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주인공이 컨셉충이면 곤란한가요-80화 (80/389)

◈80화 이러지 말라고 (5)

시야가 아까부터 조금 붉은 것 같다.

나는 그 사실에 살짝 의아함을 느끼다가 이내 신경을 꺼 버렸다. 기분 탓이겠거니 하는 생각도 있고, 기분 탓이 아니더라도 기껏해야 핏방울 좀 튄 것이겠거니 싶던 까닭이다.

그렇다고 크게 거슬리는 것도 아니었고.

무엇보다 고작 시야에 관심을 기울이기엔 해야 할 일이 많았다.

“도망쳐!”

“끄아아악!”

봐라, 지금도. 버러지가 살아 도망치고 있지 않나.

아, 버러지가 아니지. 사람이지. 악마기사 컨셉에 너무 심취했나, 단어 선택에 실수가.

“커헉!”

‘그런데, 버러지라고 해도 되지 않나? 이렇게 볼품없는데.’

나는 나를 피해 도망치던 이의 등을 꿰뚫었다. 시미터는 깨졌고 투헨더는 건물 내에서 쓰기 힘드니, 이번에는 어쩔 수 없이 손을 쓴 채다.

“너무 잔인한가.”

심장을 뽑아 그대로 으깨었다. 그게 조금 징그럽다가도 뭐 어때, 싶어졌다. 검으로 찔러 죽이나 손으로 찔러 죽이나 그게 그거였다.

더불어 얘네가 누군가. 학살자들 아닌가. 이 도시와 전 도시, 그 외 여러 마을을 망가트리고 그곳에 살던 이들을 도탄에 빠트린 학살자.

그런 자들에겐 이런 죽음도 호사다. 이들은 좀 더 처참하게, 조각을 맞출 수도 없을 만큼 찢어 버려야 했다.

「광기 게이지 54%」

그런 점에서 손은 참 편리했다. 인간은 전부 물러 터져서 꼭 무기를 쓰지 않아도 쉽사리 죽어 나갔고…… 일일이 찢는 건 검보다 손이 더 쉬웠으니까.

「광기 게이지 57%」

근데 광기 게이지가 언제 50%를 넘겼지?

나는 뒤늦게 파악한 사실을 두고 수심에 빠졌다. 물론 고민이 있다고 행동을 멈출 순 없었으므로 도망치던 이를 붙잡는 것 역시 잊지 않았다.

‘상관은 없겠지. 특별히 이상도 없는 것 같고.’

나는 손끝으로 그 등을 갈랐다. 짐승이 할퀸 양 네 갈래의 자국이 남아 그 작자의 뼈와 내장을 슬쩍 내보이도록 했다.

그건 꽤 볼만한 흔적이었다. 흔적만 볼만했다.

“더러워졌나.”

나는 문득, 내 손이 참 지저분해졌음을 깨달았다. 핏물과 뭉개진 살점이 덕지덕지 달라붙어 있다니.

나중에 깨끗해질 건 알지만 그래도 불쾌하다. 그냥 검 아무거나 주워서 죽일 걸 그랬나?

‘근데, 애초에 이놈들이 없었으면 더러워질 일도 없지 않았을까?’

「광기 게이지 60%」

한번 떨어진 기분은 쉽사리 올라오지 않았다.

저놈들 때문이야. 저놈들이 잘못한 거야. 마음 한구석 심술쟁이가 마구 떠들며 원인을 미뤘다.

“버러지들이.”

물론 나는 그게 저들 탓이 아님을 알았다. 그러나 알아도 분은 풀리지 않았다. 짜증이란 건 본래 그러했다.

“전부 죽어라.”

그러니 어쩔 수 있나. 죽이는 수밖에.

“커헉!”

“끄아악!”

“끄흡.”

「광기 게이지 61%」

「광기 게이지 62%」

「광기 게이지 63%」

나는 사람이 보이는 족족 목을 부러트리고 내장을 짓밟으며 나아갔다.

