기만 하면 발전의 여지는 생기기 마련이다.
【배, 뱀이야!】
무엇보다 이거, 그냥 보는 것 자체가 근사해.
새까만 기운이 돌진하는 몸을 덮다 못해 나선형으로 앞은 뾰족하고, 뒤는 길게 늘어지는데 뭔들 안 멋있겠나. 심지어 마력에 얼굴이나 육신 전반이 가려지는데.
【사, 살려!】
【으아아악!】
아, 이렇게 되면 굳이 옷을 갈아입을 필요가 없었나? 으음. 별로 상관은 없으려나. 근데 옷 하니까 뭐 까먹은 듯한, 아!
봉인구 얘기하는 거 까먹었어. 이따가 돌아가면 다시 말해야지. 이번엔 절대 까먹지 말기!
그러나 봉인구도 결국 할 일이 끝나야 말할 수 있는 것이라. 나는 마을로부터 100m도 채 안 떨어진 위치의 전사들 사이를 쏘다녔다.
붉은 진흙을 바른 덕에 구분이 쉬운 그들은 내 등장과 동시에 비명을 지르며 사방팔방으로 튀어 다녔다.
그놈의 ‘자후카야’란 뱀은 어디 있는지 모르겠다.
【돌아와, 쉭! 쉭쉭!】
하나 나는 자후카야를 의외로 금방 찾을 수 있었다. 자후카야의 외형은 몰라도 뱀을 사육하는 조련사는 구분이 쉬웠던 까닭이다.
하물며 그들도 도망치고자 서둘러 뱀을 회수하는 중이다. 나는 손쉽게 그들의 위치를 인지하고 그곳으로 돌진했다.
【끄악!】
아까도 말했지만, 이 기술은 사용한 마력 대비 공격력이 처참하다.
직격할 경우 풀이나 가는 나뭇가지는 갈가리 찢겨 나가지만, 나무 기둥이나 사람 몸뚱이만 되어도 실질적으로 생채기만 촥 그어지기 때문이다. 물론 그 생채기가 좀 깊고 많긴 한데, 아무튼.
오히려 그런 류의 공격력보다는 넉백, 즉 뒤로 미는 힘이 더 강한 것 같기도 하다. 조련사가 옆으로 튕겨 나갔다.
뱀도 튕겨 나갈 뻔했으나 어떻게 잡았다. 애 가죽이 다소… 엄, 너덜너덜해지긴 했는데 살아는 있으니까 괜찮지 않을까? 하핫.
나는 뱀이 나를 물지 못하도록 모가지를 꽉 쥔 채로 사방팔방 뛰어다녔다. 내 손이 키에 비례하여 큰 편인 게 참 다행이었다. 한 손에 뱀 두 마리는 잡히더라.
【후퇴해! 후퇴하라고!】
【검은, 검은 뱀이다. 검은 뱀이야……! 바람처럼 날아드는 뱀이라고!】
그렇게 내가 총 네 마리의 뱀을 잡고, 내 마력이 1/5도 채 남지 않은 시점.
나는 흩어지는 자타브의 전사들─일부러 마을 반대쪽으로 몰았는데 티가 난 건 아닌가 걱정된다─을 피해 아무도 없는 곳으로 뛰었다.
신체 강화를 한 번 하자 수 미터를 껑충 뛴 몸이 포물선을 그리며 수십 미터 너머에 착지했다.
내가 둘렀던 마력의 잔흔이 허공에 긴 꼬리처럼 남았다가 사라졌다.
쾅!
물론 그것만이 다는 아니었다.
착지할 때 일부러 그라운드 크래쉬를 써서 그런가. 대지가 우렁차고 요란하게 울었다.
근처에 있던 나무가 살짝 꺾이거나, 수풀이 찢어발겨지고 땅이 쩍 갈라지거나, 아무튼 그랬단 거다.
참고로 이 흔적, 일부러 세르항 본거지가 있던 곳과 좀 먼 곳으로 했다. 그러니 나중에 자타브 전사들이 와서 조사해도 저쪽엔 피해가 안 가지 않을까……?
일단 출발 지점 때도 흔적 안 남게 조심했는데.
안 가겠지?
뭐, 이미 끝난 일이다. 나는 내가 역으로 피해를 더 일으킨 건 아닌가, 그래도 전사들은 피 안 보고 다 내쫓았는데. 그런 생각과 함께 복귀했다.
앞뒤좌우 다 수림이라서 길이 좀 헷갈렸으나, 내가 날뛴 흔적을 토대로 방향을 잡으니 어렴풋이 알 것 같더라.
【은인이시여……!】
거기에 마을 사냥꾼들 일부와 제사장이 손수 뛰어나와 줘서야.
나는 한편에 자리 잡은 아크메이지를 향해 뱀들을 던졌다.
용케도 기절은 안 했으나 뱀들은 빈사 상태 내지 어지럼증에 빠져 비틀거렸다. 주변에 사냥꾼들도 있으니 놓치는 일은 없을 것이다.
【바, 방금은…….】
아, 이렇게 될 줄 알았으면 그냥 옷 안 입고 갈걸. 괜히 캐붕만.
【방금은 대체 어떻게…….】
나는 판초 후드의 단추 부분을 한 손으로 풀었다. 단추가 없이 천에 구멍을 뚫은 거라면 벗기 힘들었을 텐데, 단추로 풀어 낼 수 있어서 참 다행이었다.
휙.
덕분에 이런 식으로 벗어 넘길 수 있지 않나.
나는 제사장에게 빌린 후드를 반납하며 꺼내지도 않은 마테체를 집어 들었다. 그것 역시 휘익 날아가 다른 곳에 도열하고 있던 사냥꾼의 손에 안착했다.
멍 때리고 있던 사냥꾼이 화들짝 놀라며 마체테를 쥐었다. 검집째로 안 던졌으면 손 베였을 것 같다.
어쨌거나 여기서 마지막으로 아크메이지와 아이컨택을 하고 묻는다.
“부족한가.”
“아니, 괜찮네.”
좋아, 마무리까지 완벽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