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4화 그래도 아직 희망이 (3)
칸칸이 남긴 말은 몇 가지 의문을 가져왔으니.
그렇다고 싫다는 사람 억지로 붙잡기도 좀 그렇다. 우리는 결국 의문을 품은 채 신전으로 향했다.
다른 곳보다 유독 하얀 건물은 사막의 방식을 따랐을지언정 여타 신전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참고로 투사들이 많이 찾는다는 식당도 알아 놨습니다요.”
신전에 짐을 푼 뒤에는 데브가 알아 둔 식당으로 갔다. ‘인재 찾기’란 목적에 충실한 선정이었다.
그렇다고 음식이 맛이 없느냐면 그것도 아니었지만.
“잘 골라 주었군. 고생했네.”
“제가 할 일인데요, 뭐.”
나는 간 선인장을 퍼먹으며 주변을 쓱 확인했다. 투사들이 많이 찾는단 이야기에 걸맞게 주변은 죄다 전사뿐이었다.
다만 그래. 자그만 문제점이 있다면 그들 대부분이 혼자 온 상태라, 말없이 밥만 먹고 있단 것이다.
아무래도 귀동냥은 어려울 것 같다.
“…이제보니 실수한 지점도 있고.”
데브도 그걸 깨달았는지 작게 혀를 찼다.
“……?”
“왜 그러십니까, 인퀴지터?”
“아니, 별건 아닙니다. 이 도시에 들어온 후부터 미묘하게 거슬리는 사람들이 종종 보여서.”
“…마기입니까?”
“그건 아닌 것 같습니다만…… 잘 모르겠습니다.”
뭐, 정작 그걸 신경 쓰는 사람은 아무도 없긴 했다. 더 큰 게 있어서.
“여기서 누가 거슬리는 느낌이 납니까?”
“저기 저 테이블이랑 저쪽 테이블?”
“자네, 아는 사람인가?”
“…어어, 네. 인상착의만 고려하면 둘 다 투기장에서 꽤 이름 알린 놈들이긴 합니다. 붉은갈기만큼은 아니지만 그럭저럭 중상위쯤?”
“흐음.”
데브의 말에 아크메이지가 꺼림칙한 얼굴을 했다. 나도 비슷한 심정이었다.
다른 누구도 아니고 성직자가 거슬린다고 하면 거슬리는 거지.
“예상 가는 게 없지는 않지만, 잘 모르겠군요. 신성력에 반응했다면 이제껏 신전이 방치했을 리도 없으니.”
“하면…….”
“당장 할 수 있는 게 없으니 일단은 미루도록 하지요. 대신 자네에게 이 문제를 부탁하고 싶은데. 이야기가 끝난 후 관련해서 더 조사해 줄 수 있나?”
그러나 마땅한 방법이 있는 것도 딱히 아닌지라, 아크메이지는 일을 데브에게 미뤘다.
“그럽죠.”
데브가 인퀴지터가 지목했던 이들을 다시 한번 눈에 담은 후 몸을 돌렸다.
직후 미처 나오지 않았던 요리들이 하나둘 종업원 손에 배달되었다.
“그보다 칸칸이라 했던가? 그자가 왜 그런 말을 남기고 갔는지 아나?”
“음, 무왕을 만나지 말란 거 말이죠.”
아크메이지가 다른 문제로 화제를 돌렸다.
영문을 모르는 우리와 다르게, 데브는 짐작 가는 게 있는 듯하다. 더위를 못 이겨 후드를 벗고 만 이가 삐죽 수염이 난 턱을 살살 쓸었다.
“조금 악의적인 소문이길래 제대로 검토하고 말하려 했던 건데…… 일단 제가 들은 것만 말하면 무왕에게 약간의 문제가 생긴 것 같습니다.”
그는 그 말을 하며 목소리를 죽였다. 아니, 죽이다 못해 아예 글로 이야길 전하기 시작했다. 주변 투사들을 의식한 게 분명했다.
⌈광증이 생겼다더라구요. 그것도 주변인들을 공격하는 부류의.⌋
“……!”
우리 모두가 글을 읽을 수 있어서 다행이다.
글자를 알아들은 인퀴지터가 눈을 크게 뜨고 아크메이지가 본인의 손등을 만지작거렸다.
