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1화 머나먼 땅으로 (5)
“하, 가능하면 조용히 해결하려 했는데…….”
맹렬한 흰바람은 여기서 할 이야기가 아니라며 우리를 다시 안으로 이끌었다. 내게 의뢰를 맡겼던 마법사 무리도 마찬가지였다.
그들은 이유도 제대로 설명받지 못한 채 같이 안으로 끌려왔다. 비록 발언권은 하나도 받지 못했지만, 그건 뭐 자발적으로 안 하는 거니까 괜찮을 거라 본다.
“말하기에 앞서, 앞으로 할 이야기는 기밀 사항이니까 절대로 이야기가 퍼지지 않도록 해 줘. 알았지?”
그보다 난 못 씻고 끌려온 게 더 신경 쓰인다. 으, 찝찝해.
나는 머리 사이에 낀 나무껍질이나 풀 조각 따위를 빼내며 최대한 이야기에 집중하려 했다. 기밀 사항이란 언급까지 나온 이상 보통 일로 끝날 리 없던 까닭이다.
“참고로 네 일행, 특히 사제님에겐 더욱 비밀이야.”
한데 인퀴지터한테도 비밀이라고?
나는 뻣뻣한 머리카락을 손빗으로 쓱쓱 넘기다 말고 흰바람을 응시했다. 항상 해사하게─혹은 똘끼 넘치게─웃던 이가 냉랭한 표정을 하니 유독 심각해 보였다.
“비밀 엄수 조항에 대해선 충분히 사례할 테니까, 알았지?”
내 컨셉은 꼭 돈으로 움직이진 않습니다만…….
“내가 그 말을 당연히 받아들일 거라 생각하는군.”
합법이라면야 돈을 준다고 했을 때, 그리고 특별히 할 일이 없을 때 대부분 들어줄 의향이 있다.
그러나 파티원에게도 비밀인 일은 좀. 아크메이지가 동행한 이상 불법까진 아닐 것 같지만 그래도 찜찜하다고.
안 그래도 퀘스트창이 없어서 의뢰 내용도 정확히 표기되지 않는 상황인데.
“1천만 갈. 이 정도면 당신의 무거운 입을 살 수 있지 않을까?”
“…내가 팔 것 같나?”
“팔지 않을 이유도 없잖아. 너무 딱딱하게 굴지 말자고. 해결하면 더 얹어 줄게.”
그러나 거절하기에는 너무나도 많은 돈이었습니다.
나는 자크라티에서 불렀던 금액을 떠올리며 미묘한 눈을 했다.
물론 엄밀히 따졌을 때, 거긴 비푸릿 한 사람 모가지값이 1천만 갈이고 악마를 몰아낸 값은 따로 받았으니까─내가 거절한 것도 있고─그쪽이 너무 모자라게 줬다거나 이게 너무 많은 건 아니겠지만…….
그보다 대체 무슨 일을 시키려는 거야? 마탑이 아무리 부유해도 사소한 일에 1천만 갈씩 걸진 않을 터. 그만큼 이 일이 중요하단 건데…….
대체 무슨 일이 벌어지면 뱀잡이 의뢰가 1천만 갈짜리로 진화하는 거야?? 나 진짜 잘못 발 들인 거 아님??
“어쨌든 이제 다 된 거지? 좋아, 그럼 제대로 이야기 시작할게.”
내가 속으로 치열하게 고뇌하고 있을 때, 맹렬한 흰바람이 사정을 털어놓았다.
“일단 네가 본 그 풀들 말인데, 그거 우리들 실수로 탄생한 거야!”
시작부터 대형 폭탄이 터졌다.
“건물이 노후화되어서 그런가, 주변에 마력이 좀 새어 나갔는데 그게 주변 생태계에 영향을 끼쳤니 뭐니. 물이 공기보다 밀도가 높아, 마력이 주변으로 흩어지지 않고 남은 것도 영향을 끼친 듯하고. 아, 뱀들이 몰려오는 이유는 나도 몰라, 아하하.”
이어진 발언에는 다른 이들이 더 큰 반응을 보였다. 얼굴을 시뻘겋게 물들인 채 입술을 더듬거린 것이다.
말하는 사람이 대현자가 아니었다면 불만을 바로 성토했을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별개로 이번에도 마탑이 사고 친 거 맞네!
흰바람마저 뱀 문제는 모른다고 하는 거 보면 그쪽은 정말 연관이 없는 거 아닌가 싶다마는…… 풀은 사고 친 거 맞잖아. 저거 덮자고 일부러 뱀 문제 강력하게 해명 안 한 거고.
마법사 친구가 신전이랑 모험가길드보고 뭐라 할 게 아니라니까?
