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9화 말하고 싶어 (5)
팁도 주었겠다, 이젠 정말 볼일 없다.
나는 데브를 이끌고 바깥으로 나왔다. 출발 시간이 얼마 안 남았거니와 사람들이 하루를 시작할 때라 빨리 가야 했다.
“항구로 가는 거지? 나도 같이 가.”
잠깐 들렀다던 바람손도 항구가 목적지라─당연했다. 그가 없으면 배 출발 못 한다─우리와 함께했다.
“항구로 갑시다.”
“예.”
“아이고, 사람들 벌써 모였네.”
“그래도 다가오진 않네요.”
내가 이곳을 방문한 소식이 쫙 퍼졌는지, 벌써부터 사람들이 기웃기웃대는 게 보였다.
그러나 쉽게 다가오는 이는 없었고, 길잡이는 어련히 사람들 모이기 힘든 길만을 골라 갔다. 성주가 괜히 붙여 준 사람이 아니었다.
하므로 나는 걱정 없이 검을 재차 확인했다. 검집에서 빠져나온 검이 빛을 가르며 무광의 유려함을 드러냈다.
참 아름다웠다.
참 짧았고.
“…쓰실 수 있으십니까?”
데브의 물음에 나는 대답 대신 검을 검집에 집어넣었다. 이건 내가 쓸 수 있는 게 아니다.
“받아라.”
그러니 뭐 어떡해. 쓰지도 못하는 거 좋은 검이랍시고 묵혀 두거나 팔긴 싫으니 남에게 넘겨야지.
“네? 에??”
나는 고기만두에게 검을 던져 주며 쓰린 속을 달랬다.
안 그래도 쿠크리 대용품을 사 줄 생각이었던지라 아쉽긴 해도 아깝진 않았다.
오히려 운명 같기도 했다. 눈대중으로 내린 판결이긴 하지만 저 검, 데브가 쓰던 쿠크리와 엇비슷한 길이였거든.
내가 부숴 먹은 직후 딱 주면 좋을 만한 검이 만들어지다니. 이게 운명이 아니라면 뭐가 운명이겠나.
아쉬운 것도 뭐…… 취향에 딱 맞아서 아쉬운 것뿐, 본토에 재료가 남아 있는 이상 다시 만들면 그만이니 큰 상관 없다.
나는 후련하게 검을 넘겼다.
“저, 저 주시는 겁니까요?”
“오.”
반면 내가 검을 넘겨 주니 데브는 눈을 왕방울만 하게 떴다. 멍청하게 질문하는 걸 보니 어지간히 놀란 모양이다.
“정말로……?”
그럼 내가 널 주지, 누굴 주겠니. 바람손한테 줄 순 없잖아.
대답 없이 앞으로 쭉쭉 나아가니 어떻게 대답은 된 모양이다. 데브가 잠깐 뒤처졌다가, 금세 옆으로 따라 붙었다.
“가, 감사합니다 나리.”
감격하는 얼굴이 제법 선물하는 보람 있도록 하는 녀석이었다.
“왔나.”
유능한 길잡이의 활약 끝에 우리는 항구에 도착했다. 배는 이미 다 준비된 듯 사람들을 태운 채 물 위에 둥둥 떠 있었다.
“준비는 다 됐어?”
“옙!”
“그럼 닻을 올려! 출발이다!”
마지막으로 배에 오른 바람손이 손을 휘저었다. 닻이 건져 올려지고 노가 일을 시작했다.
“이봐요, 이것 좀 봐요.”
“뭐냐.”
“나리가 저한테 준 겁니다.”
“……!”
“댁은 이런 거 못 받았죠?”
“그, 그, 그 무슨.”
갑판 위에서 만두 두 마리가 초등학생 수준의 시비를 나누는 소리가 바람에 섞여 뱃전 너머로 넘어갔다.
“잠깐, 잠깐!”