⌈주변을 공격하는 이가 챔피언 자리에 아직 남아 있을 수 있나? 무언가 대처해야 하는 건 아닌가?⌋
눈치가 부족하긴 해도, 이런 것마저 초 칠 정돈 아닌 인퀴지터가 펜대를 잡았다. 정갈하다 못해 인쇄한 것 같은 글씨체가 그녀의 성격과 똑 닮았다.
⌈공식적으로 사건을 일으킨 적은 없습니다. 단지 거처에서 시중을 들던 하인이 시체로 발견됐다거나 친하게 지내던 이가 부상을 입은 채로 나오는 게 목격됐다는 소문이 돌 뿐이지.⌋
⌈원인은 아나?⌋
⌈아뇨. 그렇지만 스트레스가 극에 달해서 생긴 게 아닌가 하는 추측은 있습니다.⌋
갑자기 끼어든 아크메이지의 질문에 데브는 잠시 펜을 멈췄다. 그가 망설이는 사이 잉크가 한 방울 떨어졌다.
⌈이건 방금 말한 것보다 더 신빙성이 낮은 이야기인데, 광증이 돈단 소문이 퍼지기 전부터 평소보다 더 예민해진 것 같단 이야기가 암암리에 돌았거든요.⌋
⌈그게 왜 신빙성 낮은 이야기지?⌋
⌈원래 성질이 더러운 사람이라.⌋
예민한 상태나 평소나 똑같이 더럽게 굴어서 구분이 안 된다 이건가. 성격이 얼마나 나쁘면 저런 소릴 듣는 건지 모르겠다.
이 따위 컨셉을 잡은 내가 할 말은 아니지만.
“어쨌든 전부 확인된 이야기는 아닙니다요.”
정보는 이게 끝인지, 데브가 펜을 거뒀다.
동료를 고르는 데 실질적으로 영향을 끼치던 아크메이지가 고뇌에 잠긴 얼굴을 했다.
“이렇게 되면…… 재고할 필요가 있겠군. 성격이 예민한 것이야 조율하면 될 문제지만 이런 문제는…….”
나는 그 시점에서 잠시 양심이 콕콕 찔렸다. 무왕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는 건데 왜 내 약점이 계속 찔리는 것 같은지.
“그렇지만 상대를 보지 않고 판단하는 건 어리석은 행위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그렇지요. 인퀴지터의 말이 맞습니다. 편견으로 시야를 가려 버리면 진정 중요한 것을 놓치기 마련이지요.”
그래도 성장한 인퀴지터를 보는 건 감동적이다.
나는 첫 만남 때에 비하면 정말 바르게 자라고 있는 인퀴지터를 보며 괜히 감격했다. 우리 김치만두가 이렇게 잘 자라고 있다.
“저는 직접 대면해 보고 결정을 내리고 싶습니다.”
비록 칸칸이 초면임에도 말 걸면서까지 남긴 조언은 유명무실해진 듯하지만.
“알겠습니다. 하면 자네는 의견이 어떤가?”
“저 말입니까요? 전 뭐…… 상관없습니다. 소문이 진짜더라도 댁들이 그 양반한테 당할 린 없고, 일이 좋게 풀려서 파티에 들어오면 전력이 증강되는 것도 맞잖습니까.”
그러나 그래도 상관없지 않을까 싶다. 그가 충고한 이유가 광증 때문이 맞다면 그냥 손절해 버리면 되는 거 아니겠나.
광증이 아니라 다른 사정이 있는 것이라도 좋다. 데브 말마따나, 광증이 아니라면 동료로 만들어 전력 증강을 꾀할 수 있을 테니.
광증이 없어도 성격이 너무 안 맞는다면 그 역시 사절해 버리는 수단도 있다.
어느 쪽이든 우리에게 손해는 없는 셈이다. 그저 약간의 시간과 수고가 드는 것 빼고는.
“자네는?”
“관심 없다.”
“알았네. 그럼 무왕에게 제의를 하는 것은 직접 마주한 뒤 판단을 내린 후로 미뤄 두도록 하지.”
