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9화 이러지 말라고 (4)
인퀴지터는 온몸이 묶인 상태에서도 격렬히 저항하는 드래곤을 두고 메이스를 꾹 쥐었다.
방패가 있었다면 무언가 달랐을까? 쓸데없는 상념이 잠깐 들었으나 곧장 버렸다. 방패가 없다고 패배할 나약함이라면 그 여정을 시작해선 안 됐다.
“신이시여.”
그녀는 신성력을 더욱더 갈망했다. 그러자 예고된 고통이 따랐다. 혈관을 따라 불꽃이 흐르고 살갗 아래가 구워지는 아픔이었다.
하나 이 한 몸 바쳐 세상의 악을 지울 수 있다면, 스스로를 심지 삼아 모든 부정을 불태울 수 있다면.
그녀는 얼마든지 제 육신을 불사를 준비가 되었다.
“당신의 종이 이곳에 있나니.”
공양이었다.
“저를 도구 삼아, 세상의 법도를 다시 세우소서.”
타인의 평화와 안전을 위해 스스로를 바치는 공양.
“무고한 자들을 구원하소서.”
전투를 시작한 이래, 그녀의 주위를 멤돌던 신성력이 기어코 사방으로 범람했다.
크아아아아!
신성력의 파도에 가장 먼저 당한 것은 속박으로 인해 피할 수 없는 드래곤이었다. 그것의 비늘이 줄줄 녹아내리며 살점이 타들어 가기 시작했다.
거기서 피어오르는 부정한 악취는 피로 젖은 대지가 그러하듯, 신성력에 밀려 정화되고 있다.
“크아악!”
악마와 계약을 맺은 자들도 마땅히 그러했다. 침입자를 제거하기 위해 달려온 자들은 힘도 쓰지 못한 채 고통을 호소하며 쓰러졌다.
차라리 계약으로 강대한 힘을 받았다면 저항이라도 할 것을, 저항할 힘은 없되 과녁지만 들고 있어 공격받는 꼴이었다.
“시발, 어떻게 된 거야!”
“도둑 새끼들이!”
그런 점에서 악마와 계약하지 않고 인간으로서 존재하던 자들은 차라리 나았다.
그들은 신성력이 주는 따스함을 못 느끼되 특별한 방해도 받지 않았다.
“어이쿠, 좀 죽어 주십쇼.”
물론, 순수히 본인만의 힘으로 인퀴지터가 버프까지 걸어 준 도적을 상대해야 하는 건 별개의 일이었다.
“수가 너무 많아! 이봐, 드래곤은 언제 죽는 거야?!”
그러나 이쪽이라고 꼭 유리하지는 않다. 도적들은 암습 같은 전투에서 이점을 가지지, 이런 전면전에선 제대로 힘을 못 썼다.
버프를 통한 보조가 아니었다면 지금쯤 인퀴지터도 저것들을 죽이는 데 힘을 써야 했을 테다.
“…조금만 더 인내해라.”
엄습하는 고통은 목소리의 물기마저 버석히 가져갔으니. 그녀는 마른 목구멍을 쥐어짜 대답을 내놓은 후, 자신을 똑바로 보는 드래곤에게로 전진했다.
마침 드래곤도 결판을 낼 때가 왔음을 인지했는지, 높다랗게 들고 있던 고개를 아래로 내린 채였다. 처음이자 마지막 기회였다.
드래곤의 입에서 거대한 광염이 토해지기 시작했다.
“흐아아아압!”
동시에 인퀴지터 역시 달렸다. 가공할 열기가 다가왔으나 그것이 두렵지는 않았다. 그녀는 언제나 스스로를 성화에 집어넣는 사람이었다.
하얀 빛을 두른 전사가 기어코 화마 속에 제 몸을 던졌다. 신성력을 뚫고 들어온 불꽃이 홧홧히 피부를 핥고 근육을 익혔다.
그렇지만 신성력은 치유의 힘 또한 가지고 있으니. 화상 입은 피부가 순식간에 재생되고 근육 또한 더욱 단단하게 자라났다.
그녀의 몸에서 흩날리는 재 가루는 마치 빛의 파편과 같다.
“부정에게 정당한 심판을!”
기어이 불을 거스른 이가 단단히 대지를 밟았다. 쿵! 메이스를 치켜든 몸이 화염덩어리를 넘어 드래곤의 머리 위에 섰다.
“합당한 벌을!”
콰앙!
