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7화 그래도 아직 희망이 (6)
내가 무왕에게 썩 좋지 않은 기미를 느끼긴 했지만 일행들은 그걸 모른다. 하여 그들은 아침에 소식이 들려오는 즉시 붉은갈기와 챔피언과의 싸움 표를 구했다.
챔피언의 무력을 감상할 수 있는 기회니 당연했다.
“표를 구하긴 구했습니다요.”
다만 인기만 따져도 10위권 내에 드는 사람들의 격돌인지라. 더불어 그들은 며칠 뒤가 아닌 당장 오늘 자로 잡아 버렸다.
표를 구하기가 하늘의 별 따기나 다름없어졌단 소리다.
덕분에 마탑과 신전의 뒷배를 열심히 돌리고 데브가 정보길드의 도움을 받아 이리저리 뛰어다닌 결과 얻은 표가 고작 2장이었다. 우리 중 절반만 참가할 수 있는 셈이다.
“나리야 출입 금지를 먹었으니 표가 있더라도 못 가시겠지마는…… 음. 나머지 한 사람은 어쩝니까?”
데브는 그리 말하면서도 그 ‘나머지 한 사람’이 누구로 정해진 것처럼 굴었다. 자신이 나가야 한다고 생각하는 게 뻔하다.
“역시 제가 나가는 게 좋겠죠?”
봐라. 바로 본인이 빠질 각을 보지 않는가.
“아니, 내가 빠지는 게 나을 것 같다.”
그러나 상황은 의외의 뱡항으로 나아갔다. 인퀴지터가 빠지길 자청한 것이다.
“괜찮으시겠습니까?”
“아, 예. 괜찮습니다. 전 다른 방법으로 들어갈 수 있습니다.”
그렇다고 인퀴지터가 아예 빠지려 들었냐면 그건 아니었다.
“투기장 쪽에서 만일의 사태를 대비해 치료 인력을 부탁했다고 합니다. 어지간하면 나서지 않는다고 하나, 이번에 싸우는 이들은 도시에서도 손꼽히는 실력자들. 전력 보호를 위해 어쩔 수 없이 사람을 보내기로 했다니…… 전 그쪽으로 가도 됩니다. 저도 치료는 가능하니까요.”
꽤 좋은 방법이었다. 정작 그리 말하는 본인은 기분이 다소 나빠 보였지만.
“차라리 기부금을 받았으면 받았지, 전력 보호를 위해 나선다는 게 개인적으로는 공평하지 않다고 생각합니다만…… 그건 감안할 수밖에 없겠죠.”
“흐음. 그렇습니까. 그렇다면 확실히 인퀴지터는 그쪽으로 가고 저희 둘이 관객으로 가는 게 낫겠습니다. 자네도 어떤가, 괜찮다고 생각하나?”
“저야 상관없습니다요. 보면 좋죠.”
이르게 포기하려 했다가 난 기회에, 데브가 떨떠름히 대답했다.
“근데…… 이렇게 될 거라면 저보다 나리가 더 좋을 수도 있지 않습니까요? 그, 출입 금지도 좀 더 찔러 보면 풀어 볼 수도 있고.”
4자리라면 모를까, 누가 빠져야 하는 상황에서 본인이 들어간다는 게 영 어색한가 보다. 어떻게 돌아간 기횐데 이걸 나한테 또 토스하네.
아니면 투기장이 너무 더워서 가기 싫은 건가? 천장이 없다 보니 해의 위치에 따라 뙤약볕에 고스란히 노출돼야 하긴 했으니까.
“필요 없다.”
근데 나는 굳이……?
무왕이 어떻게 생겨 먹었는지, 어떻게 싸우는지 궁금하긴 하다. 그런데 예감상 얘는 어지간해서 우리 파티에 들어오게 될 것 같지 않거든.
결국 이번만 보고 끝날 인연이란 건데 그럼 구태여 볼 필요 있을까. 심지어…… 추측이 맞다면 범죄자일 놈인데?
역시 별로야. 나 안 볼래.
“그렇다는군.”
“그으렇다면야…….”
하여 결과적으로 무왕과 붉은갈기의 싸움을 지켜보는 건 나를 제외한 셋의 몫이 되었다.
선택지도 없이 빠지게 된 거였지만 오히려 좋았다. 오늘은 실내에서 휴식이다! 얏호!
* * *
“나리 정말 괜찮으실까요.”