아크메이지도 직접 보는 쪽에 마음이 기운 모양이다. 그녀는 결론을 모아 깔끔히 정리했다.
첫 번째 안건이 끝났다.
“그럼 다음은 무왕과 대면할 방법을 찾는 것이겠군.”
두 번째 안건은 이것이었다. 무왕을 만나지 말라는 조언을 무시하기로 했다면, 무왕을 만날 방법을 찾아야 하지 않겠는가.
“가장 빠른 건 약속을 잡거나 무왕의 거처를 찾아가는 것인데…….”
아크메이지가 말끝을 흐리며 데브를 보았다. 선인장 주스를 쪽쪽 빨던 이가 그것을 내려놓았다.
“그건 어려울 겁니다요. 무왕은 원래도 사람을 잘 안 만난다니까요. 지금은 거의 칩거 상태라기도 하고.”
“그렇군.”
“그래도 혹시 모르죠. 인맥으로 만날 수 있을지?”
농이 살짝 섞인 데브의 말에 아크메이지와 인퀴지터의 표정이 오묘해졌다.
“마탑은 이곳에 없으니 그들의 힘을 빌릴 순 없을 테고, 신전은…….”
“…여쭤는 보겠습니다. 그렇지만 그게 가능할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도시에서 공인한 만큼 가타부타하진 않는다. 그러나 교리에 어긋나는 부분이 많은 만큼, 그쪽과 친할 것 같지도 않다며 인퀴지터는 미리 일러 주었다.
아는 게 별로 없는 내 입장에선 그런갑다 하는 이야기였다.
“설마요. 투기장이면 부상자가 많이 나올 테고, 부상자는 대부분 신전으로 갈 텐데, 인맥 하나 없겠습니까?”
“그건 그렇긴 한데…… 잘 모르겠군. 대신전에선 기부금을 어지간히 내지 않는 이상, 이런 식으로 상처 입은 자는 잘 치료하지 않았다.”
“차별 아니에요, 그거?”
“차별이라기보단 우선순위가 낮은 쪽에 가깝다. 중상을 치료할 수 있는 사제는 수가 적기도 적거니와…… 우리가 우선해서 치료하는 자들은 악마와 싸우다가 다친 자, 산적이나 강도 같은 공동의 위험을 제거하다가 부상 입은 자들이다.”
나름 납득이 가는 이야기였다. 누군가를 지키다가 다친 사람과 개인의 돈·명예를 얻고자 하는 이들이 모여 싸우다 다친 건 느낌이 다르니까.
“허, 어디 신전이랑은 참 다르네요.”
“…그곳은, 면목이 없군.”
“됐고, 만약 신전도 안 통하면 그땐 어떻게 하실 겁니까요?”
“그땐…….”
한데 데브가 말 돌리고자 한 말이 모두의 공백을 찔렀다. 다들─이라고 해 봤자 둘이지만─ 이 가능성은 미처 염두해 두지 않은 모양이다.
나로선 뜻밖이었다. 게임이나 소설, 만화에서 너무 많이 나오는 전개다 보니까 난 당연히 ‘투기장에 참여해서 만난다!’라는 말이 나올 줄 알았거든.
칸칸도 그랬잖아? 투기장 안이 아니면 만날 방법이 없다고.
“그의 경기를 참관한다든가?”
“…관객석에서 만나자고 해 봤자 팬이겠거니 넘기지 않겠습니까요.”
“그런가.”
“주변인들을 포섭하는 것도…… 인상이 그다지 좋게 박히진 않겠군. 안 되면 안 되는 것으로 넘기는 게 낫겠네. 꼭 무왕이여야만 하는 이유는 없으니까.”
근데 이걸 말 안 하네.
하긴, 사람 하나 만나자고 투기장에 도전하는 것도 정상적인 방식은 아니지.
“대신 인퀴지터의 말대로 참관을 해 보는 건 괜찮은 것 같네. 만날 방법 이전에, 정작 그가 우리 눈에 차지 않으면 무소용이지 않은가.”
“그럼 밥 다 먹은 뒤에 표를 구하러 가죠.”
“아, 다음으론 아이녹사르에 가는 겁니까?”
“예.”
“달가운 곳은 아니지만…… 별개로 기대되는군요. 어떤 식으로 운영되는 곳일지 궁금합니다.”