나는 그 지점을 두고 썩은 반응을 보였다. 흰바람은 조금도 신경 쓰는 눈치가 아니었다.
“근본적인 원인은 노후화된 건물이니만큼 보수만 하면 끝날 일이긴 한데…… 문제는 마탑을 보수하려면 풀을 제거해야 한다는 거지! 그렇다고 우리 애들을 시켜서 제거하자니 마법 특성상 너무 눈에 띄고.”
대신 흰바람은 발랄하게 손뼉을 치며 외쳤다.
“그래서 그 일을 좀 맡기고 싶어. 난 이 일이 신전이나 모험가 길드 귀에 들어가지 않길 바라거든. 이게 전해졌다간…… 알잖아?”
왜 인퀴지터한테 말하면 안 된다고 하나 싶더라니, 뱀 문제를 해명 안 한 것과 같은 맥락이었다.
결국 그쪽 몰래 해결하고 싶다 이거지? 나 참. 이렇게 되면 의뢰비 1천만 갈은 실질적으로 의뢰 보수보다는 입막음 비용에 더 가깝겠네.
나는 졸지에 제초사로 전직하게 생긴 상황을 두고 신경질적인 반응을 가장했다.
“…내가 이따위 일에 나설 것 같나.”
“응응. 알아! 이런 하찮고 사소한 일은 나서기 싫겠지. 그래서 돈도 많이 불렀는걸!”
그런 내 반응을 예상했다는 듯, 맹렬한 흰바람은 손가락을 까닥거렸다. 그러자 응접실 한편에 서 있던 마네킹이 움직였다.
삐걱삐걱.
덜컥.
마네킹, 아니 마리오네트일까? 사람 형상의 그것은 쇳소리와 함께 걸어가 서랍을 열었다. 그 안에서 딸려 나온 건 굉장히 화려한 함이다.
무언갈 보관하는 데 쓰이기엔 다소 넙데데하고 높이가 낮긴 하지만.
“아니면 이건 어때?”
정정하겠다. 보관하는 데 쓰이는 함이 맞았다. 그것도 목걸이.
“내가 직접 만든 아공간 목걸이! 3m³짜리지! 팔면 1천만 갈은 쉽게 넘을 텐데, 이걸로 퉁쳐 줄 수도 있어!”
근데 이게 아공간 목걸이라고? 아, 인벤토리 확장은 못 참지.
“자네, 그걸 줘도 괜찮은 건가?”
“아하하. 마탑이 이 도시에서 역적 취급 받는 것에 비하면 이 정도야 아깝지 않지.”
“으음.”
“너도 그래서 용사님한테 비밀로 해 주겠단 거였잖니?”
나는 기함하는 주변인들을 두고 흰바람에게서 목걸이를 건네받았다.
팔각 체인이라 뱀처럼 보이기도 하는 그것은, 자세히 보면 좁쌀만 한 글자가 빼곡했다. 전체적으로 투박한 디자인이다 이거다.
심지어 은색이라서 내게 안 어울릴 것 같지도 않긴 한데…… 음. 왜 하필 목걸이지. 목에 두르는 건 붕대로도 충분하단 말이야.
“팔에 팔찌처럼 두르든 목에 두르든 발에 차든 네 살갗에만 닿아 있으면 상관없어. 물건을 넣는 방법은 넣고자 하는 것에 접촉한 상태에서 ‘넣겠다’란 마음만 가지면 되고, 빼는 것도 충분한 공간을 두고 빼겠다란 생각을 하면 돼.”
다행히 목에 찰 필요는 없을 것 같다. 나는 발이나 팔에 차면 되겠다 생각하며 맹렬한 흰바람을 보았다.
“남의 살갗이 닿아 있으면 사용 안 되니까 그것도 고려하고! 네 마력도 소량이지만 소모해. 뭐, 넌 마력이 많으니 상관없겠지만! 마지막으로 이거 보안이 안 걸려 있어서 너 말고도 타인이 조건을 충족하면 쓸 수 있으니까 절대 잃어버리지 말도록 해. 이상 주의 사항은 끝!”
그럼 의뢰 받겠어?
흰바람의 낭랑한 목소리가 나를 내려다보았다. 앉아 있는 시선은 분명 흰바람이 낮은데도 그런 기분이었다.
“…쯧. 의뢰 범위를 명확히 해라.”
그래도 뭐 어때. 인벤 확장을 누가 참아.
“아, 그래. 계약서가 확실하긴 하지. 글은 읽을 줄 알아?”
“안다.”
“음 음. 좋아 좋아. 그럼 이야기가 빠르지.”
흰바람은 마리오네트를 시켜 펜과 종이를 가져왔다. 필기 속도가 엄청 빠른지, 순식간에 여백이 가득 찼다.