여러 장의 철편을 붙인 형태의 플랜지드 메이스(Flanged Mace)가 드래곤의 위턱을 후려갈겼다.
알알이 존재하던 비늘이 박살 나며 그 머리통이 그대로 바닥에 처박혔다.
천지가 요동칠 만큼 묵직한 진동이 잇따랐다. 무지막지한 힘에 가격된 드래곤은 단순히 고개를 떨구는 것에 그치지 않고 크레이터를 만들어 낸다.
뭉개지고 터져 버린 용의 머리 위에서 붉은 머리의 전사가 끝내 고갤 들었다.
쿠르르릉!
“……?”
“서, 성이!”
“이봐, 성에서 뭔가 난리가 난 모양인데!”
그러던 찰나, 느닷없이 성 쪽에서 커다란 소란이 일었다.
혹시 악마기사가 일으킨 것인가, 하고 인퀴지터의 녹색 눈이 잠시 반짝였다.
“…진짜 괴물은 성에 있었잖아?”
하나 그 대신 보인 건 성을 집어삼키려 드는 것 같은 촉수덩어리의 괴물이라.
“죽어─커헉!”
콰직!
그녀는 도적들이 미처 죽이지 못한 몇 명의 해적들을 박살 내며 도적을 찾았다. 암녹발의 큐어티족은 하나뿐이어서 찾기는 참 쉬웠다.
“준비해라!”
본래 계획은 드래곤을 잡은 뒤 도심으로 도주하여 술래잡기를 하는 것이지만…… 계획은 본래 망가지라고 있는 법이다.
그녀는 새까만 참격이 성의 괴물을 가르는 걸 확인한 후 외쳤다.
“성으로 간다!”
역시, 악마기사는 저것들에게 당하지 않았다.
* * *
방패 같은 것도 없이 매번 검 한 자루로만 싸워서 그런가. 무언갈 들고 싸우는 건 굉장히 성가신 일임을 처음 알았다.
단검처럼 작지도 않고, 끝에 불이 붙어 있다는 특징도 있다 보니 더욱 그러했다.
왜, 불은 위만을 바라보는 성향에 더해, 그 열기는 피아 구분을 안 가리지 않는가. 그러한 요소로 인해 다루기 굉장히 까다로워진 게 바로 횃불이었다.
[쥐새끼 같은 것이!]
그렇지만 상대에게 대미지를 줄 수 있는 무기가 이뿐이라면 감내해야지, 뭐 어쩌겠나.
나는 처음보다 더욱 비대해진 괴물을 두고 성의 외벽을 따라 달렸다. 제물을 찾아 중앙 정원으로 향하는 이를 말리려면 어쩔 수 없었다.
놈이 저만치 커져 버린 것도 다 간수나 경비를 먹어 치우는 걸 막지 못해서 벌어진 일 아닌가. 여기서 중앙 정원에 고인 핏물까지 받아 마신다면 일은 더욱 귀찮아질 터였다.
뭐, 지금도 소란을 듣고 모인 악마계약자들이 저치에게 버프를 걸어 주거나 가고일 따위를 보내 도우려 하고 있긴 하지만 말이다.
끼이이익!
그러나 후자의 경우, 오히려 방해였다. 촉수가 온갖 방향에서 날아오는데 도리어 비행종 악마가 내게 접근하는 걸 막아 준 까닭이다.
하물며 그것들끼리 부딪치며 경로를 방해해, 내 숨통이 트인 적도 한두 번이 아니다. 포칼로르의 몸뚱이가 커지면 커질수록 더 반복되는 일이었다.
“흐아아악!”
“어째서 저희를!”
[너희의 피와 살을 바쳐 나를 도와라.]
또한 전자의 경우, 본인이 직접 서포터를 처먹처먹 한지라 제대로 걸린 버프가 드물다. 버프 걸리는 것보단 그냥 입에 쑤셔 넣고 소화하는게 더 효율적인 모양이었다.
덕택에 토사구팽당하기 싫은 악마계약자들은 버프고 뭐고 자리를 뜨고 있고.
이러나저러나 나한텐 이득이었다.
“끄아악!”
나는 창문을 통해 새로운 인간이 잡혀 나오는 걸 보며 검을 휘둘렀다. 장렬히 쏘아져 나간 참격이 사람을 붙잡은 촉수를 가르고 성벽에 선명한 잔흔을 남겼다.
“으아아악!”
퍼억!