“신전 쪽에서 별말 없지 않았나. 다소 걱정도 되고 주시도 계속 해야겠지만…… 괜찮을걸세.”
데스브링거는 아크메이지의 대답에 후드 안쪽을 긁적였다.
그는 그런 의도로 물은 말이 아니었다.
“아니, 그.”
어제, 그들이 인재를 확인하는 동안 악마기사가 얌전히 신전에 있긴 했다. 투기장에서 사고 친 게 미안해서일 리는 없을 테니, 순전히 악마를 의식한 행위였을 텐데…….
그 악마만 고려하면, 그래. 확실히 별말 없었다. 그를 지켜봐 준 사제들의 말에 따르면 폭주의 기미는커녕 미사만 성실히 참여─정말 안 어울린다마는 이상한 일까진 아니니까─해 주었다고 하니.
다만 그가 신경 쓰는 건 그게 아니었다. 그가 걱정하는 건 악마기사가 악마에게 먹힐지도 모른다는 가능성이 아니라…….
“됐습니다.”
그는 그가 투기장으로 돌아가기도 전에 목욕물을 받아 씻던 악마기사를, 그리고 미사가 끝난 후 또 한 번 씻으러 갔다던 이를 떠올렸다.
본래도 퍽 깔끔을 떨던 사내지만…… 그렇다고 하루에 두 번이나 씻던 사람은 아니었다. 하물며 미사라는, 피나 땀 흘릴 일 없던 사건을 두고 씻을 이유는 더더욱 없다.
“…혹시 다른 문제라도 있나?”
“아뇨, 그건 아닙니다.”
그런데 왜 그는 몸을 또 한 번 닦아 내야 했을까.
“그건 아니에요.”
왜?
“알겠네. 그래도 혹시 마음에 걸리는 게 있거든 말해 주게.”
…이유는 이미 짐작이 간다. 그리고 그것을 막을 방법이 없다는 것도.
“전 이만 가 보겠습니다.”
“고생하십시오, 인퀴지터.”
“네.”
익숙한 무력함이었다.
“오, 여기네요.”
데스브링거는 쓸데없는 잡념을 지웠다. 그가 할 수 없는 일에 미련 두어 봐야 그만 괴로울 뿐이었다.
대신 그는 그가 앉을 자리를 빠르게 찾아내어 엉덩이를 붙였다. 어렵게 구한 자리긴 하나 위치만큼은 나쁘지 않았다. 무대가 잘 보였다.
“자네 덕에 금방 찾았군.”
“별말씀을.”
칸칸과 무왕의 격돌까진 아직 시간이 남았다. 그는 투기장 앞에서 사 온 말린 낙타고기 절임을 입에 물었다. 짜고 달달한 게 제법 맛있었다.
“아, 그러고 보니 어제 조사하라던 것 말이죠.”
“음? 아아. 인퀴지터가 거슬린다고 했던 자들 말인가.”
“예에.”
본래라면 아까 다들 모여 있을 때 말했어야 했다만, 표 구하느라 너무 지쳐서 말하는 걸 깜빡했다.
기실 악마기사나 인퀴지터가 반드시 들어야 할 만큼 무언가가 얽혀 있지도 않았고.
“별…… 이상한 건 없었습니다요.”
“그런가?”
“수상한 점이 아예 없던 건 아닌데, 그것 자체를 파 봐도 나오는 게 없어요.”
“흠. 그 수상한 점이라 함은?”
“갑자기 강해졌습니다.”
처음엔 혹시나 했다. 초반엔 하위권을 전전하던 이들이 어느 순간 갑자기 두각을 드러내며 중상위권으로 도약하다니.
악마계약자들이 어떤지 아는 그로선 의심해 볼 만하지 않은가.
“그렇지만 악마랑 계약했다면…….”
“신전이 모를 리 없지.”
“네. 그게 문제예요.”
실력이 가파르게 상승한 이들을 전부 조사해 보았지만 그들은 평상시 신전을 오가지 않을 뿐, 부상은 대부분 신전에서 치료받았다. 악마와 계약했다면 불가능할 일이었다.
“거기에 악마계약자들은 악마를 공격 못 한다면서요.”
결정적으로 사막에서 악마들이 몰려올 때마다 그들은 수성에 참여했다. 수성에 참여하는 과정에서 악마를 죽이기도 했다.
이 또한 악마와 계약하거든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즉, 저들은 악마계약자가 아니었다.
“그렇다면 정말 별것 아니란 말인가…….”