나는 내 사고방식이 너무 문학작품에 찌들었나 걱정하며 수저를 내려놓았다.
오늘은 1등으로 먹었다. 아싸.
* * *
파르르.
사내는 삼 개월 전 날아온 편지를 쥔 채 손을 떨었다.
문장 전체를 외워 버릴 만큼 몇 번이고 읽어 내린 글은 매번 새로운 공포를 선사한다. ‘내가 왜 이런 글에.’ 읽기 전 다지는 각오는 매양 쓸모 없는 것이 된다.
“젠장!!”
쨍그랑!
결국, 그는 탁자에 있던 모든 것들을 쓸어버렸다. 탁자 위를 벗어난 물건들이 바닥으로 쏟아지며 파열음을 내었다.
그 순간에도 편지는 손에 곱게 잡혀 있다.
“…왜, 왜 이곳으로 오는 거냐!”
고향을 떠나면서 결코 다시 만날 일 없다 여겼건만, 어째서. 어째서.
사내는 비어 버린 탁자에 편지를 내던진 후, 빈손으로 제 머리를 쥐어뜯었다.
“죽을 거야, 이번에야말로 죽을 거라고.”
그 형상이야말로 주변의 박살 난 사물과 사뭇 다르지 않았다.
“죽임당할 거야…….”
처절하고 비루하다.
[그래서, 그대로 죽을 건가?]
그러던 찰나, 누군가의 목소리가 사내가 있던 공간에 울려 퍼졌다.
낙타의 가죽으로 만든 탬버린의 통통거림과 우드의 맑은 쟁쟁 소리가 뒤섞인 듯 독특한 음색은 꼭 인간이 아닌 것 같다.
“……! 넌!”
[오랜만이네, 인간. 네가 날 필요로 할 것 같아서 와 봤는데, 틀릴까?]
사내는 그런 방문자를 돌아보곤 소스라치게 놀랐다. 방금 전까지 죽음의 공포를 두고 덜덜 떨리던 몸은 이제 다른 의미로 파르르 흔들린다.
[음음. 찾아온다라. 그래. 이게 너의 ‘악몽’이구나?]
다가온 방문자가 멋대로 편지를 읽어 내리더니 키득키득 웃었다.
“이건 내 악몽이 아니다!”
그에 사내가 본능적으로 발끈해 버렸을까. 얼굴을 가리고 있는 곰 가죽 아래로, 반쯤 보이는 눈매가 곱다랗게 휘었다.
[그렇다면 돌아갈까?]
방문자는 뒤로 가볍게 물러나 등받이가 없는 카우치에 누웠다.
[그게 네 악몽이 아니라면, 넌 내 도움이 필요 없을 거잖니.]
그 덕에 옷가지가 흐트러지며 살결이 얼핏얼핏 드러났지만, 그게 요염하거나 관능적이지는 않았다. 그보다는 더한 권태가, 무료함이 있었다.
[그러니 내가 헛걸음을 한 거라 여겨도 괜찮겠니?]
그것이 대표하는 영역이 그러하듯.
“…아니. 가지 마.”
[왜, 악몽이 아니라며. 악몽이 아니란 건 결국 이겨 낼 자신이 있다는 거 아닌가?]
“젠장, 그게 가능할 리 없잖아!”
그런 존재와 연을 맺은 사내 역시 크게 다르지 않았다.
“수, 수련을 하면 물론 이길 자신 있어. 하지만 난 녀석이 오는 걸 몰랐다고. 대비할 시간도 없는데 어떻게 이기란 소리야.”
[네가 고향을 떠난 지 기십 년이라 들었는데…… 뭐, 그래. 그럴 수 있지.]
사내는 방문자를 향해 손을 뻗었다.
[그럼 이번의 꿈도 역시 ‘승리’구나.]
대가 없이 꿈을 이뤄 줄 약이 그의 손바닥 위에 떨어졌다.
* * *
밥을 다 먹은 직후, 우리는 본격적으로 아이녹사르에 방문했다.
“참가하실 겁니까?”
“아니, 우린 참가하려는 게 아닐세.”