기본적인 계약 내용, 비밀 엄수 따위의 특별 조항, 목걸이 양도 맹세, 내가 해야 할 일 등이 빽빽하게 종이를 채운 것이다.
덕분에 퀘스트창 없이도 내가 해야 할 일만큼은 명확히 알 수 있었는데…….
“확인해!”
문제는 내가 계약을 잘 몰라서 말이다.
작품 계약은 몇 번 해 보기도 했고 변호사 도움이 있어서 괜찮았는데, 여긴 그쪽과 너무 다르단 말이지.
모험가 길드가 이래서 필요한 거군. 나는 길드의 필요성을 느끼며 대충 서명했다.
특별한 독소 조항도 안 보이겠다, 들어갈 건 다 들어간 것 같겠다. 더 확인해 봤자 시간 끌기만 되리란 판단 때문이다.
무엇보다 아크메이지가 옆에 있는데 설마 사기를 쳤겠어? 보통 이렇게 믿다가 사기로 훅 가긴 하지만, 그래도.
“확인했다.”
하, 그럼 이제 바로 퀘스트인가. 목걸이 다시 안 받아 가는 걸 보니 이건 그냥 선금으로 주겠다는 것 같은데, 이렇게 받아먹었으면 일을 해야지.
나는 하나 더 제작된 계약서를 돌돌 말아 허리춤의 가방에 넣었다.
“아, 바로 갈 거야?”
“시답잖은 일을 오래 끌 생각 없다.”
“하하. 내가 사람 하난 잘 골랐다니까.”
아, 왜 씻을 시간도 안 주나 했더니 어차피 다시 들어갈 걸 알아서였구나. 뭔가 분하네.
“자, 그럼 너희도 어서 도우러 가렴! 원랜 너희도 모르게 하려고 했는데, 이미 알아 버린 이상 어쩔 수 없지. 대충 둘러댈 말이 생긴 것도 나쁘지 않고.”
그렇지만 그간 마음고생한 보상도 못 받는 저들보단 내가 나은 처지다. 나는 속으로 심심한 위로를 건네며 밖으로 나갔다.
아직 해는 지지 않았다.
* * *
첨벙!
아니, 해가 졌다.
“아, 올라오셨습니까!”
“안, 안 추우세요?”
“식사 사 뒀습니다!”
나는 호수 밑바닥의 1/3쯤을 정리한 뒤에야 나왔다.
계약서상에는 돋아난 풀을 전부 정리할 필요는 없고, 건물을 뒤덮은 것만 정리해 달랬지만 그 범위가 거진 절반이기에 벌어진 일이었다.
덕분에 해는 완전히 져 버렸고, 달은 정수리 넘어까지 떠 있다. 내 하루가 순식간에 사라져 버렸다.
“일단 담요부터…….”
나도 나지만, 너희도 고생이다야.
나는 내가 들어가 있는 동안 이곳에서 붙박이처럼 기다렸을 마법사들을 두고 다리 위로 완전히 몸을 올렸다.
차갑게 식은 몸을 고려한 것인지 마법사 한 명이 담요를 들고 후다닥 달려왔다.
“필요 없다.”
핫 팩 덕분인지 이상하게 춥다는 감상은 안 든다. 해서 나는 담요를 거절한 후, 내밀어진 음식을 살폈다. 고기 밭이었다.
“…….”
“다, 다시 사 올까요?”
…아니야. 알레르기 있는 것도 아니겠다, 남이 신경 써서 사 줬는데 밥 투정 부릴 정도로 내 인성이 썩진 않았다.
거기에 점심이랑 저녁을 생략한 채 물속에서 풀을 벴더니 포만감이 바닥 그 자체라.
애초에 올라온 이유도 잠수병 막아 주는 약의 약효가 다해서, 더하기 허기를 못 참아서 올라온 거다. 기다릴 시간도 아까우니 그냥 입에 쑤셔 넣으련다.
난 기계적으로 음식물을 씹어 넘겼다.
그러다 문득 우리 애들은 어디서 뭘 할지 궁금해졌다. 내가 없는 걸 눈치챘기는 했을까 모르겠네.
아크메이지가 잘 설명했겠지?
데브는 버서커 따라다니느라 고생 좀 했을 것 같고, 인퀴지터는 기술 연습하느라 여념이 없을 듯한데. 밥은 좀 잘 챙겨 먹고 있을랑가 몰라.
버서커는…… 거긴 신경 안 써 줘도 잘 챙겨 먹을 인상이니까 괜찮을 테고.
“더 드릴까요?”
온갖 잡념을 이어 가며 묵묵히 식사를 거의 마쳐 갈 즈음인가. 내게 최초로 의뢰를 제시했던 마법사가 조심스레 물었다.
