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8화 말하고 싶어 (4)
나는 온갖 행사를 피하기 위해 느지막이 배에서 내렸다.
사실 이렇게까지 늦게 내릴 생각은 없었는데,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됐다. 자크라티에서 내가 유명하다던 아크메이지의 말이 정말 한 점 거짓이 없더라고.
뻥 안 치고 중간에 하선했다가 5분도 안 돼서 백 명에 가까운 사람이 모이는 걸 경험했다. 내가 타인과 헷갈릴 리 없는 외형적 특징을 가진 바람에 더했다.
아니라 부정할 틈도 없이 다들 확신을 가지고 달려들었다.
“댁은 지금 자크라티의 영웅이야.”
덕분에 거리감이 생겨 버린 바람손마저도 잠시간 나를 동정했다. 억울했다.
귀동냥한 사실에 따르면 바람손도 반쯤 영웅 취급이던데, 왜 나만……!
“참 나. 흔해 빠진 얼굴이라 다행이다 싶은 건 이번이 처음이네.”
나는 옷 하나만 갈아입는 것으로 유유히 외출에 성공한─그 외출로 7백만 갈을 가져와 내게 쥐여 줬지만─바람손을 두고 통탄에 빠졌다.
이럴 줄 알았으면 나도 반반 머리만큼은 하지 않았을 텐데……!
“길 열렸어요.”
그래도 성주가 보낸 인력의 호위를 받으며, 그것도 밤을 틈타 움직이니 더는 사람이 몰리지 않았다. 그건 확실히 편했다.
“왔군.”
…편했지만, 성문 바로 앞까지 성주가 나와 있기를 바란 적은 없다!
나는 성주 뒤에 도열한 호위들의 수를 확인한 뒤 성주와 시선을 맞대었다. 아무리 본인이 거주하는 곳 앞마당이라곤 하지만 고작 열 명만 데리고 나온 저의를 모르겠다.
무슨 목적이라도 있나.
“아, 다른 이들은 내어준 방에서 쉬고 있을 걸세. 그대를 위해 준비한 방도 있으니 신경 쓰지 말게나.”
한편, 성주는 내 시선이 뒤로 갔던 걸 일행 찾는 것으로 알아들은 모양이다. 그녀의 답에 일행의 위치가 밝혀졌다.
꼭 궁금했던 건 아니지만 들어서 나쁘진 않다.
“그보다, 자크라티에 온 걸 환영하네.”
“쓸데없는 짓을.”
“그런가. 그래도 봐주게나. 자크라티의 구원자에게 제대로 된 환영식조차 못 한 것이 아쉬워 나온 것일 뿐이니.”
나는 안내하겠다는 양 몸을 돌리는 성주의 뒤에 붙었다. 원래 성주를 호위하던 인력과 날 여기까지 데려온 인력이 합쳐지며 진영을 이뤘다.
바람손이나 그 휘하 선원들은 성에 거의 다다랐을 즈음 빠졌기에, 호위진은 굉장히 꼼꼼하게 이뤄졌다.
“이야긴 들었네. 저주에 당해서 몸이 좋지 않다고. 지금은 괜찮아졌나?”
저주……? 아니 뭐, 틀린 말은 아니지만. 이쪽에는 사실을 제대로 전하지 않았나 보지.
“검은.”
나는 그 사실을 적당히 짚으며 화제를 돌렸다. 상대방이 내 약점을 잡으려 드는 상황이 아닌 이상, 이렇게 노골적으로 피하면 더는 안 물을 거다.
“걱정 말게. 검은 완성되었으니.”
저 봐. 더 이상 말 안 하지?
“다만 장인이…… 부득불 자네를 보고 싶다고 하더군. 혹시 괜찮겠나? 혹 기분이 상했다면─.”
별개로 장인이 왜 나를? 걸음 한번 못 할 이유야 없긴 하지만, 무슨 이유로 부르는 거지.
내가 만든 역작을 쓸 놈이 누군지 알아야겠다! 대충 그런 심보인가.
“상관없다.”
검만 잘 완성됐다면 그 정도 어울려 주는 것쯤이야 어렵지 않다. 하물며 다른 누구도 아닌 장인이니까.
“그렇군. 내일 오전에 불러오겠네.”