그리고 배가 선창과 멀어져 슬슬 돛을 펴려 할 때쯤. 멀리서 사람 하나가 펄쩍펄쩍 뛰며 다가왔다.
선창에 우다다 선 이의 손엔 주머니가 하나 들려 있다.
“한타?”
“이봐아아아─!”
나는 그 시점에서 자리를 뜨고자 난간에 기댔던 몸을 바로 세웠다.
“수고비를 너무 많이 두고 갔어─!!”
“음?”
“엥, 저거 나리가 주고 간 돈주머니 아닙니까?”
“돈을 얼마나 주고 왔길래 저놈이…….”
“7백만 갈이나 주고 가는 미친놈이 어디 있나─!!”
“……??”
“…7백만 갈?”
…난 모르는 일이다. 난 모르는 일이야.
“나리?”
나는 사람들의 시선이 집중되든 말든 아래층으로 내려가기 위해 걸음을 차차 옮겼다. 선창에서 외치는 목소리가 하나 더 추가된 건 다음 순간이었다.
“악마기사님! 비푸릿 사살 대금을 두고 가셨습니다!!”
…에잇! 다들 눈치 없네, 정말!!
좀만 더 늦게 오지!
* * *
나는 회항하는 것으로 내 시간을 낭비하면 죽여 버리겠다라는 협박을 남긴 후, 내게 말 걸려는 모든 이들을 무시한 채 배정받은 방에 콕 박혔다.
독실로 줘서 참 다행이었다. 아니었다면 엄청 시달렸겠지.
“…밥 가져왔다.”
뭐, 선장 주제에 직접 밥을 가져다주질 않나. 그러면서 “너란 놈은 정말…….” 이딴 대사 치고 간 시점에서 이미 시달리고 있는 게 아닌가 싶긴 한데.
아니, 캐붕을 감수하면서 도울 수 없다고 했지, 안 돕겠다고 한 적은 없거든!? 캐붕 없이 도울 방도가 있다면 돕지 못할 이유가 뭐 있냐고!
물론 너흰 그걸 모르니까 ‘저 새끼 왜 변덕이 죽 끓듯이 함.’이라 생각하겠지만!
어쨌든 나는 그 꼴을 보고 싶지 않았기에 식사마저 방에서 전부 해치운 채 바깥으로 걸음하지 않았다.
기실, 그 이유보다는 멀미가 너무 심하단 까닭이 좀 더 컸지만 말이다.
솔직히 지금도 토할 것 같아.
“자네 아직도 자나?”
“…뭐냐.”
“곧 본토에 도착해서 부른 걸세.”
그래도 매일매일을 퍼질러 자니까 시간은 훅훅 갔다. 저 먼 그뤼 텔츠가 아니라 가장 가까운 본토 도시, 카나베스로 이동하는 것도 빠른 도착에 한 역할 했을 테고 말이다.
각설하고 나는 깬 직후 몰려오는 어지러움에 이마를 잠시 짚었다가, 비척비척 나갔다.
지난 며칠간 몇 번 마주친 적 없는 아크메이지가 오늘도 나를 미지근하게 보았다. 그 시선에는 주로 장한 일을 한 손자를 보는 듯한 흐뭇함이 담겨 있었다.
“…눈깔 뽑히고 싶나?”
“허허, 그럴 리 있겠나.”
이럴 줄 알고 빨리 뜨려던 거였는데.
나는 울컥하는 감정을 억눌렀다. 이러다가 ‘격노’ 터지면 죽도 밥도 안 된다.
“도착하면, 마탑에 먼저 들르세.”
다행히 아크메이지가 그것을 도왔다.
나는 새로 등장한 주제를 두고 최대한 차분히 심정을 가다듬었다.
“봉인구가 완성되었네.”
뭐, 컨셉으로선 복잡한 심정을 꾸며야겠지만 말이다.
“…….”
