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3화 그래도 아직 희망이 (2)
베르세르크, 그러니까 투사 직업군은 ‘영웅전설’ 원작에 있어서 가장 호탕하고 단순한 캐릭터다.
다른 직업군들은 죄다 성장과 고뇌, 방황을 스토리로 삼을 때, 본인만 하고 싶은 거 다하며 욜로 인생 사는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다만 그래. 너무 욜로 인생을 살아서 문제인 구석도 있다.
베르세르크란 이름만 봐도 알겠지만, 저쪽 직업군은 장난 아니게 호전적이거든. 심지어 개인 스토리가 시작될 때 외치는 말은 ‘세상 모든 강자와 싸우고 싶다!’기까지 하다.
좋게 말해서 호쾌함이지, 사실상 싸움광이라고 보면 되는 거다.
“싸움! 흐르는 땀, 뜨거운 피! 얼마나 즐거운가!”
나는 그런 이를 두고 목에 힘을 주었다. 실제론 짜증보다 질림에 가까운 상태지만, 컨셉으로선 슬슬 화가 치밀어 오를 때가 됐다.
“아니면, 설마 겁이 나는 건가?”
그리고 자존감 없이 자존심으로만 사는 입장에서 이 도발은 못 넘긴다. 나는 결국 입을 떼었다.
“예의라곤 손톱에 낀 때만큼도 못 갖춘 야만인에게 겁 따위 날 리가.”
“그렇다면 왜 일어서지 않지?”
“네놈의 미개함에 어울려 줄 생각 없다.”
여기서 한바탕 붙는 것이 좀 더 맞는가 싶지만, 말로 내리찍는 것도 컨셉에 어긋나지는 않을 것이다.
암, 팔에 봉인구 찬 지 보름 좀 지난 마당에 화 하나 못 참아서 일반인─악마와 관련없다는 의미에서─과 한바탕 하는 것도 좀 이상하잖아.
더불어 베르세르크는…… 이기면 이기는 대로, 지면 지는 대로 손해뿐이다.
전자는 자신이 이길 때까지 계속 싸우자고 조를 거고, 후자는 패배 자체가 내 이름값에 맞지 않으니까 그렇다.
“겁쟁이였군.”
근데 아까부터 ‘쫄?’은 너무 지나치잖아. 컨셉을 떠나 한국인으로서 이거는 못 참는데.
“참게.”
내 잇새로 빠드득 소리가 나서일까. 아크메이지가 서둘러 내 왼팔을 붙잡았다. 지금 일로 식겁했는지 표정이 다소 딱딱했다.
둥근 테이블에서 내 우측에 앉은 인퀴지터 역시 아크메이지가 하는 걸 따라 팔을 뻗어 왔다.
내가 오른팔에 손대는 걸 싫어하다 보니 접촉은 삼갔지만, 말리겠단 의사는 분명했다.
“악마기사.”
명분은 충분히 주어졌다. 나는 실망한 표정의 베르세르크를 두고 몸을 이완시켰다.
긴장 상태의 일행이 안도하고, 베르세르크가 더욱 낙담한 얼굴을 했다.
“오랜만에 강자를 찾았나 싶었더니, 이렇게 되나.”
베르세르크는 숨을 푹 쉬곤 빈 테이블로 떠났다.
“주인장! 아까 말했던 것을 내와!”
“예!”
이어진 주문은 가게 안에서 싸움이라도 날까 노심초사하던 주인장을 달래 준다.
“이야, 폭풍이 지나간 것 같네요.”
데브의 말문도 그제서야 터졌다.
“너무 살벌해서 죽는 줄 알았습니다요?”
나와 베르세르크의 신경전 속에서 숨죽이고 있었을 그를 생각하니 조금 미안해졌다.
“무례한 자입니다. 무언갈 구하고자 하는 것도 아니면서 본인의 의견을 강요하다니. 저것은 옳지 않습니다.”
반면 인퀴지터는 거름 없이 말을 뱉었다. 싸움이 터졌어도 제 몸 건사할 능력이 있으니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데브가 인퀴지터를 살짝 부러운 눈으로 훔쳐보았다.
“세상엔 저런 사람도 있는 법이지요. 그래도 물러난 것 자체가 다행입니다. 어떤 자들은 거절마저 받아들이지 않고 싸움을 걸기도 합니다.”
“그런! 일방적으로 싸움을 걸다니, 그것은 용납되선 안 될 일입니다.”
일방적으로 싸움을 건다라. 나는 인퀴지터와의 첫 만남을 떠올렸다가 휘휘 저었다.
“어찌 되었건, 중요한 건 어울려 주지 않는 것이지요. 자네도 잘 참았네. 앞으로도…… 부탁함세.”