어차피 죽어야 마땅한 것들, 화풀이로 좀 더 죽이는 것뿐이니 주위 눈치 볼 필요도 없었다.

“문 열어, 문 열라고!”

“망할 놈들이 저편에서 문을 막았어!”

“어떻게 좀 해 봐!”

“해적 새끼들, 나가서 시간이라도 끌어 보라고!”

“시이발, 검도 맨손으로 자르는 걸 두고 어떻게 시간을 끌어!”

그러다가, 익숙한 복도가 보였다. 중앙 정원으로 가는 길목이었던 것 같은데…….

범죄자들의 얄팍한 유대감이 그사이 일을 또 쳤나 보다. 나는 닫힌 문을 두고 발악하는 이들을 보며 피식 웃었다.

“온다, 온다고!”

저런 것들을 한 번에 죽이는 데는 역시 참격이 최고지. 근데 무기가 없어서 되려나 모르겠다.

나는 주변에 휘두를 만한 게 있는지 슬쩍 확인해 보았다.

‘맨손으로?’

그러다 문득, 내 손이 눈에 들어왔다. 이상할 일은 아니었다. 마력을 두르면 바위도 부수고 뭐도 하는 육신이 아닌가.

마력을 담는 그릇으로 따진다면 검이나 육체가 별반 다를 게 없다. 하면 마력을 쏘아 보내는 것도 다르지 않을 터다.

내 손에 마력이 지글지글 맺히기 시작했다.

“젠장, 그냥 죽지는 않─!”

팔을 부드럽게 대각선으로 저었다. 그러자 굵고 거친 참격이 뻗어 나갔다. 검으로 쏘아 보낼 때보단 조금 불안정한 기색이었다.

서걱!

그러나 위력만은 비등비등했다. 복도 끝에 있던 자들의 몸이 어슷하게 썰렸다.

「광기 게이지 64%」

미약한 쾌감이 등골을 짜르르 흔들었다.

쿠웅.

거기서 멈추지 않고, 정원으로 향하던 문마저 덩달아 잘려 나갔다. 그 너머로 문제의 중앙 정원이 보였다.

“와, 왔다!”

“공격 준비!”

“계획대로만 해!”

악마계약자들이 어디 갔나 했더니 다 여기서 진을 치고 있었나 보다.

나는 바닥에 빼곡히 그려진 마법진을 힐끗 보고, 다시 악마계약자들을 보았다. 노림수는 참 뻔했다. 모아 둔 핏물과 제물을 바탕으로 저를 제거해 보겠다는 심보일 것이다.

“뭐 해, 마법을 쓰지 않고!”

“아, 안 써집니다.”

다만 그래, 문제가 발생한 모양이다. 그 누구도 마법을 실행시키지 못했다. 무슨 발악을 하는지 잠깐이라도 지켜봐 줄까 하던 마음마저 식어 버렸다.

“안 써진다니, 무슨……!”

“…악마야. 악마께서 우릴 죽이려 하는 거야.”

그거 실례네. 아직 악마 같은 짓은 하지도 않았는데. 애초에 악마를 오른팔에 품고 있다는 설정이 있을 뿐, 악마도 아닌 몸이고.

“도망은 다 갔나?”

그래도 무력하게 죽어가는 적을 보는 건 나름의 재미가 있었다. 나는 공격이 통하지 않는단 사실을 깨닫고 도주하려던 자들에게 가벼이 손짓만 했다.

촤악!

단번에 수십 명의 목숨이 달아났다. 정말이지, 인간이란 이다지도 나약했다.

“흐.”

「광기 게이지 65%」

웃음이 절로 나올 정도로.

“허, 허억…….”

“흐읍.”

그런데 이건 뭘까…….

나는 입술을 삐죽 올리다 말고, 정원에 너저분히 널려 있는 포로들을 발견했다. 벌레처럼 바닥에 납작 붙어 있어서 모르고 지나갈 뻔했다.

‘죽일까?’