예전이었다면 봉인구 이야기가 나오는 즉시 혓바닥 함부로 놀린다며 길길이 날뛰었겠지만…… 폭주 한번 터진 지금은 다르다. 이미 들었던 사실이기도 하고.
해서 나는 무어라 하는 대신 아크메이지를 등진 채 오른팔을 꽉 쥐었다. 어깨에도 힘을 빼고 허리도 좀 굽혔으니 뒤에서 보기엔 참 심란해 보일 것이다.
실상은 뒤숭숭한 마음이고 뭐고 ‘봉인구 효과는 뭘까. 이왕이면 격노 스킬 영구 비활성화였으면 좋겠는데.’ 같은 생각 중이지만.
“너무 걱정 말게.”
아니, 걱정은 그다지 안 하는데.
기껏 한다고 해도 봉인구 효과가 뭔지 정도? 격노 스킬 영구 비활성화라면 더할 나위 없이 베스트지만, 스탯이 깎인다면 이야기가 다르거든.
음…… 설마 아니겠지? 스탯 깎이는 거 아니지?
시작일로부터 두 달 넘게 흘렀는데 서얼마 이제 와서 밸런스 패치 할 리가.
“그건 그저 만약을 대비하는 것일 뿐일세. 자네를 믿지 못해서가 아니라…….”
나는 아크메이지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발을 떼었다. 쿵. 조금 힘이 들어간 발이 나무 복도를 삐걱삐걱 나아갔다.
“안다.”
아크메이지의 말이 완전히 끊겼다.
퉁퉁.
나는 갑판으로 이어지는 나무 계단을 밟고 올랐다. 방에서 두문불출하던 나의 등장에 선원이고 누구고 할 것 없이 내 쪽을 쳐다보았다.
“너…….”
가장 열렬한 건 바람손이었다. 내게 식사를 가져다주긴 했지만 내가 대화할 틈을 몇 번 안 줘서 그런가. 그의 얼굴엔 말하고자 하는 말이 몇십 개나 떠 있다.
“불손한 시선, 뽑히기 전에 돌리는 게 좋을 거다.”
근데 제 컨셉이 지금 기분이 안 좋아서요. 나는 으르렁댄 후 뱃전으로 천천히 다가갔다.
불어오는 바람에 머리카락이 이마를 간지럽히며 흔들렸다.
“앗, 악마기사. 나오셨습니까?”
그러나 눈치 없는 누군가는 내 심기를 모르고 다가와 버렸다. 다른 사람들이 뜨악했지만 그녀는 꿋꿋했다.
“식사는 하셨습니까? 선실에서 나오시질 않아 걱정했습니다.”
인퀴지터가 이렇게 사교성이 좋았었나. 나는 내 앞에서 조잘거리는 이를 가만 노려보았다.
내가 안 보인 게 그 정도로 걱정된 건지 아니면 얘가 성장한 건지는 잘 모르겠다.
다만 확실한 건…….
“악마기사. 그, 그것이.”
무언갈 기대하는 것처럼 눈이 부담스럽게 반짝거렸다.
“그게…….”
“나리, 나오셨네요?”
“……!”
그러나 인퀴지터가 말을 끝까지 잇기도 전에 데브가 끼어들었다. 허리춤에는 내가 선물한 검이 잘도 달려 있다.
나는 검이 마음에 드는지, 손에는 맞는지 묻고 싶었으나, 컨셉에 의해 그냥 침묵만 지켰다.
그동안 인퀴지터와 데브 사이에서 약간의 불꽃이 튀겼다. 좀 사이좋아졌나 싶었는데 도로 돌아간 느낌이다.
“아닙니다. 전 이만 도우러 가 보겠습니다!”
그리고 그 끝에서, 김치만두가 먼저 물러났다. 명분은 충분했다. 그녀의 팔에는 여전히 커다란 짐짝이 하나 들려 있었으니까.
