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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인공이 컨셉충이면 곤란한가요-112화 (112/389)

◈112화 머나먼 땅으로 (6)

나는 전등을 들어 가며 보다 확실히 살폈다. 부유물이 가라앉을 시간을 두고 관찰하니, 둥지의 모습이 보다 잘 보였다.

보랏빛이고, 진홍빛 핏줄 같은 게 돋아 있었으며, 다소 매끈한 형상이었다.

그러니까, 알을 매끄럽게 반으로 자른 느낌? 근데 그게 좀 두껍고 핏줄도 좀 도드라진 거지.

고어적 의미의 장기 자랑처럼 징그럽진 않지만, 그래도 썩 보기 좋은 형상은 아니다.

나는 오른팔이 간질간질거리는 걸 느끼며 일단 주변 풀들을 다시 베어 냈다.

둥지를 보다 자세히 살피려면 나머지 풀들을 처리할 필요가 있어 보였다. 그리고 이 약이 둥지에 어떤 영향을 끼칠지도 모르고.

그러나 알약을 심은 직후, 풀들은 시들었지만 둥지는 특별한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검으로 콕콕 찔러 보아도 마찬가지였다.

용기 내어 손을 가져다도 보았지만 미지근한… 약간 불쾌한 온기만이 있었다. 감촉 자체는 나무줄기를 겹겹이 쌓은 후 딱딱히 굳힌 느낌이었고.

나는 그것을 가만 응시하다가, 판단을 내렸다.

사이드 퀘스트인줄 알았더니 해당 지역 메인 퀘스트였다 이거지?

그래, 어쩐지 내가 나서서 받지도 않았는데 퀘스트가 내려와 꽂히더라. 목걸이 전달로 시작해서 겸사겸사 세계도 구하는 게임이 있는 이상 별 놀랄 일도 아니긴 하다만.

파각!

어쨌거나 표본은 중요하다.

나는 만일의 사태를 대비해 둥지를 살짝 뜯어 갔다. 통째로 뜯어 가면 추후 확인에 어려움이 있을 수 있으니, 일부만 제출할 요량이었다.

물론 이게 다 필요할 수도 있긴 한데… 혹시 아나. 마법사들이 원상태를 봐야 할 일이 생길지.

나중에 아차 하느니 그냥 두 번 움직이는 게 낫다. 그런 마인드로 나는 파편을 뜯어 손에 쥐었다.

퀘스트창이 이런 덴 참 방향을 잘 제시해 줬는데. 약간의 아쉬움이 머리를 스쳐 지나간 건 그때였다.

“어엇! 올라오셨다!”

“죄, 죄송합니다! 제가 돌 드리는 걸 깜빡해서!”

그래도 호수 위까진 착실히 올라갔을까.

어쩐지 한 사람을 잠수시키려던 마법사 무리가 눈에 들어왔다. 돌은 또 뭔 소린지 모르겠다.

“확인해라.”

나는 그들의 헛소리를 외면하고 잘라 온 둥지 조각을 던졌다. 우왕좌왕하던 마법사들이 파편을 받고 머리 위에 물음표를 잔뜩 세웠다.

철썩.

아이고, 난간 위로 오르는 것도 반복하니까 힘들다.

나는 모양새가 최대한 좋도록 팔심으로 단번에 다리에 오르며 머리를 털었다. 모래나 풀잎 따위가 껴서 진짜 뻑뻑했다.

씻고 싶다. 깨끗해질 걸 알지만 옷도 빨고 싶다. 좋은 잔향이 남도록 섬유 유연제까지 꼭꼭 써서 빨고 싶다.

청결을 향한 욕망이 잠시 들었다.

“…모험가님, 이건 대체 어디서 가져온 물건입니까?”

그사이 마법사들이 심각한 얼굴로 내게 물었다. 손가락으로 머리를 털던 내 눈이 직선으로 접혔다.

“머리가 없어서 묻는 건 아니겠지.”

“……!!”

현실 부정을 바랐나 본데, 이거 호수 밑바닥에서 가져온 거 맞으니까.

나는 아직 남아 있는 난간으로 다가가 철푸덕 앉았다. 절대 힘들어서가 아니라 다시 들어갈 걸 직감해서다.

암, 안내든 통째로 뽑아 오게 시키든 뭐든 간에 내 힘을 안 빌리고 배기겠냐고.

“다, 당장 보고해!”

그런데 마법사들이 저렇게까지 심각해진 이유는 잘 모르겠다. 대체 저게 뭐길─.

