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7화 말하고 싶어 (3)
사람은 본인이 겪어 보지 않은 일을 두고 대저 낮잡아 보는 경향이 있다.
위험성을 전해 들어도, 그 이상의 유용함이 존재한다면 합리화 끝에 받아들이려 할 때가 많단 소리다.
바로 지금처럼.
“그대의 행적은 잘 보았네. 불미스러운 일이 있긴 했지만…… 그래도 많은 도움을 주었다지.”
나는 신전에서 새로 파견했다는 대주교를 가만 보았다. 참 지극히도 우호적인 태도였다.
내가 지지부진하던 섬 수복 속도를 배 이상 끌어올려서인가. 아니면 인퀴지터가 쉴 수 있도록 대신 전장에 서서 길을 만든 것 때문인가. 그것도 아니면 신전 사람들이 날 적대하든 말든 그들 피해를 최소한으로 줄여 주어서?
“섬 수복에 도움을 주어 고맙네.”
뭐, 아무래도 좋다. 무엇이 이유가 되든, 결국 대주교는 날 유용한 패로 판단해서 봐주기로 결정한 것이 테니.
“대주교님!”
물론 그런 대주교의 결정에 내 폭주를 직접 대면했다던 주교는 펄펄 뛰었다. 내 활약상을 보고도 여즉 위험하다며 사형을 주장하는 사람이니 당연했다.
“그를 쉽게 보면 안 됩니다! 저자가 언제 이성을 잃을 줄 알고 그러시는 겁니까!”
“용사께서 인증도 하셨고, 지난 며칠간 스스로 증명도 하지 않았나.”
“대주교님!”
개인적으로 후자의 입장을 이해 못 하진 않는다. 하필 걸린 게 내 목숨이라 전자가 이기길 바랄 뿐.
“난 자네가 왜이리 예민하게 구는지 모르겠네.”
그렇다고 전자를 좋아하느냐면 그것도 사실 아니긴 하다.
현장의 고됨을 이해하지 못하는 상급자만큼 빡치는 것도 없거니와, 두 번째로…….
“와, 입맛 떨어진다…….”
데브 말마따나, 밥 먹던 사람 앞에 와서 대뜸 말 걸어 봐야 밥맛만 떨어질 뿐이다.
나는 주교가 대주교를 설득─을 가장한 말다툼을─하든 말든 끊겼던 식사를 이어 나갔다. 마지막 도시를 탈환하고, 추가 인력이 오는 동안 버티느라 끼니를 못 챙겼더니 배가 너무 고팠다.
인퀴지터는 차곡차곡 쌓인 피로가 터졌는지─가장 궂은 일은 내가 다 가로챘음에도─밥 먹기도 전에 곯아떨어져 버렸지만, 아무튼.
“나리.”
그리고 식사가 거의 끝났을 즈음, 나보다 먼저 식사를 마친 데브가 한 손에 음식을 든 채로 슬쩍 눈을 굴렸다. 조용히 빠져나가자는 신호였다.
“가 보게.”
우리와 함께하되 무력이 아닌 펜으로 우리를 지원했던 아크메이지 역시 지원사격을 해 주었다. 내가 그날 이후로 사람들을 불편해한다는 걸 눈치챈 모양이다.
어쩌면 그녀가 불편한 걸지도 모르고 말이다. 그날 이후로 묘하게…… 내외하고 계시거든. 그렇다고 사람들 사이에 방치해 두거나, 내가 자리를 뜰 때 결코 혼자 가게 만들지도 않았다마는.
각설하고 그 배려를 거절하지 않았다. 폭주 전적이 생긴 이상, 난 더는 교단과 엮이고 싶지 않았다.
교단의 고위층과 대화? 더 최악이다. 교단과 나의 연결 고리는 김치만두로 충분하다.
“와, 진짜. 다들 태도 싹 바꾸는 것 좀 봐.”
데브의 인도하에 나는 몰래─주교랑 대주교만 못 본 걸 몰래라고 할 수 있다면─식당을 빠져나왔다. 침묵할 뿐 우리를 계속 주시하고 있던 시선들이 끊기니 드디어 편안해졌다.
“새벽에 출항하면 얼굴 볼 일도 더 없겠죠. 어휴.”
내 맘이 네 맘이다. 오늘 밤이 지나면 드디어 이 섬을 뜰 수 있다.
“자크라티에서 개선식이니 뭐니 한다지만…… 그것도 하루면 끝난다니까.”
따지고 보면 한 일 자체는 다른 지방에서 한 거랑 크게 다르지 않은데, 이상하게 지긋지긋하단 말이지.