다만 물러나는 등이 쓸쓸해 보이는 건 어째서인지.
나는 무슨 문제 있나 돌아보았다. 그렇지만 걸리는 건 딱히 없었다.
내가…… 뭐 잘못한 게 있나……? 아니, 잘못한 사람 보는 눈치는 또 아니었는데? 그것치곤 너무 초롱초롱하지 않았어?
“나리.”
잠시 고민 좀 했을까. 김치만두를 내쫓은 고기만두가 내게 쓱 말을 걸어왔다. “정박을 준비해라!” 본토에 거의 다다름에 따라 갑판은 서서히 분주해지고 있다.
“그, 음. 제가 할 말은 아니지만…….”
나는 그 소란들을 지켜보며 팔짱을 낀 채 가오를 잡았다. 옆에 서 있던 데브가 살금 내게 속삭였다.
“벽창호한테도 뭐…… 하나…… 주실 만한 거 없으십니까?”
그 속삭임 한 번에 깨달음이 바로 다가왔다.
데브가 뭘 받아서 자기도 뭐 받고 싶었던 거구나……!
아이들은 차별하면서 키우면 안 된다던 육아 서적─자료 조사하다가 읽었던─의 내용이 머릿속을 찌릿 스쳐 지나갔다.
“헛소리를.”
“음, 역시 그렇죠?”
문제는 컨셉이 선물을 펑펑 뿌리고 다니는 타입이 아니란 점이라.
나는 반사적으로 쳐내며 머릿속을 필사적으로 굴렸다. 데브도 고생 많았지만 사실 제일 고생한 사람을 고르라면 인퀴지터인지라 도저히 그냥 넘어가기가 그랬다.
거기에 인퀴지터 덕분에 내 모가지가 붙어 있는 것도 맞으니까.
나는 쓸모없는 것을 처분한다는 변명이라도 있었던 데브의 검을 힐끗 보았다. 데브한테 용비늘로 만든 검을 줬으니, 인퀴지터한테 줄 것도 그쯤 되어야 할 텐데…….
안타깝게도 인퀴지터가 쓰는 것들은 내 것과 겹치는 게 없다. 만들어서 주는 즉시 캐붕 난단 소리다.
하면 하다못해 밥이라도 좋아하는 걸로 든든히 먹이고 싶은데…… 이것도 역시 안 되겠지? 여건이 안 나겠지?
나는 완성된 검이 짧다는 걸 목격했던 순간 이상으로 서글퍼졌다. 말하고 싶은 것, 해 주고 싶은 것이 이다지도 많은데 컨셉에 막혀서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통탄스러운 일이었다.
“그보다 신전이 마중 나와 있네요?”
“그들은 추가 배치 인력일세.”
“아, 아크메이지님.”
“물론 용사를 마중 나온 이들도 있을걸세. 이번 사건이 워낙 크지 않나. 경위서를 작성해 보고하긴 했지만 보다 자세히 듣고자 하는 이들도 많네.”
“…그 말은 즉, 또 일합니까?”
“걱정 말게. 그쪽은 내가 알아서 할 것이니. 자네들은 그동안 푹 쉬며 요양부터 하게. 아니면 다음 갈 도시를 결정하는 것도 좋겠지.”
“그나마 다행이네요.”
지금 다음 도시가 문제야? 인퀴지터한테 하나도 줄 수 있는 게 없는데…….
나는 하다못해 사과의 말이라도 하고 싶다며 속으로 눈물을 삼켰다. 최애한테 제일 박하게 대하는 거 실화냐? 진짜 눈물이었다.
“자, 내릴 놈들 어서 내려!”
그래도 하선은 해야 한다. 나는 바람손의 말을 들으며 배로부터 뛰어내렸다.
그리다나, 마카랑 따위의 상회 소속 선원들이 선창에서 배로 물자를 실어 나르는 게 얼핏 보였다.
둥.
