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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인공이 컨셉충이면 곤란한가요-84화 (84/389)

◈84화 이러지 말라고 (9)

대략 2주쯤 흘렀을까. 아크메이지는 언제 이렇게 시간이 흘렀는가 하고 돌이켜보았다.

일에 치여 하루하루를 보냈더니 이만큼 흘러간 꼴이기에 더욱 현실감이 없었다.

그러나 그 대가로 도시 내부 치안은 안정되었고, 추가 인력도 도착하며 여유가 생겼다. 인퀴지터가 도시 내부를 벗어나 바깥의 악마들을 정리할 정도였다.

그렇다고 내부 단속을 그만둔 것도 아니다.

여력이 없어 내버려 두었던 비푸릿 일당들 역시 여유가 생기자마자 잇따라 처형했다.

어쨌거나 그런 식으로 하나둘 일거리가 사라졌을까.

2차 추가 인력이 온다는 소식에 ‘드디어 숨 돌릴 수 있나!’ 안도하던 아크메이지에게 벼락 같은 소식이 하나 더해졌다.

“아직 성주님께서 오실 정도로 안전한 곳이 못 됩니다만…….”

자크라티의 성주, 피우온이 막 수복된 아유 힌에 찾아왔다.

“아유 힌과 자크라티의 사이가 좋았다곤 말하지 않겠으나, 이런 상황에서 도움의 손길 하나 못 내줄 정도로 나쁘지도 않았다 생각하네.”

의전을 요구하지 않은 게 그나마 다행인가.

피우온의 평판이 보통의 귀족과 다르단 건 알지만, 그런 것에 기대기엔 아크메이지가 살아온 세월이 너무 길다.

더불어 그녀는 아까까지만 해도…….

『대악마를 품은 인간이라니. 살려 두는 것보단 죽이는 게 이득일 것 같은데. 왜 그런 판단을 했지?』

『대악마의 그릇? 죽일 거면 시체는 양도해 주면 안 돼?』

『정화는…… 안 되니까 내버려 둔 거겠군. 교단에서 하는 봉인도 안 먹혔나?』

『폭주를 막는 봉인구라, 재밌네! 신체 정보 좀 보내 줄래? 바로 만들어 줄게!』

세간의 평판과 실제 성격이 극과 극을 달리는 대현자들을 상대하고 온 길이었다.

일부나마 협조를 얻어낸 게 유일한 위안일 지경이다.

“혹 내 대접을 걱정하는 거라면 그럴 필요 없네. 용건이 해결되는 대로 떠날 생각이니.”

각설하고, 피우온이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그녀가 살짝 비켜선 자리엔 호위로 데려온 경비대장 외에도, 숨겨진 항구와 아유 힌을 오가며 이것저것을 날라 주던 해적들이 있다.

각각 바람손과 무법자, 푸른달이다. 하나같이 시선을 내리깐 채 다소곳이 손을 모은 게 참 수줍어 보였다.

“일단 첫 용건은 이것일세.”

피우온의 말에 해적들과 경비대가 일사불란하게 움직였다. 그러자 그들이 이곳까지 힘들게 끌고 온 것들의 베일이 거두어졌다.

아유 힌에 있어 가장 필요한 음식과 옷가지, 약 따위의 물자였다. 다른 도시의 성주가 방문한단 소리에 기웃거리며 구경 나온 이들이 환호성을 지르기 시작했다.

“이, 이건.”

아유 힌이 수복되자마자 해적들 배를 타고 복귀한─사람들을 달래고 이끌 사람이 필요했기에 가장 먼저 데려왔다─재경 역시 감격하여 눈물을 글썽였다.

암. 피우온이 무언갈 잔뜩 가져온 시점에서 예상은 했겠으나, 예상과 직접 보는 것은 느낌이 다르기 마련이다.

“내 사비로 마련한 것은 얼마 안 되고, 도시 사람들이 사정을 듣고 십시일반 준비한 것들이 태반일세.”

“자크라티도 상황이 좋지 않다고 들었습니다만, 어찌 이런 걸 다…….”

“이곳만 하겠나. 그리고…… 40년 전엔 우리가 유독 도움을 많이 받지 않았나. 다들 그걸 기억한 것일 테지. 그러니 너무 부담 갖지 말게.”

그녀는 손을 휘저으며 말을 덧붙였다.

“다른 도시에서도, 하다못해 바다 건너 카나베스에서도 상황을 듣고 물자를 보내오는 중이니 부족하더라도 조금만 더 견디게.”

“…그래야지요. 견뎌야지요.”