“내가 직접 가겠다.”
아, 나 뭐 더 사야 해. 대장간 절대 직접 가.
“…알겠네. 하면 내일 길잡이를 붙여 주지.”
“귀찮게 굴지 않는 놈이어야 할 거다.”
“그러진 않을걸세.”
성주는 내 싸가지 없는 답변에 화내는 대신 시종일관 부드럽게 응대했다.
주변에 서 있던 호위들도 가끔 몸을 들썩이기만 할 뿐 예전처럼 날 선 반응은 별로 보이지 않는다.
“보수는 방에 준비해 두었네. 편의를 위해 백금화와 금화, 은화로 나누어 준비했는데, 그대 마음에 들면 좋겠군.”
각설하고, 성주는 약속한 현상금마저 내주었다.
의외였다. 배에서 들은 바로는, 지금 성주가 창고를 박박 긁어 가면서 사람들을 구제하고 있댔는데.
해서 지급일을 늦춰 달란 말까지 들을 각오를 했건만, 처음부터 그런 각오는 필요 없었나 보다.
“그 외에도 바라는 것이 있다면 말하게. 상황이 이러하니 많은 걸 들어주긴 힘들겠지만…… 그렇다고 전부 불가능한 건 아니니.”
그래도 그렇지. 여유가 되나?
나는 추가 보상에 대한 이야기는 귓등으로도 듣지 않으며 무심코 주변을 둘러보았다.
본격적으로 성 내부에 진입한 후라 돌로 이뤄진 벽과 바닥이 먼저 보였다. 어쩐지 황량해 보였다.
“실로 바라는 것이 없나?”
…원래 이런 느낌이었던가? 저번에는 이렇게까지 삭막하단 느낌이 안 들었었는데.
나는 기시감에 성을 보다 자세히 뜯어보았다. 그리고 얼마 안 가 진실을 깨달았다.
카펫, 커튼, 장식품 등 성을 꾸미고 있던 모든 것들이 사라졌다. 사람들이 말하던 ‘창고까지 박박 긁어 가면서’의 뜻은 정말 말 그대로였던 셈이다.
“무엇을 그리 보나? 아, 성 내부가 바뀐 게 어색한가 보군. 요즘은 이런 게 인기라기에 조금 정리해 보았네.”
빈티지도 빈티지 나름이지. 애초에 이런 세계관에 빈티지가 유행하는 것도 이상하잖아.
나는 변명일 게 분명한 성주의 말을 두고 사위로부터 시선을 거뒀다. 때론 진실을 알아도 눈감고 넘어가야하는 것들이 있었다.
“이쪽일세.”
어쨌거나 한참을 걷다 보니 별관이 나왔다. 일행이 여기서 머무는 게 사실인지 기척이 여럿 느껴졌다.
“잠시, 가기 전에 이것 하나만 받아 가겠나.”
그러다 잠깐, 안으로 들어가려던 나를 성주가 붙잡았다.
“본래는 개선식에서 넘겨줄 것이었네만, 어쩌다 보니 이렇게 되었군.”
호위로부터 무언갈 받아든 그녀의 손에서 하얀 빛무리가 흘러나왔다. 마법이나 뭐 그런 게 아닌, 순수한 빛이었다.
“자크라티의 구원자에게 찬사를.”
예컨대, 머금은 달빛을 잘게 부수어 사방으로 흩뿌리는 보석의 빛 같은 것.
“그리고 그에 맞는 명예를.”
훈장이 내 손 위에 올라왔다.
“누가 뭐라 하든 자네는 이 땅의 은인이자, 암운을 걷고 희망을 가져온 영웅이네. 몇백 년이 지나도 그 사실은 사라지지 않을 것이며 대대로 이 땅에 기억되겠지.”
두 번째 수훈장이었다.
“그러니 그대 또한 어떤 순간에도 잊지 말게. 누군가는 그대를 어둠이라 여길지 몰라도, 이 땅에서 그대는 그 누구보다 빛나는 존재였음을.”
…이제 보니 제대로 못 전해 받은 것도 아니고 말이다.
“이따위 것에 쓸 돈이 있다면 저 밖의 사람이나 신경 쓰지.”
