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8화 머나먼 땅으로 (2)
남부 동서를 잇는 도시인 만큼 휴델렌으로 모이는 물자는 엄청난 편이다.
다만 꽃엔 나비가, 꿀에는 벌이 꼬이는 법이라고. 그 물자들을 노리는 도적 떼 또한 많았다. 그 증거가 바로 이것이었다.
“길 가는 것도 일이네요.”
“이 근방이 워낙…… 그렇죠. 끄트머리라서 경비대가 덜 오는 걸 이용해 이 골목에 자리 잡는 놈들이 많습니다.”
휴델렌 근처에 접어들자마자 습격이 벌써 세 번이나 이뤄졌다.
전부 가난이 힘겨워 기어 나온 게 아니라 처음부터 약탈로 먹고살 생각만 한 악질들이었다.
“그럼 매번 그런 자들과 싸우는 겁니까?”
“그렇진 않습니다, 사제님. 보통은 지나갈 때 세력이 가장 큰 집단에게 사례비를 지불하고 통과합니다.”
“권력을 잡고 있는 집단……?”
“도적들 입장에서도 매번 상단과 싸우면 인력난이 심해지니까요. 적당한 통행세면 넘겨 주는 편입니다. 대신 그 금액이 쏠쏠한지라, 그거 얻자고 저들끼리 다툼하는 경우가 많죠. 해서 가장 세력이 강한 무리가 대표해서 받아 가고요.”
뭐, 자릿세 받아 가는 조폭이나 무협의 녹림맹이 그러하듯, 그런 악질들이어도 나름의 통과 방식은 있던 모양이지만…….
“어, 그럼 저흰 왜 공격받은 겁니까요……?”
“보통은 주도권을 가져가는 집단이 하나쯤 있는데…… 산발적으로 덤비는 걸 보니 지금은 자리가 비었나 봅니다. 운이 좋은 건지 안 좋은 건지 모르겠네요. 여러분들을 고용하길 참 잘했다 싶습니다.”
양쪽 다 타이밍이 안 좋았다. 우린 기어코 칼을 꺼내 들어야 해서, 산적들은 재수없게 강자들을 만나 목숨을 날려야 해서.
“으으, 살려…….”
푹!
“안 그래도 날아간 상품 덕분에 적자인데, 적어도 통행비 낼 필요는 없어졌으니까요.”
그러나 따지고 보면 본인들이 자초한 일이다.
하여 우리 외 고용된 호위들이건, 상단 내에서 자체적으로 운용하는 호위들이건 아무도 도적 떼를 굳이 살려 두지 않았다.
도시까지 끌고 가기도 어렵겠다, 뉘우침의 여지도 적겠다, 결정적으로 저들이 먼저 덤볐다. 손속에 자비를 둘 이유가 없었다.
“왜 그 기술은 안 쓰는 거지? 까만 게 훅 날라가면 다 죽을 것 같은데!”
…뭐, 덕분에 평소 같았으면 주먹으로 상대했을 나도 그냥 검을 들고 싸우는 중이다. 버서커가 묻다시피 스킬은 쓰지 않았지만.
“아니면 이 베르세르크에게 기회를 양보한 건가? 으하하! 고맙다!”
참고로 쓰지 않은 까닭은 절대 저것 때문이 아니다.
그냥…… 급한 것도 아니고 악마랑 관련된 것도 아닌데 굳이 참상을 만들어야 하나 싶었을 뿐이다.
솔직히 참격으로 사람 수십 명을 절단한 게 보기 좋은 광경은 아니지 않은가. 고어를 볼 수 있다고 해서 그게 자랑스럽진 않은 것처럼.
“저도 악마기사처럼 유용한 기술을 사용할 수 있다면 좋겠습니다.”
“일일이 상대할 가치가 없되, 죽여야 할 것들을 죽일 때는 확실히 편할 것 같다.”
“전 그런 댁들만도 못하지만 말입니다.”