“해변에 물자를 쌓아 두긴 좀 그래서, 나머진 그 항구에 넣어 놨네. 여력이 되는 대로 옮기시게.”

“도움에 감사할 뿐입니다.”

“나보단 백성들에게, 그리고 항구를 내어준 해적들에게 감사하게. 그들이 만들어 둔 항구가 요충지가 되었으니.”

참고로 숨겨진 항구가 요충지로 사용되는 것엔 별 이유가 없다.

대피한 사람들 덕에 노동력이 많고, 지형상 악마가 들어오지 못했으며, 위치도 딱 섬의 중간쯤이기에 결정된 것뿐이다.

또 다른 이유로는 해방된 항구가 거기밖에 없다는 것도 있고.

물론 그쪽도 용사 일행이 떠난 직후, 배신자의 존재로 인해 한 번 더 사건에 휘말리긴 했다.

때마침 도착한 본대가 아니었다면 그곳도 더 이상 못 쓸 상황이 되었을 거다.

“그보다 마탑에서 이번 좀비 사태에 대한 정보를 밝혀냈다고 들었네만.”

어쨌거나 피우온이 방문한 목적 중 하나를 해치웠을까.

그녀가 곧바로 다음 용건을 거론했다. 그녀가 그냥 물자만 보내지 않고, 직접 강림한 것엔 이 이유가 클 것이다.

아크메이지의 손이 지팡이를 슬슬 쓸었다.

“갑자기 끼어들어 죄송합니다만, 이곳에서 이야기하기엔 너무 길어질 듯합니다. 괜찮으시다면 자리를 옮기지요.”

어차피 알려 주려 했던 사항이다. 피우온이 급한 마음에 먼저 달려왔을 뿐, 말해 주지 못할 이유는 없다.

“인사가 늦어졌군요. 다시 뵙습니다, 대현자님.”

아크메이지의 존재를 느지막이 파악한 피우온이 가볍게 인사한 후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면, 흠. 안 그래도 비푸릿이 죽은 걸 보고 싶던 참입니다. 혹 그쪽으로 가며 들어도 괜찮겠습니까?”

“물론이지요.”

비푸릿이야 모두가 볼 수 있도록 효수해 둔 참이다. 그곳이라고 대화하기 좋은 장소는 아니지만, 여기서 서서 이야기 나누는 것보단 나을 것이다.

“제가 안내하겠습니다.”

“배려에 감사드립니다.”

아크메이지는 안내를 시작했다. 피우온과 그 호위들 일부가 따라왔다. 왜 일부인가 하면, 눈치 보던 사략선주들이 도망쳐서 그런 것이다.

아, 조금 고민하던 재경은 선물받은 물자 수습을 위해 남기로 했다.

그는 이미 해당 사항을 보고받았을뿐더러, 아크메이지와 재경이 동시에 손님을 상대하기엔 여전히 할 일이 많았다.

“그래서, 좀비가 빨리 탄생되는 이유를 알아냈다 들었습니다만.”

아크메이지와 피우온은 호위에 둘러싸인 채─그 호위에 바람손을 비롯한 사략선주들이 껴 있는 건 다소 웃겼지만─이동을 시작했다.

사람들이 연신 고개를 기웃거리는 건 두 사람 다 쇠심줄 같은 신경으로 외면했다. 기껏해야 목소리가 좀 더 줄어든 것이 의식했다는 증거의 전부였다.

“예. 놈들이 자료 일부를 여기까지 끌고 왔더군요.”

자료를 가져온 것도 모자라, 그것들을 치울 시간도 없이 전부 죽어 버린 게 다행이었다. 보다 엄밀히 말한다면 악마기사가 미쳐 날뛰며 전부 쳐 죽인 거겠지만.

“일단 감염이 단축된 원리는…… 40년 전 사건으로 인한 공포를 기반으로 하는 듯합니다.”

“…공포가 기반이라고요.”

“때론 모르는 것보다 아는 게 더 문제가 되는 법이지요.”

무식하면 용감하단 말의 반대가 딱 이번 사태의 원흉이었다. 알고 있기 때문에 더 겁을 먹는 이들의 심리를 이용, 그 부정적 심리로 저주를 심화시킨 것이다.

“예컨대, 불안의 실체화인 셈입니다. 두려움의 크기가 크면 클수록 저주의 효과가 더욱 커지죠.”

“사람마다 감염에 걸린 시간이 들쭉날쭉한 것도 그 때문이겠군요.”

“정확히 이해하셨습니다.”

실제로 겪은 세대야 그렇다 쳐도, 부모님 세대에게 전해 들은 세대는 둘로 갈린다. 세뇌되다시피 겁을 먹거나 여전히 실감 못 해서 무시하거나.

