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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인공이 컨셉충이면 곤란한가요-99화 (99/389)

◈99화 존재하는 (1)

곰 가죽을 두른 이는 나귀를 탄 채 거리를 터벅터벅 걸었다. 사막에서 쉬이 볼 법한 모습이 아님에도 그 존재를 신경 쓰는 이는 아무도 없다.

[인간들도 참 어리석지. 대가 없이 힘을 가질 수 있다고 생각하다니.]

가느다란 까만 손이 곰 가죽을 뒤로 젖혔다. 얼굴을 가리던 곰의 머리가 물러나자 곱슬거리는 머리칼이 흘러내렸다. 관리를 잘 받았는지 광이 나고 엉킴이 하나 없었다.

[대가가 없다고 생각하는 것 자체야말로 대가였음을.]

그 존재는 그런 제 머리칼이 마음에 드는지, 일부를 검지로 느릿하게 꼬았다.

[그렇지만 조금 아쉽기도 하네. 난 아직 이 도시 너머로 넘어가고 싶지 않은데.]

그리고 긴 머리카락이 손가락에 칭칭 휘감겼을 때, 그 존재는 그대로 머리카락을 끊어 버렸다.

[하, 판데모니엄과 모비 딕은 대체 뭘 하는 거야. 이제껏 용사 하나 죽이질 못해서 왜 나까지…… 아, 하기 싫어.]

끊어진 머리카락이 손가락으로부터 살금 풀리며 흩어지려는 것을 그것은 손바닥에 그러모았다. 푸힝! 나귀가 한바탕 울었다.

[채근하지 말렴. 나도 알고 있어. 실패하면 헬렐이 잔소리할 거 안다고. 그렇지만 내가 뭘 할 수 있는데? 나랑 용사는 가장 상성이 안 맞는다고. 그레트헨처럼 전면전이 가능하면 몰라, 난 꿈을 덧씌우는 게 다인데…….]

푸힝!

[정작 용사와 상성이 가장 좋은 녀석이 저 꼴이니. 짜증 나. 하여간 그레트헨 저놈은 정말 예전부터 마음에 안 들었어…… 왕을 제외하면 제가 제일 강하다며 멋대로 설치고 다니더니만, 정작 필요할 땐…….]

화륵. 손바닥 위에 올라가 있던 머리카락에 절로 불이 붙었다. 순식간에 타들어 가던 머리카락은 입김 한 번에 공기 중으로 재 가루를 퍼트린다.

[이참에 골탕 좀 먹으라지.]

재 가루가 휘엉청 날아, 거리 저편의 누군가에게 닿았다. 회색과 검정이 정갈하게 나뉜 머리카락이 휙 돌아갔다.

* * *

“……?”

인퀴지터가 갑자기 뒤를 돌아보기에, 나도 덩달아 뒤편을 힐끗 살펴보았다. 반사적인 행동이었는데 그다지 수확은 없었다.

봉화가 오른 지금, 거리는 매뉴얼에 따라 대피하는 시민들과 성벽으로 달려가는 병력들로 가득했다.

“왜 그러십니까. 또 거슬리는 것이 보이셨습니까?”

“…아닙니다. 그냥 뒤에 무언가가 있는 것 같아서. 제가 너무 예민했던 것 같습니다.”

“무언가가 느껴지셨다면 그냥 넘기진 마시지요. 악마가 쳐들어온 지금, 도시 내에 무언가가 숨어들어 왔을 가능성도 배제할 순 없습니다.”

“네, 알겠습니다.”

그녀는 수긍의 말을 할지언정 왔던 길을 돌아가진 않았다. 정말 기분 탓에 그쳤나 보다. 이 이상 반응하지 않는 걸 보면.

“그보다 어서 가지요.”

좁아터진 거리에 서 있어 봐야 사람들 이동만 막을 뿐이다. 우리는 서둘러 가던 길을 재촉했다. 목적지는 악마들이 쳐들어오는 쪽 성벽이었다.

“이걸 들여보내 주네요.”

그보다 데브 마음이 내 마음이다.

무력과 별개로 긴급사태도 아닌 만큼─긴급이라면 긴급이긴 한데 자크라티처럼 대처가 안 되는 상황은 아니니까─정규군도 아닌 우릴 성벽 위까지 들여보내 줄 거란 생각은 안 했는데. 의외네.

아니면 그냥 신전 뒷배와 마탑 뒷배 덕에 허가가 난 건가? 아, 이건 좀 가능성 있을지도?