그렇지만 잔인함과 유용함은 별개라, 다른 애들은 그게 부러운 듯하다. 내게 안 썼다고 뭐라 하지 않은 건 고맙지만 묘하게 싱숭생숭하다.
“…제가 그런 걸 쓰게 될 수 있다면 악마를 처단하기도 더 쉬워질 텐데.”
그리고 파 에녹을 떠난 후로부터 인퀴지터가 묘하게 전투 때마다 처지는 것도 신경 쓰인다!
무력적 부족함 때문에 도시 사람들을 제대로 돕지 못하고 떠나온 게 그렇게나 마음에 걸렸나……!
“맞아요, 댁은 왜 그런 거 못 씁니까?”
“여러 가지 사정이 있긴 하지만 결정적으로는 내 능력 부족 때문이다.”
“어…….”
그사이, 한풀 꺾인 더위 덕에 되살아난 데브가 인퀴지터를 놀리려 들었다. 이번엔 인퀴지터의 우직함이, 그보단 축 처져 버린 상태가 이긴 듯하지만.
“너무 겸손한 것도 좋지 않습니다, 인퀴지터. 신성력의 성질과 관련한 역사로 인한 부재를 스스로의 무능으로만 포장해 버리면 착오가 일지 않습니까.”
“아, 아크메이지님.”
근데 잠깐만. 대충 둘러보니 산적 처리가 다 끝난 것 같으니 일단 출발할 준비부터 하자.
나를 비롯한 일행들이 전 마을에서 낙타와 바꾼 말에 올랐다. 여기가 휴델렌의 영역권이라곤 하나 아직 가야 할 길은 많이 남아 있는 까닭이다.
대화는 가면서 해도 되는 이상─컨셉의 탈을 쓰고 있는 이상 내겐 대화의 기회조차도 주어지지 않겠지만─말 좀 먼저 타도 문제는 안 생긴다.
“신성력에도 성질이 있나?”
해서 다시 출발을 시작하고, 버서커가 해맑게 물었다.
“그렇고말고. 치료를 행했을 때 신성력과 마력의 효율을 생각하면 딱 알걸세.”
“그건 그냥 신의 힘이라서 그런 거 아닙니까?”
“그런 이유일지도 모르지. 그러나 사유가 무엇이든 특징이 일관된 형상을 보인다면 ‘성질’이란 단어로 정립해도 되지 않겠는가?”
어차피 도적이 없는 한 그저 걷는 게 다인 길이다. 상단 사람들이랑 친하게 대화 나눌 사이도 못 되고.
해서 틈을 타 아크메이지가 짤막 특강을 열었다.
이동할 때면 가끔 있는 일인데, 나로선 꽤 반기는 시간이었다. 아무렴 상식 보충은 기회가 날 때마다 해야 한다.
“신성력은 면을 이루는 특성이 있네. 넓게 펴진 채 쉽게 흩어지지 않는단 이야기지. 하나 반대로, 신성력을 꽉꽉 눌러 점이나 선으로 응축하는 건 거의 불가능하다시피 하네.”
“그렇습니까요?”
“…그랬습니까?”
“……? 댁은 왜 몰라요.”
“본능적으로 쓰기만 했지 한 번도 이런 식의 접근은 해 본 적 없어서…….”
아무래도 상식 보충은 나만 할 게 아닌 듯싶지만.
“육신이나 병장기 같은…… 형체가 이미 존재하는 것엔 면으로 펴 바르든 점을 찍든 선을 찍 긋든 난이도가 평이하니 모르신 걸 겁니다. 저 차이는 외부로 발현할 때만 체감되는 부분이니까요.”
“그렇군요.”
“그렇습니다. 그럼 다시 설명으로 돌아가서, 마력은 점이나 선으로 응집하는 게 면을 이루는 것보다 더 쉽네. 물론 밀도를 일정 이상 넘기면 이쪽도 까다로워지지만…… 아무튼 그렇네.”
“으음, 으음. 그게 공격 기술이 없는 거랑 뭔 상관이지?”