겪은 일의 규모가 워낙 커서 그런 걸까? 다 도시 단위다가 이번에 지방 단위로 훅 뛴 거니까. 덕분에 여기서 보낸 시간도 압도적으로 길고…….
“그보다 드디어 보수를 받을 차례인가요? 크, 천만 갈이라니.”
음, 그러네. 야바드에서만 근 한 달을 보냈네. 이 정도면 진저리 날 만도.
“아, 검도 받아야 했죠? 용의 비늘과 이빨로 만든 검이라니 상상도 안 돼요.”
그래도 데브 말마따나 이제 남은 건 정산뿐이니까.
나는 나보다 더 설레발을 떠는 이를 두고 천천히 배정받은 곳으로 돌아갔다.
미처 정리하지 못한 사람과 악마들의 시체가 곳곳에서 인사했다. 잿더미가 된 건물들이 팔랑팔랑 풍겨 대는 재 냄새는 덤이다.
“여, 이제 왔나?”
혹은 바람손이 우리 방에서 까꿍 하는 게 진짜 덤이거나.
“왜 그런 눈이야?”
“대주교 쪽이랑 같이 왔나 봅니다?”
“애초에 그쪽을 태워 준 게 난데, 뭐. 새벽에 당신들 태우고 갈 것도 나고.”
“아.”
나는 게스트 하우스처럼 돼 있는 방을 두고 찜해 둔 침대에 앉았다.
참고로 인퀴지터도 같은 방에서 이불을 돌돌 만 채 자고 있다. 멀쩡한 방은커녕 건물 자체가 몇 채 남은 게 없어서 벌어진 일이었다.
“근데 그래서 왜 왔는데요?”
데브가 싸들고 온 음식을 인퀴지터 바로 옆 침대에 내려놓고 본인 자리를 찾아갔다.
그러자 나와 데브가 나란히 벽면을 차지하고, 반대편에 인퀴지터가 자고 있으며, 그 가운데에 바람손이 앉아 있는 구도가 되었다.
“음, 특별히 공적인 일이 있는 건 아니고…….”
바람손이 눈을 데굴 굴리더니 곧 내 쪽을 보았다.
“저번에 거절한 건 기억하지만, 그래도 매달릴 곳이 당신밖에서 없어서 말이야.”
곧 그 눈이 딱 감기고 고개가 절도 있게 숙여졌다.
“부탁이야. 자크라티 성주에게 받기로 한 천만 갈, 내가 대신 치를 수 있게 해 줘.”
저번처럼 날카롭게 쳐내기에는 너무도 무겁고 진중한 부탁이었다. 컨셉이라고 해도 이유는 들어 봐 주지 않을까 싶을 정도로.
“물론 알아. 당신을 설득할 일이 아니란 거. 그렇지만…… 설득할 수 있는 게 당신뿐이야.”
“성주님보다 나리를 설득하는 게 더 쉬워 보이진 않는뎁쇼.”
“아니, 내겐 당신이 더 가능성 있어.”
바람손이 우물쭈물하다가 한마디 덧붙였다.
“그 사람은 더 이상 내게…… 우리에게 빚지려 들지 않을 테니까.”
“우리?”
“나와 내 형제들을 말하는 거야.”
그쯤 되니 슬슬 지금까지의 단서로는 해결되지 않는 호기심이 들었다.
아니, 진심으로. 대체 어떤 사이쯤 돼야 대신 빚 갚아 주려 들 수 있는데? 심지어 말하는 것만 들으면 바람손뿐 아니라 형제들도 나서 줄 듯한 뉘앙스다.
“…왜요?”
“……?”
“대신 갚아 주고 싶은 마음 자체야 알겠습니다. 그거야 그냥 받아들이면 그만이니까. 그런데 왜 굳이 나서는 건진 당최 이해가 안 가서 말입죠.”
다행히 날 대신해 데브가 물어봐 주었다. 쟤도 어지간히 궁금했던 모양이다.
“냅다 빚 대신 갚게 해 달라는 것보단 사정이라도 털어놓고 부탁해 보시죠? 적어도 그게 설득하긴 편할 것 같은데.”
데브의 말에 바람손이 살짝 표정을 달리했다. 이것을 말해야 할지 말아야 할지 고민하는 것 같았다.
그마저도 바늘도 안 박힐 것 같은 내 표정에 결심을 내렸지만.
“그 사람이, 내 어머니라서 그래.”
봇물 터지듯, 폭탄 발언이 터져 나오기 시작했다.
“예?”