수상하다. 그러나 나오는 게 없다. 그 간극 속에서 아크메이지가 고민에 빠졌다.
어제부로 그가 가져 온 고뇌와 동일한 것이었다.
“이건 지금으로서 알 수 없는 일 같군. 마탑에 협조를 구하는 쪽이 차라리 낫겠어.”
“옙.”
신전이 모른다면 마탑을 부르는 게 당연하다. 마기를 알아채는 능력은 교단이 우월해도, 마기가 아닌 그 밖의 것은 대부분 마탑이 분석을 더 잘하니까.
하므로 데스브링거는 더 이상 해당 사항에 대해 관심을 껐다. 이제 이 문제는 그의 손을 떠났다.
“그보다 경기는 언제 시작하는 건지.”
“아직 남았네.”
“5년 동안 챔피언을 유지해 온 사람의 실력을 어서 구경해 보고 싶은데 말입죠.”
“이 도시의 최고인 만큼 실망할 수준은 아니지 않을까 싶네.”
“기사 나리보단 약할 것 같지만요.”
아크메이지는 그 말에 대답하지 않았다. 다만 빙그레 웃었다. 답을 할 필요도 없다는 태도였다.
“누가 이길까요? 무왕이 챔피언의 자리에 오르기 전만 해도 칸칸이 무왕과 비등한 실력자였다던데.”
“호오, 그랬나?”
그뿐인가? 좀 더 조사해 본 바로는 붉은갈기 칸칸과 챔피언은 오랜 친구 사이라고 한다. 무왕이 챔피언에 오른 후에도 친구 사이를 계속 유지했다는 듯하고.
“예에. 심지어 둘이 친구라던데요. 뭐어 요즘 들어 사이가 소원해졌다는 듯하지만.”
⌈챔피언의 거처에서 죽어 나간 고용인이나 지인이 부상을 입은 채 나왔다던 소문이 진짜고, 그중 지인은 바로 붉은갈기라덥니다.⌋
그렇지만 숨겨진 사실도 있다. 그는 말을 함과 동시에 아크메이지의 팔뚝에 해당 진실을 적었다.
참고로 이제서야 이걸 알게 된 이유는 별거 아니다. 무왕을 그리도 아낀다던 성주가 직접 덮은 일이라 정보길드가 말을 아끼고 있었을 뿐이다.
다른 지부에 비해 너무 비협조적인 게 거슬려, 소속 일원이 아닌 밤손님의 자격으로 다녀오지 않았다면 아직도 모르고 있었을 거다.
“무왕이 그렇게 까칠하다던데. 그것 때문일까요?”
⌈그리고 그날 이후로 붉은갈기에게 감시가 붙었다네요. 성주가 붙인 사람이나 챔피언에게 투자한 상단, 두 쪽 다.⌋
그는 계속해서 아크메이지의 팔뚝에 글자를 적어 나갔다. 아크메이지가 알아듣고 있는지는 미지수이나, 되묻지 않는 걸 보면 대충 이해하고 있는 것 같다.
“자네 말이 맞을 것 같네. 사람이 포악하거나 도량이 작으면 멀어지기도 하는 법이지.”
역시 이해한 게 분명하다.
“혹, 붉은갈기가 갑자기 도전장을 내민 이유도 그 때문인가 궁금하군. 자네는 무엇이 이유라고 생각하는가?”
“뭐어. 법사 나리가 생각한 거랑 비슷하지 않겠습니까요.”
⌈붉은갈기가 몇 번이고 신고를 하려고 했지만 매번 막혔답니다. 그걸 고려하면 차라리 투기장에서 챔피언을 죽이려는 걸지도 모르죠. 이대로 가다간 희생자가 더 나올지도 모르니까요.⌋
“그가 이길 것 같은가?”
“저야 모르죠. 그렇지만 대부분 붉은갈기의 패배를 점치고 있긴 합니다.”
⌈져요. 100%.⌋
그들은 입으로는 여상스럽게, 글자로는 비밀스러운 정보를 주고받으며 슬슬 바글바글해진 관객석을 훑어보았다.
“그럼, 오늘 혹시 ‘사고’가 날 것 같은가?”
⌈챔피언에게 속죄할 의향이 없다면 솔직히 그렇지 않겠어요? 지금처럼 합법적으로 피해자이자 목격자를 죽일 기회도 드문데.⌋
아직 게임은 시작되지 않았다.