“나도 이때 들어와 본 적은 없지만…… 봉화가 1단계라서 가능한 걸걸.”

그때, 얼떨결에 여기까지 함께 온 칸칸이 살짝 귀엣말을 했다.

사막의 악마들은 바로 쳐들어오기보다 시야에 닿는 곳에 멈춰 선 채 군세를 끌어모은 후 반나절에서 이틀 정도의 시간을 두고 온다는 이야기다.

해서 악마들의 규모를 가늠하고 대비하고자 마법사들과 사제들을 불러 토의한다고. 그들을 들여보내 준 것도 그 때문일 가능성이 높다고 말이다.

“아크메이지님과 대리자님께선 각 세력의 중추 역을 맡으셔도 무방하신 분들. 출입이 허가되는 건 당연합니다.”

심지어 그 추측을 동행했던 사제가 확신까지 해 주었으니.

…근데 그럼 우리는? 그냥 곁다리로 낑겨 들어온 건가. 상황 파악할 수 있는 기회니만큼 나쁘지만은 않다만, 기분 오묘하네.

“…악마들이 준비할 시간도 준답니까?”

“그렇다기보단, 저 군대를 이끄는 대악마의 특징으로 추측되고 있어. 사막에 둥지를 튼 대악마는 듀크, ‘나태’로 이름 높은 존재니까 느릿느릿 오는 게 아니냐 하는 거지.”

오…… 대악마라고만 해서 누군가 싶었는데 나태인가.

나는 칠죄종의 면면을 짚어 보았다. 나태면 아스타로트나 벨페고르 담당인데.

그게 진짜 이름인지도 모르겠고 전자라면 몰라도 후자라면 변기에 앉아 있는 그림이 너무 기억에 콱 박혀 있어 그다지 위협적으로 느껴지진 않았다.

“…대악마가 있으면 위험한 거 아닙니까?”

“지난 세월간 나태의 대악마가 전면에 나선 적은 한 번도 없네. 심지어 악마들의 세가 강했던 시기마저도.”

“그래도…….”

“당연히 과거에 그랬다고 지금까지 그러리란 법은 없지. 아네. 하지만 이미 이 도시에 들어온 상황 아닌가. 피할 방법은 없네. 조심하는 수밖에는.”

“그것도 그렇네요.”

데브가 낑낑대더니 대악마에 대한 이야기나 들려 달라고 요청했다. 정보라도 머릿속에 구겨 넣어 두겠단 의도 같다.

“대악마, 특히 나태에 대한 정보는 별로 없다.”

“왜요.”

“아까 아크메이지님이 말하지 않았나. 전면에 나선 적이 없다고. 고문에야 가끔씩 이야기가 나오긴 하지만, 구전 수준이다. 네가 바라는 수준의 이야기는 아예 없다.”

악마가 주제라서 그런가. 인퀴지터가 드물게 말을 얹었다.

구전 수준이라는 게 사실인지, 이어지는 설명도 대체로 ‘호랑이가 담배피던 시절’ 수준의 문장들이다.

“어떻게 도움이 되는 게 없네요.”

“대악마들이 그만큼 집요하게 본인들의 기록을 없앤 증거기도 하네. 그들의 진명이 알려지지 않은 것과 동일한 맥락이지.”

“…진명도 몰라요?”

“그렇다네.”

“나 참.”

하여 나와 데브는 얻는 것 없이 성벽 위에 섰다.

“거기 서 있으면 안 돼. 물자가 들어오는 통로야.”

이곳에 종종 서 본다던 칸칸이 슬쩍슬쩍 도와준 덕에 실수를 저지르는 일은 없었다.

“천장이 있네요?”

갈음하듯 호기심이 터져 나오긴 했다.

암, 파 에녹의 성벽은 양 옆면에 담을 세운 것도 모자라 천장을 얹어 위도 막아 둔 독특한 형식을 취하고 있었다.

이런 식의 구조는 본 적이 없던지라 조금 신기하다. 천장에 구멍을 뚫어 둘 거면 왜 지붕을 얹어 둔 거지? 답답할 것 같은데.

“공중으로도 악마가 오니까, 그놈들에게 죽임당하는 걸 막기 위해서 지은 거야. 이 구멍을 통해 지붕에 내려앉은 놈들을 찔러 죽이는데…… 가끔 불을 뿜는 놈들 때문에 역으로 죽는 경우도 많아.”

“아.”