그리고 전자는 감염이 빨랐을 것이며 후자는 느렸을 거다. 이번 사건에 한해 후자의 처지가 더 나았던 셈이다.

“…이건 우리 지방이어서 가능한 일이겠습니다.”

“여러분껜 그다지 도움 되지 않겠지만…… 예. 다른 지방에선 이런 일이 벌어지지 못할 겁니다. 마을이나 도시 단위로 좀비를 두려워하는 곳은 있어도…… 지방 전체가 좀비를 두려워하는 경우는 없으니까요.”

“쯧.”

아크메이지의 차분한 설명에 피우온의 눈살이 좁아졌다. 주위에서 슬쩍 엿듣고 있던 호위들도 표정을 구기긴 매한가지지만, 대화에 끼어들진 않았다.

“알겠습니다. 앞으론…… 대비책은 세워 두되 겁내지 말라고 사람들을 독려해야겠군요.”

“올바른 판단이십니다.”

좀비에 대한 두려움은 완전히 없앨 순 없겠으나, 장려하는 것만으로도 도움은 될 것이다.

아크메이지는 그것을 인정하며 슬슬 걸음을 멈췄다.

무너진 성의 근처엔 비푸릿이었던 것의 잔재가 일일이 꼬챙이에 꿰인 채 놓여 있다. 목책처럼 줄지어진 꼬챙이가 꼭 장식품 같았다.

“이것입니다.”

“…이것이?”

“믿기지 않으실 수도 있겠습니다마는, 증인도 있습니다.”

운 좋게 살아남은 도적─아니, 정말 운이 좋다는 말로 끝낼 수 있을까? 그 도적의 말에 따르면 그건 운이 아니었다─이 모든 걸 말해 주었다.

악마기사가 어쩌다 함정에 빠졌는지, 깨어난 후는 어떠했는지, 자신이 어떻게 살았는지, 비푸릿이 어떻게 죽었는지 등.

여전히 ‘저것’이 정말 비푸릿인지 의심하는 사람은 있지만…… 최소한 대부분의 사람은 저것이 비푸릿임을 확신하고 있었다.

“원하신다면 불러오지요.”

“아니, 그럴 필요 없습니다. 저도 아예 모르고 온 것은 아니니까요.”

피우온은 해적들에게도 미리 전해 들었다며, 다만 생김새가 상상보다 더 괴악하여 놀랐을 뿐이라고 점잖게 말했다.

“…제가 아는 놈이라면, 확실히 이리 굴 것 같기도 했고.”

그녀는 깍둑 썰려 효수된 시신들을 낱낱이 눈에 담았다. 짙은 갈색 눈동자는 이렇다 할 감정을 쉽사리 띠지 않는다.

“그보다 1천만 갈을 지급할 때가 왔군요. 제가 돈을 지급하기로 한 대상은 어디로 갔습니까?”

아크메이지는 그 질문에 잠시 눈을 껌뻑였다. 해당 이야기는 금시초문이었던 까닭이다.

“아, 대현자님은 모르시겠군요. 악마기사란 모험가에게 비푸릿 살해를 부탁했습니다. 혹시라도 놓치는 일이 없도록.”

이런. 아크메이지는 땀구멍도 없는 몸에 식은땀이 다 나는 기분이 들었다.

악마기사에 대한 사실은 마탑과 교단, 그리고 아유 힌의 권력자와만 공유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어느 쪽으로든 사방에 알려져서 좋을 이야기가 아닌 까닭이다.

“그는…….”

그러나 악마기사가 지금처럼 계속 깨어나지 않는다면, 그때는…….

“…저주에 당해 격리된 상태입니다. 만남은 뒤로 미루시는 게 좋으실 것 같군요.”

아니, 그가 깨어나지 않을 리 없다.

아크메이지는 인퀴지터보다 그녀가 더 악마기사에게 의존하는 건 아닌가 생각하며 답을 돌렸다.

딱히 틀린 말도 아니었다. 악마기사가 저주에 당한 것도, 봉인으로 격리된 것도 맞으니까.

단지 그의 몸 안에 있는 악마가 결정적 이유임을 밝히지 않았을 뿐.

“그렇습니까. 하면 어쩔 수 없지요. 그렇다면 그 동료는 어디 있습니까? 그 녹색 후드를 쓴 이 말입니다.”

“음, 그는…….”

다행히 이것은 답할 수 있는 부류의 질문이다. 다만 그 답을 모를 뿐.

“거리를 돌아다니고 있을 것 같군요……?”

아크메이지의 말끝이 흐려졌다.