사막인데도 판금갑옷을 입은 괴상한 이가 하나, 등에 대검을 맨 싸늘한 인상의 사람이 하나여서 그런가.
표를 사러 간 곳에서 그런 오해를 받기도 했다. 아크메이지와 데브 덕에 참가하는 건 겨우 면했지만.
“푯값이 제법 나가는군.”
“이렇게나 비쌀 줄은…….”
실력 있는 자를 구하는 게 목적이기 때문에, 자연히 우리가 구하는 티켓값─종이가 귀한지라 토큰 형식이었지만─도 올라갔다. 실력자는 대부분 인기가 많고, 인기가 많으면 보려는 사람도 많아지니 당연한 일이었다.
“애초에 이것만 보려고 최전선까지 오는 담 큰 인간도 있으니까요.”
이 투기장에서 벌린 돈이 전선 유지에도 흘러간다며 데브는 얼음을 꼬옥 쥐었다. 도시 내에 들어와서도 헥헥거리는 게 가련했는지 아크메이지가 손수 만들어 준 것이다.
지속 시간이 길지 않고, 마력이 꽤 소모되는지라 만일을 대비해야 했던 바깥에선 몇 번 누리지 못한 호사기도 하다.
“앗, 이자는 아까 저희가 봤던 그자 아닙니까?”
“오, 맞습니다. 이 사내의 시합도 잡혀 있군요.”
그때 인퀴지터가 누군가의 시합 일정을 찾아냈다. 붉은갈기, 칸칸의 것이었다.
“최다 연승 17번…… 승률 73%…….”
인퀴지터는 칸칸의 정보를 살피더니 다른 이들의 것과 비교해 보았다. 대부분은 칸칸의 기록에 현저히 못 미쳤으나 일부는 그보다 높았다.
“놀랍군요. 그 사람도 약해 보이진 않았건만, 그자보다 강한 이가 이렇게나 많다니.”
그녀는 명확히 수치로 제공된 강자의 수를 보며 감탄을 토해 냈다.
“다른 곳에선 본 적이 없건만, 이 투기장엔 왜 이렇게 강한 자들이 많은 겁니까?”
“그것은…… 이 도시의, 아니 남부전선의 특징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아크메이지는 지도와 배운 것을 떠올려 보라고 하며 인퀴지터에게 차근히 지식을 알려 주었다.
딱히 할 일 없던 나 역시 은근슬쩍 이야기를 엿들었다.
“사막의 가장자리를 두고 솟아오른 산맥 덕분에 남부전선이 다소 좁은 편임은 기억하실 테지요.”
“기억하고 있습니다. 산맥이 험하고 메말라, 악마들조차 쉽사리 넘지 못한다지요.”
“그렇습니다. 해서 악마들이 사막을 넘어오는 경로는 제한적입니다.”
참고로 악마도 생물이긴 한지라, 그들도 양분을 섭취해야만 살아갈 수 있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 때문에 사막이나 험한 바위산을 쉽사리 못 넘어오는 것이고.
“그리고 그 제한된 길로 중 하나가 파 에녹이 자리한 골목이지요.”
“예, 그것도 기억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게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아, 악마를 막기 위해 모여든 실력자란 이야기십니까?”
“결론만 보면 맞는 말이긴 합니다. 다만, 그래서야 투기장의 존재가 설명되지 않지요.”
아크메이지는 살짝 웃으며 방금 전 구매한 티켓을 들어 보였다. 곧 시작이니 들어가면서 이야기하잔 뜻일 테다.
“악마들이 사막을 넘어오는 경로가 제한적이긴 하지만, 애초에 악마들이 사막을 넘어오는 일 또한 드뭅니다. 사막에 자리 잡은 대악마가 의도할 때만 넘어오는 정도지요.”
인퀴지터는 못 알아들은 눈치지만, 아크메이지가 걸음을 옮기니 반사적으로 따라갔다. 나와 데브 역시 그들 두 걸음 뒤쪽에 붙었다.
“한데 그 기간이 대단히 들쭉날쭉해서 말입니다. 가깝게는 한 달을 주기로 쳐들어올 때도 있지만, 길 때는 7년 만에 쳐들어온 적도 있습니다.”