잠깐 동했으나 금세 떨쳐 냈다. 저들은 내가 구해야 할 사람들이었다. 죽여야 할 대상이 아니라.

‘정말로?’

…그랬을 것이다.

나는 눈가를 짚었다. 조금, 이상했다. 잘은 모르겠는데 아까부터…… 좀, 머리가…….

‘이럴 때가 아니야.’

…모르겠다. 피로도가 좀 쌓였는데 혹시 그것 때문인가. 아니면 광기 게이지의 페널티 효과가 머리의 멍함인 걸지도.

“가라.”

나는 갑자기 착 가라앉는 기분을 명확히 인지한 채 사람들의 족쇄를 찢었다. 손에 마력 싣는 법을 제대로 터득하니 별로 어렵지도 않았다.

“흐, 흐아악!”

그런데 내가 도우려 다가갈 때마다 왜 비명을 지르는 거야. 사람 기분 나쁘게.

심지어 이미 풀어 준 자들은 뒤도 안 보고 도망가기까지 했다. 감사 인사 그런 건 존재하지도 않았다.

좀, 불쾌하다.

‘누가 날 이유 없이 싫어하면, 싫어할 이유를 만들어 줘야 하는 게 아닐까.’

나는 이 사람들이 진짜 겁낼 이유를 만들어 줄까 하다가, 끝끝내 참았다. 민간인들에게 해를 끼칠 순 없다. 그건 윤리에 어긋났다. 어긋났으니까…… 나는, 그것을…….

「광기 게이지 66%」

「광기 게이지 67%」

그것을?

「광기 게이지 68%」

짜증 나, 불쾌해. 모든 게 거슬려. 분명 아까까진 재밌었는데.

「광기 게이지 69%」

뜨거운 것이 속으로부터 올라오는 기분이 들었다. 모든 게 짜증 났다. 아니, 화가 났다.

전부 내 눈앞에서 없애 버리면 편할까? 아니면 죽여 버려야 할까? 모든 것들의 사지를 찢고 내장을 파내어 대지에 흩뿌린 후, 그렇게 불태워 버리면 이 감정이 덜할까?

「광기 게이지 70%」

모르겠다. 그냥 ‘분노’가 치밀었다.

세상 전부를 태워도 꺼지지 않을 것 같은 화火가.

시야가 더욱 붉어졌다.

* * *

인퀴지터는 몰려드는 악마를 처리하며 어떻게든 성까지 도달하는 데 성공했다. 어느 시점부터 악마들이 그들에게 덤비기는커녕 도망쳐서 마냥 어려운 일도 아니었다.

“악마들이란 게 원래 이유 없이 도망도 가고 하는 생물입니까요?”

“…아니. 악마는 도망치지 않는다.”

단 한 경우를 제외하면, 악마들은 쉬이 도망치는 법이 없다.

“다들 무기를 들어라. 그리고…… 만일의 순간, 뒤도 보지 말고 도망쳐라.”

그들이 도망치는 경우는 딱 하나. 그들보다 압도적으로 강한 고위 악마가 그들을 사냥하려 들 때뿐.

“예?”

인퀴지터는 다가가면 다가갈수록 소름 끼치는 성을 향해 걸음을 뻗었다. 성 정면부의 끝부분에서 어슴푸레 동산의 윤곽이 보였다.

“땅이 일직선으로 움푹 파인 것 같은데?”

“진짜네…… 누가 이런 거지?”

그들은 부자연스럽게 그어진 흔적을 따라 동산 쪽으로 접근했다.

“저건…….”

그것의 정체를 가장 먼저 목격한 건 밤눈이 가장 밝은 데스브링거다.

“…참혹하군.”

그러나 그는 차마 말을 잇지 못했고, 그를 대신해 다른 도적이 발언했다. 미들족인 데다가 밤눈 자체가 밝지 못한 인퀴지터의 눈동자가 잠시 어둠을 노려보았다.

“난 잘 안 보이는데, 무엇이 보이지.”

“…악마의 사체.”