* * *

“…댁들 뭐 합니까?”

한편, 성주와 아크메이지가 찾고 있는 이는 지금 난데없이 양팔을 붙잡힌 상황이었다.

“갑자기 튀어나와선 왜 제 팔을 붙잡는 건데요.”

비푸릿 휘하 해적들이 전부 처형된 지금, 데스브링거에게 남은 일은 몇 없으니. 그로 하여금 그는 평화롭게 도시를 거닐던 중이었다.

여전히 일에 치여 사는 아크메이지나 인퀴지터와는 대조되는 순간이었지만 하릴없다. 더 있을지도 모르는 추종자를 찾는 작업은 지난함에 비해 하는 건 별로 없어 보였다.

기실, 지금 이 순간은 일 안 하고 있는 게 맞기도 하고.

“잠깐 신세 좀 지자.”

“하하, 너무 기분 나빠 마시오.”

그러나 일하지 않고 논 대가는 분명 존재했다.

데스브링거는 본인의 목적지에 거의 다다랐을 즈음 바람손과 무법자에게 붙잡혔다. 푸른달은 한 걸음 떨어진 곳에서 삐딱하게 서 있다.

“아니, 왜 여기 있는데요. 한창 여기저기 오가며 물자 보급하고 있어야 하는 거 아닙니까?”

“성주님이 하루만 시간 달라고 잡는 걸 어떡해.”

“최대한 안 마주치려고 도망다녔는데 하필 항구에서 딱 마주쳤지 뭐요. 으하하. 그러니 어쩔 도리 있나. 잡혀 드리는 수밖에.”

“뭐라는 거야.”

자크라티의 성주가 왔다는 건 사람들 떠드는 소리로 들었다. 굳이 보고 싶진 않아서 구경 가지는 않았고.

그런데 설마 이 해적들이 거기에 껴 있었을 줄이야. 데스브링거의 눈매가 삐죽거렸다.

“그러면 성주랑 같이 있어야 하는 거 아닙니까?”

“눈치 살살 보다가 빠져나왔지. 성주님 말은 거절 못 해도 경비대랑 계속 있는 건 불편하단 말이야.”

“나 참.”

“그보다 어디 가던 길이오?”

해적 주제에 성주의 눈치를 보는 게 이상해서 눈을 좀 흘겼을까.

그는 무법자의 질문에 눈을 깜빡였다. 그가 지금 가는 곳은 다른 이들에게 개방되지 않은 곳이다.

애시당초 개방된 곳이라고 해도 데려가진 않았겠지만 말이다.

“…음, 뭐…….”

그는 몇십 걸음 남지 않은 목적지를 두고 어물어물 말을 흐렸다.

마음이 복잡해서 그런가. 평소엔 잘만 나오던 말들이 쉽사리 이어지지 않았다.

“뭐야, 무슨 문제라도 있어?”

그걸 바람손이 기가 막히게 캐치해 냈다.

“무슨 일 있긴요.”

“그래?”

그래도 말할 수는 없다. 악미가사가 악마에게 먹혔고, 가까스로 폭주를 저 스스로 막아 내긴 했지만 여전히 위험해서 봉인 중이란 걸 어찌 말한단 말인가.

“이봐, 악마기사는 어디 있는지 아나? 그에게 할 말이 있는데.”

“아, 맞소 맞소. 내게도 알려 주시오.”

그러나 푸른달과 무법자는 그를 도와주지 않았다. 후드를 푹 눌러쓴 데스브링거의 얼굴이 미묘하게 굳었다.

둘러댈 말이 없었다. 무엇을 둘러대든 저들이 조금만 수소문해 보면 바로 들통날 상황이다.

“…그, 나리는…….”

“길 막지 마라.”

그렇지만 들통나더라도 진실을 입에 담는 것보단 낫겠지. 데스브링거가 그런 생각으로 입을 열려던 찰나, 새로운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교단의 개인가.”

“아아, 사제님 아니시오.”

“…오랜만에 보는데, 머리는 왜 그 모양이야?”

인퀴지터였다.

도시 바깥, 부정한 땅을 정화하고 악마를 처리하러 나갔다가 지금 돌아온 듯하다.

“싸움 도중 잘렸다.”

“그래?”

돌아와도 하필 지금 돌아오다니. 하여간 저 벽창호는 도움이 되질 않는다.

데스브링거는 안 좋은 타이밍에 끼어든 고집불통을 보며 속으로 안절부절못했다. 바람손이 악마기사에 대해 물어보면 사실대로 고하는 건 아닌가 걱정이 되었던 탓이다.

