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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인공이 컨셉충이면 곤란한가요-107화 (107/389)

◈107화 머나먼 땅으로 (1)

“이게 맞는 겁니까?”

“너도 어제 찬성하지 않았나?”

“그건 그런데. 기사 나리가 영 질색인 것 같은뎁쇼.”

“…그, 건.”

아냐. 괜찮아. 파티에 들어올 거 알고 있었는데 뭐. 이게 운명이란 걸 알고 있었는데 뭐.

“잘 부탁한다! 으하하!”

비록 내 귀는 앞으로 안전치 못하겠지만…….

농담이고, 싫어하는 건 컨셉이지 나 자체는 괜찮아하니까 너무 오해는 말아 줄래.

엮이지 말아 달라고 지금까지 염불 외웠으면서? 하고 물을 수도 있긴 한데, 나 진짜 베르세르크 본인을 싫어하는 건 아니거든.

그냥 내향인이 외향인 친구를 사귄 느낌? 아니면 난데없이 비글을 분양받게 된 애견인의 심정? 대충 그런 느낌에 가깝다.

좀 피곤해도 싫은 건 아닌, 그런 미묘한 감정 있잖아. 친구가 없는 사람은 모르겠지만.

어쨌거나 그런 사유에서 나 베르세르크 싫어하지 않는다.

아니, 솔직히 내가 당사자가 돼서 흐악 하는 거지 소년 만화에는 자주 나오는 성향이라서 오히려 익숙한 면도 있고?

베르세르크는 너무 기니까, 데브처럼 버서커란 애칭을 붙여 줄 정도의 호감은 있다. 진짜로.

해서 나는 와하하 웃는 버서커를 두고 조용히 의자에 몸을 기댔다.

웨폰마스터는 왜 안 보이나 싶다마는 어련히 알아서 하겠지 싶다.

오히려 내 관심사는 다음 지역이 어딘가인데. 신규 파티원도 들어왔겠다, 다음은 좀 가볍게 갔으면 좋겠다.

이동하며 취한 휴식도 많고, 사건을 해결한 뒤에는 충분히 쉬기도 하는데…… 그래도 좀 가볍게 보내고 싶어.

* * *

우리는 이틀을 더 도시에서 보냈다. 경과를 지켜보기 위함이었는데 결과적으로 추가적인 침공이 있진 않았다.

전투에 소모된 악마의 수를 생각하면 나름 납득 가는 사항이었다. 대악마의 저력을 정확히 모르는 이상 마냥 안심할 수도 없긴 하지만.

“지금 출발하는 게 나을 것 같네.”

그러나 그렇다고 언제까지 이곳에 남아 있을 순 없다. 그런 점에서 아크메이지의 발언은 나로선 참 반가운 소식이었다.

“벌써요?”

“흠. 그거 아쉽군. 악마기사와 제대로 싸워 보고 싶었는데!”

예비 봉인구도 오늘 아침에 총알 배송으로 날아왔거니와 지난 이틀간, 버서커가 심심하다며 틈만 나면 결투 요청을 했거든.

전투가 막 끝난 다음, 결투의 기역 자도 안 꺼내길래 안심했었는데 말이지. 역시 어김이 없었다.

“댁은 지치지도 않습니까.”

별개로 이틀간 버서커가 의외로 대하기 쉬운 사람임을 안 데브가 옆에서 입을 털었다. 버서커의 눈이 잠깐 동그래졌다가 금세 우하핫 웃었다.

“베르세르크를 지치게 만들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다!”

아니, 제발 지쳐 줘. 나는 지쳤다고.

“악마기사께 너무 폐를 끼치지 마십시오.”

“응? 내가 그에게 폐를 끼쳤나?”

“억지를 부리고 계시잖습니까.”

“베르세르크가? 억지를 부렸다고??”

그래도 인퀴지터랑 데브가 둘이서 버서커를 말려 줘서 참 다행이다.

버서커가 워낙 막가는 사람이라 그런가, 인퀴지터가 갑자기 사회생활 마스터로 보이는 건 다소 당황스럽지만 말이다.

“다들 많이 친해진 것 같구만.”

아크메이지 양반은 의외로 버서커를 통제하는 데 스트레스를 안 받는 듯하다.

하긴, 싸움에 관해 말이 안 통해서 문제지 평상시 대화가 불가능한 케이스는 아니었더랬다. 그걸 고려하면 아크메이지는 편할 수밖에 없겠지. 버서커 어그로는 내가 다 끌고 있으니까…….

