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주인공이 컨셉충이면 곤란한가요-85화 (85/389)

◈85화 말하고 싶어 (1)

「…내 목소리가 들리십니까?」

「만약 들린다면…….」

「전부, 잊어버리세요.」

* * *

저도 모르게 정신이 끊겼다가 깨어난다면 못해도 ‘낯선 천장이다’라든가, ‘번뜩!’이란 수식어 정돈 허락해 줘야 하는 거 아닌가?

나는 그마저도 허락하지 않는, 눈을 동여맨 듯한 무언가의 존재에 안타까움을 느꼈다. 내가 생각해도 참 쓸데없는 아쉬움이었다.

내가 지금 그런 걸 느낄 처지가 아닐 텐데.

어쨌거나 덕분에 정신은 좀 들었다. 나는 먼저 내 상황을 파악해 보았다.

일단 못해도 눈은 확실히 가려진 듯하고. 신체는 무슨 문제가 생긴 건지 영 감각이 없다. 팔다리가 분명 붙어 있긴 한 것 같은데 움직일 수는 없단 소리다.

심지어 입가에서도 약간의 압박감이 느껴진다. 시험 삼아 입술을 움직여 봤는데 움직이기 힘든 걸 보면 입도 막아 둔 것 같다.

귀를 막아 둔 것 같진 않은데 주변에서 들려오는 소리는 따로 없고.

뭔가 망한 기분이 솔솔 든다.

눈이랑 입이 묶여 있다는 건 신체도 구속되어 있을 확률이 높은데, 나 왜 구속된 거지?

나는 서둘러 끊기기 전 기억을 더듬어 보았다.

그러니까…… 내가 분명 함정에 걸려서 악마인 척 굴었고, 그 상태에서 72기사인가 뭔가 하는 녀석들을 처리했고, 괴물로 변한 비푸릿도 처리했고. 그리고…….

그리고 뭐 했지?

어…… 그러니까, 악마추종자들을 성에 남겨 두기 찝찝하다고 정리하러 갔던 것 같은데. 제물로 쓰일 사람들도 구한 기억이 어렴풋이 남아 있고.

근데 기억이 왜 이렇게 필터 먹인 것처럼 뿌연지 모르겠다. 프레임 몇 개 빼먹은 것처럼 빠진 기억도 많고…… 그때 했던 생각이나 가졌던 감정도 잘 안 떠오르고…… 오?

나는 순간 눈을 깜빡이고 싶은 마음이 되었다. 뒤늦게 떠오른 기억 하나 때문이다.

나, 마지막으로 광기 게이지 엄청 높게 찍은 상태에서 나한테 메이스를  휘두르던 김치만두를 본 것 같은데……? 어, 날 보던 고기만두도 어렴풋이 좀 기억나고?

…뭔 기억이지?

일순, 등 뒤로 식은땀이 주르륵 흐르는 듯했다. 기억나는 건 딱 그 정도였으나, 그렇다고 생략된 모든 장면들이 좋을 거란 예감도 안 든 까닭이다.

어쩌면 내가 구속된 이유 역시 그 때문인지 모르겠다.

기억에 없으니 확신할 순 없지만, 나… 광기 게이지 다 채워서 피아 구분 없이 날뛴 게 아닐까. 그런 거라면 구속 절대 가능인데.

나는 가장 높은 가능성을 두고 심란해졌다. 정말로 그런 거라면 난 어떻게 해야 할까. 그보다 시간은 얼마나 지난 거지?

일단 시계를 확인하려다가, 시계 기능이 따로 없다는 걸 떠올렸다. 그렇다면 시간의 흐름을 확인할 수 있는 기능이 뭐가 있을까.

꼬르르륵.

그때 내 심각한 상황을 비웃는 듯 뱃가죽 안이 우르릉 울었다. 심지어 그와 같이 몰려오는 건 아주 미칠 듯한 허기라.

나는 고통에 가까운 굶주림을 느끼며 잇새로 신음을 씹었다. 칼에 맞았을 때보다 지금이 더 아플 지경이었다.

“으.”