“그래도 뭐, 저 자리에 버티고 있는 양반이 누군데 설마 죽겠습니까?”
그렇지만 이미 결과는 나온 듯했다.
* * *
인퀴지터는 약속된 자리에 털썩 앉았다. 공기는 후덥지근했으나 갑옷에서 전해져 오는 냉기가 숨통을 틔워 주어서 버틸 만했다.
“청! 우리의 챔피언, 무왕이 올라옵니다!”
그러다 드디어 경기가 시작되었다. 둘 중 먼저 올라오는 건 무왕이었다.
큐어티족인지 머리 위쪽에 달린 귀에는 한쪽에만 귀고리가 하나 착용되어 있다. 어지간한 샤기족만큼이나 덩치가 큰 큐어티였다.
“크군.”
인퀴지터는 그걸 보며 조금 부러움을 느꼈다. 자신을 두고 ‘작다’란 생각을 해 본 적은 없지만, 저만한 덩치들을 보면 그녀도 종종 저만해지길 바랄 때가 있었다.
싸움에 있어 체격은 그 자체로 무기기에 품는 소망이었다.
“그런데 좀…….”
무언가 기이한 느낌이 드는 것 같다. 도시에 들어온 이래 몇 번이고 마주친 거슬림이 보다 확대된 느낌이었다.
그녀는 체격을 두고 부러워하는 걸 그만둔 채, 하얀 머리칼과 까만 피부를 가진 챔피언을 지긋이 바라보았다. 마음 같아서는 신성력을 마구 뿜어 무언가 걸리는 게 있는지 확인하고 싶었다.
“왜 그러십니까?”
“그냥, 무언가 미묘한 게 있는 것 같아서 말입니다.”
그렇지만 그녀는 꾹 참았다. 아크메이지가 말했었지만, 신성력에 반응했다면 지금껏 신전이 가만히 있었을 리 없다.
상대가 신전에 가지 않았다는 가능성도 사실상 고려하기 힘들다. 상대는 5년이나 이곳에서 챔피언으로 버텨 왔고, 그 과정에서 부상 한번 안 입었을 리 없으니까.
“미묘한 것?”
“신경 쓰실 일은 아닙니다.”
결국 기분 탓인가. 그녀는 시무룩해진 채 다음으로 올라오는 이를 확인했다. 붉은갈기 칸칸이었다.
“백! 그에 맞서 싸우는 이는 붉은갈기의 칸칸!”
그들을 도운 게─그걸 도움으로 봐도 될까마는─있기 때문일까. 그녀는 어쩐지 칸칸을 응원하게 되었다.
이것이 상금과 명예를 노리며, 동시에 서열을 정하고자 할 뿐인, 별 의미 없는 결투에 불과하다 해도 그렇다.
투기장의 존재가 달갑게 변한 것은 아니나, 투기장의 존재 의의를 알게 된 이상 탐탁잖던 마음도 사라졌고, 칸칸 자체의 인상도 좋다. 그러니 응원 정도는 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만! 그만 멈춰라!”
“스, 승자! 무왕!”
“어서 응급조치를!”
“제가 하겠습니다!”
그녀는 응원하던 마음을 곧바로 접었다. 접다 못해 나름 이해하게 되었던 투기장의 존재 의의를 다시금 의심하게 되었다.
아무렴 실력 차가 뻔히 나는데도 일부러 가지고 놀며 부상을 더 많이, 크게 입히다니. 유흥의 목적이 크다곤 하나 이건 너무 잔인하고 불명예스러웠다.
“비, 빌어먹을.”
“말하지 마라.”
그녀는 과다 출혈로 죽기 직전인 이를 향해 신성력을 퍼부었다. 오랫동안 힘을 쓸 일이 없었던지라 이건 별 무리도 안 되었다.
약간의 지끈거림을 대가로 생사의 경계를 오락가락하던 이가 살아나기 시작했다.
새살이 돋고 신성력이 피 대신 온 세포를 촉진하며 양분을 대신 전달하는 기적이었다.
“역시 난 안 되는 건가…… 나로서는, 더 이상…….”
그러나 그 기적 속에서 상대는 조금도 기뻐하지 않았다. 그저 잘려 나갈 뻔한 팔뚝을 제 눈가에 얹은 채 오열할 뿐이었다.
“무엇이 그리 슬픈진 모르겠지만, 당신은 분명 훌륭히 맞서 싸웠습니다.”