오히려 한층 더 심해진 ‘몸 상태 괜찮냐’, ‘봉인구엔 진정 문제가 없냐’ 러쉬를 포함하면 그냥 내가 제일 고생인 것 같다. 정말이지 양쪽 다 자비 없네.

“자 자, 그렇지만 너무 지체하진 않는 게 좋겠네. 내 이야기 좀 들어 주지 않겠는가?”

“혹 다른 도시에서 구조 요청이 왔습니까? 이리 급하게 발언하시는 걸 보니 문제라도 있는가 싶어…….”

“아, 그런 건 아닙니다. 다만 제가 제시하려던 목적지와 경로가 일치하는 의뢰를 발견해서 말이지요.”

아크메이지는 의뢰에 대한 이야기는 일단 미뤄 두자고 한 뒤, 목적지에 대한 이야기를 먼저 꺼냈다.

“일단 저는 다음 목적지로 휴델렌을 제시하려던 참입니다.”

“휴델렌 말입니까.”

“예. 동부로 넘어가려면 거의 반드시 거쳐야 하는 도시지요.”

그녀는 지도를 꺼내 우리가 있는 곳을 찍었다. 그러곤 손가락을 지도상 동쪽으로 움직였다. 거의 수직으로 뻗은 산줄기가 그곳에 있었다.

“카릴 산맥을 넘어갈 수 있는 위치는 한정되어 있습니다. 물론 우리 일행이라면 카릴 산맥의 험준함 따윈 전혀 문제없겠습니다마는, 굳이 어려운 길을 선택할 필요는 없겠지요.”

아크메이지는 다음으로 손가락을 남쪽으로 살짝 내렸다. 산맥 중간쯤에 위치한 도시: 휴델렌이 그녀의 손가락에 가려졌다.

“그러니 휴델렌입니다. 산줄기가 가장 가늘어지는 지점에 위치해 있어 본래도 동서를 잇는 도시로 이름 날린 곳이니까요.”

그녀 혼자 결정지어 놓고 반강제적으로 유도하는 거 아니냐고 말하기엔, 사유가 너무 타당한 선정이었다.

다른 거 다 필요 없고 험한 산 넘어서 동부로 가느니 그냥 돌아가고 만다.

“목적지가 휴델렌인 이유는 알겠습니다. 한데 의뢰라 함은…….”

“호위 임무입니다.”

“아.”

심지어 딱 그쪽으로 가는 호송 퀘스트가 있다? 이건 놓치기 싫을 만하지. 좀 찝찝하긴 해도 일은 마무리된 듯한 참이고, 겸사겸사 돈도 벌 수 있다면 거절할 이유 뭐 있겠나.

“그리다나 상단이 다른 도시로 이동하려는 모양입니다. 추가 공격 걱정은 거의 던 상태지만, 상단 입장에선 또 다르니 말입니다.”

상단에서 먼저 요청한 거라 거절해도 승낙해도 아무 상관이 없는 상태라며 그녀는 선택권을 넘겼다.

말이 주도권 이양이지 사실상 인퀴지터에게 묻는 말이었다.

나나 버서커는 악마, 또는 싸움만 있다면 뭐든 상관 없고, 데브는 목적지나 가는 방식에 관여할 의향이 없어 보였으니까.

“벌써 떠나도 되는가 싶긴 합니다만…….”

그러나 인퀴지터는 무언가 찜찜한 모양이다. 하기야 전투는 끝났어도 추가 침공의 여지가 있다. 성벽이나 도시 재건이 완벽히 이뤄지지 않은 마당에 대악마는 언제 또 수작을 부려 올지 모르고 말이다.

부정부패 청산을 남은 자들에게 맡기는 것과는 완전히 다른 맥락이었다.

“음.”

아크메이지도 그 마음을 이해하는지, 조금 굳은 얼굴을 했다.

“인퀴지터, 사실 지금 떠나고자 하려는 건 의뢰 때문이 아닙니다. 마탑과 신전의 조력이 있는 이상 돈이 궁한 입장은 아니지 않습니까. 다양한 경험을 위해 권유했던 것이지.”

“예, 그건 알고 있습니다.”

“지금 떠나려는 건, 불안함 때문입니다.”

그녀는 그리 말하며 나를 보았다. 불안함이란 단어 때문인가. 나는 깨진 봉인구가 생각났다. 그거랑 대악마 때문에 그러나?

“대악마가 나타난 것 때문입니까.”

