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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인공이 컨셉충이면 곤란한가요-101화 (101/389)

◈101화 존재하는 (3)

인퀴지터는 뒤에서 느껴지는 기묘함에 무의식적으로 고개를 틀었다. 그녀를 중심으로 기도를 올리던 사제들이 먼저 보였다.

그런 다음으로 보이는 건 그런 사제를 향해 내리쳐지는 칼날이라.

그녀는 바닥에 내려 두었던 방패를 집으려 했다. 이것을 들었다간 늦는다. 여러 번의 실전을 거쳐 늘어난 판단이 현실을 꿰뚫었다.

그렇다면 그녀는 어떻게 해야 할까.

“갈!”

인퀴지터는 그녀가 두른 갑옷을 믿고 사제 앞을 막아섰다. 놀랍도록 가벼운 갑옷이 그것을 가능케 했다.

깡!

방패 대용으로 올린 팔뚝과 도끼날이 부딪쳤다. 부서지진 않았으나 반동으로 팔뚝이 조금 밀려났다.

“이걸!”

그래도 막았다. 그거면 되지 않을까?

인퀴지터는 도끼날과 닿지 않은 손을 아래로 내렸다. 허리춤에 걸린 메이스를 뽑아 저 간자의 머리통을 후려칠 작정이었다.

“쉬이.”

찰나, 그림자에서 솟아난 듯한 것이 거구의 사내를 장악했다.

오금을 밟아 키를 맞추고, 턱을 잡아 얼굴을 고정하며, 칼날로 목을 긋는 모든 행위가 동시다발적으로 이뤄졌다. 피가 쏟아져 나왔다.

“컥, 커억.”

정확히 경동맥을 잘랐다. 인퀴지터는 뿜어지는 피의 양으로 그것을 단언했다.

그다음으로 이 짓을 저지른 이를 확인했다. 그늘에서 보면 검정색으로도 보이는 암녹색 망토와 쫑긋 솟은 귀. 뺀질이였다.

“어떻게 된……!”

“어떻게 된 거긴요. 설마설마하던 새끼들이 본색을 드러낸 거지. 악마랑 손잡은 건지 아닌지는 아직 모르지만, 관련도 없는 사제 나릴 노린 거 보니까 아마 맞는─.”

“마기!”

그녀는 습격자의 목숨이 끊어지자마자 흩날리는 검은 가루와, 터져 나오는 마기 한 자락에 얼굴을 굳혔다.

지금까진 약간의 이질감만 들었을 따름인데 이제 와서 마기가 느껴지는 이유를 당최 알 수 없었다.

“침입자?!”

“이, 어떻게.”

“괜찮으십니까?!”

심지어 마기가 허공으로 퍼져 나온 직후에야 주변에 있던 병사들이 습격자의 존재를 눈치챘다. 마치 마기가 습격자까지 은폐하고 있었던 것처럼.

“놈들을 당장……!”

그런 건 위험하다. 인퀴지터는 장소를 벗어나기 위해 움직이려 했다. 거슬림이 느껴지는 자들이란 자들은 전부 처리하기 위함이었다.

우르릉.

그런데 하필이면 이때 성벽 일부가 허물어지는 소리가 났다. 그녀가 기도를 멈춤에 따라 축복 일부가 끊겨 버린 이 타이밍에 말이다.

“……!”

우연일 수도 있지만, 아닐 가능성이 더 크다. 그 사실이 그녀의 발목을 잡았다. 인퀴지터의 이가 입술을 살짝 깨물었다.

“모래범이다!! 모래범 두 마리가 온다!!”

설상가상으로 대지를 뒤흔드는 소리가 나기 시작했다. 모래범. 몸길이만 20m에 달하는 악마로 땅을 파고들어 이동하는 게 특징이다.

지반 위에 존재하는 성벽에 있어 최대 천적이라 이 소리다.

“제가 처리하고 올 테니 댁은 여기서 기도나 하십쇼.”

“……! 네가 어떻게…….”

“사람 죽이는 건 댁보다 내가 더 잘하거든요?”

“……!”

뺀질이의 말에 그녀는 무심코 눈을 부릅떴다. 그림자에 속해 있는 이가 순간 굉장히 위협적으로 보였던 까닭이다.

“기사 나리가 성벽 위로 올라갔으니 그쪽이나 더 신경 써 주십쇼. 아, 그리고 성물도 좀 주시죠. 왜 죽였냐고 물으면 명령이라고 둘러대야 해서.”