“친어머니는 아니야. 친어머니는 40년에 돌아가셨어. 그분은 그 뒤에 날 거둬 주신 거고.”
“…성주님이요?”
“그래.”
한번 터진 물꼬는 쉽사리 그치지 않는 법이다. 바람손은 마른세수를 하며 꾹꾹 숨겨 왔던 제 사정을 토로했다.
“나뿐만 아니야. 무법자 치마와, 푸른달 와티아, 순수한 토니, 사자 캄펜…… 그 밖에도 많은 해적이 그분 아래서 컸어. 해적이 되지 않은 애들까지 포함하면 더 많고.”
“아니, 어쩌다……?”
“다들 조실부모한 채 죽어 가고 있었으니까.”
데브도 이건 예상 못 했는지 귀와 꼬리를 바짝 세웠다.
나도 마찬가지였다. 관심 없는 척 눈 감고 있어서 망정이지 아니었다면 표정 관리 좀 어려웠을 거다.
“이걸 설명하려면 40년 전까지 거슬러 올라가야 하는데…… 40년 전 좀비 사태가 일어나고 또 해결된 이후, 야바드 지방은 고아 문제로 시끌시끌했거든? 부모들이 죄다 애들부터 피난시킨 바람에, 생존자의 1/4가량이 어린애들이었어서. 자크라티도 별반 다를 게 없었고.”
“아, 그래서?”
“그래. 바로 직감했겠지만, 거기서 나선 게 바로 피우온 님이야. 아이들을 죽게 만들 순 없다고 다 거둬들이셨지.”
그러나 이야기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바람손이 뒤로 몸을 젖혔다.
“그 과정에서 후계자 자리도 박탈당하셨는데…… 아, 그땐 아직 성주가 아니셨어. 당시 성주님은 피우온 님의 자선사업을 반대하는 쪽이셨고.”
“…그래서 박탈당한 거구만요.”
“맞아. 그뿐만 아니라 모든 지원도 다 끊기고 성에서도 내쫒기셨지.”
“잠깐. 그러면 애들 먹이고 입힐 물자는……?”
“당연히 피우온 님이 직접 벌어 충당했지.”
“예? 그게 가능해요?”
“가능하겠어? 애들이 몇 명인데.”
그는 손을 휘적휘적 저었다. 술이 있었으면 진즉 술병을 땄을 분위기였다.
“내 형제들이, 그리고 내가 해적이 된 이유도 다 그것 때문이야. 은인은 돈 번다고 온갖 궂은 일을 다 하느라 갈수록 수척해지지, 그럼에도 돈은 떨어져 가지. 설상가상으로 고아들은 줄어들긴커녕 갈수록 늘어나기만 하는데…… 거기서 아는 거라곤 바다뿐인 새끼들이 뭘 택하겠어?”
“…성주님은 찬성하셨어요?”
“미쳤어? 절대 반대했지.”
하다못해 이곳엔 담배도 없다. 나는 오랜만에 담배가 피우고 싶어졌다. 맨 정신으로 이걸 듣자니 속이 너무 답답했다.
“가장 나이가 많았던 누나가 해적질로 돈을 벌어 왔던 날, 피우온 님은 죽을 때까지 내 얼굴 볼 생각 말라며 누날 쫓아냈어. 그리고 처음으로 술 한 통을 비우셨지. 우리 앞에선 찬물도 안 드시는 분이었는데.”
“…그 누나는?”
“피우온 님은 자신이 한 말을 어지간하면 어기지 않는 분이야. 정말 죽을 때까지 얼굴 안 보더라. 그 뒤에 해적이 된 형제들도 그랬고. 아, 물론 장례는 직접 치러 주셨어. 바닷사람이 으레 그렇듯, 대부분 시체는 없었지만.”
“그런데도 해적 할 생각이 드셨습니까?”
“말했잖아. 우리는, 그것밖에 할 수 있는 게 없었어. 무언갈 배울 처지조차 못 됐으니까. 물론 성주님은 어떻게든 우리에게 뭘 가르치려 하셨지만……. 솔직히 그렇잖아? 글 공부보다는 칼을 잡고 바다로 나가는 게 더 빠르고, 쉬운걸.”
심지어는 좋아하지도 않는 술까지 심하게 당겼다. 술을 배 속에 욱여넣기보단 술병으로 내 대가리 깨고 싶다.
“물론 이게 잘한 행위라고 말하는 건 아니야. 그렇지만 나는 손에 피 묻힌 형제가 밤에 남몰래 찾아와 우리들이 먹을 고기와 채소, 생필품 따위를 두고 가는 걸 보고 자랐어. 그리고 내가 바다로 나갈 수 있는 나이가 됐을 때, 나보다 어린 놈은 여전히 많았지. 그러니 뭐 어쩔 도리 있어? 더러운 돈이 가족을 지킨다면 욕 먹어서라도 버는 수밖에.”