나는 결국 신음을 흘렸다. “응?” 그러자 근처에서 무슨 소리가 났다. 사람 소리였다.

그러나 정작 사람의 존재가 느껴지니 부르기가 또 그랬다. 내가 깨어난 걸 알리긴 해야 하는데, 또 알리자니 상황 파악이 덜 된 탓이다.

이유도 모른 채 구속된 입장이니 더 그랬다. 여기서 함부로 깨어난 척했다가는 모가지가 달랑달랑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기분 탓인가…….”

해서 나는 숨죽인 채 가만히 기다렸고, 드디어 주위에 있던 사람이 경계를 풀었다. 안도가 가슴에 먹먹히 차올랐다.

다시 사고할 시간을 벌었다.

다만 문제는 생각할 시간은 있어도 뭘 알아낼 단서가 없다는 건데. 하다못해 얼마나 흘렀는지조차도 몰라서……?

어, 잠시만. 배가 고프단 건 포만감이 그만큼 떨어졌단 소리 아니야?

나는 보다 확실한 파악을 위해 상태창을 잠시 열었다. 상태창이 눈 감는다고 안 보이는 건 아니라서 참 다행이었다.

「체력 2457/2457

마력 2785/2785

피로도 51

포만감 0」

나는 내가 올리는 게 아니라서 제대로 확인한 적 없는 스테이터스를 쭉 밀어낸 후, 보고자 한 정보를 확인했다. 조금, 이상하단 감상이 가장 먼저 들었다.

피로도랑 포만감은 둘째 치더라도 마력 상태가 이상했다. 원래 1,500대였는데? 왜 뻥튀기가 됐지?

나는 기묘한 기분에 마력 칸을 계속 들여다보았다. 포만감이야 바닥을 친 걸 보니 최소 3일은 지난 것 같은데…… 아니, 마력은 진짜 왜 늘었지? 거의 두 배 가까이 는 거잖아. 왜?

그러나 나를 놀래킬 일은 그게 전부가 아니었다.

「격노│분노는 힘이 될 수도, 독이 될 수도 있다.

효과: 걸려 있는 모든 상태 이상을 무효화하며 추가 상태 이상을 무시.

광기 게이지가 새로 생성되며, 특정 행동을 할수록 광기 게이지가 차오른다.

※해당 스킬은 특정 상황에 자동으로 활성화됩니다.」

「마력창│허공에 마력으로 이뤄진 창을 생성해, 원하는 곳으로 쏘아 보낸다.

효과: 마력 20 소모. 적을 200%의 대미지로 관통 공격.」

「봄바드│나선 형태로 꼬아 버린 마력의 덩어리를 전방으로 사출한다.

효과: 마력 100 소모. 범위에 들어온 적을 600% 대미지로 공격.」

「세 개의 발톱│휘두른 갈래에 두 개의 궤적을 추가한다.

효과: 활성화 시 모든 공격에 두 갈래의 궤적을 추가한다. 스킬의 마력 소모가 3배로 변한다.」

「마력 컨트롤│마력을 섬세히 조절할 수 있게 된다.」

어차피 할 수 있는 일도 없겠다, 레벨도 올라가서 포인트도 생겼다.

결정적으로 뭐 새로운 스킬이라도 생겨서 마력이 뻥튀기됐나 확인하려 했더니 진짜 새 스킬이 튀어나왔다.

뭐지?

심지어 첫 번째 스킬은 내가 가졌던 상태 이상과 동일한 것이었다.

더 이상 상태 이상이 아니라 패시브스킬, 그것도 제가 알아서 발동하는 스킬로 고착화돼 버리긴 했지만.

두 번째, 세 번째는 대충 원거리 공격스킬 같고.

네 번째는…… 알 것 같은데 완벽히 감 잡히진 않는다. 나중에 확인해 봐야 할 것 같다.

마지막으로 다섯 번째 스킬은…… 이건 더 모르겠다. 마력량이 는 게 이놈 탓인가 했더니 설명엔 정작 양이 증가한다는 문구가 없단 말이지?

더불어 설명만 보면 이게 뭐꼬 하는 심정밖에 안 든다.

정말 영문을 모르겠다.

