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3화 존재하는 (5)
[아.]
차라리 저 악마 놈을 두고 다른 데로 가 버리는 게 맞지 않을까. 인퀴지터가 안 온다면 내가 먼저 그쪽으로 가면 되는 거 아닐까.
그런 생각마저 들던 찰나, 듀크가 고개를 틀었다. 듀크의 시선은 싸움이 이는 듯한 도심지를 향해 있다.
[너랑은 더 이상 못 놀아 주겠네.]
놀아? 놀아아아?
확실히 듀크 입장에선 내 날뜀만 구경한 입장이니 놀이라고 해도 이상할 건 없는데, 너무 얄밉다. 얄미워 죽겠다.
격노 발휘될까 봐 화는 못 내겠지만, 정말 괘씸하다고!
“버러지가……!”
[제물이 허용하는 몽중몽의 한계치도 다한 것 같고…… 하. 역시 잔소리고 뭐고 나서지 않는 건데. 이게 뭐야. 몇십 년간 모아 왔던 악마들만 잔뜩 잃어버렸잖아.]
몽중몽이니 모아 온 악마들이니 뭔가 중요한 단서들이 지나갔지만 나는 그보다 다른 것에 욱했다.
[본체까지 강림하기엔 내가 너무 손해겠지? 그래. 안 그래도 용사랑은 상성이 안 맞는데, 그레트헨까지 이 모양이니 강림해 봤자 뭔 소용이겠어. 차라리 잔소리 듣는 게 낫지.]
너, 너어어어. 이번은 이벤트 때문에 대미지 하나도 못 주고 끝냈지만 다음은 다를 거다.
본체를 숨긴 거든 뭐든 간에 스토리상 무적 버프 풀리는 순간 너어어는 진짜……!
[아냐, 오히려 전진이 막혀 버린 지금이 더 좋을지도? 전선이 넓어지면 신경 쓸 곳만 늘어날 뿐인데. 현상 유지야 말로 최선이 아니겠어. 응응. 전선이 넓어진다고 인간들이 발악을 그만둘 것도 아니고.]
나는 또 한 번 검을 휘둘렀다. 지금까지 계속 검을 휘둘러 오긴 했으나 지금은 특별히 더 마력을 담은 일검이었다.
끼이익.
쇳소리가 어렴풋이 귀에 울리며 검격이 날아갔다.
[자, 그러니 지금 엿들은 말, 그대로 지휘관에게 전달 좀 해 줘. 응? 난 지금 상태가 딱 좋으니까 이대로만 가자고. 겸사겸사 너도 저얼-대 그레트헨 놓아 주지 말고? 그래야 내가 면이 사니까.]
“이 쓰레기가─.”
[난 이곳에 눌러앉을 수 있어서 좋고, 너흰 날 막을 수 있어서 좋고. 둘 다 윈윈이잖아.]
서걱!
역시나, 통하지 않았다. 나는 푸스스 흩어지기 시작하는 안개를 두고 얼굴을 와락 일그러트렸다.
안개 사이로 지금껏 내 분풀이성 참격에 잘려 나간 악마들의 잔해가 보여도 마찬가지였다.
[알았지? 꼭 전해 주기다.]
저놈만 아니었어도 내가 죽일 수 있던 악마가, 구할 수 있던 사람들이 얼마나 많았는데……! 회피판정도 안 나서 회피반격을 통한 약점표기도 안 되고 진짜!
콱!
서서히 공중으로 녹아드는 가루를 향해 또 한 번 검질을 했다. 당연히 통하지 않았다.
기어코 검은 가루 안개는 내 시야에서 몽땅 사라졌다.
쨍그랑.
동시에 무언가 깨지는 소리가 났다.
“버러지가……!”
음, 좀 심각한 소리가 들리긴 했는데 일단 검은 안 깨졌으니 나중에 확인해도 되겠지.
나는 그런 생각과 함께 주변을 좀 더 살펴보았다.
결과는 같았다. 그저 거의 끝나가는 성벽 위의 사투와, 여전히 치열한 도심 속 방어전, 그리고 정신만 너덜너덜해진 나뿐이 없었다.
듀크 이 자식. 진짜로 튀어 버렸다……!
“빌어먹을……!”
나는 듀크가 사라지자마자 득달같이 달려드는 가고일을 베며 이를 박박 갈았다.