“계속 머물다가 또 덤비면 곤란하니 이만 가죠? 식사도 다 끝난 것 같은데.”
뭐가 됐든 데브 말대로 이 자리나 얼른 떴으면 좋겠다.
어렴풋이 기억하는 스크립트로 판단하건대, 베르세르크가 여기서 더 말을 걸진 않겠지만 혹시 모르는 일이니까.
지금 떠나 버리면 베르세르크가 파티에 합류할 여지도 없어지기도 하고.
“그게 좋겠네.”
“저도 마침 다 먹은 참입니다. 출발하지요.”
다행히 아크메이지와 인퀴지터도 그 의견을 반대하지 않았다. 우린 서둘러 식당을, 마을을 떠났다.
“다신 만날 일 없었으면 좋겠네요.”
…마지막에 가서 데브가 플래그를 꽂아 버린 건, 뭐. 부디 적용되지 않기를 빌 뿐이다.
* * *
“여기가 파 에녹…….”
우리는 말을 낙타로 바꿔 가며 몇 날 며칠을 더 달렸다. 그리고 그 끝에 아이녹사르가 있는 도시, 파 에녹에 도달했다.
“최전선이라서 그런가, 검문이 엄청 깐깐하네요.”
데브의 투덜거림은 이유 없이 비롯된 게 아니라.
1분이면 입장 가능했던 기타 도시와 달리, 파 에녹은 거진 십 분을, 그것도 땡볕 아래서 대기해야 했다.
이마저도 일반인들에 비하면 나은 처지─그들은 평균 세 시간쯤 대기한단다─지만…… 항상 프리패스를 누려 온 입장에서 ‘깐깐하다’라는 인상은 어쩔 수 없다.
“악마추종자들이 들어와 소란이라도 피우면 곤란해지니 말일세.”
“그렇게 해도 들어올 놈은 다 들어오지만 말이죠.”
“안 하는 것보단 낫잖나.”
그건 그렇지.
나는 아크메이지의 의견에 동의하며 파 에녹의 정경을 둘러보았다.
사막 도시답게 흙으로 만든 집들이 오밀조밀 모여 있고, 도로는 보통 도시보다 좁았다. 공간이 부족해서 좁게 만들었다기보단, 천을 드리우기 위해 일부러 의도한 것 같다.
“으왓, 드디어 그늘!”
덕분에 가장 신난 건 데브였다.
인퀴지터는 갑옷 덕에. 아크메이지는 온도 조절 마법이 걸린 옷이 있어서. 나는 이상하게 더위가 체감이 안 돼서.
그런 이유로 혼자만 사막의 열기에 죽어 나가고 있었거든.
“여긴 그나마 낫네요.”
내가 느끼기에 자크라티나 몬타타 섬이랑 기온이 비슷한 것 같은데 말이지. 그늘이 없고 바람이 덜 불어서 그런 건가?
“허약하긴.”
“장비빨로 버티고 있는 댁이 할 말입니까?”
“악마기사는 4겹이나 걸치고 계시다.”
“저 양반은……!”
뭐.
“…나리를 비교 대상으로 올리는 건 너무하잖습니까.”
나는 피식 웃고 싶은 걸 겨우 참으며, 앞으로 나아갔다. 덥진 않으나 여러 이유로 걸치게 된 망토와 두건은 제발 벗고 싶었다.
다들 입어 달라 사정사정해서 어쩔 수 없이 입긴 했지만, 스타일 구겨진다고!
“아이녹사르든 뭐든 간에 일단 신전부터 찾지요.”
“신전이라면 저쪽에 있습니다요.”
우린 성문 근처 호객 행위들을 싸그리 무시한 채, 데브의 가리킴에 따라 이동했다.
아크메이지도 아는 건 많지만, 이런 곳에선 정말 데브만 한 인재가 없었다.
“신전이 이렇게나 안쪽에 있다니. 이 정도면 소몬보다 더 크겠습니다.”
“남부전선의 중심축이니까요. 클 수밖에 없지요.”
“…아, 투기장 때문에 커진 게 아닙니까?”
“예. 애초에 투기장이란 이곳이 중심지 역을 수행하며 탄생한 산물에 불과합니다.”
아크메이지의 설명에 인퀴지터가 눈을 껌뻑거렸다. 이해는 했는데 그래도 잘 모르겠다는 눈치였다.
인퀴지터 이상으로 지식이 없는 나 역시 궁금하긴 매한가지였다.
아크메이지가 생각보다 안전하다며, 그 이유로 투기장이란 여유를 부릴 수 있다 대긴 했는데…… 정말 얼마나 여력이 남으면 그럴 수 있나 궁금하던 참이거든.
“댁은 그것도 모릅니까. 투기장은 이를테면 미끼 같은 거라고요.”