그녀는 긴장을 늦추지 않은 채 앞장서 걸었다. 도적의 말이 그녀가 세 걸음 더 나아간 후 겨우 덧붙여졌다.

“수십, 수백 조각으로 갈기갈기 찢겨 나간.”

그제야 그녀의 눈에도 동산의 정체가 보였다. 그건 거대한 악마를 고기 다지듯 다져 버린 흔적이었다.

더욱 끔찍한 것은, 저 다지기가 메이스 같은 둔기류가 아닌 예리한 날붙이로 이뤄졌다는 사실이다. 깍둑썰기 한 것처럼 단면이 반듯한 게 그 증거다.

“…누가 이런 거지?”

도적 중 하나가 혼잣말했다. 그리고 그것이 함의한 의문의 답은 인퀴지터와 데스브링거가 아는 사람이었다. 두 눈으로 본 적은 없으나 확신할 수 있다.

“기사 나리, 겠죠.”

대지에 새겨진 흔적을 포함해, 저런 짓거리를 할 수 있는 자는 그 사내 외에 아무도 없다.

일행 위에 침묵의 베일이 덮어씌워졌다.

“진입한다.”

그들은 묵묵히 동산을 지나, 성 내부로 들어갔다. 어렴풋한 달빛마저 사라진 성은 너무도 어두워, 당최 보이는 것이 드물었다.

“기척이 없는데, 불 좀 켭니다?”

“…그래.”

팍, 팍, 팟. 몇 번 시도하자 드디어 기름 전등 내부에 불이 붙었다.

동시에 세상은 주홍빛으로 화악 물들었다. 돌 벽도, 해진 카펫이 놓인 바닥도, 천장도. 하다못해 사방에 흥건히 진 핏물과 그 핏물의 옛 주인도 말이다.

“……!!”

기실 그건 새삼스러울 광경은 아니었다. 바깥의 악마를 죽인 게 악마기사가 맞다면, 그리고 그가 바깥으로 가는 대신 성안으로 들어갔다면, 이들을 놓치고 갈 리 없다.

이들은 전부 부귀영화에 영혼을 판 자들이니까.

다만…….

“기사 나리가 이렇게 잔인하게 사람을 죽일 리 없는데.”

데스브링거는 의문을 느꼈다. 그가 아는 악마기사의 살인 방식과 시체들의 사망 방식이 굉장히 차이 났기 때문이다.

아무렴 악마기사는 특별히 자비롭진 못해도 최소한 단칼에 사람을 보내 주는 편이었다. 또한 사용 무기는 단검이든 장검이든 반드시 도검류였고.

만약 검을 들지 않는다면, 그건 제압을 위한 경우일 때가 많았다. 말이 제압이지 거진 팔다리 하나쯤은 부러트리지마는, 하여튼.

“심지어 이건…… 검으로 죽인 게 아니잖아.”

한데 시체들의 사인을 분석해 보거든 이건 검으로 죽인 게 아니다. 이건 오히려…….

“손으로 잡아 뜯었나?”

손으로 죽인 것 같은데.

“손?”

“날붙이를 썼다기엔 상처가 너무 거칠어요. 네 갈래로 난 상처도 많고. 무엇보다 이 사람…… 심장이 뜯겨 나갔어요.”

칼로 찔렀다기엔 너무 크고, 날붙이로 심장을 도려냈다기엔 상처가 너무 거칠다. 그가 아는 어떤 무기도 이런 형상을 연출할 수는 없었다.

“기사 나리는 마력으로 몸을 강화할 줄 아니까…… 만약 손에 마력을 두르고 심장을 뜯어 갔다면 설명이 되겠죠.”

물론 정말 그게 가능한지는 모른다. 악마기사를 보기 전까지 그는 마력 사용자를 접해 본 적도 없으니까.

그러나 그가 봐 온 악마기사라면, 정확히는 그 무용이라면. 마냥 불가능할 것 같지가 않다.

“혹시 댁은 안 됩니까?”