“하면 생각해 보게. 10의 힘을 1씩 분산하여 10군데에 맞는 것이 아픈가, 한군데 몰아 맞는 것이 아픈가?”
“한군데 몰아 맞는 게……?”
“그것 때문에 마력이 보다 공격적으로 발달한 것이고, 신성력이 방어적으로 발달한 것일세. 서로 기질이 너무 다르니까.”
신성력을 이용한 공격기가 없는 건 역사 탓도 있다며 아크메이지는 다른 이야기도 해 주었다.
다만 역사에 대한 사설이야 시험 칠 거 아니니 재밌긴 했어도, 내용 자체는 크게 중요하지 않았다.
오히려 슬쩍 엿들은 입장에선 다른 게 더 궁금했다.
일점사가 안 된다면 그냥 면 그 자체를 이용해 공격하는 수는 안 되나? 망치 같은 둔기도 따지고 보면 면을 이용한 공격이잖아.
“그, 신성력이 면을 이루는 게 특징이라면…… 그걸로 찍어 누르거나 하는 건 안 됩니까?”
그래. 데브 말대로.
“그건…….”
아크메이지가 데브 말에 잠시 말문이 막혔다. 이론을 아는 것과 별개로 신성력 자체는 다룰 줄 모르니 섣불리 가능성을 논하기 싫은 듯한데…….
“안 되나?”
“…아니, 될 것 같다.”
반대로 유일하게 신성력을 쓸 줄 아는 이가 딱딱히 굳었다.
굉장한 충격을 받은 것처럼 뚝딱거리는 게, 만화였으면 느낌표 이펙트를 배경에 깔고 있을 거다. 귀엽고 웃기다.
“고!”
거기에 감사 인사 하려다가 데브 얼굴 보고 딱 멈춰서 “맙다…….” 부분을 작게 말한 것까지 진짜 웃기고 귀엽다.
“뭡니까, 그런 힘 빠지는 인사.”
“감사 인사다.”
“아니, 힘이 빠졌잖아요.”
“문제 있나.”
거기에 화제가 돌아간 바람에 기죽었던 것도 사라졌으니 원.
나는 새어 나오려는 웃음을 꾹 참으며 말을 재촉했다. 아웅다웅하는 만두 두 명과 아크메이지의 설명을 여즉 이해 못 해서 끙끙대는 버서커가 내 양옆으로 지나갔다.
* * *
운 좋게도 그 이후론 도적 떼를 만나지 못했다. 오히려 순찰을 마치고 돌아가던 경비대와 마주침으로써 공짜 호위도 받았다.
무력으로 고용된 우리의 일이 덜어진 건 덤이다.
“하하, 휴델렌에 오신 걸 환영합니다.”
그리고, 끝내 도시 입구에서 경비대가 그런 말을 했을 때.
동서를 잇는 지대답게 정말 크고 발달된 도시가 내 눈에 들어왔다.
“…아름답습니다.”
“그런 말 많이 듣습니다. 세계에서 손꼽히는 도시다운 풍경이라고들 하더군요.”
뭔가 빠진 것 같은데. 그런 생각이 들긴 했으나 금세 흩어졌다.
대신 나는 인퀴지터가 그러하듯, 풍경을 두고 감탄을 삼켰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뒤로 보이는 산세와 절벽 단면을 통째로 개발하여 세워진 건물들, 그 사이로 종종 흐르는 물길, 도시의 중심이자 가장 아랫부분에 고인 호수까지.
절벽에 난 길로 이동해야 도시에 진입할 수 있단 말을 들었을 땐 그러려니 했는데, 지금 보니 가장 판타지 세계다운 전경이었다.
아름다움을 두고 경비대가 자부심 가질 만하다.
“이 도시에선 무슨 일 없겠죠?”
그러나 그 아름다운 세계를 두고 데브는 감탄하기보다 경계만 했다. 도시에 들르는 족족 사건 사고가 터졌으니 이해 못 할 반응은 아니었다.
“이곳엔 어떤 강자들이 있을지 궁금하군!”