그리고 그건 기분 탓이 아닐 것이다.

인퀴지터는 제 앞에 선 이를 두고 주먹을 쥐락펴락하다가, 끝내 무언갈 꺼내 던졌다.

탁.

“감사.”

이후 그녀는 그녀의 자리로 돌아갔다. 아까보다도 더욱 강렬한 축복이 성벽을 마구 휘감았다.

* * *

데스브링거는 머릿속에 있는 자들의 위치를 떠올리며 왔던 길을 되돌아갔다.

그리고 빠진 그를 대신해 더 열심히 싸우던 칸칸을 붙잡았다.

“뭐야?!”

“배신자들 좀 족치러 갑시다.”

“모래범이 오는, 뭐?”

눈앞의 일에 급급하다 보니 다른 곳에서 어떤 일이 벌어졌는지도 모르는가 보다.

그는 칸칸을 억지로 잡고 나왔다.

악마기사가 활약하곤 있다지만 싸움이 갈수록 격렬해지는 것도 사실이라. 그들의 이탈을 눈치채는 자들은 드물었다.

눈치챈 자들도 당장 공격해 오는 악마들 때문에 말릴 여력이 없거나, 그가 들어 올린 성물을 보고 입을 다물어 주었고.

“배신자라니?”

“그놈들이요. 무왕 같은 애들.”

“……!”

“사제들을 공격한 것도 모자라 마기가 검출됐습니다요. 악마들이랑 싸우고 있다고 미뤄 둘 게 못 돼요, 이젠.”

칸칸이 실력자라곤 하나, 이런 장소에선 악마기사쯤 되지 않고서야 사람 한 명 빠진다고 크게 티 안 난다.

반면 배신자를 색출해 죽이는 작업엔 강자의 가치가 높다. 단숨에 죽이는 것이 피해가 덜하거니와 빨리 움직일 수 있으니까.

“댁이 할 일은 간단해요. 제가 미처 모르는 놈들을 알려 주는 것. 그리고 정면 승부 담당.”

더불어 데스브링거는 정면 승부에 자신이 없었다. 해당 부분을 커버해 줄 사람이 하나는 필요했다.

“알겠어.”

그 정도 설명하니 붉은갈기도 바로 납득했다. 말이 잘 통해서 좋았다.

“그럼 바로 가죠. 성벽 내에 있는 모든 놈들을 죽이고, 무왕도 노려 봐야 하니까.”

“……!”

사냥은 이제 시작이었다.

* * *

우와. 악마 너무 많아. 진짜 양심적으로 너무 많아.

나는 그런 생각을 하며 검을 휘둘렀다. 봄바드를 좀 남발했더니 마력이 바닥에 닿으려 해서 스킬은 두르지 않았다.

어차피 손목에 약간의 저항감이 들 뿐, 이래도 잘 잘리니 상관없다.

서걱!

나는 또 하나의 하피를 찢어 버린 후, 얼굴 일부를 닦아 냈다. 죽인 놈들이 워낙 많다 보니 이래저래 튄 피가 낯짝 전반을 덮고 있다.

손등과 손가락에 밀려난 피가 방울방울 뭉쳤다가 손짓 한 번에 날아갔다.

끼아아아!

“쯧.”

그사이에 한 놈이 더 날아왔다. 포탄처럼 내게 돌진한 녀석은 나를 밀어 치다 못해 성벽을 으스러트릴 기세다.

그러나 내가 마력을 좀 아끼겠다고 목숨을 내놓을 정도는 아니라서 말이다.

나는 쏘아지는 녀석을 반으로 갈랐다. 세로로 양분된 몸뚱이가 쩍 벌어지더니 내 양옆으로 추락했다.

축복을 머금은 벽은 굉장히 단단해, 두 개로 나뉜 몸뚱이가 떨어졌다고 무너지진 않았다. 성벽 뒤쪽 땅은 어쩔지 모르겠으나 거긴 이미 사체가 쌓일 대로 쌓였을 테니 상관없겠지.

끼이이이익!

또 다른 놈이 성벽에 내려앉아 불꽃 넘실대는 입을 놀렸다. 대충 내려앉은 직후 불꽃이라도 쏘아 보내고 싶던 모양이다.

그러나 이 성벽이 그냥 단단하기만 하지는 않은지라.

암, 내 HP도 3초마다 -1씩 닳을 정돈데 악마들에겐 어떻겠나.

치이익!