「카나베스」
그리고 선창에 막 발이 닿았을까.
오랫동안 배에 있어서 그런가, 흔들리지 않는 대지가 잠깐 낯설었다. 육지 멀미의 전조였다.
“나리, 같이 가요!”
내가 육지 멀미를 물리치기 위해 잠시 가만히 있는 동안, 데브가 내 뒤로 착지했다.
맨날 자긴 초인이 아니라며 울지만, 쟤도 잘 보면 일반인은 아니었다.
“저도…….”
“넌 뛰면 안 돼! 선창 작살 낼 일 있냐!”
“헛.”
한편 우리를 따라 하려던 김치만두는 기겁한 바람손에게 붙잡혔다.
그럴 만했다. 언제 갑옷을 갖춰 입었는진 모르겠으나 그 차림으로 배에서 뛰어내렸다간 나무 선창이 와장창 박살 날 터였다.
옆에 있던 아크메이지의 표정은 잠깐 사이에 폭삭 늙은 것 같다.
“얌전히 사다리 타고 내려가!”
“알았다…….”
결국 바람손의 감시하에 인퀴지터는 아크메이지와 함께 사다리를 타고 내려왔다.
귀엽긴 하지만 이번 일에 한해선 나도 편 못 들어 준다.
“댁은 머리가 있는 겁니까, 없는 겁니까?”
“시, 시끄럽다.”
“어휴.”
뭐 그래도 저 나이대 애들은 주변 사람들이 하면 따라해 보고 싶어지는 법이니까.
…아닌가? 20살이었던 적이 뭐 하루이틀 전이야 기억하지, 10년도 넘은 지금은 잘 모르겠다. 별로 중요한 건 아니니 상관없지만.
“잠깐!”
나는 포구를 벗어나고자 발을 천천히 움직였다. 아크메이지 다음으로 내리던 바람손이 그런 나를 불렀다.
“젠장, 이걸 마지막이 되어서야 말하게 될 줄은 몰랐는데…….”
나는 바람손의 말로 하여금, 이 순간이 그와 하는 마지막 순간임을 깨달았다.
암, 그는 우리 파티의 일원이 아니고 파티에 넣기도 모호한 전력이었다.
우리가 자크라티에 다시 가지 않는 이상, 혹은 이 근해의 해적들과 다시 얽힐 일이 생기지 않는 이상 바람손과는 더는 볼 일 없을 것이다.
“…….”
하므로 나는 찰나간을 그에게 내어주었다. 그게 외려 긴장된 것인지 바람손은 말을 쉽사리 잇지 못했다.
“할 말이 없다면 가겠다.”
근데 내 컨셉이 마지막이랍시고 우대해 줄 그런 부류는 아니라서 말이다. 나는 냉정하게 등을 돌렸다.
“고마워. 이 말을 꼭 말하고 싶었어.”
직후 감사 인사가 내리꽂혔다.
“이단심문관도, 초반에 막 대했는데 끝까지 최선을 다해 줘서 고맙고…… 후드 친구도, 대현자 양반도…… 이래저래 신세 많이 졌어.”
“…마땅히, 해야 할 일이었다.”
“전 뭐 한 것도 없는데…….”
“별말씀을.”
한번 터진 말은 술술 이어졌다. 진솔하게 건네진 인사에 다른 이들이 머쓱한 얼굴을 했다. 비록 내 컨셉은 너 알아서 해라, 나는 내 갈 길 가련다 마인드로 계속해서 나아가는 중이었지만.
“그리고…… 악마기사, 당신에게 제일 고마워.”
그러나 그 인사만은 들을 수밖에 없었다.
“내 고향을, 내 가족들을 구해 줘서…… 정말로 고마워. 누가 뭐라 하든 당신은 자크라티의 영웅이야.”
마지막에 트롤 짓 한 것 때문이어서인가. 괜히 낯뜨거워졌다. 나보단 인퀴지터가 그 말을 듣는 게 맞을 듯.
