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1화 말하고 싶어 (7)
아깝진 않지만 아쉽고 억울한 마음을 사방으로 말하고 싶었다. 그러나 컨셉은 그것을 허용하질 않아서.
나는 겉으론 쿨하게, 속으론 뿌앵 울며 용 사체를 양도했다.
“너무 안 와서 직접 왔어!”
그리고 그 직후, 신전에 방문자가 찾아왔다.
마탑의 인물이었다.
“뭐야, 무슨 일 있었어??”
그 즈음, 나는 그래도 공짜로 받긴 그렇다며 양도의 대가로 소정의 사례─5백만 갈─을 받느라 다소 넋이 나간 상태였다.
금액이 너무 커서는 아니고, ‘너의 재료, 돈으로 대체되었다’ 이딴 드립이 머릿속에 둥둥 떠다녀서 벌어진 일이었다.
솔직히 금액이 아무리 크더라도 소재의 희귀도만 생각하면 아쉽긴 매한가지고. 난 오백만 갈보다 용비늘로 만든 검이 더 가지고 싶고.
근데 그게 안 되고…….
“자네가 알아 둘 만한 일은 아닐세. 그보다 어찌하여 걸음했는가?”
…나 용 레이드 한 번 더 하면 안 되나?
“완성품을 얼른 시험해 보고 싶은데 너희가 안 오잖아.”
안 되겠지. 그래.
나도 사실 그 바다로 다시 나갈 자신이 없다. 그 배 타고 용 잡는 건 더 자신 없고.
그럴 바에야 차라리 다음에 나올 레이드를 기다리고 말겠다. 어흐흑.
“그래서 아, 이쪽이 악마기사지? 딱 봐도 알겠네.”
어쨌거나 슬슬 방문자를 상대할 때가 됐다.
나는 절절한 아쉬움을 갈무리하며 방문자를 꼬나보았다. 내 불손한 시선에도 방문자는 서글서글한 웃음을 잃지 않았다.
코코아 파우더 빛깔 피부 사이로 백금색 눈동자가 기다랗게 휘어졌다.
“나는 멀록이라고 해. 대현자로서 받은 이명은 맹렬한 흰바람! 오랜만에 재밌는 일을 맡아서 즐거웠어!”
그는 내 손을 잡고자 손을 뻗었다. 상대의 나이가 꽤 많아 보였지만 접촉만은 허가할 수 없으므로 가볍게 쳐 냈다.
밀려난 흰바람의 손이 물 흐르듯 회수되더니 다른 손과 함께 손뼉을 짝, 쳤다. 자연스러웠다.
“자, 그래서 봉인구를 마련해 왔는데, 기능만 먼저 말하자면 마기를 억제하되 일부를 마력으로 치환해 필요할 때 쓸 수 있도록 하는 거야! 더불어 내재되어 있는 악마를 세뇌하는 기능도 있는데, 말이 세뇌지 자아를 억압하는 거라고 보면 돼. 쉽게 말해서 악마가 깝치지 못하도록 하는 거지! 아, 네가 뭘 선호할지 몰라서 목에 채울 수 있는 거랑 오른팔에 채울 수 있는 거 둘 다 만들었는데, 그중 하나만 골라 줄래?!”
자연스럽긴 한데, 너무 텐션이 높다.
우리 집 아크메이지랑 너무 달라……!
“이왕이면 목에 거는 걸로 골라 줘! 잘만 하면 중요한 순간에 머리를 쾅! 날려 버리는 기능을 넣을 수─.”
“자네 지금 무슨 말을 하는 건가!”
뒤에서 지켜보려는 듯했던 아크메이지가 기겁하며 달려왔다.
우리 파티의 아크메이지가 아크메이지라서 정말 다행인 순간이었다.
용비늘 검에 이어 내 인권마저 잃어버릴 뻔했다.
“뭐? 팔? 아깝게에. 알았어. 일단 차기라도 해 보…….”
쨍그랑!
“…….”
“…….”
“…다시 만들어 올게.”
그렇다고 그 뒤의 일이 좋게 끝났냐면 그건 아니지만.
* * *
“자, 오늘은 어떤지 한번 보자고!”
대현자, 맹렬한 흰바람의 인성 논란이 잠시 일긴 했으나 봉인구에 대한 이야기가 사그라들진 않았다.
인퀴지터가 장담한 것과 별개로 처음부터 그런 일은 없는 게 좋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하여 나는 도시에 머무는 내내 그와 함께했다. 봉인구 효과를 확인하겠다는 명목이었다.
“93번 개량품! 간다!”
그게 불편했냐면, 글쎄. 적어도 탈주하고 싶어질 정도까진 아니었다.
씻을 때, 잠잘 때는 배려해 줬거니와 개량할 구석이 발견되면 마탑 연구실로 돌아갔거든. 개량품은 1번부터 시작해 93번째까지 왔고.