“악마둥지가 나타났다고!”

오.

* * *

“이건, 예상 밖의 문제인데.”

당장 밖으로 뛰쳐나온 맹렬한 흰바람이 사근거렸다. 생글거리던 얼굴은 냉정함을 넘어 아예 표백된 듯한 형상을 한다. 응접실에서 부리던 마리오네트 같았다.

“장막을 치렴.”

“네.”

흰바람의 명령에 마법사들이 결계를 치기 시작했다. 마탑과 호수 일부를 덮는 결계는 굉장히 컸지만, 동원된 마법사들이 많은 덕에 오래 걸리진 않았다.

“용사님은 신전으로 돌아갔니?”

“다행인지 불행인지. 이건 나보다 걔가 더 잘 알 텐데. 용사 몰래 빼 올 수 있으련가 몰라.”

흰바람은 그리 말하며 내게 다가왔다.

“정말 미안한데, 저게 발견된 곳으로 날 다시 데려가 줄래? 참고로 나 헤엄 잘 못 치니까 줄로 연결도 해야 하는데.”

예상했던 부탁이었다. 잠깐 동안 휴식을 취한 몸이 스르륵 일어나 물로 다가갔다.

“젖기는 싫은데에.”

“대, 대현자님!”

“저희가 대신 가겠습니다!”

“응, 아냐. 내가 가. 너희가 뭘 안다고. 신전에 가 있는 녀석이나 대신 불러 줘. 신전 사람들 모르게, 용사 절대 못 따라오게. 알지?”

흰바람이 걸치고 있던 대부분의 옷을 벗어 주변으로 넘겼다. 공기 방울이라도 만들어서 갈 줄 알았는데, 마법사도 이런 건 수가 없나 보다.

첨벙!

금세 나와 흰바람의 신형이 호수 아래로 잠겨 들었다.

“곤란해, 곤란해.”

참고로 온몸을 공기로 둘러싸진 못해도, 코와 입가에 공기 방울을 만들어 기계를 대체하는 건 되는 듯하다.

둥지를 한참 살펴본 흰바람은 본인 입에 기계 대신 공기 방울을 만들어 소리를 내었다.

의외의 친절은 내게도 똑같은 행위를 해 줬단 거다. 그래도 할 말은 별로 없지만.

“묵은 마력이 마기가 되다 못해 악마까지 만든 건 정말 곤란한 일이라고.”

“…지금 뭐라 했지?”

시정하자. 할 말 있게 만드는 주제가 나왔다.

“새삼스레 왜 놀라니. 이것의 산증인이 바로 너인데.”

내가? 내가 왜 산증인?

나는 당황해서 눈살을 좁히다가, 그만 깨달았다.

지금 벌어진 사태의 원인이, 아무래도 마력이 마기로 변해서 벌어진 것 같은데… 나는 그 반대의 대표 예시잖아. 그러니까, 마기를 마력으로 밥 먹듯이 바꿔 써먹는 사람이잖아.

그렇다는 건……?

“마기가 마력이 될 수 있다면 그 반대라고 못 될 리 없잖니. 비록 우린 알면서도 그 가능성을 없는 셈 쳐 왔지만.”

오 마이 갓. 그런 거였냐고.

“그보다 이제 어떻게 될지 모르겠네. 마력이 마기가 될 수 있다는 걸 넘어, 악마까지 탄생시켰단 소식이 전해지면 분명 마법사 중 일부가 선을 넘을 거란 말이지. 그렇게 되면 마탑은 신전과 공존할 수 있을까?”

그동안, 흰바람은 물속에서 나풀거리는 머리카락을 쓸어 넘겼다. 별 소용은 없었다.

“…뭐, 이런 문제를 네게 물어봐도 아무 의미 없겠지. 넌 마법사도 아니고, 네 몸에 기생하는 골칫덩이만 아니면 이쪽에 연관될 일도 없었을 사람이니까.”

하소연도 비슷했다. 흰바람의 말마따나 나는… 이쪽 문제를 잘 몰랐다. 흰바람이 예상하는 것보다 더 많이.

그래서 물어보고 싶은 마음이 있어도 질문할 거리 자체를 찾지 못한다. 나는 계속 입을 다문 채 분위기만 잡았다.

“일단 이것부터 해결하자. 이게 본관 지붕에 있으니까… 그쪽 벽을 보강한 후 이쪽을 통째로 뜯어내면 되겠지.”

그러나 그건 그거고 이건 이거다.