버서커의 말은 애초에 들을 필요도 없고.
“설마 무슨 일이 있겠나. 자, 의뢰는 끝난 듯하니 길드에 보고만 하고 헤어지면 될 것 같네.”
마지막으로 아크메이지는…… 플래그를 꽂았다.
내 시선이 잠시 그녀에게 닿았다가 말았다. 도착한 첫날은 안전하리라 믿고 푹 쉬기나 해야겠다.
“다음에도 꼭 저희 의뢰를 받아 주세요!”
우리는 이런저런 절차를 거쳐 서둘러 도시를 가로질렀다.
교역과 그로 인한 의뢰가 잦은 만큼, 모험가 길드도 교역소와 붙어 있어서 동선이 낭비될 일은 없었다.
정작 제일 중요한 숙소(신전)와 마탑의 위치가 정반대긴 했지만 말이다.
“신전은 맨 꼭대기고, 마탑은 맨 하층이라니. 괴랄한 위치 선정입니다요.”
“신전은 원래 높은 곳에 위치하는 경우가 많다.”
“누가 그걸 몰라서 묻습니까?”
“흠! 신전과 마탑 사이를 몇 번 왕복하다 보면 운동이 될 것 같군. 좋은 도시야.”
근데 이걸 운동이랑 연결 짓는다고? 싸움광인 것과 별도로 저 근육이 괜히 나온 게 아니었다.
“…베르세르크 나리는 진짜 다른 의미로 광기에 젖은 것 같습니다요.”
“베르세르크는 미치지 않았다만.”
“그런 의미로 말한 건 아닌데…… 기분 나빴으면 사과드립니다.”
“좋다. 그 사과 받아 주겠다.”
광기란 단어에 버서커가 드물게 정색했다. 그에 찔끔한 고기만두가 바로 고개를 숙였다. 그제야 버서커의 표정이 평소의 호쾌함으로 풀어졌다.
“내일 마탑까지 왕복하는 데 함께한다면 말이다!”
“으엑!”
오히려 너무 풀린 것 같기도 하다. 나는 버서커가 데브의 어깨에 팔 두르는 걸 외면했다.
난 안 낀다. 너희끼리 해라.
“단련입니까? 저도 함께하겠습니다.”
“으핫! 좋다! 너도 역시 전사였군!”
나는 아찔해질 정도의 경사를 살피며 속으로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정면으로 올라가는 계단을 놓자니 너무 가팔라서 가로 방향으로 지그재그 올린 도시인데 이걸 왕복한다고? 가능이고 자시고 그런 고행을 왜 해.
경사진 곳 오르는 게 너무 싫어서 등산도 안 하는 사람이 나라고!
“악마기사! 너도 함께하자!”
“꺼져라.”
앗, 너무 싫어서 척수반사적으로 대답을 해 버렸다. 그렇지만 말을 주워 담진 않겠다.
나한테 등산 시키지 마라.
“왜지? 너는 다른 방식의 훈련을 선호하는가?”
아니, 나 훈련 딱히 안 하는데…… 스킬을 좀 더 세밀하게, 다양한 방법으로 응용하고자 그 부분은 가끔 연습하지만.
웨폰마스터가 힌트 아닌 힌트를 던지고 간 후에는 그 부분을 집중적으로 공략하고 있기도 하고.
그렇지만 안 한다고 말해서 저 우악스러운 운동에 동참하고 싶진 않다. 그 이전에 대답하는 거 캐붕이다.
나는 버서커를 외면하며 앞으로 나아갔다. 신전이 너무 잘 보여서 길 잃을 걱정 없다는 게 다행이다.
“아, 악마기사. 내가 말 안 했나? 자네, 오늘 마탑에 가야 하네.”
…그렇다고 저 아래까지 내려갔다 와야 한다는 미래가 바뀌진 않았지만.
아니, 어째서! 어째서엇!!
“너무 기분 나빠 말게. 맹렬한 흰바람이 봉인구에 대해 점검하고 싶은 게 있다고 부른 것이니.”
흐아아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