바로 고개를 저었다. 여기서 더 먹으면 체할 것 같다.
“그것만 드셔도 되는…….”
아, 밥 먹고 바로 물에 들어가도 괜찮나? 괜찮겠지. 밥 느리게 먹어서 20분은 쉰 것 같으니까.
“어, 바로 들어가시게요?”
당근빳다지. 피로도는 아직 넉넉하다고.
더불어 계약 조항에 최대한 눈에 띄지 않을 것이 있다.
이런 진행 방식이라면 낮에 한다고 해서 큰 문제는 안 될 성싶긴 한데…… 그래도 밤이 더 나을 거다. 얼마 안 남기도 했고.
해서 나는 약까지만 받아 먹고 다시 냅다 입수했다.
내가 나올 때까지 여기서 대기해야 하는 마법사들은 불쌍했으나 외면했다. 나는 거기 있으라고 한 적 없다.
첨벙!
한밤의 차가운 호숫물이 내 몸을 휘감기 시작했다.
“엇!”
다만 누군가가 타인을 향한 배려 없이 잠수한 직후, 남은 마법사 중 하나가 비명을 질렀다.
“왜, 왜!?”
“무슨 문제 있어!?”
주변인들이 심각한 일인 줄 알고 화들짝 놀랐을까. 처음 비명을 질렀던 마법사가 끼기긱 고개를 돌려 제 동료들을 쳐다보았다.
“까먹고 체온 유지용 돌을 안 드렸어…… 그, 그거 시간 다 된 지 몇 시간이나 지났을 텐데.”
“…이 미친놈아! 까먹을 게 따로 있지!!”
“흐아악!!”
큰 문제는 아니었다.
* * *
한편, 마법사들의 걱정을 한 몸에 받던 이는 단숨에 밑바닥에 도달했다. 30m쯤 될까 싶은 수심은 밤의 칠흑과 부유물이 결합하여 폭설이 내리는 밤을 연상시킨다.
나는 풀을 베어 낸 자리에 착지한 후, 남은 부위를 살폈다. 본관이 남았다.
푸르륵.
수중 호흡 도구로 숨을 이어 가며 건물 외벽을 천천히 걸어 나갔다. 그리고 내가 베지 않은 풀들을 다시 마주했을 때, 몸을 낮추고 날이 40cm가량 될 검을 휘둘렀다.
참격이 대략 2m 정도 전진하며 나아갔다. 그 반경에 있던 풀들이 우스스 잘려 나간 건 덤이다.
뽀그륵.
이후, 잘려 나가며 내 무릎까지만 오게 된 풀들 사이로 들어갔다.
생존력 하난 질긴 것들이라, 그 상태에서도 내 다리에 엉켜들었다. 못 버틸 정도는 아니었다.
그리고 잘려 나간 범위의 중심에 다다랐을 때, 나는 인벤토리에 넣어 둔 것을 꺼냈다. 알약처럼 생긴 이것은 이 풀들 전용으로 만들어진 독이다.
대충 마력에 작용하여 마력으로 변형된 것들에겐 독으로 작용한다던데…… 이게 있음에도 내게 부탁한 이유는 간단하다.
이걸 땅에 묻어, 뿌리와 접촉하게 해야만 효과가 있단다. 문제는 마법사들이 나처럼 쑥쑥 자르질 못한다─자르더라도 소란이 이니까─는 거고.
참고로 내가 이거 개량할 생각은 없었냐고 돌려 물으니까, 그건 시간이 오래 걸린다더라. 급한 대로 물에 타도 효과 있게 발전시키고는 있었는데, 그사이에 신전이나 길드에게 걸릴까 노심초사 중이었다고.
해서 내가 오자마자 떠맡긴 것 같기도 하다. 나를 쓰면 지금 개발된 걸로도 충분히 해결 가능하니까.
뭐, 별로 중요한 부분은 아니었다. 인벤칸 받은 시점에서 나는 전부 만족이거든.
푹.
어쨌거나 나는 알약을 바닥에 박아 넣었다. 건물 외벽을 뒤덮고 있던 풀들 일부가 곧바로 시들기 시작했다.
내가 베어 낸 것보다 조금 커다란 반경만큼이었다.
약간의 손실이 있긴 하지만, 그래도 알약은 많으니까.
나는 눈대중치고 잘 잘랐다 자찬하며 방금과 같은 작업을 반복했다.
그리고 그렇게 본관의 중심에 다다랐을 때.
“……?”
풀들 사이에 가려져 있던 보랏빛의…… 흉측한…… 마치 둥지 같은 걸 발견했다. 이게 뭐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