거기에 데브가 말을 얹었다. 알듯 말듯 애매한 힌트였다.
“남부 전선에 강자들을 붙잡아 두기 위한 미끼.”
“…무슨 의민지 잘 모르겠는데.”
“아, 그러니까…….”
데브가 인퀴지터를 뭐라 다그치려던 사이, 아크메이지가 슬쩍 내 쪽에 붙었다.
“몸은 괜찮나?”
이어 꺼낸 말은 파 에녹에 가까워진 이래, 하루에 한 번씩은 꼭 듣던 소리였다. 이틀 전부터는 아침·점심·저녁으로 듣고 있는 문장이기도 했다.
“내가, 분명, 아침에 답을 했을 텐데.”
아, 상황을 고려해 컨셉 성질을 수그리는 것도 어느 정도지.
이 정도로 들으면 컨셉도 더 이상 안 참는다. 안 그래도 아침저녁으로 봉인구의 작동 여부, 망가짐 여부 보고하느라 살살 긁힌 성깔 아닌가.
내가 그걸 고려해 지르문 채로 대답을 내놓으니, 아크메이지가 물러갔다. 저래 놓고 저녁 되면 또 물을 사람이었다.
걱정해 주는 건 알겠는데 슬슬 본체 쪽마저 질려 간다.
쾅!
와중에 이 도시에는 대로변에서 싸울 수 있다는 규칙이 있나? 어지간한 막장 도시가 아니고서야 그럴 리는 없는데.
나는 일단 반사적으로 손을 치켜들어 아크메이지와 데브의 전진을 막아섰다. 그다음으로 행동한 건 인퀴지터였다.
쿵!
인퀴지터가 가장 앞으로 나가 방패를 추켜세운 직후, 돌가루가 쏟아졌다.
“뭐, 뭡니까?!”
인퀴지터가 나와 살짝 비껴 서서 다행이다. 나는 열린 시야를 통해 보다 정확히 사건을 파악했다.
고작해야 폭 5m도 되지 않을 거리. 천장처럼 드리워진 천을 뚫고 나온 미들족 검사가 바닥에 널브러져 있었다.
그리고 그 검사를 그렇게 만든 건…….
“벌써 뻗은 거냐!”
건물 옥상에서 대로로 뛰어내린 까만 피부의 미들족이 아닐까 싶다.
순간 베르세르크인 줄 알고 깜짝 놀랐다.
“대로에서 싸움을 벌이다니!”
반면 인퀴지터는 나와 다른 부분에 집중했다. 원칙주의자답게 질서와 규칙을 어긴 부분을 지적한 것이다.
싸움에 휘말린 피해자들이 속출하는 시점에서 꼭 예민한 반응도 아니었다. 무고한 피해자가 발생한 이상, 빼도 박도 못하게 범죄자 행이니까.
“이야. 파 에녹 치안이 썩 좋은 편은 아니라더만, 시작부터 화끈하네요. 대로변에서 대놓고 싸움이 벌어지는 건 흔히 볼 수 있는 일이 아닌데.”
“경비대는 오지 않는 건가?”
끼어들 생각은 없는지, 아크메이지가 공권력을 찾았다.
“사건 사고가 많이 터지는 만큼 경비대도 빠릿빠릿하다고 들었으니까 지금쯤이면 오고 있을 겁니다요.”
데브의 말대로였다. 사람들의 기척이 너무 많아서 조금 헷갈리긴 하지만, 저어쪽에서 한 무리가 달려오는 게 느껴졌다. 아마 경비대일 것이다.
근데 결판이 거의 난 상황이라…… 의미가 있을까?
“이봐, 대로변에서의 싸움은 금지라고.”
그때 누군가가 터벅터벅 싸움에 끼어들었다. 적갈색 머리카락이 사자 갈기처럼 사방에 뻗어 있는 사내였다.
“붉은갈기다!”
“칸칸!!”
“어서 저 못돼 먹은 놈을 처리해 주세요!”
나는 그에게서 꽤 강하단 인상을 받았다.
아무렴, 무협지의 무인처럼 경지가 어느 정도인지 딱 알아챌 수준은 못 되어도, 비범한 자들은 일반인의 눈에마저 특별해 보이지 않던가. 저 사내가 딱 그 짝이었다.
“칸칸?”
“아이녹사르에서 꽤 인기 있는 전사입니다요. 챔피언만큼은 아니지만, 그래도 인기만 따지면 아이녹사르에서 열 손가락 안에는 들 겁니다.”
“그렇군…….”
붉은갈기, 칸칸은 심드렁히 까만 피부의 미들족에게 다가갔다. 상대의 표정이 다소 일그러졌다.
“하, 내가 왜 네 말을 들어야 하지!?”
