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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인공이 컨셉충이면 곤란한가요-96화 (96/389)

◈96화 그래도 아직 희망이 (5)

붉은갈기, 칸칸은 제 앞의 문을 두고 한숨을 뇌까렸다.

이 문 너머로 가야 할지, 가지 말아야 할지 도저히 알 수 없던 까닭이다.

마음 같아선 그만두고 싶다. 죄 없는 고용인을 여럿 죽이고 30년지기 친구마저 공격하는 인성 파탄자를 뭐 하러 만난단 말인가. 평소에도 성격이 더러워서 저걸 친구라고 사귀었나 싶었던 새끼인데.

그러나 그놈의 우정이 뭐라고. 노르다 전사로서 맹세한 게 뭐라고, 일주일 전에 침 뱉었던 자리에 또 한 번 서 버렸다.

누군가의 강요도, 강압도 없이 그 혼자만의 의지로 말이다.

“하, 염병.”

민간인을 죽인 시점에서 놈을 동정하는 건 물론 아니다. 노르다 전사는 약탈의 순간 외, 민간인을 건드리지 않는 게 원칙이며 그 원칙을 어긴 자는 전사의 자격이 없다.

함에도 그가 이곳에 선 것은, 그래. 30년지기로서 친구가 더 이상 타락하는 걸 두고 볼 수 없기 때문이다.

“…이 새끼는 나한테 감사할 줄 알아야 해.”

신고도 막혀, 입막음을 위해 협박도 당해, 심지어는 실제로 공격도 당해.

그 고초를 당해 놓고도 마지막 타락까진 막아 보겠다고, 손절 대신 자수를 권고해 주는 친구가 세상에 어디 있을까.

하다못해 죗값 치르겠다고 하기만 하면 옆에서 같이 해 주겠다고도 하는데.

최소한 무왕 저 새끼한테 아까운 친구인 건 확실하다. 칸칸은 그렇게 자기 이름에 금을 칠했다.

“야, 야. 있냐?”

그리고 끝내 30년 정에 못 이겨 대문을 두드렸다.

안 통할 걸 알아도 그것이 옳은 일이기에. 제 친구를 위한 길이라 생각하기에 행한 일이었다.

“야우 얌마! 얌마, 야!”

그렇지만 이런 친구가 있어도 어떤 개자식은 끝까지 회개하길 택하지 않는다.

“개시발……!”

칸칸은 결국 대문을 발로 쾅 걷어찼다. 정말 진심을 다해 걷어찼다면 문이 부서졌겠으나 그것만은 인내했다.

저번에 그랬다가 문값 물어 달란 소리나─나무 문이 얼마나 귀한지는 아냐던 생색과─들었으니 당연했다.

“다신 안 와, 알았어?! 이 빌어먹을 새끼야! 오늘이 끝이야. 오늘이 끝이라고!”

대신 그는 분노를 마구 토해 냈다. 이렇게 말해도 내일이면 다시 이 근처를 배회할 테지만, 지금 내뱉지 않고선 참을 수 없었다.

그의 30년지기는 지기가 아니라 원수 그 자체였다.

쾅!

칸칸은 마지막으로 대문을 한 번 더 걷어찬 뒤, 그곳을 떠났다. 주로 투사들이 거주하는 거리라 그런가, 아무도 그 소란에 관심 주지 않았다.

“오늘도 까였냐?”

대신 일부 사정을 아는 이들이 낄낄대며 고개를 들이밀었다. 저 새끼들도 망할 놈이긴 매한가지였다.

칸칸의 얼굴이 구겨졌다.

“닥쳐.”

친한 놈들이면 몰라, 친하지도 않은 별 같잖은 것들이 툭툭 건드리긴.

이곳에 막 왔을 때만 해도 이런 놈들도 별로 없었는데, 요즘 들어선 이런 등신 새끼들이 많다. 투사보다는 호사가처럼 구는 놈들이.

“자존심하고는.”

칸칸은 중지를 치켜올려 보이곤 그 거리를 빠져나왔다. 갈수록 이 거리에선 구린내만 나, 가능하면 오래 있고 싶지 않았다.

“…냄새하곤, 정말.”

이 새끼들은 똥도 안 치우나.