“…….”
“성주님이…… 우리에게 손 벌리지 않을 거란 것도 그 이야기야. 그분이 멍청이도 아니고, 해적이 된 우리가 이것저것 두고 간 걸 설마 모르겠어? 알면서도 받을 수밖에 없으니까, 받지 않으면 애들이 다 죽을 걸 아니까. 비참해도 넘어간 거지.”
“…그분은, 그걸 빚이라 여기시나 보죠.”
“그래. 그래서 성주가 되셨을 때, 본인 성정에 맞지도 않는 사략선을 허가해 주셨지. 본인 세대의 실패로 자라난 아이들을 차마 막을 수 없다며. 물론 복지를 받고 자랐을 요즘 세대 해적들은 어림도 없지만…….”
바람손은 그 시점에서 살짝 웃었다. “덕분에 우린 자크라티에 상납금도 안 낸다?” 별로 웃긴 이야기는 아니었다.
“말이 좀 돌아갔는데…… 내가 그분 빚을 대속하려는 것도 그 때문이야. 그분은 우리에게 빚을 졌다고 생각하는 듯 하지만…… 정말 빚을 진 건 우리니까.”
아, 미치겠네.
나는 머리를 벅벅 긁고 싶은 걸 겨우 참았다. 아무렴 이런 이야기는 너무, 너무 내 안의 양심을 자극했다.
컨셉이 할 반응을 생각해야 하는데 그 이전에 본체가 먼저 펄펄 뛴다 이 소리다.
“그러니 제발, 내가…… 우리가 대신 천만 갈을 내게 해 주면 안 될까? 성주님한테 돈이 있고 없고를 떠나, 그분은 그 돈으로 더 많은 걸 할 수 있는 사람이야. 우리와 다르게.”
그, 그렇지만 캐붕은, 캐붕은……!
“음, 그렇다네요, 나리……?”
“부탁해.”
캐붕은 내 양심을 이긴다……!
“그래서.”
돈 자체야 사실 안 받아도 좋다. 내가 돈에 미친 사람도 아니고, 재해에 휩쓸린 사람들을 두고 악착같이 대금을 받아 갈 이유가 뭐 있겠나.
그러나 여기서 냅다 ‘어, 그래 네가 갚아.’ 하는 건 캐붕이 맞아서, 그래서.
“내가 분명 말했을 텐데. 네놈의 헌신 따위 내 알 바 아니라고. 네 사정에 나를 끌어들이지 마라.”
캐붕 없이 도울 방도라면 몰라도, 캐붕을 감수하며 도울 순 없다. 댐이 무너지는 건 거대한 구멍이 아니라 작은 균열 때문이다.
스윽.
기분 탓인가. 바람손 뒤편의 이불 뭉치가 들썩거린 것 같았다.
* * *
“도착이야.”
나는 어제부로 서먹서먹해진─그보단 비즈니스 느낌 정도로 멀어진─바람손의 외침을 들으며 뱃전에 섰다.
가까워진 자크라티의 모습은 떠날 때에 비해 많이 나아진 상태였다. 불길로 인한 연기가 올라오지 않고, 망가진 건물은 철거되거나 보수 중인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내리면 사람들이 환호성을 지를 텐데, 다들 너무 놀라지 말라고.”
더불어 항구엔 깃발이나 손수건을 쥐고 있는 인파가 가득했다.
저걸 보고도 극복이란 단어를 떠올리지 못한다면 그건 너무 과한 현실주의자일 것이다.
“아직 끝나지 않았는데, 사람들은 벌써 끝난 것처럼 여기는군요.”
아니면 인퀴지터처럼 너무 원칙적인 사람이거나.
“그 말이 틀리진 않습니다만, 가장 큰 고난은 넘기지 않았습니까. 이번 행사의 의의도 바로 그것입니다. 가장 큰 고난을 넘겼으니 남은 일도 이겨 낼 수 있다는 희망을 주는 것. 일종의 사기 진작이지요.”
“아, 이해했습니다. 그럼 저희에게 시가행진을 부탁한 것도……?”
“그렇지요.”
그래도 아크메이지가 돌아와서 다행이다. 설명해 주는 사람이 생겼다. 비록 인퀴지터의 시선에 맞춰 말하느라 많은 것이 생략됐다고 해도.
“제가 저기에 포함돼도 되나 싶네요.”