“그런데 결과적으로 나리가 이기지 않았어요?”

“대악마가 나타났었나??”

각자의 반응에 아크메이지가 고개를 살짝 저었다.

“대악마를 고려한 건 맞으나, 약간 다르다네. 내가 가장 중심적으로 본 건 대악마가 ‘어떻게 알고’ 왔느냐니까.”

“그건…… 예측한 게 아니겠습니까요?”

“가능은 할걸세. 우리의 진행 경로를 보면 의도는 명백한 편이니까. 다만 날짜가 정확히 맞아떨어진 건 이상하지.”

아크메이지는 그리 말하며 도시 곳곳을 거론했다. 파 에녹과 거의 비슷한 경도의 도시들이었다.

“우리가 동쪽으로 간다는 건 예상할 수 있네. 그러나 이 많은 도시 중 우리가 갈 곳을 정확히 예측한 건 좀 이상하지 않나? 하물며 우리는 신전이나 마탑에도 목적지를 알리고 움직이지 않는데.”

“확실히…….”

정보에 한해선 아크메이지만큼 똘똘한 데브가 고개를 주억였다.

“하지만 목적지를 명확히 지목하지 않았을 뿐, 관련된 소문을 수집한 건 감안해야죠. 마탑이나 신전, 모험가 길드. 마지막으로…… 정보길드에 끄나풀이 있는 건 염두에 둬야 할 겁니다요.”

“자네 말이 맞네. 그러나 지금 중요한 건 우리가 이곳에 왔다는 사실을 악마들이 알았다는 점이지.”

“…추가 공세를 걱정하시는 겁니까요?”

“내가 걱정하는 건 추가 공세 따위가 아닐세. 그 이상의 것이지.”

아크메이지는 그 이상 말을 잇지 않았다. 해서 추가 공세를 ‘따위’로 만들 게 무엇인지 내가 알아서 추측해야 했는데…… 아크메이지가 무서워할 게 뭔지 소거법으로 하나하나 배제해 보니 금방 답이 나왔다.

나야 메타적인 요소로 최종보스가 나서지 않을 걸 확신하지만, 그런 확신이 없는 아크메이지 입장에선 사탄도 의식 대상이다.

“저, 그. 아크메이지님의 말씀을 잘 이해하지 못하겠습니다. 끄나풀들이 저희의 정보를 전달한 것과 도시를 떠나야 하는 게 무슨 상관입니까?”

“…일종의, 함정일 수 있다는 것이지요. 저희가 이곳에 올 걸 알고 이번 공세를 준비했을 경우, 실패했을 가능성을 설마 대비 안 했겠습니까.”

“하면 더욱 이곳에 남아야 하는 것 아닙니까? 저를 노리고 추가 공격을 한다면…….”

“그건 안 됩니다.”

함에도 그걸 입 밖으로 발언하지 않은 건 바로 이런 점 때문일 것이다.

사탄이 이곳으로 온다는 건 이 도시가 멸망할 가능성이 크단 이야기인데, 인퀴지터가 그걸 알고도 물러날 리 없지 않나.

“인퀴지터, 이번에도 신성력을 과하게 사용하며 쓰러지지 않으셨습니까. 만약 적들이 그런 점을 노리고 군세를 여러 번 나누어 쳐들어온다면 위험합니다.”

“그, 그래도 저번보단 나아졌는데. 이번엔 하루 내내 까무러쳐 있지 않았습니다. 몬타타 섬에서 잔 기간보다도 덜 자고 일어났고요.”

“압니다. 그러나 대악마들이 연속으로 쳐들어온 상태에서도 그러실 수 있으십니까?”

“그건…….”

“적들에게 시간을 주면 줄수록 더 위험합니다. 북부전선에 있는 악마들이 남쪽으로 내려오고 있을지 어떻게 압니까.”

아크메이지는 지팡이를 쓰다듬고는 처진 인퀴지터를 살살 타일렀다.

“반면 용사가 일찍 떠나 버리면 놈들도 움직이지 않겠지요. 목적이 사라진 이상 무리해서 움직일 이유 없으니까요.”

다만 이렇게 되면…… 왜 이틀 전에 출발하지 않았냐는 건데. 체력 회복 때문에 그런가? 하긴 그 상태에서 도시를 나갔을 때 매복이라도 마주치면 고역이었겠지.

“어, 음. 무슨 말인지 베르세르크는 잘 모르겠다…….”

그사이 버서커가 완전히 격침되어 책상에 늘어졌다. 내가 학생 때 수학 포기하고 드러누웠을 때의 모습과 동일했다.