피부에 닿는 순간 수증기가 일며 타기 시작했다. 단번에 녹을 정도로 강력한 공격은 아니어도 악마들 따끔하게 만들긴 딱 좋았다.

불 뿜으려던 놈이 자세가 흐트러지며 공격을 반 박자 늦게 했다. 내가 몸을 빼내고 그 머리통을 벨 수 있는 시간이었다.

퍼억!

잘려 난 머리통이 성벽 너머로 떨어졌다.

“후.”

근데 정말 언제까지 싸워야 하는 거지? 나 꽤 많이 잡은 것 같은데…….

나는 힐끗 주변 상황을 확인했다.

성벽을 오가며, 벽을 박살 낼 수 있는 악마들을 우선해서 처리한지라 커다란 놈들은 일단 안 보이고. 비행형 악마들은 내게 덤비거나 손 닿는 놈들만 잡아서 아직 많이 남아 있고.

성벽 바깥 지상엔…… 와, 누가 사탕 떨궜냐! 지상에 있는 녀석들은 손쓸 구석이 없어서 내버려 뒀더니 아주 바글바글하다.

일부는 성벽에 손톱을 박아 가며 올라올 지경이었다. 특히 방금 전 허물어진 몇몇 부분 쪽을 집요하게 노려서.

콰아앙!

그래도 성벽은 여전히 건재하고, 마법사들도 꾸준히 놈들을 처리해 주고 있다. 그러니 시간만 좀 소요될 뿐, 이대로만 가면 그럭저럭 괜찮을 것이다.

“모래범이다!! 모래범 두 마리가 온다!!”

중간보스나 보스라 할 만한 존재가 끼어들지만 않는다면, 아마도 그럴 거다.

“쉽게 가나 했는데.”

말이 씨가 된다고, 보스 안 나오면 안정적으로 깰 수 있다는 생각을 하자마자 보스급으로 보이는 몬스터가 두 마리나 등장해 주신다. 이런 음성 인식, 아니 생각 인식은 필요 없는데.

쿠구구구구궁.

심지어 이번 보스들은 지하로 이동하는 특성을 가지고 있었다. 나는 들썩이며 살짝 둔덕이 지는 땅을 보며 혀를 찼다.

저건 여기서 못 잡는다. 이곳에서 저기까지 참격을 쏘아 보내려면 마력이 많이 닳을 테니까. 봄바드는 그 자체로 마력 소모량이 미쳤고.

반면 마력창은…… 흙을 관통한 다음 닿을 스킬이 얼마나 피해를 줄지 모르겠다. 외형은 아직 못 봤어도 지하를 쏘다닐 정도면 피부가 굉장히 단단할 텐데.

내 생각엔 무의미할 가능성이 높아보인다. 하지 않는 게 나을 거다.

내려가서 잡는 것도…… 아크메이지의 당부는 미뤄 두고서라도 좀 무리다. 한 마리도 아니고 두 마리인 데다가 주변에 쫄도 많고, 결정적으로 나 마력이 없지 않은가.

어지간한 건 마력 없어도 잡겠지만 저렇게 까다로운 녀석은 아무래도 무리다.

쿠구그그긍.

그 순간에도 모래범들은 계속해서 다가왔다. 지상에 나 있던 마법의 흔적과 악마들이 날아갈 정도로 거친 움직임은 정확히 성문으로 이어진다.

지능이 어떻게 돼먹은지는 몰라도 명백한 노림수였다.

아, 이렇게 되니까 봉인구 해제 말리네. 봉인구만 풀어도 스킬을 깔짝깔짝 쓸 필요 없는데!

서면 앉고 싶고, 앉으면 눕고 싶다고 계속 마력 뻥튀기 생각이 퐁퐁 들었다. 자력으로 풀지 못하게 개량된 것이 천추의 한일 지경이었다.

쾅!!!

그렇지만 내 감정과 현실은 다르게 흘러간다.

결국 나는 놈들에게 손도 대 보지 못한 채 성문이 박살 나는 걸 봐야 했다. 이 도시가 성문 부서지는 걸 기본으로 잡고 있다는 게 유일한 위안이었다.

“죽여!”

“대피소까지 가게 만들지 마!”

성문 부서지는 걸 기본으로 잡는 게 왜 위안인가 하면, 이 상황을 상정한 덕에 이후 대처가 빠릿빠릿해서 그렇다.

마법사들이 흙벽으로 뚫린 자리를 메우는 것이나, 도심 곳곳에 배치해 둔 인력이 모래범에 대항하는 것들 말이다.