“하하. 그들을 걱정해 주는 건가? 걱정 말게. 이것은 내가 만들고자 한 것이 아니라, 시민들이 자발적으로 만들어 내게 전달한 것이니.”
“……!”
“그러니 받아 주게. 아니, 받게. 당신에게 구원받은 이들의 감사 인사를.”
결국 이번에도 악성 재고를 얻어 버렸다.
썩 나쁜 기분은 아니었다.
* * *
피우온은 반박 대신 입술만 두어 번 씹고 떠나는 이를 가만 바라보았다.
마주칠 때마다 본 얼굴이 사납기 그지없어서 몰라봤는데, 이제 보니 참 젊고 어리다 싶었다.
“기이한 일이지.”
“예?”
“평생 용서하지 못할 거라 여겼던 것을 용납하게 되고, 본래라면 혐오했을 것에게 더없이 감사하게 되다니.”
그것이 더없이 서글프다. 그래, 애달팠다.
저리도 젊은 이들에게 그들이 맡긴 짐은 너무도 많았다.
“…그것도 저리 어린 이들의 손에 의해서.”
그녀는 시선을 가만 내리깔았다. 젊은이들 하면 악마기사 다음으로 떠오르는 이는 새빨간 머리카락이 참 곱던 아이다.
『예, 압니다. 이 땅에 여전히 교단을 싫어하는 분들이 많다는 걸요. 그렇지만 처음부터 모든 걸 얻을 거라 기대한 적 없습니다.』
도발적인 머리색만큼이나 어찌나 당돌하던지. ‘아직 너희를 싫어하는 이들이 많다’란 말에 그리 대답하는 이는 처음이었다.
『속죄하는 건 언제까지나 저희 몫입니다. 과거를 잊지 않고, 반복되지 않도록 경각심을 가져야 할 것도 저희 몫입니다. 마지막으로, 그분들이 도움을 받아들이고 싶어질 만큼 노력하는 것도 저희의 일입니다.』
…그리도 담백한 시인 역시 처음이었다.
『그러니 괜찮습니다. 신께선 성실하게 노력하는 자를 사랑하시니, 저흰 여러분께서 문을 열어 줄 때까지 힘껏 두드려 보일 것입니다.』
다 처음이어서, 결국 믿어 버리게 될 만큼.
“…악마기사는 그다지 어려 보이지 않습니다만.”
“푸흐. 정말 그렇게 생각하니.”
붉은 머리의 사제는 훌륭히 그녀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저 젊은 기사도 본인의 무력으로 사람들의 희망이 되었다.
그리도 어리면서, 그렇게 젊으면서.
“난 그 붉은 머리 사제만큼이나 어리게 보이는데.”
…아니면 외려 어리기 때문에 그럴 수 있던 걸까?
자신들이 살 세계라서, 살아갈 세계를 더 낫게 만들기 위해서 저렇게나 노력할 수 있는 걸까?
“…젊은이들이 저렇게나 노력하는데, 늙은이가 가만히 있을 순 없겠지.”
모르겠다. 크게 중요한 것도 아닐 것이다.
정말 중요한 것은…….
“자, 돌아가자꾸나. 아직 할 일이 많이 남아 있으니.”
저 젊은이들이 노력해서 내어준 기회를 그녀가 날려 먹어선 안 된다는 것이다.
악마와의 싸움은 끝났지만, 자크라티의 미래를 위한 투쟁은 이제 시작이었다.
* * *
다음 날, 나는 동이 트는 대로 대장간을 향해 이동했다. 사람들이 몰려들까 겁나서 한 조치였다.
곧 항해 시간이라서 그 전에 다녀와야 한다는 점도 한몫했고.
“저곳입니다.”
다행히 대장간은 성과 그리 멀지 않았고, 길잡이는 인기척 없는 길만 골라 안내할 수 있는 솜씨가 있었다.
나는 안전히 대장간에 다다랐다.
“생각보다 작네요?”
대장간이 슬슬 보일 위치에서 데브가 쫑알거렸다. 본인도 살 게 있다며 따라온 건데…… 아무튼 꺼낸 말 자체는 틀린 내용이 아니었다.
대장간은 멀리서 봐도 협소해 보였다.