사실상 붙어 있는 시간만 따지면 하루에 2시간도 채 안 되는 셈이다. 심지어는 내 소소한 부탁도 대가 없이 들어줬고.
찰칵.
어쨌거나 그런 과정을 거쳐 탄생한 93번째 개량품이 내 오른팔에 채워졌다. 건틀릿이 오는 부분보다 좀 더 위, 겨드랑이와 맞닿는 위치였다.
「봉인구를 착용했습니다. 능력치가 하락합니다.」
머리가 조금 맑아지는 기분과 함께, 지난 며칠간 익숙해진 창이 떠올랐다.
“어때, 어때?!”
어떻긴 무슨. 착용감 자체는 전의 것과 크게 다르진 않다. 상태창을 꺼내 봐도 뭐, 마력만 1,500대로 돌아온 게 다다.
스탯 전체가 깎이진 않을까 노심초사한 것에 비하면 꽤 합리적인 페널티였다. 이유 없이 상승한 마력이니 다시 하락한다 해서 크게 불편한 것도 없고.
줬다 뺏긴 느낌이야 없잖아 있긴 해도 이 정도면 만족이다. 격노 스킬이 비활성화되지 않은 건 역시 아쉽지만.
“좋아, 마력을 한번 써 봐!”
그러나 지난 며칠간 경험해 본 바, 봉인구에서 눈여겨봐야 할 건 페널티의 강도가 아니다.
“이번엔 안 터질 거야.”
스킬 사용 시 드는 마력을 봉인구가 안정적으로 수급해 올 수 있는가의 여부다.
참고로 이건 봉인구의 개량 숫자가 93번까지 와야 했던 이유기도 하다. 죄다 출력을 못 견뎌서 깨지더라고.
“정말이야!”
그래도 불만은 없다. 이런 봉인구라도 없으면 교단에서 계속 브레이커를 걸 것 같거든.
무엇보다 실험이 이렇게 길어지는 것도 흰바람이 스킬 사용을 막지 않고 악마만 봉인해 보겠다며 도전하는 것 때문이라.
자칫하면 스킬이 봉인될 수 있는 만큼 얌전히 협력하는 수밖에 없다.
스킬이 빠진 나는 팥 빠진 붕어빵만도 못했다.
“자, 어서, 어서!”
나는 채근하는 이를 두고 수련터 한가운데로 터벅터벅 걸어갔다. 지은 죄가 있는 신전에서 내준 공간인데…….
말이 수련터지, 안 쓰는 뒷산 내준 꼴에 불과하다. 지반이 다져지긴커녕 굴곡조차 다듬어지지 않은 걸 보면 얼마든지 알 수 있다.
사람들이 뭣 모르고 휘말리지 않도록 결계를 쳐 준 건 다행인 지점이지만.
서걱!
“좋아, 기본은 성공이네.”
나는 가볍게 참격을 날려 보았다. 봉인구에선 아무 이상 없었다. 1단계는 성공인 셈이다.
“자, 다음 출력!”
그러나 1단계가 있다면 2단계도 있는 법.
스킬 사용이 된다면, 이제 출력을 신경 쓸 차례다.
나는 흰바람의 기대에 맞춰 다음 스킬을 사용했다. 설명창에 표기된 것만 따르면 가장 많은 마력을 잡아먹는 스킬, 봄바드였다.
촤악!
신전에서 굴러다니던 잡검으로부터 나선형의 마력이 출수되었다. 몬타타에서 무의식적으로 썼던 것보단 조금 작은 규모의 빔이 전방을 꿰뚫었다.
마력이 한 순간에 쭈륵 떨어졌다.
“이번에도 안 깨졌어! 안 깨진 거 맞지??”
스킬 사용은 됐어도 봄바드급 출력이 나오면 봉인구가 깨지는 게 지금까지의 일이었으니.
나는 흰바람의 동동거림을 뒤로한 채 회수한 검을 바닥에 잠시 꽂고, 왼손으로 오른팔의 링을 더듬었다.
손가락으로 봉인구의 표면을 쓸어 보았지만 원래 각인된 문구 외의 금은 느껴지지 않았다. 마의 벽, 봄바드의 출력을 봉인구가 드디어 버텨 냈단 소리였다.
“좋아, 좋아. 이대로만 가자!”
내가 봉인구를 해제하지 않는 것에서 흰바람은 사실을 읽어 냈다. 성공을 목전에 둔 양 밝아진 얼굴엔 희열이 점차 차오르고 있다.
“계속해!”
나 역시 성공을 두고 기대되긴 매한가지였다. 마지막 시험까지 성공하면 이 지긋지긋한 실험도 드디어 끝이다.
“어서!”