단지 저 거대한 것들이 한 번 날뛸 때마다 재산 피해가 엄청나게 증가할 뿐이지.

음, 역시 내려가야 하나? 나는 내게 덤비는 가고일의 입을 찢어, 와이번에게로 던져 버리곤 잠시 고민했다.

성벽 밖이라면 몰라, 도심 안으로 들어왔으니 당부를 어기는 것도 아니고, 성벽을 부술 수 있는 악마들도 거진 내가 다 처리했다.

남은 건 성벽 밖 쫄뿐인데…… 쫄이라면 다른 사람들도 잡을 수 있다. 피해가 좀 나는 것도 모래범이 내는 것만 못할 테고.

무엇보다 내가 쫄을 담당하고 저 수많은 사람들이 보스를 담당하는 것보단, 나 하나가 보스를 담당하고 저 많은 사람들이 쫄들을 처리하는 게 더 효율적일 테다.

“후.”

그래. 도우러 가자. 한 마리도 아니고 두 마린데.

마침 둘이 찢어지기까지 했으니 마력이 좀 부족해도 목숨 위험하진 않을 거다. 한 마리 정도는 어떻게 되겠지.

나는 그렇게 생각하며 아래로 내려가기 위해 없는 마력을 다리에 둘렀다.

[표정이 좋아 보이네. 정말 제대로 억제하고 있나 봐? 못해도 감정 일부는 동조할 줄 알았는데.]

“……!”

처음부터 내게 선택지가 없었다는 걸 알면 그런 낭비는 안 했을 텐데 말이다.

[일부러 가장 화낼 순간을 골라 선물해 줬는데, 아쉽게 됐어.]

“넌…….”

나는 할리우드에서 볼 법한 미인을 두고 손을 휘둘렀다. 분위기를 못 읽은 또 하나의 악마가 내 손에 찢겨 나갔다.

그러나 상대는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당연했다. 이 광경에 일일이 반응할 사람이었다면 그리스식 천 옷 쪼가리 하나 입고 이 위에 서지 않는다.

아니, 옷 이전에 이 성벽 위로 올라오는 것 자체가 문제다. 실력에 어지간히 자신이 있지 않고서야 이곳에 설 인간은 없다.

[심지어 날 몰라보기까지…… 그레트헨도 슬슬 퇴물이 다 됐나 봐.]

더 문제는 내가 저치의 접근을 몰랐단 점이라.

알림도 안 울렸고 기척 자체도 못 잡았다. 이건 위험하다. 내 등 뒤로 식은땀이 삐질 흘렀다.

그나마 상대 쪽에서 먼저 말 걸어 줘서 다행이다. 아니었다면 등에 칼 박힌 후에야 눈치챘을지도.

끼긱.

‘죽여. 당장.’

나는 귀에 울린 약간의 쇳소리를 흘려들으며 사고를 이었다.

그보다 방금 ‘몰라본다’라고 말하지 않았어? 심지어 그레트헨을 얕잡아 보듯 말한 것까지.

대악마보다 서열이 낮은 72기사가 저렇게 말할 것 같진 않은데…….

“나태인가.”

[아, 거기까진 아닌가 보네?]

이야. 아크메이지, 보고 계십니까. 당신의 소환 주문이 성공했습니다. 대악마가 진짜 등판했다고요.

끼기긱.

‘당장 죽여.’

나는 다른 것 다 내버려 둔 채 상대에게 집중했다. 무왕이고 자시고 내 앞에 있는 건 최종보스의 바로 아래 직급이었다. 저걸 두고 방심할 수는 없다.

물론 스토리 진행에 맞춰 밸런스 패치해 뒀겠지만. 당연히 해 뒀겠지만!

설정상 못해도 악마들을 통틀어 여덟 손가락 안에는 들 대상인데 긴장을 안 하고는 못 배기지.

원래 이런 네임드들은 스토리에 맞춰 나와도 같은 시기에 나오는 보스보다 좀 더 강하게 나온다고.

[뭐, 사실 아무래도 좋아. 너 때문에 내가 움직여야 했던 걸 생각하면 쉽게 끝낼 생각 없거든. 억압된 상태에서 제 힘을 낼 리도 없고. 나야 좋네.]

…그래도 살살 해 줬으면 좋겠다. 제 잘못이라곤 게임에 갇혀 못 나가는 것뿐인데 제발 살살해 주시면 안 될까요?

[가자, 너의 악몽으로.]

갸아아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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