“대체 뭘 보여 주려는 거…….”

그때 무언가 열리는 소리와 함께 낯익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마도 바람손 같은데…… 맞나?

“…저거, 악마기사야?”

“예.”

“왜, 왜 저 사람이……!”

나는 일단 내색하지 않고 그들의 대화를 들었다. 내가 봉인되었다는 말에 순간 들썩일 뻔하긴 했지만, 구속이나 봉인이나 거기서 거기였으므로 다시 침착해졌다.

오히려 집중해야 할 건 내가 정말 폭주했다는 건데…….

와, 광기 게이지 무섭네. 설마설마했는데 정말 피아 구분 없이 날뛰게 만드는구나. 그것도 플레이어 정신머리까지 날려 버리고.

악마기사란 직업엔 참 어울리는 스킬이었다. 물론 절대 바라진 않지만! 가능하면 당장 삭제해 줬으면 하지만! 젠장!

“가운데 부분이 소멸된 성 못 봤어요?”

“뭐?”

“기사 나리가 한 건데.”

근데 지금 내가 뭘 했다고?

나는 참지 못하고 몸을 살짝 들썩였다.

기실 감각이 없어서 내가 몸을 움직였단 자각도 별로 없었다. 단지 사슬 소리가 미약하게 들려서 ‘어? 나 움직였나?’ 싶었던 거지.

“…잠깐.”

그러나 그게 다른 사람 눈엔 보였나 보다. 인퀴지터의 것 같은 목소리가 중심을 가르고 발소리가 척척 다가왔다.

“악마기사, 깨셨습니까?”

그쯤 되어서, 나는 슬슬 일어날 때가 됐다는 판단을 내렸다.

촤륵.

내 몸이 옥죄던 쇠사슬─아마?─을 흔들었다.

“그렇다면…… 제 말이 명확히 들리십니까? 들리신다면 고개를 흔들어 주십시오.”

그보다 와, 나 진짜 애들 얼굴 어떻게 보냐. 나 제압하느라 고생했을 텐데. 물론 상성상 유리한 건 인퀴지터긴 하지만.

“정말 악마기사가 맞으십니까? 맞다면 고개를 위아래로 끄덕여 주십시오.”

…아니다. 내가 당장 걱정해야 할 건 이게 아니다.

“정말 깨어나셨군요!”

암, 악마기사 컨셉이 어디 폭주해 놓고도 뻔뻔스럽게 넘어갈 양반인가?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풀어 드리겠습니다.”

심지어 저번처럼─소몬에서 타타라로 이동할 때─잠깐 당한 것도 아니고, 봉인까지 당할 정도로 날뛰었는데?

물론 내가 날뛴 건 악마에게 먹혀서가 아니라 스킬 페널티에 불과하긴 하다. 그러나 남들 보기엔 무조건 전자일 터. 솔직히 저들에게 설명할 수 있는 것도 전자뿐이고.

더구나 나, 룩콴이랑 나 살자고 악마 연기까지 했잖아! 그건 그나마 연기였지만 다른 애들은 절대 모를 거고!

흐아악, 흐아아악.

나, 나 이제 어떡해……? 컨셉이라면 이렇게까지 사건이 크게 터진 이상 절대 스스로를 용납하지 않을 텐데?

스륵.

그사이 눈을 가리던 것이 사라졌다. 주변이 과하게 밝지 않아서 다행이었다.

눈을 몇 번 깜빡이는 것으로 빛에 익숙해졌다.

“입도 풀어 드리겠습니다.”

눈이 빛에 적응하자 사위 풍경도 막 들어오기 시작했다. 인퀴지터는 내 앞에 무릎 꿇고 앉아 내 얼굴로 손을 가져다 대는 중이었다.

그 덕에 김치만두의 얼굴도 똑바로 볼 수 있었다. 희고 통통한 뺨이나 언제나처럼 반짝거리는 녹색 눈이나 한쪽을 싹 밀어 버린 붉은 머리칼이라거나……?

그보다 쟤 왜 또 머리 밀었어.