뭐어, 그렇다고 버서커의 입장이 이해가 안 가는 건 아니다. 합류한 지 얼마 안 된 만큼 이쪽 사정을 잘 모르잖아. 예전에 합류했어도 머리 아파했을 거란 생각은 좀 들지만.

“애초에 이 도시에 온 목적이 달성된 만큼, 가는 게 맞습니다. 더불어 나태의 대악마를 퇴치하는 방법도 찾아야 하는 상황 아닙니까? 이번에야 우연이 겹쳐 막아 냈지만, 우린 아직 그 대악마에게 피해 입히는 방법을 모릅니다.”

아크메이지는 포기하지 않고 인퀴지터를 살살 설득했다. 저 구실들마저도 빙산의 일각에 불과할 것이나, 결국 넘어가는 건 인퀴지터였다.

“그런 상황이라면…… 제가 반대할 수 없는 노릇이겠지요. 알겠습니다. 전…… 아크메이지님의 판단을 따르겠습니다. 다른 분들은 어떠십니까?”

“베르세르크는 복잡한 게 싫다. 갈 거면 가고 가지 않을 거면 말아라.”

“전 상관없습니다요.”

“하면 내일 아침 출발하는 것으로 하겠네. 다들 알아 두게.”

인퀴지터가 조금만 더 노련했다면 아크메이지가 일부러 언급하지 않고 넘어간 가능성을 짚었을 테지만…… 지금은 아무래도 어려운 듯하다.

그렇다고 내가 그걸 말해 줄 수도 없고. 기실 말해 줄 수 있는 입장이었더라도 덮었을 거고.

“악마기사, 자네는 나와 함께 가지. 길드에 가야 하지 않나.”

해서 나는 아크메이지의 부름에 따라 일어섰다.

파티로 묶여 등록된 아크메이지·인퀴지터와 다르게 나는 개별로 길드에 적을 올린 상태라 계약을 따로 맺어야 하는 까닭이다.

이럴 때마다 길드에 들러야 하는 건 좀 귀찮지만 파티에 이름을 올리는 건 캐붕이니까 그냥 감수하고 있다. 별도로 의뢰를 맺는 거다 보니 보수가 따로 책정돼서 마냥 손해도 아니고, 이럴 때 자리 피할 수 있는 것도 꽤 쏠쏠해서.

“잠깐!”

그때 누군가가 찾아왔다. 막 숙소의 문을 걷어 낸 참이었기에 모두 방문자의 존재를 알 수 있었다.

“할 말이 있어서 찾아왔는데. 시간 좀 되려나……?”

팔 한쪽이 허전해진 칸칸이었다.

“뭐냐.”

“일단, 밤 늦게 찾아온 건 먼저 사과할게. 그, 엿들으려고 엿들은 건 아니고! 아까 상단이랑 의뢰 이야기 나누는 걸 봐서…… 음, 내일 출발할 수도 있다고 생각하니까 그 전에 인사해야겠다 싶었어.”

그는 갈기를 닮은 머리카락을 복복복 긁으며 머쓱한 얼굴을 했다.

“고마워, 다들. 특히 너…… 너한테 정말 고마워. 덕분에 내 친구를 막을 수 있었어.”

그러곤 끝내 고개를 숙였다. 고맙다고 말하는 게 익숙하진 않은 듯─대충 내 나이 되어 보이는데 심정은 대충 이해가 갔다. 나이 먹으면 고맙다란 말 하나가 그렇게 어렵더라. 그걸 이겨 내면 참 쉬워지지만─숙인 고개 사이로 보이는 귀가 붉었다.

“뭐어…… 전 한 것도 없는뎁쇼.”

“아냐, 네가 아니었으면 난 그 녀석을 멈추지 못했을 거야. 이 팔만 해도 그 증거잖아? 내가 녀석을 이길 수 없었다는 증거. 반면 너는…… 그 녀석의 목을 멋지게 그어 버렸고.”

근데 칸칸의 친구면 무왕일 텐데. 칸칸이랑 데브 둘이서 무왕을 죽인 거였어? 베르세르크가 도와준 게 아니라?

이런 말은 없었잖아!

“댁이 시선 끌어 줘서 가능했던 건데요, 뭐.”

“으하하, 하여간 어린 사냥꾼은 참 부끄러움이 많다니까. 자신해도 좋다, 어린 사냥꾼! 그놈은 전사이길 포기했지만, 그럼에도 약한 건 아니었어. 넌 그 녀석의 기감을 뚫고 공격에 성공했던 거고!”