아는 건 많아도 군사적 지식이 없던 데브가 칸칸의 설명에 고개를 주억였다. 나도 덩달아 새로운 지식을 얻었다.

악마를 상대하는 곳은 달라도 확실히 달랐다. 다른 곳에 비해 대비가 정말 철저하다.

“야바드 지방 성에도 이런 게 있었으면 고생을 덜했을 텐데요.”

“그곳에선 비행종 악마를 볼 일이 없지 않나.”

“악마가 성벽을 부수거나 하진 않습니까?”

“공세가 강하면 부서질 때도 많아. 그래도 없는 것보단 있는 게 덜 죽으니까.”

“높낮이가 조금 낮은 것 같은데…… 샤기족 출신 병사가 불편해하진 않습니까?”

“이보다 더 높으면 창이 안 닿으니 어쩔 수 없어. 그리고 이게 불편할 정도로 체급이 큰 양반들은 처음부터 다른 곳에 배치되거든.”

인퀴지터와 데브가 대신 물어봐 줘서 정말 다행이지.

나는 그들의 대화를 대충 뇌에 욱여넣었다. 부족한 상식은 이렇게 틈틈이 넣어 줘야 나중이 편했다. 대부분은 꺼낼 일 없는 지식이지만 세상 일은 모르는 거니까.

“이쪽입니다.”

그러던 차, 지휘관인지 뭔지 망루에 있던 사람이 소수의 인물들을 위로 불러들였다. 물론 나나 데브는 거기에 갈 수 없었는데…… 그것 자체는 별로 상관 없었다.

망루에 올라가지 않아도 성벽에 난 창을 통해 사막을 살펴볼 수 있었다.

“설마 저게 다 악마입니까……?”

“그럴걸.”

“예. 시력 좋은 샤기와 큐어티들을 모아 몇 번이나 확인했으니 확실합니다.”

투기장을 만들어서라도 실력자들을 붙잡는 이유를 알겠다. 몇 년에 한 번 쳐들어오더라도 저렇게 대군을 가지고 쳐들어오면 절대 병력 못 빼지.

나는 혀를 차고 싶은 걸 겨우 참으며 주먹을 쥐락펴락했다.

뚫린 구멍 사이로 보이는 사막의 지평선엔, 희미하게 까만 선이 꿈틀거리고 있다. 전부 악마들이었다.

“본격적이군요. 마지막 침공이 언제였습니까?”

“…두 달 전이었습니다.”

그사이, 망루에 올라간 아크메이지와 사제들이 지휘관과 대사를 나눴다.

최대 7년까지 텀을 두었단 말을 들어서인가. 두 달이란 기간이 그렇게 멀게 느껴지지 않았다.

“보통 이 정도 기간을 두고 옵니까?”

“아닙니다. 가장 빠른 짧은 기록이 한 달이긴 하지만…… 그건 악마들의 기세가 가장 강했던 시대의 일입니다. 고착화된 지금은 아무리 빨라도 반 년…… 보통은 1년을 두고 쳐들어왔습니다. 지난 20년간요.”

내 옆에 있던 데브가 눈을 깜빡였다. 아무렴, 이렇게 명확한 수치로 주어지면 그 어떤 사람도 예삿일이 아님을 눈치챌 터였다.

하물며 우리의 특징이 뭔가. 사탄을 최종 목표로 삼은 용사 파티가 아닌가.

“…벽창호 인기 참 많으십니다요. 가는 곳마다 악마들이 뻥뻥 튀어나오네.”

나도 인정하는 바였다. 이건 김치만두 잘못이 아니라 그냥 스토리가 글러 먹어서 그런 거지만.

“그보다 이렇게 되면 무왕은…….”

“…미뤄야지. 최소한 음, 저것들이랑 이렇게…… 한 건 아니라며?”

“그렇다고 추측은 됩니다만요.”

칸칸이 악마를 두고 양손을 붙잡는 제스처를 취했다. 저것들이랑 거래한 게 아니라면 괜찮은 거 아니냐는 의미 같은데.

내가 보기엔 글쎄올시다. 심증뿐이라서 격렬하게 주장은 못 하겠지만 역시 뒤통수가 간질간질하단 말이야.

“그럼 어쩔 수 없잖아. 이 땅에 악마만큼 우선해서 처리해야 할 것들은 없어.”

“…그렇죠.”

“놈들이 아무리 우릴 죽이고 싶어도, 설마 악마가 쳐들어오는 상황에서 그러진 않겠지.”