나는 가까스로 동공 지진을 막았다. 도움이라곤 쥐뿔도 안 되는 얄팍한 기억 속에는 허공으로 치솟던 ‘붉은색’ 머리카락 일부가 우연찮게도 남아 있다. 그 뒤에 김치만두가 메이스를 내게 휘두른 것도.

즉, 아무래도 내가 범인인 모양이다.

스르륵.

“됐습니다.”

입을 봉하던 천 쪼가리가 드디어 떨어져 나갔지만, 내 입은 여전히 떨어질 생각을 않았다. 당연했다. 내가 무슨 염치로 입을 연단 말인가!

하물며 악마기사 컨셉으로 인해 내가 할 수 있는 말도 한정되어 있었다.

“악마기사?”

나… 아무래도 내 입으로 직접 죽여 달라 말해야 할 것 같지?

“얼마나, 죽었지.”

흐아악. 그것만은 제발!

나는 최대한 시간을 벌기 위해 아무거나 물어보았다. 물론 이 또한 치열한 고민 끝에 선정된 질문이었다.

죽여 달란 말 이전에 내가 이 컨셉 가지고 할 수 있는 말은 몇 개 없다.

“없습니다.”

그렇지만 번 시간 동안 아무리 머리를 굴려도 내 컨셉이 이 상황을 빠져나갈 방도는 없었다. 내가 입힌 피해 규모나 사건의 진행 상황을 모르니 더 그랬다.

“입 바른 말은 필요 없다.”

그 틈을 타 철컹, 하고 목에 걸려 있던 족쇄가 떨어져 나갔다. 걸려 있는지도 몰랐다.

목이 간지럽고 숨이 잠시 막혔다가, 내가 정신을 잃고 벌였을 일이 먼저 다가왔다.

“정말입니다.”

아, 허리에 힘 빠진다.

쿵.

인퀴지터 외에도 다른 이들이 마법사를 닦달한 끝에 허리를 조이던 사슬을 부쉈다.

그 덕에 내 허리가 절로 구부러졌다. 암, 3일을 넘게 굶었을 텐데 허리 세울 힘이 있겠는가. 사슬은 구속구임과 동시에 내 지지대였다.

내 몸이 앞으로 꼬꾸라지듯 했다. 두 손은 따로 결박되어 있는지 팔을 먼저 딛는 것도 못했다.

“나는…….”

아슬아슬하게 머리…… 이마? 정수리와 이마 사이 부분이 먼저 바닥에 찍혔다. 허리에도 어떻게든 힘을 줘서 흐물텅 흘러내리는 것만은 막았고.

그러나 철푸덕 엎어지는 걸 면했다고 해서 가오 사는 것 이외에 달라지는 것이 있으랴.

“난…….”

최대한 행복회로를 돌려 보고 또 돌려 봤지만, 역시 내가 할 수 있는 말은 이것뿐이다.

“난 살아 있을 가치가 없다. 날 죽여라.”

…아무래도 난, 죽음을 피할 수 없을 것 같다.

눈물 난다.

“악마기사!”

“날, 죽이라 말했다.”

당연하지만 정말로 리트라이를 바라는 건 아니다. 누누이 말하지만 다시 깨는 건 너무 힘드니까.

그러나 망할 컨셉이란 놈이 도저히 허락을 안 하는 걸 어쩌겠는가.

결국 나는 바라지도 않으면서─이 게임을 시작한 이래 언제나 그랬지만─죽음을 부르짖었다. 요청 안 하자니 그건 그거대로 ‘님, 캐붕이시네요. 죽으세요’ 엔딩일 것 같아서 도전할 수도 없었다.

“당장 나를 죽이란 말이다……!”

하, 근데 그래도 살려 주면 안 될까?

“뭔 소릴 하는 겁니까요, 나리!”

앞으로 엎어졌던 내 몸을 데브가 일으켜 세워 주었다. 상체가 똑바로 세워지자 미지근한 무언가가 콧잔등을 타고 흐르는 게 느껴졌다.

눈이 부릅떠졌다.

“그럴 순 없습니다!”

“아니, 넌 그래야만 할 거다.”

아냐, 아냐. 가능하면 절대 그러지 말아 줬으면 좋겠어.