아, 참고로 포칼로르의 두 번째 입에 인간이 안 들어가도록 하는 것과, 붙잡혔던 인간을 추락으로부터 구해 주는 건 별개다.
민간인도 아니고 악마와 손잡은 상관 아래서 꿀 빨던 놈들을 내가 왜 살려 줘?
「광기 게이지 19%」
무엇보다 낙하하는 이들을 일일이 잡아 안전한 곳까지 놓고 오기엔 아무리 나라도 여력이 없다.
당장 포칼로르와 온갖 쫄의 공격을 피해 촉수를 자르고, 잘라 낸 부위에 횃불을 빨리 갖다 대어 눋게 하는 작업만으로도 나는 충분히 힘들었다.
점차 쌓여 가는 광기 게이지도 마찬가지고!
나는 더 이상 시간을 끌면 안 될 것 같다는 위기감을 느끼며 외벽을 박찼다.
나를 노리던 촉수가 간발의 차로 비껴 나갔다. 아주 다행인 일이었다.
[그 질긴 명줄이 어디까지 이어질 것 같으냐!]
물론 7층짜리 성 외벽을 박차 봐야 추락만 남는 것도 사실이다.
하나 내가 누군가. 해상 공중전을 겪으며 한층 성장한 게이머가 아닌가. 사방에 남아도는 게 발판이었다.
“네놈의 추잡한 목숨이야말로 그만 끝내 주지.”
나는 나를 지르물려던 가고일의 아가리를 밟고 다른 각도에서 나를 노리는 촉수를 향해 작은 참격을 날렸다. 촉수를 베되 완전히 잘라 내진 않을 수준이었다.
그리고 그건 내가 바라던 그대로 이뤄졌다.
완전히 잘린 게 아니라서 새 것이 자라나는 대신 봉합을 위한 재생이 이뤄졌고, 그 잠깐의 회복은 내가 놈을 추가 발판으로 삼을 시간이 되었다.
재생하는 찰나간은 촉수가 본체의 말을 못 듣는 덕이다.
[이 비천한 놈이!]
덕분에 나는 발목을 붙잡히는 대신 자유자재로 허공을 뛰어다녔다. 나를 노리며 또 다른 촉수들이 달려들었지만, 아무런 문제도 되지 않았다.
외려 촉수 중 두 개가 비행종 악마의 이빨에 뜯겨 나갈 뿐이었다. 일부는 내가 횃불을 가져다 댄 덕에 더 이상 재생도 못 하게 되었고.
[나는 이 땅과 저 바다 건너의 대지를 모조리 지배할 존재다! 악마왕의 자리마저 탈환하여 이 세상의 유일한 왕이 될 거란 말이다!]
네, 그러세요. 마음껏 하세요. 그게 가능할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묻지도 않았는데 구구절절 본인의 야망을 토로하는 이를 보며 귀나 후비적대고 싶어졌다.
그럴 여유도 없고 정말 그랬다간 캐붕이니 차마 시도는 안 했지만 말이다.
[한데 밑바닥 인간 따위가 왜 죽질 않는 거냐!]
글쎄. 그건 내가 할 말인데.
살 익히다가 횃불이 꺼지는 불상사도 벌써 세 번. 그만큼 많은 촉수를 지져 버렸다.
그런데도 포칼로르의 촉수는 이다지도 많이 남아 있다. 화상 입은 부분을 스스로 도려내면서까지 다시 재생시켜 버린 탓이다.
정말 징글징글하기 짝이 없는 보스였다.
「광기 게이지 20%」
나는 상성이 안 맞아도 너무 안 맞는 보스를 두고 치밀어 오르는 짜증을 느꼈다.
솔직한 심정으론 확 기름 구덩이에 처박고 싶다. 그렇게 튀겨 버리든 구워 버리든 하면 최소한 재생은 안 할 테니까.
「광기 게이지 21%」
아니, 정말 그렇게는 못 하나? 빌어먹을, 주방의 위치라도 알면 기름이라도 털어 확 끼얹어 버릴 텐데.
그런 다음 불을 붙여 버리면 활활 불타지 않을까?
「광기 게이지 22%」
앗, 광기 게이지가 언제 20퍼를 넘겼지.
나는 혀를 차면서도 꽉꽉 뭉쳐 내게 쏘아지는 공격을 피해 뛰었다. 몸이 튕겨져 오르며 한 바퀴 돌듯 성 지붕을 디뎠다.