“그건 좀 더 고민해 봐야 할 문제 같습니다만.”

꼭 악마랑 연결된 게 아니더라도 입막음을 위해 난전을 틈타 암살 시도 하는 건 꽤 가능성 있어 보이는데.

흠. 그래도 다들 그거 하나 대처 못 할 수준은 아니니 괜찮으려나. 아크메이지야 가장 안전한 곳에 있을 테니 상관없겠고.

으음…… 입장상 여기서 뭐라 말할 처지가 못 되니 그냥 내가 좀 더 신경 쓰는 게 나을 성싶다.

등장해서 뒤통수 치려 하는 즉시 내가 콱 그냥.

“놈들이 괜히 두 달 만에 쳐들어온 것은 아닐 것입니다. 혹 무슨 수를 썼을지 모르니 수색을 강화하는 게 좋겠군요.”

다행히 위로 간 아크메이지가 지휘관에게 해당 문제를 에둘러 전해 주었다.

이질적인 작자들에 대한 언급은 아쉽게도 없었다. 악마와 손잡은 놈들인지 단순 비리자인지 확실치 않다보니 그런 것 같다.

애초에 증거가 없어 증명이 여의찮거니와 증거를 잡아 빼 버리기엔 시간이 부족한 것도 있고 말이다.

“어쩌면 성벽이나 도심에 어떤 수작을 부렸을 수도 있습니다. 폭탄도 폭탄이지만 이번에 야바드 지방에서…….”

아크메이지는 대신 야바드 지방에서 제대로 당했던 저주 항아리까지 언급했다.

덕분에 성벽과 주민들의 대피소 수색은 더욱 꼼꼼해질 것 같다. 경계도 한층 삼엄해질 테고.

이 정도면 비리 투사들이 진짜 악마와 손잡았더라도 제대로 못 움직일 거다. 기껏해야 싸움이 시작했을 때 직접 움직이는 정도인데…….

객관적으로 보면 그건 제법 감수할 만하다. 적어도 폭탄 같은 화력은 안 나올 테니까.

“어, 오시네요.”

그렇게 10분쯤 지났을까. 생각보다 빨리 아크메이지외 지휘관이 내려왔다.

물론 이 대화가 빨리 끝난 이유엔 수성전이라는 특성상 전략을 크게 달리할 여지가 없어서라고 생각한다.

사제들은 언제나처럼 성벽 강화 및 사람들 치료에 힘을 쓰고 마법사들은 광역기로 악마들을 최대한 많이 처치한다. 병사와 투기장의 투사들은 성벽 위와 도시 곳곳에 세워 두어 악마들을 막는다. 끝.

신기술이나 무기가 등장하지 않는 이상, 달라지기 힘든 전투 방식이었다.

“자네.”

다만 아크메이지는 아래에 기다리던 사람 중 가장 먼저 나를 꼬집었다. 무언가 걸리는 게 있는 듯 미묘하게 굳은 얼굴이 인퀴지터와 나를 번갈아 가며 힐끔거렸다.

말하지 않는 걸 보면 확실하지 않거나 우리가 알 필요 없는 것일 테지만 말이다.

“이 도시에 들어오면서도 말했지만, 지금부터 절대로 혼자 움직이지 말게. 성벽 밖으로 나가지도 말고.”

대신 그녀는 쉼 없이 뒷말을 덧붙였다.

“전적이 없다곤 하나, 이곳엔 용사와 자네가 동시에 있는 상태지 않은가. 만약 저들이 우리의 존재를 알고 온 거라면 대악마 본인이 나섰을 가능성도 있네. 그 경우 자네 또한 표적일 수 있고.”

충분히 할 만한 걱정이고 당부들이었다. 내 귀에는 어쩐지 대악마 소환 주문처럼 들렸다마는.

아무렴, 이렇게 자리까지 깔아 줬는데 대악마가 안 등장하면 오히려 이상하지 않겠냐고.

* * *

“올 거면 빨리 올 것이지…….”

악마 소환 주문과 별개로 수성을 위한 대비는 계속되었다.

성벽에 병력을 배치하고, 화살 같은 물자를 재확인한 뒤 부족한 곳에 배분하고, 검증을 마친 비정규군─투사나 모험가─들을 추가로 투입하는 등.

우선순위에 맞춰 돌아가는 게 조별 과제 희망 편을 보는 듯했다. 비록 과제의 난이도가 장난이 아니었지만.