몇 명은 그래도 냄새가 안 나는데, 갑자기 치고 올라온다 싶은 신입들은 하나같이 고약한 내가 났다. 빌어먹을 제 친우도 그렇고.

하여간 마음에 드는 놈들이 하나도 없다.

그는 투덜대며 코를 들썩였다.

그러다 문득 떠오르는 건 오늘 낮에 봤던 신출내기 투사다. 반반 머리는 난생처음 봐서 유독 기억에 남던, 동시에 미묘하게 이 거리와 비슷한 향이 나서 기분 나쁘던 자식.

그래도 좀 강해 보이던데, 근시일 내에 투기장에서 만나려나?

그는 가능하면 안 만났으면 좋겠다 생각하며 자리를 떴다. 정말 운수 더러운 하루였다.

“어, 넌 아까 낮에 봤던……?”

“뭐냐.”

정말로, 운수 더러운 하루였다.

투기장에서 안 만나게 해 달라고 빌었더니 신전에서 얼굴 보네.

* * *

나는 삭신이 쑤시는 걸 느끼며 신전의 예배실에 앉았다.

대낮부터 시간 낭비하는 꼴이었지만 상황이 상황이다 보니 어쩔 수 없었다.

아무렴, 만일을 대비해 개인행동은 삼가 달랬지. 자동으로 성벽 너머 악마들이 가득한 사막에도 입장 못 하지.

모험가 길드를 털어도 나오는 퀘스트는 악마사냥뿐이고, 투기장 시합을 감상하며 실력자를 선별하는 것도 아까 사건으로 어렵게 됐다.

내가 먼저 시비 건 건 아니다 보니 수리비까진 물지 않았지만, 관객으로서의 출입 금지 딱지는 붙어 버렸거든.

정 입장해야 한다면 투사로서 들어가는 꼼수는 있겠으나─그쪽도 그걸 바란 듯 투사로선 환영한다고 했다─굳이 그럴 것까지 있나. 그냥 신전에 박혀 있고 말지.

더불어 꼭 나쁜 것만도 아니었다. 신전 자체가 마기를 억제하는 기능이 있어서 그런가, 여기서만큼은 개인행동 해도 뭐라 안 하더라고.

아크메이지야 그래도 한 사람은 남아 있으면 좋겠다는 눈치긴 했는데…… 남을 사람이 없는 것도 사실이라 고집하진 않았다. 인원이 적은 덕을 본 셈이다.

각설하고, 제한적인 자유도 나름 자유다. 오늘 하루 종일 이곳에 박혀서 명상이나 하련다. 이쪽 신이든 우리 세계 신이든 뭐든 불러다가 고해성사 하고픈 말도 많던 참이니까.

“저희에게 자비를 베푸소서. 저희의 기도를 들어 주소서…….”

무엇보다 나, 이쪽 신님께 제발 빌고 싶은 것도 하나 있었다.

“신이시여, 당신의 자애와 자비와 사랑을 당신의 종들에게 베푸소서.”

나는 저녁 미사에 꼽사리 낀 채 간절히 빌었다.

제발 자애와 자비와 사랑으로 우리 파티에 베르세크가 들어오지 않게 해 주세요……. 다른 건 몰라도 그 사람은 좀 봐 주세요……. 저의 신체와 제 아크메이지의 위장을 지켜 주세요…….

신에게 양심이 있다면 들어줘야 할 소망이었다.

“저희는 그 무엇보다 당신의 지혜를 바라니, 저희가 겪을 시련과 역경을 부디 이겨 낼 수 있도록 도와주소서.”

물론 너무 베르세르크 안티 같다고 말한다면 할 말은 없다. 그런데 솔직히 안티가 아니더라도 이 정도 기도는 할 법하다고 생각한다.

암, 우리 파티에 말 안 통하는 딜러는 내 컨셉으로 충분했다! 조율 잘 안 하고 냅다 정면 돌파를 외치는 건 나로 충분하다고!

거기에 일상도 문제다.

결판을 제대로 냈다면 모를까, 중간에 무산됐으니 독이 바짝 올랐을 터. 다시 마주치면 재도전할 게 뻔한데, 파티에 들어오기까지 하면 그걸 피할 수가 없지 않나.