“베르세르크 말이 맞아. 한 번 찔렀던 존재를 두고 또 한 번의 암습을 해내는 건 결코 쉬운 일이 아니라고.”

나는 배신감을 느꼈다. 너, 너…… 베르세르크가 다 했다고 하더니. 뭐야 이게! 내숭 부릴 게 있지, 이런 걸 축소하면 어떡해!

“어쨌든, 고마워. 저 친구 말고도, 당신들 모두 다.”

하여간 성벽 전체를 축복해 놓고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이라며 겸손하게 구는 인퀴지터나, 무력적으론 기대 안 했는데 중간보스 내지 보스로 예상했던 녀석을 잡은 데브나.

우리 만두들 너무 맡은 바 일들을 잘해 내서 대견하다. 애들 나이 생각하면 조금 눈물도 나지만. 흑흑.

“이건 고마움에 대한 답례야.”

그사이, 칸칸이 뼛조각 팔찌 비스무리한 걸 내밀었다.

엄밀히 따지면 그가 의뢰한 일도 아니고, 엄연히 전쟁 도중 벌어진 배신자를 처단한 일에 불과하지만…… 심적인 빚은 갚고 싶었던 듯하다.

“별건 아니지만, 내 고향에선 은인한테 이런 걸 주는 풍습이 있거든. 그러니까 이건 일종의…….”

“증표다. 노르다 전사가 인정했다는 증표. 베르세르크가 함께하는 이상 노르다 전사들이 적대할 일은 없겠지만, 이걸로 더 적대할 일이 사라졌군!”

“베르세르크 말이 맞아.”

버서커가 낄낄 웃으며 받으라고 데브를 쿡쿡 찔렀다. 물론 칸칸은 우리 모두의 몫을 전부 챙겨 왔기에 데브만 받는 일은 없었다.

단지 데브가 제일 많이 받았을 뿐이지.

“뭐, 뭐 이렇게 많답니까.”

“너 덕분에 무왕으로부터 살아남은 놈들이 많잖아. 그 녀석들이 너한테 신세 갚겠다고 벼르고 있는데 네가 영 보이질 않아서…… 내가 대신 전달해 주기로 했지.”

“그, 그래도 이건 너무 과한데.”

“받아 둬.”

타타라에서 내가 보따리를 선물받았듯, 데브 역시 선물 보따리를 받았다.

받으면서도 ‘제가 이걸 받아도 되는지’나, ‘다른 사람들이 더 고생했는데’ 이러면서 공을 살살 돌리는 게 이런 상황이 정말 안 익숙한 모양새였다.

그만한 공을 세웠다면 당연히 받아야지 싶었기에 말리는 사람은 없었지만.

“자, 악마기사. 당신도 받아.”

“필요 없다.”

“당신은 특히 더 받아 줬으면 하는데…… 노르다 전사들이 멋모르고 당신을 적대시하다 죽는 일이 없었으면 하거든.”

“…….”

뭐, 나라고 피해 가는 건 아니었다.

선물 보따리가 아니라 팔찌 하나라서 다행이랄지, 이마저도 달갑진 않달지. 무슨 훈장 모으기도 아니고.

차라리 명예 칭호로 쥐어 주면 편할 텐데, 아이템으로 주니까 악성 재고만 늘어 간다.

“그럼, 훌륭한 전사들의 앞날에 훌륭한 투쟁이 있기를.”

그래도 받아는 뒀다. 이미 받을 대로 받았는데, 여기서 하나 추가되는 것 정도야.

* * *

“으, 더워어.”

칸칸과 작별 인사 비슷한 것도 했겠다, 도시에서 할 일도 없겠다.

반면 가야 할 이유는 많다. 해서 우리는 미련 없이 호위 임무와 함께 도시를 떠났다.

“하하, 이 부근 더위가 다소 살인적이긴 하죠.”

다만 호위 임무라고 해도, 짐을 보호해야 할 일은 별로 없었다. 사막이란 게 원체 악마도 짐승도 없는 땅이라서 가능한 일이었다.

사막에서도 도적질하는 양반들이야 물론 있긴 한데, 자주 마주치는 건 아니니까 미뤄 두고.

여기서 제일 큰 적은 역시 자연이었다. 예컨대 살갗을 두드리는 태양 빛과 열기, 가끔 부는 모래 폭풍 말이다.

“물이라도 좀 드시렵니까?”