마지막 공격에 마력을 박박 긁어 넣었더니 도심으로 뛰어갈 마력마저 없다는 게 더 짜증 났다. 격노 스킬 발동할까 봐 제대로 화도 못 내겠다는 점 역시!
“으아아악!”
“사, 살려 줘!”
“버텨!”
그렇지만, 정말 화가 나지만.
거의 끝물이란 게 진짜 끝났다는 소리는 아니기에.
아직 악마와 싸우는 이들이 남아 있으니까.
나는 이를 꽉 깨문 채 성벽에 붙은 악마들을 죽였다.
도심지로 가기엔 마력도 없거니와 가장 문제가 되었던 모래범 두 마리가 이미 죽어 버린 후였다. 누가 죽였는진 몰라도 이쪽을 먼저 신경 써도 될 것 같았다.
“비켜라!”
“……!”
잠시간 끊겼던 싸움이 다시 시작되었다.
칸칸과 데브가 어디로 쏙 사라져 버렸다는 것과, 인퀴지터가 괜히 날 구하러 오지 않은 게 아니었다는 거, 마지막으로 깨진 게 팔뚝의 봉인구였음을 알게 된 건 성벽 위 전투가 정리된 후의 일이었다.
* * *
한편, 아직 악마기사가 대악마와 전투를 벌이고 있을 때, 데스브링거는 검은 안개로 가득한 성벽을 보고 달려가려 했다.
그가 합류한다고 해서 악마기사의 안위가 나아지진 않겠으나, 그가 안 된다면 이단심문관이든 법사 나리든 도움이 될 수 있는 사람을 부르면 그만이지 않은가.
그러나 그렇게 떠나려던 순간, 뒤에서 벌어지는 일이 그의 걸음을 붙잡았다.
악마들이야 그가 대항할 수 없는 존재들이니 제쳐 두더라도, 칸칸과 무왕의 싸움이 너무 일방적으로 흘러간 것이다. 투기장에서 그러했듯이.
“너로선 안 돼!”
“빌어먹을.”
데스브링거는 몇 합 나누었다고 벌써 피를 흘리는 칸칸을 보았다.
이대로 가면 그가 성에 도달하기도 전에 칸칸은 죽임을 당할 게 분명했다.
그리고 자유로워진 무왕은 모래범 사냥에 나선 이들을 학살하겠지. 어떤 수를 썼는진 몰라도 무왕을 비롯한 배신자들은 악마의 타깃에서 벗어난 상태니.
또한 자길 가로막는 자들이 사라진 이상 모래범은 피난처로 쭉 향할 테며…… 그렇게 되면 전방 전선이 생존해도 도시는 무너질 수밖에 없다.
전선에 서는 건 병사와 투사, 모험가들이지만 도시를 유지하던 원동력은 시민들이었으므로.
배신한 자들? 전선이 무너진 시점에서 저들은 그들의 역할을 톡톡히 해냈다. 악마들과 어떤 거래를 했는진 몰라도 도망칠 길쯤은 열어 두었을 거다.
도시 하나를 몰락시켜 놓고 뻔뻔스럽게 살아 돌아갈 거란 말이다.
그것만은 참을 수 없다.
데스브링거는 자신에게 달려드는 창자벌레의 입에 칼날을 쑤셔 박으며 이를 아득 씹었다.
그는 심판받지 않고 살아남는 악인들이 제일 싫었다.
“나리, 버틸 수 있죠? 버틸 수 있을 거라 믿습니다요.”
악마기사는…… 괜찮을 거다. 지난날의 일로 그도 한낱 인간임을 알아 버렸지만 지금은 수가 달리 없다. 그의 고강함을 믿어야 했다.
혹은 이단심문관이나 아크메이지가 저 이상을 눈치채고 도우러 갔을 가능성을 믿거나.
“딱 한 놈만 죽이고 가겠습니다.”
하므로 그는 병 하나와 검 한 자루를 들었다. 더불어 호흡은 멈추고 몸은 그늘에 숨겼다.
칸칸이 팔 한쪽을 잘려도, 칸칸을 대신해 덤벼든 투사들이 무왕에게 죽어 나가도, 악마가 그의 바로 옆 공간에 솟아올라도, 모래범이 그가 있던 곳 옆옆 건물을 박살 내는 순간에도 말이다.