“…가능 여부를 묻는 거라면, 가능은 하다.”

하물며 악마기사와 비슷한 무력의 인퀴지터마저 가능하노라 인정해서야.

“…각오해야겠습니다.”

악마를 죽인 점에서 악마기사가 악마들에게 넘어가지 않았음은 알게 되었다. 그러나 아군이라 여기기엔 수상한 징조가 너무 많으니.

데스브링거의 말에 인퀴지터는 입술을 꾹 다물었다. 어째서인가, 이단심문관으로서의 본능이 경종을 울리는 기분이었다.

“잠깐, 사람들이 달려오는 소리가 들리는데.”

그러던 차, 도적 중 한 명이 귀를 쫑긋거렸다. 그 말은 거짓이 아니라서 곧 저편으로부터 사람들 한 무리가 보이기 시작했다.

인퀴지터가 가장 선두에 서서, 방패를 앞세웠다. 방패의 출처는 장식용으로 서있던 풀플레이트다.

“누구냐!”

“흐악, 사, 살려 주십시오!”

인퀴지터는 매서운 눈으로 달려온 이들의 면면을 살폈다. 마기 같은 건 딱히 느껴지지 않고 복장은 너저분했다. 그들이 보고 왔고, 한 명은 은신처에 데려다 두기까지 했던 노예가 그러했듯이 말이다.

“우린 비푸릿을 죽이기 위해 온 자들이다. 너흰 누구지?”

“저, 저, 저희는…….”

그러나 혹시 모른다. 그녀는 마기 하나 없이 타락한 부정자들을, 심지어 교단에 숨어들기까지 한 자들을 알았다.

인퀴지터는 결코 경계심을 늦추지 않았다.

“그들은 안전해요.”

익숙한 목소리가 그들을 대변해 주지만 않았어도 꽤 오래 그랬을 것이다.

“당신은……!”

이름이 룩콴이었던가. 분명 악마기사를 따라갔던 걸로 기억하는데.

“살아 있었군!”

그들은 그녀가 죽었을 것이라 생각했다. 악마기사가 함정에 빠졌거든 무력이 떨어지는 룩콴은 살아남기 힘들었을 게 분명한 탓이다.

“룩콴!”

“누님, 살아 있었구만요.”

그러나 살아 있다. 멀쩡히 목숨을 부지하고 있다.

인퀴지터는 그 자그만 행운에 잠시간 안도했다.

“운이 좋았지.”

그사이, 룩콴이 복잡한 얼굴로 다가오며 사람들을 턱짓했다.

“하고픈 말은 많지만…… 일단 저들은 제물로 쓰이려던 사람이에요. 안전합니다.”

“그런가.”

절대적으로 신뢰할 만큼 살가운 사이는 아니나, 이 정도 믿음 하나 내주지 못할 관계 또한 아니다. 인퀴지터는 룩콴의 말을 믿고 방패를 내렸다.

눈치 보던 사람들이 안도의 숨과, 약간의 조급함을 드러냈다.

“도, 도망쳐야 합니다.”

그러다가, 그중 한 명이 용기 내어 더듬더듬 말을 뱉었다. 그건 기묘한 말이었다.

“안에 뭐가 있습니까요?”

“괴, 괴물이 있어요…….”

“우릴 다 죽일 거예요.”

“저흴 보내 주세요!”

뭔가 하며 되물으니 히스테릭에 가까운 반응들이 돌아온다.

“다 죽인다니… 대체 무엇이.”

“악마기사를 말하는 걸 거예요.”

그러나, 예상했지만 각오하지 못한 현실이 불쑥 치고 들어왔을 때. 인퀴지터는 사람들이 그러하듯 흥분할 수밖에 없었다.

“그분이…… 이상해졌어요.”

인퀴지터의 손이 메이스를 꾸욱 붙잡았다.

* * *

죽여, 죽이지 마. 그렇지만 죽이고 싶어. 그런데 왜? 몰라, 화가 나. 모든 게 짜증 나고 거슬려.