“아, 감사합니다.”

뭐, 나는 그나마 더위를 안 타서 버틸 만했다. 더위를 심하게 타는 데브가 문제지.

아크메이지가 얼음을 만들어 주면 좀 낫겠지만 그건 10분 전에 이미 누린 혜택이다.

만일의 사태를 대비해 마력을 아껴야 하는 그녀인지라 다시 부탁하긴 그렇다. 저번에도 말했지만 사막에서 얼음을 만드는 건 마력 소모가 꽤 큰 작업이었다.

“으으.”

그러다 보니 데브는 낙타 위에 축 늘어진 채 간간이 주어지는 물만으로 상황을 견뎌야 했다. 마음 같아선 더위 일부를 받아 가 주고 싶은데, 그건 안 되더라.

“나약하긴.”

“갑옷빨 덕에 버티는 거면서…….”

“아, 아니다!”

음, 아. 갑옷빨 하니까 생각난 건데 나한테 아직 해룡이 준 아이템 하나 남지 않았나?

그 구슬에도 혹시 물의 힘이 있다면…… 근데 애가 지금 많이 뽀스라져 있어서 될지 안 될지 모르겠다. 무엇보다 이게 돼도 이것까지 내주는 건 역시 캐붕일 것 같아서. 사막 지역 다 끝났는데 이제 주는 것도 좀 웃기고.

미안하다, 데브야. 악으로 깡으로 버텨라. 네가 선택한 길이다.

“하하…… 그래도 이틀만 더 가면 카릴 산맥이니까 더위는 좀 가실 겁니다. 조금만 더 버티세요.”

“네엡.”

다행히 카나베스에서 파 에녹으로 왔을 때보다는 사막에 머무르는 날짜가 적다. 데브도 그 사실을 듣고 그나마 밝은 얼굴을 했다.

“흐아암. 지루하군. 사막은 너무 황량한 곳이다.”

한편 버서커는 다른 의미로 축 늘어졌다. 그녀도 데브와 비슷한 수준으로 더위를 탔으나, 정작 그녀를 괴롭히는 건 따분함이 더 큰 듯하다.

“사냥할 것이 아무것도 없군.”

사냥할 게 나오면 버서커는 즐거울지 몰라도 상단 사람들은 비명을 지를 텐데.

나는 차마 맞장구치진 못하고 어설프게 웃기만 하는 사람들을 보았다. 하여간 고생이 많다.

“휴델렌에는 재밌는 일이 있나?”

“일단 들은 건 없네. 자네는 뭐 아는 거라도 있나?”

“저도 별로…….”

데브가 고개를 힘없이 휘젓곤 상단 사람들을 가리켰다. 저 양반들도 소식엔 빠삭할 테니 저쪽에게 물어보란 의도 같다.

그러나 그들에게서도 별다른 정보는 나오지 않았다. 애초에 별일 없으니까 그쪽으로 가는 거겠지만 말이다.

아무렴, 저 양반들이 사냥꾼도 아니고 사건 사고 있는 도시에 갈 이유가 뭐 있겠어. 이번처럼 상품 날려 먹을 가능성만 농후한데.

“음?”

그때 버서커가 고개를 힐끗 들었다. 늘어져 있던 몸이 허리를 꼿꼿이 펴자 아크메이지만큼 높은 시야가 나온다.

그녀의 호박안이 전방을 세밀히 주시하기 시작했다.

“…싸움의 냄새가 난다.”

덩달아 나도 전방을 뚫어져라 노려보았을까. 지평선 쪽의 먼지구름을 발견했을 때 버서커가 대뜸 그런 말을 내놓았다. 심심함에 젖어 있던 얼굴이 점차 활기를 띠었다.

“잠깐, 자네…….”

“전방의 마적 떼! 이쪽으로 옵니다!”

버서커의 몸이 들썩임과 동시에 축원경을 손에 들고 있던 이가 외쳤다. 버서커를 말리려던 아크메이지가 뻗었던 손을 냉큼 회수했다.

법사의 눈은 ‘저걸 어떻게 알았지?’ 정도의 심상을 띠고 있다. 나도 인정하는 바였다. 눈이 좋은 것 같진 않고, 직감이 진짜 짐승 수준이다.

“으하하하! 투쟁이다!”

“…부탁함세.”

별개로 어떤 퀘스트든 그냥 넘어가는 일이 없지, 하여튼.

나와 버서커를 태운 낙타가 일행을 벗어나 앞으로 질주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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