“그래도 실력은 좋습니다.”
데브의 말에 길잡이가 다급히 실드를 쳐 주었다.
근거는 없지만 믿음은 갔다. 아무렴, 성주가 미치지 않고서야 무능한 사람에게 의뢰를 맡겼을 리 없다.
“아저씨! 이거 먹어도 돼요?”
“먹어도 되는데 순서대로 가져가! 다른 애들도 먹어야 하니까 너무 욕심 내지 말고!”
“어르신, 난민분들이 도움에 감사하다고 음식을 보내오셨는데…….”
“본인들 입에나 넣을 것이지, 보내긴 또 뭘 보내! 돌려줘!”
“어르신, 대금으로 옥수수 가루를 사 오긴 했는데…… 그리다나 쪽이 칼값을 너무 후려쳐서 생각보다 양이…….”
“뭐? 이 양아치 놈들! 남의 불행을 돈벌이로 써먹어?”
“죄송합니다…….”
“썩을. 일단 그거로라도 죽 끓여! 애들 곧 올 시간이야!”
…아마도 그럴 거다.
“…여기 대장간 맞아요?”
데브는 정말이지 내가 하지 못한 말을 대신 해 주는 것에 탁월한 능력이 있으니.
나 또한 길잡이한테 물어보고 싶었다. 정말 이곳이 맞냐고.
“예에, 맞습니다.”
“무료 배식터 같은데?”
“어르신이 워낙 좋으신 분이라 그렇습니다.”
우리가 신뢰를 점차 잃는 듯하자, 길잡이가 서둘러 입을 열었다.
이어지는 말은 대장간의 주인이 얼마나 좋은 사람이며 선한 일을 얼만큼 하는지에 대한 설명이다.
고아원의 가장 큰 후원자라거나, 재능은 있는 아이들을 거둬 무료로 가르침을 베푼다거나, 이번 일이 터지자마자 상품이었던 무기들을 무상으로 나눠 주어 대처하게 만들었다거나, 정리된 지금은 무기 판 돈으로 식량을 사들여 주변을 먹여 살리고 있다거나.
“좋은 사람이네요?”
“그렇지요.”
그 성주에 그 백성이라고, 말만 들으면 정말 그린 듯한 선인이었다.
“정말 좋은 분입니다. 저 본토 사람들도 들러서 사 갈 만큼 만들기도 참 잘 만드시고요.”
물론 많은 게임에서 이런 식의 선인은 의외로 뒤가 구린 경우가 많지만…… 뭐, 거기까지 캐낼 생각은 없으니까.
그리고 뒤가 구리다기엔 선행의 증거가 너무 명확하다. 도제로 보이는 이들도, 도움을 받는 이들도 하나같이 웃고 있었다.
“전 그럼 바깥에서 기다리겠습니다.”
“옙.”
나는 길잡이를 두고 대장간 마당으로 들어갔다. 300m 밖에서 봐도 구분될 반반 머리에 사람들의 시선이 일제히 모였다.
부산스럽던 장내가 일순 조용해졌다.
“저, 저분은…….”
“기사님? 기사님인가?”
이 도시는 왜 내 이름과 외형을 이렇게도 잘 판 건지.
나는 사람들이 쉽게 접근하지 못하도록 흉흉한 분위기를 조성했다. 아이들이 겁먹은 얼굴을 하는 건 좀 미안하지만 여기서 인파에 둘러싸이는 건 싫다.
“검을 찾으러 왔다.”
마당의 한가운데서, 조용히 목적을 말했다. 그러자 누군가가 굽혔던 허리를 펴고 내게 다가왔다.
“당신인가? 성주님을 통해 검을 만들어 달라고 한 사람이?”
우락부락한 몸집에 완고한 얼굴을 가진 이였다.
“너흰 알아서 하고! 따라와라. 완성품은 안에 있다.”
“어, 저도 같이 가도 됩니까요?”
“…오든가!”
“넵.”
장인은 나와 데브를 마당의 안쪽, 건물 안으로 이끌었다. 얼굴 보자는 말에 시험이라도 할 줄 알았는데, 다행히 그런 건 없는 듯하다.
“상품이 없네요?”
“뭐 찾고 있는 거라도 있나?”