그리하여 그의 형상이 주변에 녹아들고 그가 사람이 아닌 한낱 그림자로서 존재하게 되었을 때.
그리고 칸칸이 마지막으로 쥐어짠 힘을 가지고 무왕과 칼을 맞대며 힘겨루기를 하던 순간.
그는 그늘을 벗어났다. 광조차 흐르지 않되 무언가가 묻은 검날이 무왕의 등을 정확히 찔렀다.
“흐흡!”
키 차이로 인해 대각선으로 올라갔지만 그게 오히려 낫다. 그는 간을 넘어 폐에 칼이 닿도록 최대한 손을 썼다.
노련하게 갈비뼈를 피해 간 칼날이 살점을 헤집다가 비틀어진 상태로 빠져나왔다. 마지막까지 상대의 목숨을 빼앗기 위한 집요함이 깃든 한 방이었다.
“이, 흡.”
그러자 말소리는커녕 바람 빼는 듯한 신음 소리만이 위에서 들려왔다. 제대로 찔렀다는 증거였다.
“피해!”
“……!”
그렇지만 이렇게까지 했는데도 기력이 남은 모양이다. 무왕은 칸칸과 검을 맞대는 한편, 골반을 살짝 틀어 뒤로 손을 휘둘렀다.
제 몸을 추스르지 않고 흉수를 잡으려 든 것이다. 칸칸은 그것을 알아채고 소리를 지른 것이고.
쾅!
몸을 빼려 했지만 늦었다. 그의 가슴팍을 무왕의 팔이 휘젓듯 후려쳤다. 둔중한 충격이 몸을 구르도록 만들었다.
“큿.”
부서진 건물 조각과 모래가 가득한 바닥을 두어 바퀴 돈 몸이 가까스로 균형을 되찾을까. 그는 얻어맞은 부위를 붙잡았다.
“…시발, 갈비뼈 금간 거 아냐?”
공격 성공 여부와 상관없이 몸을 뺄 수 있게 대비했고, 실제로 검을 뽑은 후 바로 움직였거늘 그걸 기어이 타격하다니. 분노가 대단한 건지 독기가 대단한 건지 모르겠다.
빗맞았음에도 고통스러운 걸 보면 무력은 최소한 괴물이 맞는 듯하지만서도.
“죽어!”
다행히 그가 몸을 추스를 시간은 칸칸이 벌어 주었다. 주요 장기가 찔린 무왕에게 가열찬 공격을 가한 것이다.
이 틈을 놓치면 더는 기회가 없을 거란 사고도 제법 영향을 끼친 것 같다.
“방해하지 말랬을 텐데!”
그러나 무왕은 무왕이었다. 무슨 수를 썼는진 몰라도, 호흡을 되돌리고 검을 맞댔다. 징그럽기 짝이 없는 양반이었다.
아니면 뭐, 악마랑 거래하면서 관련 혜택이라도 받았나? 그렇지 않고서야 인간이 내장을 찔리고도 저렇게 팔팔히 굴 수 없는데.
“널 막아 내기 전까진 절대 안 쓰러져!”
기실 징그럽긴 저쪽도 만만치 않다.
그는 빗맞은 한 방으로도 이렇게 힘든데 저 인간들은 팔이 잘리고 내장이 찔리고도 쌈박질을 이어 나가는 중 아닌가.
둘 다 마력 사용자라고 해도 좀 너무하다. 인종이 다른가?
“시간만 끌어요, 붉은갈기 나리!”
뭐, 정말 다르더라도 크게 상관은 없다. 속살이 강철로 이뤄진 게 아닌 이상 독은 통할 테니까.
그는 부정검 대신 비수 몇 자루를 쥐어 던졌다.
한 번 암습을 가한 만큼 쉬이 빈틈을 내주지 않을 터. 그걸 기다리느니 차라리 깔짝거리며 방해할 작정이었다.
“쥐새끼가!”
예상했다시피 무왕은 칸칸을 손쉽게 떨쳐 내며 비수들을 전부 쳐 냈다. 알 바 아니었다.
“그 쥐새끼의 발톱에 독 묻었다는 건 알고?”
독을 바른 곳은 저 비수가 아니라 암습에 썼던 검이다.