그쯤 되어 나는 슬슬 아크메이지와 데브가 말했던 것들이 이해가 되었다.
아크메이지가 말한, 길면 7년 만에 쳐들어오는 적. 데브가 말한, 강자들을 붙잡아 두기 위한 미끼.
“그즈음 되면 누군가는 지쳐 떠나가기 마련이지요. 그러나 사막의 대악마는 자주 쳐들어오진 않을지언정 한 번 찾아올 때마다 굉장한 군세를 이끌고 오기에…… 언제나 인력을 유지할 필요가 있습니다.”
요컨대 투기장은 정말 미끼였다. 언제 터질지 모르는 싸움을 대비해 강자들의 흥미를 끌고 붙잡아 두는 미끼.
“해서 만들어진 게 투기장입니다. 악마가 쳐들어오지 않는 기간 동안 강자들이 지루함을 덜 수 있도록 한 것이죠.”
“아…… 그래서.”
“예. 이 도시가 중심축이기에 투기장이 탄생했다는 말이 바로 이것입니다.”
“이런 건…… 이런 건 배우지 못했는데. 신기한 이야기군요.”
“파 에녹에 투기장이 생겨난 계기를 안다고 악마를 상대하는 데 유리해지진 않으니 안 가르쳐 준 걸 겁니다.”
하긴, 저런 건 알면 재밌긴 해도 실생활에 써먹을 지식은 아니지.
나는 문득 학창 시절이 떠올랐다. 인퀴지터가 신전에서 무언갈 배우던 순간도 내가 다니던 학교랑 크게 다르진 않나 보다.
“해적도 그렇고, 투기장도 그렇고. 자세히 알고 나니까 조금은…… 조금은 이해가 가는 것 같습니다. 세상엔…… 어쩔 수 없다는 것도 있다는 게.”
“……! 그렇지요, 그렇습니다 인퀴지터. 그릇되어 보이는 모든 것들이, 알고 보면 사정이 있는 경우도 꽤 있습니다. 물론 사정이 있다고 해서 모든 걸 용납해선 안 되겠지만…….”
근데 왜 우리 김치만두가 또 다른 깨달음을 얻은 거지? 장하긴 한데 요즘 쑥쑥 커서 좀 당황스럽다.
역시 저 우직한 성격은 꼭 성향에서만 비롯된 게 아니라 사회 초년생의 경직성도 영향을 끼친 거였나……!
“…저 벽창호가 웬일이래.”
고기만두야, 너도 소름 끼친단 표정은 잠시 치우고 감격 좀 해 줘.
“아, 여기가 우리 자리인가 보군.”
한편, 아크메이지가 티켓에 적힌 좌석 번호와 일치하는 자리를 찾았다. 늦게 산 것치고 무대와 거리가 꽤 가까웠다.
좌석도 사람이 앉은 자리보다 빈 자리가 더 많은 게, 아무래도 인기가 없는 전투가 아닌가 싶다.
“이번에 싸우는 사람은 누구랍니까?”
“붉은 문신 오마르와 이번에 막 데뷔한 신예라더군. 등록한 이름은 버서커라던데…….”
“오마르? 제 기억에 없는 걸 보니까 주목할 만한 사람은 아닌가 봅니다.”
“어떤 식인지 보고 싶어서 가장 빠른 걸 하나 골랐다.”
아, 어쩐지.
“아, 시작하나 봅니다.”
우리가 거의 막바지에 들어와서 그런가. 얼마 기다리지 않아 싸움이 시작되었다.
“청! 검 하나로 제패를 말한다. 붉은 문신의 오마르!”
길고 유쾌하지 않을까 싶던 생각과 달리 소개말은 대단히 짧고 담백하다.
“백! 막 데뷔한 신예, 노르다 전사 출신 버서커!”
그와 동시에 무대 양옆에 있던 구멍에서 사람이 튀어나왔다. 한 명은 별명 그대로 붉은 문신을 한 여성이었고, 다른 한 명은…….
“버서커가 아니라 베르세르크다! 발음 하나 제대로 못하다니, 이 멍청한 놈들!”
거구의 슬랜드족, 베르세르크였다.
“저자는!?”
“저 양반이 여기서 왜 나옵니까?!”
내가 하고 싶은 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