호기로운 말이었지만 그다지 옳은 선택은 아니었다.
“말을 안 들으면 이렇게 되니까.”
순간, 칸칸의 몸이 쏜살같이 앞으로 튀어 나가며 미들족의 얼굴을 쥐었다. 상대는 자신의 머리가 잡히고 난 후에도 상황을 파악하지 못한 듯 보인다.
그러나 인생은 무릇 모든 사람을 배려하며 흘러가지 않는 법이라.
쾅!
칸칸의 손이 상대를 머리부터 그대로 바닥에 박았다. 대지가 움푹 파이며 대가리를 살짝 묻은 게 제법 아파 보였다.
어쩌면 죽었을지도 모르고.
“으으.”
“나 참, 사람 귀찮게 하고 말이야.”
그래도 목숨은 건진 모양이다. 신음이라도 낼 수 있는 걸 보면.
“어서 데려가슈.”
“아, 도움 감사합니다 붉은갈기 님!”
“간식거리 사러 왔다가 이게 무슨 봉변이람.”
칸칸이 물러나는 타이밍에 끼어든 경비대가 상황을 수습했다.
피해자들을 찾아 증언을 확보하고, 싸운 이들을 체포하며, 무너진 천막도 척척 수거하는 게 한두 번 해 본 솜씨가 아니다.
순식간에 거리가 원상 복귀 되었다.
“…강하군요.”
그사이, 인퀴지터가 작게 감상을 내놓았다. 경비대보고 한 말은 아닐 테니 아마 칸칸을 두고 평하는 것 같은데…….
그녀라고 저런 짓을 못 하는 건 아니지만, 자신 외 타인이 그걸 성공한 점이 놀라운 듯하다. 지금까진 저런 게 가능한 사람이 우리들밖에 없었으니까.
“저런 실력자가 챔피언이 아니라니.”
기실 그 부분은 나 역시 깜짝 놀랐다.
지금까지 저렇게 강한 사람 한 명 안 보여 줬으면서, 지역 하나 바뀌었다고 바로 내보낼 줄이야.
최전선이란 이름값 한다 싶다가도 조금 긴장이 된다. 나도 슬슬 힘겨워지는 게 아닐까 싶어서.
“챔피언이 아닌 사람마저 저렇게 강한데, 챔피언은 얼마나 강할지 기대됩니다.”
그래도 막, 괴로워질 정도로 올라가진 않았겠지? 지금까지 올려 둔 레벨이란 게 있는데. 암암.
“아이녹사르에 도전하려는 전사인가?”
그러던 찰나, 누군가 슬쩍 말을 붙여 왔다. 날뛰던 애송이를 제압하고 제 갈 길 가려던 붉은갈기 칸칸이었다.
그의 머리카락 사이로 한쪽 귀에만 걸린 귀걸이가 유난히 반짝였다.
“못 보던 얼굴인데, 이번에 처음 왔나 보지?”
그는 다소 피곤한 얼굴로─모처럼 얻은 휴일에 비척비척 과자 사러 나온 직장인 같았다─우리를 쓱 훑어보았다.
가장 앞에 있는 인퀴지터와 키가 커서 눈에 잘 띄는 아크메이지, 더워서 헥헥대는 데브, 마지막으로 나 순이었다.
다만 나랑 시선이 마주쳤을 때 다소 표정이 굳은 것 같은데…… 왜 그런진 잘 모르겠다. 설마 쟤도 마기 느끼는 건 아니겠지.
“뭐…… 그래. 열심히 하도록 해. 그렇다고 너무 무리하지는 말고. 나이가 꽤 어려 보이는데, 여긴 어린 애들도 안 봐주는 놈들이 많거든. 무시하는 건 아니지만 미래를 생각하면서 살살 하라고.”
분위기가 험해지지 않는 걸 보면 걱정하진 않아도 될 성싶다. 초면인데 덕담해 주는 걸 보면 성격도 좋아 보이고.
“마지막으로…… 무왕은 만나지 마.”
좋아 보였고.
“네?”
“가능하면 절대로. 투기장 안이 아니면 만날 방법도 없긴 하지만, 어쨌든.”
“그게 무슨…….”
“이만 간다.”
저 충고 하나 해 주려고 굳이 말 붙인 거였나. 그보다 충고할 거면 최소한 납득할 이유 정돈 알려 달란 말이야.
“잠깐, 무슨 뜻인지는 알려 주고…….”
“좋은 결과가 있으라고.”
아크메이지가 마지막까지 그를 붙잡고자 했지만 칸칸은 스킨십 싫어하는 고양이처럼 쏙 빠져나갔다.
봉변이라기엔 피해가 없고, 도움이라기엔 미묘한 만남의 끝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