“단검을 사려고 했는데…….”
“다 팔아서 없어.”
“그렇습니까요.”
들어간 건물 내부는 물품 진열대와 더 안쪽의 작업장으로 나뉘어 있었으니.
정말 물건들을 다 팔았는지 진열대는 텅 비어 있었다. 깨진 쿠크리를 대신할 걸 사러 온 듯한 데브가 귀와 꼬리를 축 늘였다.
“만들어 달라고 하면 만들어 주고.”
“기다릴 시간이 없어서, 괜찮습니다.”
“쯧.”
그사이 장인은 작업장으로 들어가 그곳에 있던 상자 하나를 뒤적였다. 곧 그 손에 천으로 휘감긴 무언가가 이끌려 나왔다.
“이놈이 완성품이다. 확인해라.”
장인은 우리가 볼 수 있도록 검을 진열용 책상에 내려놓은 후, 천을 걷어 냈다.
순간, 내 잇새로 감탄이 짓이겨졌다.
“도신은 비늘 조각같이 생긴 것을 녹여 만들었고, 칼자루와 검집은 준 뼈를 깎아 만들었다. 금과 경옥으로 방해되지 않는 선에서 자잘하게 꾸몄고. 어디, 마음에 드나?”
나는 절반가량 드러난 검으로 손을 가져다 대었다. 경옥을 박아 넣은 폼멜에 가장 먼저 손가락이 닿았다.
이어 새까만 가죽끈을 두른 상아질의 검자루를 지나 검푸른색 날에 도달했다.
“예쁘다…….”
데브의 중얼거림을 뒤로한 채 손가락으로 날을 천천히 쓸었다. 탁한 암청색이라 광이 나지 않되, 그래서 더 우아하고 위험한 매력이 흐르는 검날은 참 서늘했다.
이 정도면 외형은 만족이다.
스륵.
“……?”
“어?”
외형은 만족이었다.
만족이었었다…….
“…검이 짧군.”
검날을 쓸어 가며 검을 가리던 천을 마저 걷어 낸 결과 드러난 진실은 참 처참했으니.
도신이 너무 짧다. 칼날 길이만 따졌을 때 30에서 40cm 사이일 것 같고, 손잡이를 합쳐도 70cm밖에 안 될 것 같다면 대충 감이 잡힐 것이다.
이건 거의 단검 수준이다.
“어떻게 된 일이지?”
나는 다급히 원인을 알 사람을 다그쳤다. 한 걸음 떨어져서 지켜보던 장인이 어깨를 으쓱였다.
“재료가 부족한 걸 내 탓으로 돌리지 않길 빌지.”
“재료가, 부족했다고.”
“그래.”
아니, 그게, 그게 부족했다고? 물론 그것만으로 만들면 부족할 수도 있긴 하겠는데…… 보통 다른 금속이랑 섞어서 양을 채우지 않아?
“부족하면 다른 금속으로 메우면 되는 거 아닙니까?”
“하, 그게 가능했다면 진즉 했겠지!”
…안 됐던 거야?
“철부터 구리, 아연…… 내가 다뤄 본 모든 금속을 다 가져와서 섞어 봤지만 하나도 섞이는 게 없었다. 물과 기름처럼 분리되기만 했다고. 그런 마당인데도 주문자와는 연락도 안 됐고! 거기서 내가 뭘 할 수 있단 거지?”
안 됐던 거구나…….
“그래서 어쩔 수 없이 최대한 손실되는 재료 없이 만들었다. 추가 재료를 주고 다시 녹여 만들라면 만들어 주겠지만, 그렇지 않다면 그걸로 만족하시지.”
추가 재료야 있긴 하다. 아크메이지가 내 몫의 사체를 더 얻어 냈다고 했으니까.
그렇지만 그건 본토에 있단 말이지. 그걸 다시 여기까지 가져와 만들기도 좀 그렇고.
때문에 나는 망연한 심정이 되었다. 이건 장인 잘못도 아니고 내 잘못이라고 하기도 좀 애매한 것이라 더욱 가슴만 막막해졌다.
“어, 그럼 어떻게 합니까?”
“뭘 어떡해? 받아 가든가, 재제작을 맡기든가 둘 중 하나지.”