“그보다 악마기사를 보러 온 거면 빨리 들어가든가 해라. 길 막지 말고.”

…바로 지금처럼!

“뭐?”

“……?”

“이 화상아…….”

돌겠네 진짜. 데스브링거는 이마를 짚었다. 뜬금없이 나온 악마기사 언급에 해적 세 명은 얼떨떨한 얼굴이고, 사제는 또 상황 파악 못 해서 멀뚱멀뚱한 표정이다.

“뭔…… 소리야? 악마기사를 보러 왔다니?”

“…악마기사를 보러 가는 거 아니었나?”

“그걸 말하면 어떡해요! 비밀로 하자고 아크메이지님이 말했는데!”

“나, 나는 네가 세 사람을 데리고 가길래 말한 줄 알았……!”

“잠깐, 비밀이라니? 대현자가?”

“어…… 이거 좀 문제 생긴 상황 같소?”

“대체 무슨 상황이야?”

망했다. 여기까지 들었는데 저들이 물러날 리도 없고.

데스브링거는 마른세수를 하다 말고, 저를 채근하는 이들을 보았다. 젠장. 그래도 세 사람 다 입 가벼운 것 같진 않다는 게 유일한 행운이다.

“…따라오십쇼.”

그는 한숨과 함께 걸음을 돌렸다. 상황이 요상하단 걸 깨달은 해적들이 심각한 표정으로 따르고, 제 잘못을 깨달은 벽창호가 초조한 얼굴로 마지막에 붙었다.

“미, 미안하다…….”

“나 말고 기사 나리한테 하십쇼.”

“…악마기사한테 문제가 생긴 거야?”

“…예. 그렇지만 일단 보고 듣는 게 더 이해하기 편할 겁니다요.”

데스브링거는 주변에 흙벽을 둘러 시선을 차단한 공간에 들어섰다. 감시자들이 오가기 쉽게 문을 만들어 둔 것이 그나마 다행이었다.

“대체 뭘 보여 주려는 거…….”

그리고 문이 열린 순간, 세 해적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특히 바람손은 평상시의 표정을 가져다 댈 수도 없는 수준이다.

“…저거, 악마기사야?”

“예.”

“왜, 왜 저 사람이……!”

“악마추종자들의 수작으로 악마기사가 악마에게 먹혔습니다. 폭주 상태에서 피아 구분 못 하고 저희랑도 좀 싸웠고. 그래서 봉인된 상태입니다.”

하지만 그 얼굴을 두고 말 못 할 이유도 없다. 데스브링거는 시큰둥한 얼굴로 사정을 설명했다. 그다지 이해한 눈치는 아니다.

“이건 말도 안 돼.”

“이미 벌어진 일입니다요.”

부정이라면 그들이야말로 제일 많이 했다. 그럼에도 현실은 달라지지 않았고.

그러니 남는 건 납득이다.

“아무리 악마에게 먹혔다지만 이런 처우는……!”

“이러면 고맙다는 말도 못 하겠군.”

“저렇게 할 정도로 강했던 거요?”

그들과 자주 어울리며 악마기사에게 신뢰를 한가득 쌓았던 바람손과 달리, 그나마 정이 덜 쌓인 무법자가 물어 왔다.

직후 그는 자신이 한 말을 후회하는 듯했지만─그가 목격한 것만으로도 이미 충분했을 테니─이미 데스브링거의 입은 열린 상태였다.

“가운데 부분이 소멸된 성 못 봤어요?”

“뭐?”

“기사 나리가 한 건데.”

“보긴 봤는데 그게 이 양반이 한 거였소?”

“하, 신전에서 난리 났겠군.”

“그러니까 이 모양이죠.”

“…그걸? 어떻게?”

푸른달이나 무법자와 달리, 바람손은 쉽사리 이해하지 못했다. 데스브링거도 무리해서 설득할 생각은 없었다.

이에 대한 이야길 입 밖에 내는 것만으로 그는 충분히 힘겨웠다.

“말도 안 돼…… 그 남자가 악마한테…….”

“…잠깐.”

그러다 잠깐. 들어온 이래 유일하게 말이 없던 이가 처음으로 발언했다.

“뭡니까?”

발언하다 못해 앞으로 나아갔다. 한쪽 구석에서 감시하던 마법사가 제지하고자 일어섰지만, 빨간 머리 벽창호가 더 빨랐다.

“악마기사, 깨셨습니까?”

마법진에 발이 닿을락 말락 한 거리에 멈춰 선 이가 속삭였다.

촤륵.

우연이라기엔 너무 절묘한 순간에 사내를 구속한 쇠사슬이 흔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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