리트라이를 하면 분명 지금보다 나은 상황을 만들 수 있겠지만, 함정에 빠지는 일 없이 속전속결로 피해를 줄이고 해낼 수 있겠지만, 저 망할 패시브스킬이 없는 상태에서 다시 시작할 수 있겠지만 그래도…….

어라. 이렇게 말하니까 재시작이 훨씬 나은 것 같기도?

“그것이 네가 할 일이다.”

아니다, 내가 잘못 생각했다. 리스타트 지점이 언젠지 알고 리트라이를 해.

이 망할 게임은 수동 저장 기능이 없어서 세이브 파일을 이용한 로드를 노릴 수도 없고, 자동 저장을 이용한 재시작도 불가능하다고.

참고로 후자가 불가능한 것엔 여러 가지 이유가 있다.

1차로 내가 직접 재시작을 지시할 경우 「불가능한 명령입니다.」 따위의 시스템창만 뜬다는 것이며, 2차로 GAME OVER를 통한 재시작의 경우는…….

가능 여부는 둘째 치더라도 현 상황 자체가 조금 걸림돌이다.

왜냐면, 마지막 자동 저장이 분명 싸움 이후 시점에 이뤄졌을 테니까!

암, 자동 저장이란 게 굵직굵직한 사건이 끝날 때마다 알아서 해 주니 ‘자동’ 저장이라 불리는 것 아닌가.

오랜 게임 짬밥으로 비벼 보건대 마지막 저장 지점에서 재시작 눌러도 분명 내가 원하는 부분 이후일걸?

“당장, 나를 죽여라.”

아, 잠깐만. 이렇게 보니까 리트라이고 뭐고 나 그냥 망한 거 아닌가? 자동 저장 시점이 탈환 이후라면 나 계속 이 꼬라지 봐야 할 텐데?

미친. 미친. 미친!

“…….”

운영자님, 아니면 상태창님, 시스템님. 아무튼 뭐든 간에. 이 가여운 이에게 리셋 버튼 좀 주세요. 제발 이렇게 빌 테니까.

맨 처음부터 다시 하라고 해도 진짜 아무 말 안 할게. 아니, 오히려 그래 주면 더 좋겠어. 이참에 컨셉 청산 좀 하게.

그러니까 제발 리셋 버트으으은!!

“뭘 망설이는 거냐!”

나는 내 앞에서 침묵하는 이들을 채근했다. 당연히 속내는 정반대였다.

아무렴, 리셋 버튼이 주어지지 않을 경우 내가 미래로 향할 수 있는 유일한 방안은 저들의 자비뿐이었다.

정작 내 입은 자비 때려치우고 나 죽여 줘 징징거려야 하지만.

젠장. 이 극한의 모순이 진정 실화냐? 가슴이 웅장해진다…….

“악마를 살려 두는 게 네 일은 아닐 텐데!”

한 번만 봐주자. 한 번만 봐주자. 이번만 내 말 씹어 주자!! 제발!!

나는 속으로 애타게 살려 달라 부르짖으며 입으로는 장황히 죽음을 요구했다. 필사즉생행생즉사가 멀리 있지 않았다.

목에 뻣뻣이 힘이 들어갔다.

“이봐, 뭔 소릴 하는 거야?”

“나리…….”

그리고 모두가 내 외침에 압도되었을 때,─아니, 압도되면 안 되지! 날 설득해야지! 아니면 내 말 씹어야지! 야!─인퀴지터가 입술을 꾹 씹었다.

너무 과하게 나왔나. 후회가 살며시 고개를 들었다.

“저는, 당신이 악마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렇지만 김치만두는 끝내 내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다.

“정말 당신이 악마였다면, 제게 죽여 달라 말할 이유가 없잖습니까.”

김치만두는 신이었다!

* * *

“하!”

날카로운 웃음소리가 장내에 울려 퍼졌다. 물기 하나 없이 쩍쩍 갈라진 목소리는 마치 사풍에 뒤덮인 유적을 보는 것 같다.