“그 꼴을 보고도 영웅이라 말하는 건가.”
그런 심정에 의거하여 나는 오른팔을 살짝 쥔 채 말 좀 회수해 가라고 찔러 보았다.
“우습기 짝이 없는─.”
“혹시 그…… 마법진 위에서 본 순간을 두고 하는 말이라면, 저 사제 씨가 말하지 않았나?”
돌아온 건 웃음기 섞인 목소리였다.
“당신이 어떤 사정인지는 잘 몰라. 자세히 듣지 못했으니까. 그렇지만 적어도 그때 저 이단심문관 씨가 한 말엔 동의하지. 내가 봐 온 당신은 절대 지지 않는다고.”
허를 찔린 기분이 되었다.
“그러니 당신은 영웅이 맞아. 다른 누가 뭐라 해도, 우리에겐 영원히 그럴 거야.”
근데 그게 불쾌하느냐면, 음. 누가 어머니하고 그 아들 아니랄까 봐 크게 그렇진 않았다.
“더불어…… 우린 언제든 이 은혜를 갚을 준비가 되어 있고 말이야.”
오히려 오글거릴지언정 기분은 좀 좋을지도.
“우리 힘이 필요하면 언제든 불러. 그곳이 어디든…… 당신이 부른다면 흔쾌히 달려갈 테니까. 알았지, 기사 나리?”
소년 만화가 괜히 인기 있는 게 아니었다. 진짜 낯은 뜨거웠지만.
“잠깐.”
그때 인퀴지터가 나섰다. 뭔 말을 하려는 건진 모르겠지만 덕분에 분위기가 환기되었다.
자, 저 말에 동조하는 말만 빼고 아무거나 말해 봐라! 나는 그사이에 이 감동 물씬 풍기는 곳을 탈출할 테니!
“나도…… 나도 하고 싶은 말이 있다.”
내가 대답 없이 몸을 휙 돌려 자리를 뜨려던 찰나, 인퀴지터가 복식호흡을 크게 한 후 우렁우렁 외쳤다.
“자크라티와 신전 사이의 관계를 떠나, 범죄는 나쁘다!”
걸음을 삐끗할 뻔했다.
“어?”
“그러니 해적질은 청산해라!”
“그, 뭔……?”
“네놈의 능력이면 더 이상 해적으로 남지 않아도 타인을 도울 수 있을 것 아닌가!”
“……!!”
“알겠나!”
나는 웃음을 터트리고 싶은 걸 겨우 참았다. 뒤돈 상태라 보지 못할 얼굴들이 어쩐지 연상된 까닭이다.
“…젠장, 내가 해적질 청산하려면 50년은 감옥에 갇혀 있어야 한다는 거 알고 말하는 거야?”
“모른다! 그렇지만 옳지 않은 걸 옳다고 말할 수는 없다!”
“빌어먹을, 그렇겠지! 하하! 알았어, 알았다고! 다음엔 떳떳한 자격으로 맞이하지, 용사님!”
아, 소년 만화 감성 탈출하나 했더니 더 짙어졌잖아. 역시 싫지는 않지만.
* * *
“대리자님!”
우린 해적들의 경례를 받으며 선창을 차차 벗어났다. 포구에서 기다리고 있던 사제들이 후다닥 달려왔다.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혹시 나 잡으러 온 건가 잠시 불안감도 들었지만, 다행히 그건 아니었다. 그들은 용사의 귀환을 축하하며 마중다운 마중을 선보였다.
“한데 왜 벌써 나와 있는가? 신전에는 후에 들른다고 기별을 했을 터인데…….”
“그것이…….”
그러나 마중다운 마중이라고 해서 꼭 사건이 터지지 않으리란 법은 없으니.
“죄송합니다. 보관 중이던 용의 사체에 문제가 생겼습니다.”
내…… 내 보상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