앞으로의 일을 걱정하느라 당장 들이닥친 일을 외면할 수는 없다. 우리는 할 수 있는 것들은 선별한 후 바로 행했다.

둥지를 도려내는 과정에서 건물 안쪽에 물이 새지 않도록 대비를 단단히 한 후, 둥지를 뜯는 작업이었다.

워낙 급한 사안이라서 그런가. 모든 노동은 1시간 만에 끝이 났다. 그 과정에서 나는 두 번 더 호수 밖과 안을 왔다 갔다 해야 했지만, 크게 중요한 건 아니었다.

“흰바람, 이야기는 대강 들었네. 이게 대체…….”

그리고 그쯤 되어 아크메이지가 후다닥 도착했다. 이 야밤에 저 꼭대기에서 여기까지 내려오느라 고생깨나 한 듯 옷차림이 엉망이었다.

“…이건.”

고위 마법사들을 헤치고 나온 아크메이지의 시선이 둥지에 닿았다. 단번에 정체를 알았는지 그녀의 얼굴이 딱딱해졌다.

“용케도 혼자 왔네?”

“아, 연구 관련이라고 하니 신전도 적당히 알아주더군. 한데 이게 중요한 게 아니잖나.”

“아니지. 중요하지. 신전에서 알면 어떻게 나오겠어. 너도 그걸 알고 네 평생을 바쳤던 연구를 버린 거잖니?”

“…….”

어, 평생 연구를 버려? 그, 아크메이지도 과거사가 있었군아……?

나는 법사 개인스토리를 떠올려 보았다. 마법사 쪽 갠스는… 심오함과 별개로 특별한 건 달리 없었다. 그냥 지식욕이 이기느냐 도덕이 이기느냐에 따라 전직이 갈리는 거였으니까.

“…그 이야긴 나중으로 미루지. 지금 나만 있는 자리는 아니니.”

“그래. 지금 중요한 건 사건이 끝난 후가 아니라 이 사건을 어떻게 끝낼지니까.”

나는 펑펑 터지는 떡밥에 눈알이 핑그르르 돌았다.

별것 아닌 줄 알았던 퀘스트가 세계관 및 캐릭터의 비설과 연결된다아아. 그아아앗.

“먼저 둥지에서 무엇이 부화했는지를 알아야 해. 그리고 그걸 죽이거나 생포해야겠지. 그래야 은폐하든 보고하든 뭘 할 수 있으니까.”

그리고 그 사냥꾼 역할은 내가 맡게 되겠지.

나는 핑글핑글 도는 와중에도 앞으로 나올 퀘스트 내역을 정확히 캐치했다.

흔한 게이머의 눈치였다. 다년간의 게임 짬밥은 창 하나 없어졌다고 궁예질 하나 못 하게 될 만큼 얕지 않다.

“마기의 잔향이 남은 걸 보면 부화한 지 오래되진 않았을 거야. 다만, 알지? 난 기술 개발 전문이지 실전은 젬병인 거. 우리 애들도 추적마법을 다룰 수 있는 애들은 전부 실전이…….”

“…그래. 이건 내가 맡겠네.”

“좋아. 부탁 좀 하자?”

더불어 이번 퀘스트 담당 동행은 아크메이지가 될 것 같다.

다만 인퀴지터가 알면 안 되니 그쪽은 동행에 당연히 제외되겠고. 인퀴지터만 뺀 채 나머니 전부를 동원하는 것도 웃긴 모양새니 데브와 버서커도 못 데려가려나.

버서커 들어오자마자 따로 행동하는 건 둘째 치고, 아크메이지랑 단둘이라. 이건 또 새로운 조합이다.

앞선 퀘스트에서 아크메이지 분량이 없었다고 지금이라도 챙겨 주는 건가 싶다.

“악마기사도 부탁하자. 추가 계약서도 작성해 줄 테니까.”

뭐, 누가 동행하든 상관은 없지. 나는 사백만 갈로 계약을 체결, 용이한 추적을 위해 바로 출발했다.

나나 아크메이지나 체력 상태가 좋은 상황은 아니지만, 어쩔 수 없었다. 이 이상 시간 끌면 마기의 흔적이 다 사라진다는데 어떻게 쉬어.

“이 방향은 대삼림 쪽인데…….”

그보다 이번에도 잠수해야 하는 거 실화냐? 나는 흰바람 때와 비슷하게, 아크메이지를 줄로 연결한 채로 호수 아래를 훑고 악마의 자취를 쫓았다.