“치리아 대삼림의 왕도마뱀에게서 얻은 독인데, 아시나 모르겠네.”
“……!”
독이란 게 단번에 작용하는 종류는 별로 없다. 상대가 마력을 사용한다는 걸 고려하면 좀 더 걸릴지도 모르고.
그러나 그것도 언젠간 끝날 것이다. 제일 비싼 독까진 아니어도 이 역시 한번 사용하면 백 중 백 사망에 이르는 독이니까.
“한 시간이면 내장이 절반이 녹을 거고 하루면 곤죽이 될 겁니다요. 혈관이 녹으며 출혈도 심해질 테고 근육 조직과 살점도 서서히 썩어 들어 가겠죠.”
“……!”
“다른 말로, 댁은 X됐어. 개자식아.”
언제 죽느냐가 문제일 뿐, 무왕은 반드시 죽는단 소리다.
“너 이 새─ 쿨럭!”
그는 무왕이 피를 뱉는 걸 보며 단검을 던졌다. 이 순간에도 단검을 쳐 내고, 빈틈을 노린 칸칸을 막아서는 게 정말 독기 하난 끝내주는 인간이었다.
“내가, 내가 이렇게 죽을 것 같으냐?”
슬슬 내출혈로 머리가 핑 돌 시점인데도 굳건한 다리는 어떻고. 정말 목숨줄 하난 두꺼웠다. 굳이 살아 있을 가치가 없는 인간인데도.
“나는 죽지 않는다. 결코 죽지 않아!”
“뭐라는 거야. 그냥 좀 죽…….”
일순 데스브링거의 눈이 커졌다. 무왕이 무언갈 삼키는 걸 본 까닭이다.
“여기서 쓰고 싶진 않았지만……!”
이어 성벽 위에서 보이는 검은 기류와 닮은 것이 무왕으로부터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그냥 흘러나오는 것도 아니고, 바닥에 흡착되듯 깔리는 식이었다.
“너희 따위가 이 자리에서 날 끌어내릴 순 없어!”
심지어 그것은 어떤 형상까지 갖추었으니.
“난, 난 지지 않는다고……!”
투기장? 아니, 아니었다. 투기장의 형식이긴 했지만 이 도시에 있던 투기장과는 달랐다.
“여긴…….”
“……?”
“고향의……?”
다소 원시적인 형태의 투기장은 칸칸의 말과 뒤섞이면 적당히 단서가 나온다. 다만 그것이 왜, 어떤 원리로 이곳에 생겨난 것인지가 중요할 뿐이지.
『패배자.』
“저건……!”
생겨난 무대 중심에 서서 말을 뇌까리는 저 인영 역시도.
“난 지지 않아─!”
무왕이 우렁차게 외쳤다. 그러자 인영이 파삭 부서졌다.
독에 당해 서서히 죽어 나가던 얼굴 역시 무슨 조화를 부린 건지 혈색이 돌아오고 있었다. 귀신이 곡할 노릇이었다.
“죽여!”
끼이이익!
하물며 놈은 악마들을 부리기 시작했다. 무왕의 존재 덕에 근처로 접근하지 않던 악마들이 그를 노리고 날아오기 시작했다.
“그냥 좀 죽을 것이지……!”
“피해!”
“댁이나 피해요. 이젠 나도 방법이 없어!”
“내가 시간을 끌 테니 도망가라고!”
시간 벌이는 개뿔, 양팔이 멀쩡해도 못 끈 시간 아닌가.
또, 설사 시간을 벌더라도 문제다. 악마들이 대놓고 그만 노리는데 시간을 버는 것에 의미가 있을까? 그가 정말 도망칠 수 있어?
“아, 씨!”
모르겠다. 차라리 무왕이 상대였으면 가능성이라도 있었을 텐데.
쾅!
그래도 안 움직이는 것보단 움직이는 것이 목숨엔 더 좋다. 데스브링거는 다가오는 가고일을 피해 몸을 굴렀다.
쏟아진 화염이 땅을 그을리다 못해 망토 자락과 그 사이로 삐져나온 꼬리 끄트머리를 태웠지만 적어도 통구이 신세는 면했다.
끽긱.
끼아악!
…그렇다고 위험이 다 사라졌느냐면 그건 또 아니다마는.
“으악!”