나는 흰바람의 재촉을 순순히 받아들였다. 마력 소모가 장난 아닌 스킬들이 연이어 쏟아졌다.
궤적을 3개로 늘려 주는 세 개의 발톱까지 활성화된 상태라 마력 소모량은 계산할 필요도 없이 많다.
세 개로 늘어난 참격과, 허공을 수놓은 마력창, 대지를 뒤흔드는 스킬이 연계기처럼 한참 이어졌다.
실험하는 김에 스킬 숙련 및 응용도 연습 중인 상태라 매번 쏟아지는 스킬의 형상은 약간씩 달라진다.
쾅, 콰광.
“잘한다, 잘한다 잘한다!!”
그리고 며칠간 혹사당한 땅이 이제는 정말 안 된다며 GG를 칠 즈음.
드디어 마력이 바닥을 쳤다.
“깨졌어? 깨졌어??”
나는 마지막 참격을 쏘아 보낸 순간, 양옆에 똑같이 생겨난 궤적을 보며 손목을 털었다.
마력 컨트롤 스킬이 생긴 김에 마력 조절에도 신경을 좀 썼더니 심신이 다 지쳤다. 어지간하면 나지 않던 땀이 목에 흐를 정도였다.
“줘 봐!”
그러나 연구자는 내 상태 따위 신경 쓰지 않았다.
“어서!”
그는 내 오른편으로 후다닥 달려와 발을 동동 굴렀다. 팔을 건드려 강제로 뺏지 않는 건, 첫날 그와 나 사이에 암묵적으로 생겨난 룰 때문이다.
뭐, 암묵적이라곤 하지만 말로 표현하지 않았다 할 뿐, 내 검이 그의 옆 공간을 가르긴 했다. 그러니까 저 연구광이 알아들은 거겠지.
나는 봉인구를 풀어 그에게 건네주었다. 미세한 금이 그어지긴 했지만 깨지진 않았다. 흰바람의 얼굴이 완전히 밝아졌다.
“좋아! 이제 내구도만 좀 더 보완하면 돼!”
그는 대현자란 직위에 맞지 않게 팔짝팔짝 뛰어다녔다.
이해 못 할 마음은 아니었다. 나이와 직위가 너무 높아서 그런 거지, 백에 가까운 시도 끝에 성공했다고 하면 누구나 기뻐할 테니까.
또, 나 역시 기쁘긴 매한가지였다. 본체와 컨셉 너 나 할 것 없이 포함하는 말이다.
컨셉은 성가셔하는 게 사라짐&악마를 연상시키는 봉인구로 인한 근원적 스트레스에 대한 해방 때문이라면…… 본체는 길게 말할 필요 없다.
현대인은 퍼스널 스페이스가 필요하다.
“이따 보자!”
대답 한 번 주지 않아도 매번 인사하는 이를 두고, 나는 대답없이 검을 갈무리했다. 너무하다면 너무한 대우였지만 컨셉이니 어쩔 수 없다.
“비켜어!!!”
더불어, 맹렬한 흰바람도 내 인사를 딱히 바라지 않을 거다. 본인 인사만 마치고 쌩하니 달려 나가는 게 그 증거다.
아크메이지랑 크게 나이 차이 나는 것 같진 않은데, 참 괄괄한…… 아니 활발한 사람이었다.
“이번이 마지막이면 좋겠네…….”
나는 마력을 실컷 퍼부은 덕에 텅 빈 듯한 감각을 두고 목을 주물렀다.
그날 이후 마력회복 속도도 상승해서 금방 차기야 하겠지만…… 바닥까지 박박 긁어 쓴 듯한 이 느낌은 익숙해지려야 익숙해지지가 않는다.
갓 태어난 아기처럼 무력해진 기분이었다.
“…갈까.”
그래도 당장 할 일은 다 끝났으니까.
나는 뻐근한 팔다리를 움직이며 수련터를 떠났다. 자크라티를 떠나 카나베스에 온 지 딱 열흘 되던 날 정오의 일이었다.
* * *
“나리!”
수련터 담당자의 망연한 눈을 피해 신전으로 돌아왔을까. 데브가 가장 먼저 나를 반겨 주었다.
“마침 잘 오셨습니다!”
이어서 환대해 준 건 인퀴지터였다. 그 몸에는 지금까지 봤던 것과 썩 다른 형상의 갑주가 걸쳐져 있다.
청은색을 기조로 하는 갑옷이었다. 파란색이 기조긴 해도 색이 옅어서 붉은 머리와 제법 컬러가 맞았다.
양이 안 됐을 텐데도 어떻게 풀 플레이트로 완성한 건 좀 신기하지만.
“신전의 대장장이 분들이 노력해 주신 끝에 완성되었습니다. 일반 금속이 아니라 세례한 철과는 섞인다는 사실이 밝혀져 풀 플레이트로 맞춰 주셨다고 합니다.”