오랜만에 형광 추적 마법이 빛을 발했다.

“이쪽에 동굴이 있었군. 이러면 정말… 대삼림으로 넘어간 걸지도 모르겠네. 숲의 주민들 영역에만 들어가지 않았다면 좋으련만.”

그 결과, 풀을 제거할 땐 못 봤던 동굴을 발견했다. 돌들이 구멍을 가리듯 놓여 있어서 미처 못 본 길이었다.

“이쪽인가?”

“불 하나 껐다고 눈이 멀었나?”

“이 나이 먹으니 눈이 침침해지는 걸 어쩌겠나.”

“…쯧.”

“불 켜 줘서 고맙네.”

우리는 대화가 가능하도록 특별히 제작된 수중 호흡 도구를 찬 채 그 안으로 이동했다.

아크메이지가 나보다 덩치가 크되 수영을 못해서 다소 고역이었지만, 의외로 바깥보단 나았다.

온통 물뿐일 땐 내가 그녀를 당겨야 했으나, 동굴 안에선 울퉁불퉁한 벽면을 잡고 나아갈 수라도 있던 까닭이다.

“물이 많이 차갑군. 돌을 더 가져올 걸 그랬네.”

다만 그런 식으로 한참을 들어왔을 때, 아크메이지가 추위를 토로했다. 방수마법은 안 걸어 뒀다며 온도 조절 로브를 벗은 게 타격이 큰 듯하다.

“나약하긴.”

그보다 이게 추운가? 난 그냥저냥 미지근한 느낌인데.

아니면 내가 너무 오랫동안 호수에 몸을 담그고 있어서 그런 걸지도? 그런 것치곤 처음부터 차갑다란 감상이 없었긴 하지만.

어쨌거나 우리 소중한 인력, 골병이라도 나면 큰일 난다. 나는 아크메이지에게 핫팩용 돌을 내밀었다.

아무렴 전사인 나보단 마법사인 아크메이지가 감기 걸릴 확률이 더 높지 않은가. 나이도 저쪽이 더 많고, 우리 뒷받침도 항상 해 주고.

요즘 잔소리 과해진 건 좀 그렇지만 그마저도 걱정에서 비롯된 마음임을 안다.

질린다는 감상이 있을지언정 그 호의를 모르지 않는데, 이깟 돌 하나 못 건네주겠나.

“자넨 안 추운가?”

“악마를 놓치면, 네놈이 추워지겠지.”

아, 그냥 받으세요, 어르신.

나는 아무 말이나 하며 좀 더 안쪽으로 헤엄쳤다. 아까까지만 해도 갈수록 좁아졌던 구멍은, 가장 좁은 구역을 지나치자 다시 넓어지고 있다. 심지어 상승 중이기도 했다.

첨벙.

기어코 공기와 맞닿은 곳이 등장했다.

이번엔 군화 신고 들어오길 잘했다. 나는 신발 안쪽에서 찰박거리는 물의 존재를 애써 외면하며 동굴을 살폈다.

약하게나마 바람이 느껴졌다. 외부와 연결되었다는 증거다.

“외부와 연결되어 있었나.”

내 뒤로 아크메이지가 철벅거리며 올라왔다. 핫팩을 그리 두르고도 추운지 몸이 파들파들 떨리는 게 살짝 보였다.

“잠깐, 물 좀 짤 시간 좀 주게.”

그럼요. 그럼요.

나는 아크메이지가 옷과 털을 짜는 동안, 흔적을 보다 자세히 살폈다.

마법이 형광색으로 표기한 자국은 끊임없이 길게 남아 있다. 마치… 포대 자루를 질질 끌거나 뱀이 기어간 것처럼 보인다.

“…뱀인가.”

설마 포대 자루일 리는 없으니, 분명 후자일 터. 두께 보니까 엄청 큰 놈 같은데……. 와. 뱀이 몰려온 이유도 대충 알 것 같다. 아하하.

“음? 아. 그렇군. 하면 물밖으로 나올 수 있던 이유도 알겠네. 악마는 아무래도 뱀의 형상을 띤 모양이구만.”

아니, 사실 안 웃겨. 너무 크잖아, 이거!! 폭이 내 허리만 한 게 말이 돼!?

왕물뱀 수준이 아니라 와아아앙 물뱀이잖아!

나는 질린 기색을 겨우 감추며 허리에 묶은 줄을 풀고, 인벤토리 속 코트를 꺼내 입었다. 본격적으로 쫓을 차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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