“하면, 날 속박한 이유가 뭐지? 그 이유를 두고 내가 품은 것이 날뛰지 않았다고 말할 수 있나? 내 안의 악이 날뛰지 않았다고, 그 외의 이유가 있다고 말할 수 있느냔 말이다!”

영락과 쇠퇴의 산물이었다. 멸몰해 가고, 그러길 바라며, 오직 그것만이 유일한 미래인 것들.

“…다시 말하지. 네놈들이 할 일은 악마를 죽이는 것이고, 내가 할 일 또한 악마를 죽이는 것이다.”

그래서일까. 도적의 부축을 뿌리치고 평소처럼 꼿꼿이 선 모습이 유달리 작아 보였다.

강철 같던 평상시와 한없이 닮았으되, 어쩐지 목소리로부터 계속해서 체념이 읽히는 것이다.

“그러니…… 각자의 사명을 다할 수 있도록 해라.”

그래서.

그러해서.

그녀는 함부로 입을 열지 못했다. 다른 이들의 침묵도 같은 심정이기에 자아내는 것이라고 몇 없는 눈치가 외쳤다.

“…제 사명은.”

그러나 언제까지고 입 닫고 있을 순 없다. 인퀴지터는 한참 만에 말문을 떼었다.

“악마로부터 사람들을 구하는 것입니다. 무고한 사람을 죽이는 것이 아니라. 더불어 당신이란 사람은…… 제게 있어 죽여야 할 대상이 아닙니다.”

이것이 옳은가? 그건 모르겠다. 다만 노력할 뿐이다. 언제나처럼.

“악마에게 몸을 빼앗겼음에도 마지막 순간까지 저항했던, 그리고 끝내 사람을 죽이기 전에 멈춘 당신을 제가 어떻게 죽일 수 있단 말입니까.”

그것이 그녀가 걸어야 할 길이었으므로.

“…어리석은 소리. 이번에 죽은 자가 없다고 해서 다음에도 없을 거라 여기는 건가?”

어렵사리 뗀 말에 반박이 돌아왔다. 다소 뼈아픈 말이었다. 그녀마저도 저 말을 섣불리 부정할 수 없다.

“한순간의 행운에 기대어 방심할 거라면, 좋다. 족쇄를 풀어라. 네가 하지 않겠다면 내가 하겠다.”

하지만 그렇다고 받아들일 수도 없다. 받아들이기 싫다.

“그것이 행운이었다면.”

악마기사가 왜 악마에게 진단 말인가? 그는 지지 않는다. 이번만 해도 끝내 이겨 내지 않았던가.

“다음에는 필연이 될 것입니다.”

그러니까, 제발 그런 말은 하지 말았으면 좋겠다.

언제나처럼 자존심을 세우고 승리를 확신해 줬으면 좋겠다. 그녀조차 헷갈리는 순간에 당당히 나아갔던 것처럼, 불가능해 보였던 것을 태연히 가능으로 끌어내린 것처럼.

“제가 그렇게 만들겠습니다. 결코, 당신이 떠안고 있는 악이 날뛸 수 없게, 그 누구에게도 피해 입히지 못하게 막겠습니다.”

하면 그녀 자신도 그를 따라 나아갈 수 있을 테니까.

“그러니 한 번만 더 믿어 주십시오.”

인퀴지터는 그것으로 말을 마쳤다. 이것이 먹힐지 안 먹힐지는 이제 그녀도 몰랐다. 그녀는 최선을 다했다.

“…어째서.”

그리고, 오랜 고요와 한참의 침묵 끝에서.

“어째서 내가 악마를 억누를 수 있다고 확신하지.”

악마기사가 조용히 질문했다. 쉬운 질문이었다.

“제가 본 당신이란 사람이 그러하니까요.”

뿌득, 하고 이 가는 소리가 들려왔다.

“…너 같은 멍청이는 세상에 다시 없을 거다.”

명백한 백기가 펄럭였다.

훈훈한 결말이었다.

비록 그녀가 모르는 대화의 이면엔, ‘여기서 받아들여도 캐붕 아닌가.’ 내지 ‘좀 더 대사 쳐 봐도 인퀴지터가 트롤링을 커버 쳐 줄까.’ 하며 계속 간 보던 속내가 있었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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