이 와중에도 검은 더럽게 아름답다.
나는 멍하니 단검보다 조금 더 길고, 한손검보단 턱없이 짧은 검을 들어 올렸다. 단검류인 걸 고려해도 굉장히 가벼웠다.
“…가볍군.”
“그래. 가볍지. 같은 길이의 철검과 비교하면 배는 가벼울 거다. 더불어 예리함과 강도는…….”
장인은 그리 말하며 내게 무언갈 내밀었다. 지름이 4cm쯤 될 철막대기였다.
“힘껏 내려쳐 봐.”
홀린 듯 검을 휘둘렀다. 약간의 저항감이 느껴지긴 했지만 쇠막대가 손쉽게 잘려 나갔다. 마력도 두르지 않았는데 쇠가 뭉텅 잘려 나간 거다.
“…내가 휘둘렀을 땐 철에 박히는 정도로 그쳤는데. 큼, 어쨌든 철검보다 단단하고 절삭력이 뛰어나다. 어지간한 걸로는 날이 망가지거나 무뎌지지 않을 거야.”
나는 서둘러 옵션을 확인해 봤다. 별 의미 없었다. 옵션이 죄다 ???로 떡칠되어 있었다. 시스템 망할.
“내가 그걸 만드느라 망치를 몇 개나 망가트렸다는 걸 부디 알아줬으면 좋겠는데.”
“…확실히, 그럴 만한 검인뎁쇼. 철을 무슨 무 자르듯 자르네.”
그렇지만 옵션이 안 떠도 이 검이 잘 만들어진 검이란 건 알 수 있다. 날이 너무 짧아서 문제지!
나는 이마를 팍팍팍 치고 싶은 마음을 두고 검을 몇 번이나 더 확인해 보았다.
진짜, 진짜 너무 잘 만들어졌고 디자인도 너무 예뻤는데 그 놈의 재료 부족으로 인한 도신 길이가 걸림돌이었다. 하다못해 칼날이 50cm만 넘겼어도 써 봄 직했을 텐데.
“이봐, 한타. 있냐?”
“……?”
내가 비탄에 젖는 사이, 익숙한 목소리가 귀에 내리꽂혔다.
“바람손 나리?”
“응? 뭐야 왜 너희가…… 아, 성주님이 한타에게 맡겼나 보네.”
“수리야냐.”
“어어.”
“어인 일로 고개를 들이민 거냐. 지금쯤 돈 벌러 가야 할 시간 아니냐?”
“저 인간들 뭍으로 날라야 해서 오늘은 안 가. 그리고…… 음, 내 쪽에서 줄 수 있는 돈이 없다고, 그거 말하러 잠깐 들렀다. 적어도 며칠간은 못 도울 것 같아.”
“뭐?”
“미안하다.”
“쯧, 됐다. 네가 못 돕는다면 이유가 있겠지.”
이 와중에 바람손과 장인의 대화 소리는 왜 이렇게 귀에 잘 들어오는지.
나는 울고 싶어지는 마음을 겨우 억누르며 검을 전용 검집에 넣었다.
검날이 검푸른색인데 비해, 검집은 회백색 상아 질감에다가 금으로 장식을 넣은지라 또 다른 매력이 풍긴다. 더 울고 싶어졌다.
어쩌다 나한테 이런 시련이 온 거지?
“…이대로 받아 가지.”
그러나 결과적으로 내가 택할 수 있는 건 하나뿐이었다.
아무리 궁리해도 내가 써먹을 수 있는 길이가 아니지만…… 내가 쓰지 못한다고 해서 쓸모가 없는 것도 아니니까.
장인의 시선이 내게로 돌아왔다.
“그럼 나가라.”
참 쿨한 대우였다.
“옙. 가죠, 나리.”
아냐, 잠깐. 아직 나 볼일 남았어.
잘그락.
가방에 잠깐 들어갔다 나온 손이 무언갈 꺼내 책상 위로 떨어트렸다. 누구라도 그것의 내용물이 금속임을 알 수 있는 소리가 맑고 곱게 울려 퍼졌다.
“……?”
“수고비다.”
검신 길이는 마음에 안 들지만, 그래도 검 자체는 잘 만들어졌으니까. 팁은 주고 가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