경사진 천장은 조금 미끄러웠으나 90도 경사의 벽면보단 나았다. 최소한 가만히 있을 때 아래로 추락하진 않지 않나.
“후.”
무엇보다 이건 기회였다. 내 근력에만 의지하지 않고, 지지대의 안정적인 받침을 누리면서 공격할 기회.
벽면을 타고 오르는 적을 상대로 이런 상황이 쉽게 마련되진 않을 터. 나는 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자 검에 마력을 쏟아부었다. 마력회복 속도가 높아진 만큼 이 정도는 별 부담도 안 되었다.
그리고 자세를 다시 갖춘 촉수가 나를 노려 올 때, 나는 냅다 횃불을 공중으로 던지고 포칼로르의 품으로 돌진했다.
[어리석은!]
당연하게도 포칼로르가 기회를 잡았다는 양 촉수와 팔을 마구 휘둘렀다.
즈걱!
다만 그녀의 공격이 내게 닿기 직전, 돌진하기 전에 미리 내던진 마력참이 대각선으로 포칼로르의 몸을 갈랐다.
경로에 있던 촉수도 예외는 아니었다.
[소용없다고 했을 텐데!]
잘린 단면에서 가는 실 같은 것이 튀어나와 서로를 잇기 시작한다.
콱!
그것들이 미처 수복되기 전, 내 다리가 그것의 가슴팍을 밟았다. 재생에 쓰이던 촉수 일부가 다급히 내 발목과 허리를 감싸거나 일부 부위를 스치고 관통했다. HP가 쭉 떨어졌다.
“죽어라.”
그렇지만 이 정도야 예상한 손실량이다. 내 팔이 검을 그대로 내려찍었다.
그라운드 크래쉬. 간만에 사용한 스킬이 사방을 향해 야성적인 기운을 폭발적으로 내뿜었다.
[크읏!]
새까만 기운이 어둠을 가르고 사방을 난자했다. 내 몸을 휘감은 촉수와 짓밟고 있던 몸뚱이, 범위 내를 비행하던 악마들도 예외는 아니었다.
[네놈!]
그러나 내가 그라운드 크래쉬를 쓴 건 전방위 공격기라서뿐이 아니니.
그라운드 크래쉬에는 넉백(대상을 뒤로 밀어 버리는 것) 효과가 있다. 포칼로르의 몸이 기어이 외성 벽에서 떨어져 나가 추락을 시작했다.
무어, 그래 봤자 촉수로 어떻게든 다시 붙을 건 안다. 창틀마다 촉수 하나씩 걸면 떨어트리는 것도 별 의미 없으니까.
그렇지만 놈이 중앙 정원으로 가는 걸 잠깐이나마 저지한 게 어딘가.
무엇보다 나는 반동을 통해 다시 지붕에 착지한 상태다. 이 상태에서 뛰어내려 포칼로르에게 방금 썼던 스킬을 재사용하기만 해도 놈을 막아서긴 충분할 것이다.
물론 횃불이 충격파에 휘말려 꺼지는 건 아닌지 조오오금 걱정이지만.
탁.
나는 아까 위로 던졌던 횃불을 다시 받으며 검을 고쳐 쥐었다. 서걱! 내게 달려들던 하피가 반으로 쪼개진 채 지붕을 굴러 아래로 추락했다.
문득, 내 눈에 이변이 들어왔다.
[죽여 버리겠다!]
“…상처가 회복이 안 되네?”
아까 대각선으로 베였던 상처가 완벽히 복구되지 않았다. 불을 대지 않았는데도 그렇다.
무엇이 원인이든 간에 놈의 재생력을 뛰어넘어 저 육신을 반으로 갈라 버릴 수 있단 소리다.
「광기 게이지 24%」
아니, 반으로 가르는 것만 해서 되겠어? 사지를 갈기갈기 찢어 버려야지. 날 얼마나 귀찮게 했는데.
「광기 게이지 25%」
그래도 기름 가지러 동분서주할 수고만큼은 덜었다.
나는 다가오던 악마 두 마리를 부드럽게 양분하며 한 발 앞으로 내보냈다. 감히 허공을 디디려 한 다리가 그 대가를 치렀다.
내 몸이 수직 낙하를 시작했다. 횃불이 검푸른 공기 속에 길다란 궤적을 남겼다.
‘죽인다.’
「광기 게이지 26%」
그조차, 의도한 바였다.
검이 촉수를 모조리 찢어발긴 후 횃불이 포칼로르의 어깨를 지졌다. 매캐한 탄내와 비명 소리가 뒤섞였다.