난, 난 다시 붙기 싫다…… 차라리 적이랑 싸우는 건 힘 조절이라도 할 필요 없지, 베르세르크는 그것도 안 될 거잖아. 난 싸우기 싫어.

“오늘 기도를 마치겠습니다.”

그렇지만 역시 들어오겠지…… 물론 지금 일행 눈치 보면 쉽게 합류시킬 것 같진 않은데, 그건 도적 때도 비슷했으니까. 따흐흑.

나는 눈물을 삼키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예배실에 남아 있을 것과 별개로, 안쪽에 앉은 사람이 나가려는 것 같았다.

“어, 넌 아까 낮에 봤던……?”

근데 왜 네가 나와.

나는 적갈색 머리카락을 보며 상대의 이름을 뒤적였다. 그러니까…… 칸칸이었던가?

주변에 누가 앉든 신경 안 쓰고 기도만 했더니 내 옆자리가 이 양반인 것도 몰랐다. 미사 전, 주교가 나눠 준 천─축성받은─을 뒤집어쓰고 있던 것도 한 이유 하겠지만 말이다.

“뭐냐.”

별개로 칸칸이 내 옆자리든 앞, 뒷자리든 크게 달라질 건 없는지라. 정보 알아내서 전달해 줄 컨셉도 아니니 이 우연은 결국 아무 의미 없다.

나는 뚱하니 놈을 째려보았다.

“응? 아, 아…….”

칸칸은 저도 모르게 내게 아는 척을 했나 보다. 내가 꼬나보니 본인도 머쓱해진 양 머리를 긁적였다. 나이를 좀 먹은 듯한 얼굴이 미묘해졌다.

“…구린내 나는…… 신전 다니는 건 처음…….”

그러면서 뭐가 중얼거렸는데, 내용이 다소 껄쩍지근하다.

지금 뭐라고 했냐. 구린내? 구린내애애??

나 냄새나?!!?

나는 충격을 받았다. 하나는 남에게 냄새난다고 직설적으로 말하는 칸칸의 예의에, 두 번째는 내게서 냄새가 난다는 사실에.

허, 내가 얼마나 청결히 씻었는데. 사막이라고 10배는 비싼 목욕비, 감수해 가며 목욕재계했는데. 그것도 아까 전에, 바로 아까 전에 씻은 건데!

나한테 고린내가!!

나는 그만 정신을 잃고 말았습니다…… 라고 하고 싶지만 차마 그러진 못하고 주먹을 꽉 쥐었다.

다시…… 다시 씻으러 간다, 제기라아알. 현대를 살아온 문명인으로서 냄새나는 인간이 될 순 없어.

“용건이 없다면 꺼져라.”

그보다 여기 사람들 하나같이 잘 안 씻는 편인데, 그런 사람들마저 구리다고 할 정도면 얼마나 안 좋은 향이 나는 거냐고.

허, 참. 허어어참. 비누 문젠가. 아니면 온몸에 든 피멍 때문에 살살 닦은 게 문제였나.

돌아 버리겠네, 정말.

“어어, 미안.”

나는 짜증을 한가득 담은 채 축성받은 천으로 몸을 좀 더 가렸다.

천은 깨끗하니까 이러면 덜 나겠지. 이걸 빨아야 하는 분껜 다소 죄송하지만 그렇다고 면전에서 고린내 난단 소리 들었는데 가만히 있을 순 없잖아. 컨셉 때문에 향수도 못 산다고, 나는.

나는 날 계속 힐끗대며 자릴 떠나는 칸칸을 두고 이를 악물었다. 냄새난다는 거 알려 준 건 고마운데 그래도 얄미웠다.

“아, 붉은갈기 님. 신전에서 또 뵙는군요.”

아, 내 쿠크다스 멘탈아…… 문명인으로서의 자존심아…….

“너……! 이번에도 날 따라온 거냐!”

“에이, 따라왔다니 그런 오해의 소지 가득한 말씀을. 그저 우연이랍니다?”

“우연은 개뿔……!”

그런데 저 양반은 또 왜 나가다 말고 이상한 사건에 엮여 있어.