그보다 한동안 내륙만 다녔더니 멀미 진짜 장난 아니네.
나는 진탕이 된 속을 겨우 참으며 데브의 말을 흘려들었다. 하여간 저 녀석도 은근히 본인이 한 일을 후려치는 경향이 있다.
“자네가 빠지면 어쩌려는 건가? 용사를 구한 몸인데.”
“윽, 그건…….”
그 용사, 내가 죽일 뻔했다지만 말이지.
나는 그 시점에서 선측으로부터 발을 떼었다. 갑판을 가로지른 다리가 통통 소리를 내며 배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목적지는 내게 배정된 방이다.
“어딜 가나? 곧 다시 올라와야 할 텐데.”
아크메이지가 그런 나를 두고 의문을 표했다. 배에서 내리려면 갑판에 남아 있는 것이 맞으니 이상한 질문도 아니었다.
“악마기사?”
그러나 나는 개선식에 참가 안 할 거거든. 본체도 부담스러워서 싫고, 컨셉에도 안 맞는 행위니까.
그러니 너희나 실컷 치러라. 나는 항구의 사람들이 시가행진 따라서 우르르 사라지면 그때 내리련다.
“…설마 빠질 생각인가?”
“광대 노릇은 하지 않는다.”
절대 시가행진하다가 토할 것 같아서 도망치는 게 아니다.
“이런.”
아크메이지가 서둘러 내 뒤에 따라붙었다. 무언가 설득하려던 모양인데, 안타깝지만 내 입장이 바뀔 일은 없다.
무엇보다 나에겐 치트키가 있어서 말이지.
“자크라티에서 자네가 얼마나 유명한지 아나? 그런 자네가 빠진다면 사람들이 분명 실망…….”
나는 아크메이지가 끝까지 말을 잇기도 전에 오른팔을 붙잡고 이를 악물었다.
악마가 준동한다고 해석할지 내가 저기 설 자격이 없다고 해석할지는 글쎄. 그건 별로 중요하지 않다.
“…알겠네. 성주님껜 잘 전달하지.”
어느 쪽이든 아크메이지에겐 가불기(가드불가기술)로 들어갈 테니까. 으하학.
나는 손쉽게 아크메이지를 떨쳐 내고 방에 틀어박혔다. 귀찮은 거 참여 안 한다는 기쁨 이전에 멀미가 ‘안녕? 나 멀미야!’ 하면서 달려오고 있었다.
너무 오랜만에 하니까 진짜 죽을 맛이다.
똑똑.
그보다 누구야. 노크 소리를 낸 사람.
유일하게 날 설득할 수 있는 아크메이지를 무찔렀는데, 어째서……!
“뭐냐.”
나는 해먹에 몸을 누인 채로 방문자를 확인했다. 문을 열어 준다 그딴 건 없다. 꼬우면 가라!
“악마기사.”
한데 들려온 목소리가 뜻밖의 것이라. 나는 눈을 끔뻑거렸다. 앞으로 말 걸지 않을 거라 생각했는데, 바람손이 왜 또 날 찾아왔지?
“의뢰비, 준비해 놨다.”
나는 문 저편에서 들려온 말을 두고, 잠시간 이해하지 못했다.
내가 쟤한테 받을 의뢰비가 있었…… 지! 비푸릿 사냥과 자크라티의 구원은 별개의 의뢰였으니까.
선금을 너무 거하게 당겨서 후불금 생각을 아예 안 하고 있었다. 최초의 의뢰와 내용이 너무 달라진 것도 있고.
“이것저것 끌어모아서 7백만 갈까진 모았는데…… 혹시 부족할까.”
내게 말을 걸긴 했지만 여전히 기분 상한 게 낫진 않은 듯, 바람손은 다소 사무적으로 말했다.
크게 신경 쓰이진 않았다.
의뢰 내용에 비해 돈이 좀 적다 싶은 것도 뭐. 애초에 개인이, 그것도 해적이 낼 금액이 아니니까.
아크메이지에게 위약금 받았을 걸 감안해도 마찬가지고.
“부족하다면 더 낼게. 근데 시간이 좀 필요…….”
“확인했다.”
결정적으로 성향상 앞으로 사람들 도우러 뛰어다닐 녀석이다. 그런 사람한테 돈을 악착같이 뜯어내고 싶진 않다. 나는 군말 없이 받아들였다.
대화 나누느라 멀미가 더 심해져서 냅다 받은 건 절대 아니었다. 정말이다.
개선식이 시작된 듯, 바깥으로부터 크나큰 환호성이 들려오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