그 감정을 공감할 순 없으나 적어도 붉은갈기가 최선을 다했다는 건 안다. 인퀴지터는 그녀가 느낀 바를 성실히 전하며 손을 떼었다.
치료가 끝났다. 한 사람을 살린 대가로 온몸에 살짝 따끈한 열감이 올라왔지만 전력으로 싸울 때에 비하면 따끔하단 단어만도 못하다.
그녀는 갑옷의 시원함으로 열감을 누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니 일어나십시오. 당신에겐 아직 미래가 있지 않습니까.”
“…나는 내가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시도했음에도 실패했다. 그런데도 내게 미래가 있다고?”
“글쎄. 정말 모든 걸 시도해 보았습니까?”
인퀴지터는 손을 뻗었다.
“그렇다면 다시 시도해 보십시오. 절 가르쳐 준 분이 말하시길, 한 번 만에 성공하는 일이 오히려 드물다 하였습니다. 하면 다시 해 봤을 때 성공할 수도 있지 않겠습니까.”
“……!”
상대는 그 손을 쉬이 잡지 않았으나, 잡기 직전 머뭇거림은 보였다.
“…그래도 안 된다면?”
“그래서 포기할 겁니까?”
“그건…….”
“저는 당신의 사정을 모릅니다. 그러니 당신이 포기한다고 해서 비난하지 않을 겁니다. 그러나 이 일을 포기했을 때, 당신 스스로는 수긍할 수 있습니까?”
“…아니.”
“그럼 다시 도전해 보십시오. 당신이 당신 스스로를 설득할 수 있는 합당한 이유를 찾을 때까지.”
인퀴지터는 그 머뭇거림을 흔쾌히 기다려 주었다. 붉은갈기의 표정이 헝클어졌다.
“하, 신입 투산 줄 알았더니만, 그냥 말 잘하는 사제님이었잖아.”
“제가 말을 잘합니까?”
그녀는 처음 듣는 칭찬에 볼이 발그레해졌다. 다른 건 몰라도 말 잘한다는 소리는 이번이 처음이었다!
비록 지금 한 말 대부분이 그녀를 가르친 사제들이 한 말이라고 해도 말이다.
“…살려 줘서 고마워.”
“제 할 일이었습니다.”
“…당신 말대로…… 그래, 다시 한번 도전해 봐야지.”
인퀴지터는 드디어 맞닿은 손을 꽉 붙잡고 그를 일으켜 주었다. 그녀보다 좀 더 큰 덩치가 자리에 서며 옷을 털었다.
그런 사내의 시선은 건너편, 아직도 시선을 즐기고 있는 무왕에게 닿아 있다.
“내가 죽는 한이 있더라도…… 멈춰 봐야지.”
인퀴지터로서는 잘 이해 가지 않는 일이었다. 도전이라면 몰라도 ‘멈춘다’라니? 챔피언의 연전연승을 멈춘다는 말인가? 하면 그것은 무왕과 만나지 말란 말과 관련이 있나?
“무엇을 멈춥니까?”
“……! 아니, 별 의미 없는데.”
“목숨을 거는 것에 의미가 없습니까?”
“아니, 그런 소리가 아니라.”
“……?”
칸칸이 쩔쩔매며 그녀에게 무어라 말을 덧붙였다. 이해 안 가긴 매한가지였다.
그러다 잠깐. 그녀의 시선이 관객석에 닿았다. 아크메이지가 손을 흔들고 있고 뺀질이가 그 옆에서 뚱한 눈을 하고 있었다.
“내 말은, 잊어 달란 거야. 이건 사제님이 신경 쓸 게 아니니까…….”
“마침 잘됐습니다!”
“……?”
“무왕에 대해 이야기를 듣고 싶었던 참입니다. 치료가 끝났다곤 하나, 푹 쉬는 것도 필요하니, 이참에 신전으로 같이 갑시다!”
“뭐?”
저보다 약한 상대를 가지고 노는 시점에서 무왕을 동료로 데려오고 싶은 마음은 싹 가셨다.
그러나 동시에, 무왕이란 사람에게 거슬림을 느낀 이상 그를 조사해 보고 싶은 의향은 생겼다.
그런 점에서 이자를 저 두 사람 앞에 데려다주면 저 둘은 그녀보다 훌륭히 정보를 털어 주리라.
“자, 이쪽입니다!”
“아니, 사제님?!”
그녀는 냅다 붉은갈기를 붙잡고 나갔다. 어차피 끝난 경기, 그들을 막는 자는 아무도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