양도는 해 주었을지언정, 남에게 관심 없단 컨셉을 유지하고자 관련 질문은 안 하려 했건만. 인퀴지터는 내가 뭐라 하기도 전에 조잘조잘 이야기를 토로했다.
학교 다니는 중의 조카나 사촌 동생이 쪼르르 와서 자랑하는 기분이라 듣기 싫진 않았다.
하나 들을 때마다 용소재로 만든 검에 대한 미련이 다소 남긴 해도.
“다만 철과 섞이니 색이 이리 변했습니다. 본래 색으로만 만들어졌으면 굉장히 눈에 띄었을 것 같아 다행이라고 생각합니다.”
…나도 용비늘 검!! 나도 용비늘 장비……!
“음, 슬슬 저도 발언하고 싶은뎁쇼.”
아니야. 내가 이번에 보상을 못 얻긴 했어도 김치만두가 기뻐하잖아. 우리 김치만두, 거기서 그렇게 고생했으니 이 정돈 받아도 되잖아.
왜 다른 이들이 보상 안 주고 내가 줘야 하는진 의문이지만, 그래도 애가 좋아하면 된 거지. 따흐흑.
“나리, 모험가 길드에서 추가 연락이 왔는데…….”
끓어넘치는 아쉬움을 절절히 달래고 있을까. 슬쩍 끼어든 데브가 본인의 용건을 고백했다.
“수훈장 또 받아 가랍니다.”
…또?
아니, 열흘 전에 하나 더 받았는데 왜??
“아유 힌이랑 람판에서 주는 거라던데요.”
나는 눈살을 살짝 찡그렸다.
자크라티가 줬으니 본인들도 줘야겠다는 마인드도 아닐 테고, 그 훈장 만들 돈 있으면 차라리 주민 복지에나 쓰지, 이 무슨.
더구나 내겐 이미 수훈장이 두 개나 있다. 타타라에서 받은 것과 자크라티에서 받은 것 말이다.
“쓸데없는.”
타락한 용을 처치해 서해를 구했다며 감사의 의미로 준다던 수훈장도 지부장 눈앞에서 부수는 것으로 겨우 거절했는데, 여기서 두 개를 더 받으라고? 어림도 없지.
나는 식당 자리에 앉으며 검을 옆에 기대 두었다.
“…이번 것도 안 받으시게요?”
아, 안 받아. 내 인벤토리는 충분히 악성 재고로 가득하단 말이야!
그리고 그거 만들 돈 있으면 애들이랑 피난민이나 좀 구제하라 그래!
“역시, 악마기사……!”
내가 묵묵부답이자 반응은 다른 쪽에서 튀어나왔다. 인퀴지터였다.
“그렇다면 악마기사의 수훈장도 분해하여 구제 기금을 마련하는 것으로 대체하겠습니다!”
“…이럴 줄은 알았는데, 참 나. 댁들은 정말 욕망이란 게 없나 봅니다요.”
쟤는 또 왜 급발진하나 싶었는데…… 그런 건 나쁘지 않지.
나쁘진 않은데 뭔가 좀 이상하지 않냐. 내가 거절한 게 왜 욕망이 없는 걸로 연결되는 건데. 걍 싸가지가 바가지라는 걸로 가야지.
그리고 분해해서 구제 기금으로 쓰겠단 말은 왜 이리 당당히 해? 내가 그걸 용인할 거라 여기는 거야? 아니면 뭐, 거절했으니 더 이상 신경 안 쓸 거라 생각하는 건가?
컨셉상 맨 마지막이 정답이긴 한데, 어쩐지 쟤넨 내가 저걸 좋아할 것처럼 여기는 것 같아서 심경이 오묘해졌다.
내 컨셉, 이대로 괜찮은 건가??
“다들 여기 있었나?”
다행히 내가 컨셉슈탈트 붕괴를 겪기 전, 아크메이지가 식당에 들어왔다. 그녀의 손엔 돌돌 말린 지도가 들려 있다.
“마침 잘됐네. 다들 제안할 것이 있는데 들어 보겠나?”
“무엇입니까?”
나는 식당 한가운데 놓인 지도를 보며 기시감을 느꼈다.
“인퀴지터, 이번 일로 하여금 저는 인원을 보충할 필요가 있다고 느꼈습니다. 당장만 해도 전투에 한해선 인퀴지터와 악마기사에게만 부담이 가중되고 있지 않습니까.”
일 하나를 마친 뒤 푹 쉬고, 대충 정상 컨디션일 때 다 모여서 지도를 펴면 보통…….
“그래서 그런데, 이곳에 한번 들러 인재를 찾아보지 않겠습니까? 투기장이라면 저희가 바라는 인재가 하나쯤은 있을지도 모릅니다.”
다음 장소로 가잔 이야기가 나오지 않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