“날 감시하러 온 거겠지……!”

“그런 흉악한 말씀을! 붉은갈기 님을 제가 어떻게 감시한답니까? 그래야 할 이유도 없는데.”

남의 이야기 함부로 엿듣는 건 무례임을 안다. 그렇지만 이 상황의 경우, 무례를 운운하기 전에 사람 있는 자리에서 들릴 정도로 떠드는 사람들이 더 문제 아닐까.

물론 저쪽도 신전 사람들에게 들려주긴 싫은지 가까이 붙어서 속닥대긴 하는데…… 여기에 청력 좋은 사람이 하나 있을 거라곤 생각 안 해? 너희 비밀 얘기가 장난이야!?

그런 건 사람 없는 곳에서 하라고! 예배실에서 하지 말고!

“네놈이 따라오지 않아도 난 말 안 한다.”

“대체 무슨 말씀을 하시는지…….”

“남들 안 끌어들일 테니까 다신 내 눈앞에 나타나지 말란 거다!”

으아아아. 난 왜 문학작품을 클리셰에 정통해질 정도로 많이 봐서.

끼어들 생각은 없지만 사정 다 예상 가잖아, 이것들아! 아니면 뭐, 사이드 퀘스트냐?! 그런 거냐?!

“하하, 무슨 말씀이신진 잘 모르겠지만, 역시 챔피언의 친구분다우시네요. 남 끌어들이길 싫어하신다니.”

심지어 챔피언 언급까지 나왔다.

나는 뒤집어쓰고 있는 천이 얼굴을 가리도록 의자에 앉아 고개를 숙였다. 내 얼굴은 다분히 차가워진 형상으로 머리를 빠르게 굴리고 있다.

챔피언은 광증이 돌고 있단 소문이 있음.

그 광증으로 인해 사망자와 부상자가 생겼단 소문도 돌고 있음.

그리고 칸칸은 챔피언의 친구이며 모종의 이유로 감시 및 협박을 당하고 있다…….

이야, 이거 이거.

무왕은 절대로 우리 파티에 못 들어올 운명인가 보다. 구린내는 내가 아니라 이쪽에서 풀풀 나고 있잖아.

“빌어먹을 새끼가!”

이름 모를 협박자가 떠나간 후, 칸칸은 성당 문짝을 쾅 치며 분풀이를 했다. 그대로 부서지거나 금 가지 않는 걸 보면 힘 조절할 정신머리는 있나 보다.

“형제님, 무슨 일이십니까?”

“……! 아, 아닙니다 사제님.”

“무엇이 그리 화가 나셨는지는 모르겠습니다만…… 혹, 그리다나 상인분과 불화가 있으셨는지요?”

“그럴 리가요! 저 같은 투사 나부랭이가 상인이랑 문제가 생길 일 뭐가 있겠습니까.”

아니, 아까 그 꼴을 보면 누구라도 불화가 있을 거라 생각할 텐데. 싸움꾼이라서 거짓말에 익숙하지 않는 건가.

“…그렇다면 다행입니다.”

사제도 나와 비슷한 심정 같았으나, 크게 걸고넘어지진 않았다. 그저 문제가 있으면 언제든 상담해도 좋다는 여지를 남길 뿐이지.

“저, 사제님.”

근데 그 여지를 바로 잡는다고?

“제게…… 축복 하나만 내려 주실 수 있으십니까?”

아, 아니네.

“무슨 축복을 바라십니까?”

“제가 이길 수 있…… 아니, 그런 건 형평성 때문에 허용하지 않는댔죠. 그럼…….”

나는 칸칸이, 붉은갈기가 저보다도 작은 사제에게 비는 걸 슬그머니 지켜보았다.

“제가, 제 소중한 누군가를 도울 수 있다고, 그래도 아직 희망이 있다고, 그렇게 축복해 주십시오.”

그의 적안이 무언가를 각오한 듯 결연히 빛나는 게 보였다.

챔피언, 무왕에게 무슨 문제가 있는지는 확신할 수 없으나, 그 인간이 친구 하나 기똥차게 뒀다는 건 알 수 있는 순간이었다.

다음 날, 붉은갈기 칸칸과 챔피언 무왕의 경기가 잡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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