조금 죽이는 것 정도는 괜찮지 않아?

“가라!”

아니, 괜찮지 않아.

“당장 여기서 꺼져라!”

나는 거칠게 사람들을 굴비처럼 묶은 줄을 끊어 버렸다. 사람들의 족쇄를 일일이 풀어 줄 여유는 없다.

최소한 이동 거리를 제한하는 줄만큼은 끊어 줬으니 알아서 척척 도망가 주길 바란다.

“흐, 흐윽.”

“사, 살려 주세요.”

난 이미 충분한 자비를 베풀었는데 왜 또 비는 거야. 죽여 버리고 싶게.

「광기 게이지 74%」

퍽!

나는 뛰어가는 사람들을 죽이고 싶다는 욕망이 들자마자 내 머리를 팍 쳤다.

이건 정상이 아니다. 간헐적 폭발성 장애도 아니고,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상황에 과한 분노가 치미는 것이 정상일 리 없었다.

화 나는 것을 넘어 민간인을 죽일 생각까지 했다면 더더욱!

“죽이기 전에 꺼지라고!!”

“흐아악!”

“도망가!”

나는 지끈거리는 머리를 붙잡은 채 사람들을 서둘러 내쫓았다. 컨셉이고 나발이고 더 이상 신경 쓸 겨를 따윈 없었다.

마치 무언가가 뇌에 자리 잡고 내게 끝없이 속삭이는, 혹은 주입하는 기분이다. 들끓는 살의가 제멋대로 손을 내보내려 든다.

조금만 정신줄을 놓아도 사람들을 도륙하게 될 것 같다.

「광기 게이지 76%」

혹시 광기 게이지, 저것 때문에 이러는 건가? 설마?

“으…….”

‘죽여, 죽여. 제발 죽여. 짜증 나잖아. 이 상황이 엿같잖아. 그러니까 터트리자. 전부 죽여 버리자.’

“시발, X망겜 주제에!”

「광기 게이지 77%」

누구를 향한지 모를 화가 목을 꽉 채웠다. 명확한 계기가 있는 분노가 아니었다.

그런 감정은 도화선에 붙은 불처럼 정해진 대로 타오르기 마련인데, 작금은 산불처럼 산발적으로 퍼져 나가며 멋대로 눈앞을 뜨겁게 만드는 것이다.

치밀어 오르는 분노에 눈알이 뻑뻑해지고 온몸이 들떴다. 머릿속은 이성과 감성, 그 외의 것으로 나뉘어 서로 꽥꽥 떠드는 중이다.

죽여. 미쳤어? 죽이자. X 까. 왜 안 죽여? 화가 났다고 사람 죽이는 게 말이 되냐? 그렇지만 화가 풀리지 않잖아. 답답하잖아. 염병할 광기 게이지가.

시야가 붉다. 붉었다. 그마저도 짜증 나서 더욱 사고가 힘들어진다. 그냥 감정이 흐르는 대로 몸을 싣고 싶다.

그런데 이 감정은 대체 어디서 나오는 거야? 아, 빌어먹을 광기 게이지인가?

그렇지만 게임 주제에 플레이어의 감정까지 멋대로 건드리는 게 말이 돼?

짜증 나, 아니 화가 나. 나는 왜 이 망할 게임에 갇혀서 이 고생을─.

「광기 게이지 78%」

안 돼. 휘둘리지 마. 현대 윤리 강령을 어서 되새겨. 화가 난단 이유로 사람을 죽이면 그건 사람 새끼가 아니라 짐승입니다, 라고 복창하라고.

「광기 게이지 79%」

아니, 근데 저 시발롬의 게임 새끼가 먼저 나를.

“악마기사?”

삐이이 하는 이명 속에서 나를 부르는 목소리가 간신히 들려왔다. 나는 그에 홀린 듯 고개를 들었고…….

“괜찮으십니까?”

불쾌함의 덩어리를 발견했다.

「광기 게이지 80%」

아, 이젠 더 이상 못 버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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