그는 부서진 건물 파편을 밟고 더미 위에 올랐다. 창자벌레는 대부분의 흙을 뚫고 다닐 수 있지만 바위는 오래 걸리고 철은 아예 못 뚫는 까닭이다.
물론 이렇게 되면 비행종 악마가 그들을 노리려 들긴 했다. 그러나 그것들은 적어도 보고 피할 수는 있지 않은가?
셋이나 달라붙어 덤비면 좀 무리여도.
“어이, 거기서 비켜!!”
“미친! 저걸 왜 여기로 끌고 와요!”
“무왕도 깔려 죽으라고!”
“깔려 죽겠냐고!!”
심지어 저어쪽으로 갔던 모래범 한 마리가 건물들을 부수며 이쪽으로 돌아왔다.
외치는 말이 진심일 리는 없고, 모래범을 잡는데 실패한 이들이 뿔뿔히 흩어지던 와중 이쪽으로 도망치던 이들에게 주목이 끌린 모양이다.
“빌어먹을!”
무왕이야 죽음이 확정되었으니 칸칸이나 목숨 좀 건지게 해 주려 했더니만 이런 변수가 벌어지나.
하여간 악마란 것들이란 그와 맞지를 않는다. 변수 창출에 너무 유리하거니와 그의 마지막 한 수까지 이리 박살 내 버리니.
데스브링거는 혀를 차며 방법을 강구했다.
저 싸움에 끼어들어 칸칸을 둘러메고 도망치는 건 기각. 그에게 저 덩치를 업고 잽싸게 움직이는 건 완벽한 불가능이다. 애당초 무왕이 순순히 보내 줄 리 없고.
그렇다면 모래범을 제거한다? 어떻게? 검의 성능을 믿고 찌른다 해도 저 정도 크기면 손에 가시 박힌 수준일 것 같은데.
“동료를 죽게 내버려 두는 건 이제 그만하고 싶다고……!”
하면.
역시 다시 한번 무왕을 찌를까?
“좋은 마음가짐이네요.”
순간, 그의 뒤를 바짝 쫒던 악마의 머리통이 산산조각 나며 사방으로 흩어졌다. 대로에 진 그림자는 언제나처럼 슬랜드족이라는 게 믿기지 않을 만큼 크다.
“대화 좀 하려 온 거였는데 상황상 그건 어려울 성싶고. 제가 직접 나서자니 저쪽이 너무 급해 보이고. 그래서 그런데 저거 좀 죽여 주지 않을래요?”
“당신은…….”
데스브링거는 제 앞에 선 이를 두고 입술을 달싹거렸다.
이미 격전을 치르고 온 듯 피로 몸을 적신 이와 그 너머에서 보이는 모래범 사체 하나를 두고 어렴풋한 데자뷔를 느낀 까닭이다.
“대신 악마들이 당신을 방해하지 못하게, 그리고 저 인간의 시선이 다른 곳에 끌리도록 해 줄게요. 가능할까요?”
“…다 떠먹여 주는데 그걸 못 처먹으면 나가 뒈져야죠, 젠장.”
하지만 그 기시감을 찾기엔 시간이 없다. 그는 상황 파악 이전에 가능 여부를 내뱉었다.
대상이 씨익 웃었다. 봄을 맞이하는 목련처럼 고아한 미소였다.
“좋아요.”
그리고 곧 그 미소의 성질이 변했다.
박 한 번으로 연주를 시작하듯, 혹은 손뼉 한 번으로 무대의 전환을 알리듯.
초승달 같던 눈매가 사납게 뜨이고, 부드러운 호선이던 입술은 크게 벌어져 광소에 어울리는 형상으로 바뀌는 것이다.
“그럼 저 악마 새끼들은 이 베르세르크가 다 쳐 죽여 주지!”
할버드를 쥐지 않은 손이 막 날아온 가고일의 턱을 쥐어 챈 후 바닥에 메쳤다.
뭉개진 살점과 함께 주변으로 마구 튀어 나간 목소리는 칸칸의 목을 기어코 쥔 누군가에게도 닿는다.
“그러니 저 패배자에게 본때를 보여 줘! 너는 여전히 패배자이고, 영원히 패배자일 거라고!”
“넌……!”
무왕의 눈이 큼지막하게 벌어졌다.
관심 한번 제대로 끌린 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