“젠장, 저기서 가만히 있기만 하니까 잠을 못 자겠어…….”

그러나 우리가 준비하는 것 이상으로 악마들은 꾸역꾸역 모여들었다. 지평선의 검은 물결이 보편적인 시력의 보유자들에게도 보일 정도였다.

심지어 그것들은 허투루 쳐들어오지도 않았다. 덕분에 괴로운 건 병사들이었다.

긴장을 풀자니 적이 언제 올지 모르고, 그렇다고 계속 유지하자니 그 자체로 기력이 소모되다 보니 벌어진 일이었다.

“너무 걱정 말라고.”

그렇다고 모두가 긴장해서 배 아파하느냐면 그건 또 아니었다.

이 도시에서 오랫동안 살아남아 온 베테랑들은 바깥에 악마가 포진해 있건 아니건 여유롭게 굴었다. 익숙함이 몸에 밴 느낌이었다.

“그렇게 굳어만 있지 말고 새참이나 잡수쇼!”

대피가 완료된 후, 자원자에 한해 후방 원조를 맡고 있는 시민들도 마찬가지였다.

성벽 위에 올라서지 않을지언정 이곳에 몇십 년을 버텨 온 시민들은 이 상황을 심각하게 여기지 않았다. 그들 딴에는 연례행사나 다름없을 테니 이해는 되었다.

“그보다 무왕 양반은 왜 안 보이는 거야? 올 투사들은 다 온 것 같은데.”

“몰라. 아까 지휘관이 개자식이라고 욕하는 건 봤는데.”

“허. 그 양반이 어언 일이람. 이봐, 붉은갈기! 들은 거 없어?!”

“…몰라. 내가 남의 속을 어떻게 알아?”

근데 무왕이 안 왔다라. 진짜 수상해. 완전 수상해.

“맞아, 그러고 보니 며칠 전에 들어온 신입이 하나 있지 않아?”

그때 누군가가 나를 찾았다. 아크메이지는 다른 곳에 배치받아서, 데브는 화장실 다녀온다고 자리를 비운 상태라 사뭇 곤란했다.

칸칸은 나를 그냥 과묵한 사람으로 아는 것 같아서 도움도 안 될 테고, 결국 내가 입을 열어야 하나?

같이 싸울 사람인데 시작부터 미운털 박히게 생겼네.

“야바드 지방에서 왔다던데, 그쪽 이야기좀 들려줘. 거기 무슨 일 났다며?”

음, 으음…… 역시 난처하다니까.

나는 주민들이 나눠 준 빵과 말린 대추야자를 조금씩 뜯어먹으며 입을 열었다.

“남의 불행을 재밋거리로 삼다니, 네놈 인성도 볼만하군.”

“…….”

그냥 우리 입 여물고 있으면 안 될까.

“나리이, 식사 얻어 왔는…… 분위기 왜 이럽니까?”

천만다행히도, 공기가 처참해지기 직전 데브가 쫄랑쫄랑 달려왔다.

주민에게 맛있는 거 좀 얻었다고 냉큼 나눠 주려는 태도가 조금 감동적이었다. 코 묻은 돈 뺏는 기분이라 받아먹을 생각은 없지만.

“댁도 좀 먹을래요?”

“전부 말린 채소잖아.”

“불만 있으면 덤비시든가요.”

“아니, 불만이 아니라. 채소 비싼데 어떻게 얻은 거야?”

“제가 능력이 좀 있습니다요.”

그 즈음, 누군가가 척척 다가왔다. 시선을 굳이 돌리지 않아서, 대지에 지는 그림자만 목격할 수 있었는데 그게 제법 커다랬다.

“누구…… 으엑?!”

“너, 넌?!”

그보다 목소리가 어째 어렴풋이 익숙한…… 흐아악! 야생의 베르세르크가 나타났다!

“반가워요, 인사하고 싶었는데 이제야 기회가 났네. 아, 칸칸도 안녕? 오랜만이네.”

나는 다가온 그림자의 정체가 베르세르크란 사실보다, 그리고 칸칸이 베르세르크와 아는 사이인 듯한 반응을 보이는 것보다.

그 모든 것을 제치고 남는 사실 하나가 제일 놀라웠다.

“음, 많이 놀랐어요? 미안해요. 사과하려고 온 거니까 피하지만 말아 줄래요.”

베르세르크, 당신. 이렇게 차분하게 말할 수 있는 사람이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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