그리고 그 가운데서, 모든 걸 평정하듯 터져 나오는 건 대지를 뒤흔드는 스킬이니.
퍼엉!
[왜, 왜!]
쪼개진 횃불이 불티를 사방으로 흩날렸다. 기어코 포칼로르의 육중한 몸뚱이가 바닥으로 떨어졌다.
그 와중에도 나를 노리려 하긴 했지만 촉수마저도 재생이 느려진 게 확연히 보인다.
[어떻게 내가 이 자리까지 왔는데!]
회광반조라는 단어가 세상에 있던가. 본인의 재생력이 다해 감을 깨달은 포칼로르가 광분하며 공격을 더욱 거칠게 시도해 왔다.
그녀의 감정이 육체에 반영되는 건지는 몰라도, 촉수에 외골격이 덧씌워지는 등 7개를 넘어 10개의 촉수가 덤벼드는 등 한층 격렬한 공세였다.
하늘은 호시탐탐 기회를 노리는 비행종 악마로 가득하다.
[이럴 수는 없다! 이럴 수는 없어!]
그치만 공세고 뭐고 내가 더 빠르다. 그거면 더 말할 것도 없다.
나는 마력을 부은 참격을 휘갈겼다. 아까보단 마력을 덜 실었는데, 그 때문인지 그 상처는 깨끗하게 회복되었다.
마력을 너무 적게 담은 공격은 여전히 안 통하는 듯하다.
[난 저들과 달라. 밑바닥 출신 주제에 출세하겠다고 주제도 모른 채 날뛰던 비프론스보다도, 마에 대한 탐구심에 지위마저도 버린 나베리우스보다도 더 나은 존재란 말이다!]
그사이 더욱 거대해진 그녀의 팔이 내가 있던 자리를 후려쳤다. 성의 벽 일부가 무너지며 뻥 구멍을 냈다.
가공할 힘이었다. 동작이 너무 큰 나머지 피하기가 쉬워, 내겐 그냥 밥처럼 보인다 해도.
[운이 좋아 대악마를 담았을 뿐인 네놈에게 이 내가 패배할 리 없어!]
뭐라니, 쟤. 나는 포칼로르의 말을 귓등으로도 듣지 않으며 다음 공격을 준비했다.
‘약하게 해서 안 되면, 더 강하게 베어야지.’
「광기 게이지 29%」
시미터가 절규하듯 쇳소리를 토해 냄과 동시에, 그 검날에 칠흑이 범람했다.
새까만 기운이 한 겹 한 겹 덧씌워질 때마다 검이 달그락달그락 흔들린다. 오롯이 저 괴물만을 위한 서비스였다.
[이곳은 나의 왕국이고 내 권좌란 말이다!!]
바보는 아닌가 보지. 나는 힘을 모으다 말고, 해일처럼 몰려오는 촉수들을 피하기 위해 걸음을 옮겼다.
뒤에는 성이, 앞엔 포칼로르가, 아래에는 단단한 지반이 버티고 있으니 피할 방향은 얼마 없다.
내 발이 성 외벽을 밟고 다시 위를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
[귀찮게 하지 말고 죽어어어!]
그리고 몸이 중력의 영향을 받는 것 같다 싶을 즈음, 나는 벽을 박찼다. 악마들이 나를 노린다는 건 잊었다.
그깟 것들이 감히 ‘나’를 죽일 순 없었다.
‘한 점으로, 올곧게.’
「광기 게이지 31%」
춤을 추는 사람의 턴처럼 몸을 비틀고 위를 향하던 정면을 아래로 바꾼다. 내 바로 아래엔 촉수의 물결이 존재했고, 그 끝에는 나의 목표가 있다.
하늘 위의 악마들이 길게 울부짖었다.
‘베어.’
「광기 게이지 34%」
시야가 붉게 변하며, 거대한 검격이 앞으로 나아갔다.
「광기 게이지 39%」
세계가 양단되었다.
* * *
털썩.
나는 힘을 잃고 아래로 떨어진 촉수들 위에 착지했다. 발목에 가해질 힘을 분산하기 위해 잠시 굽혀졌던 다리가 펴지면서 코트 자락도 다시금 뻣뻣하게 펼쳐진다.
[왜, 왜……?]
나는 기어코 깨져 버린 시미터를 들어 올렸다. 구름이 살짝 걷히며 희미하게 내려온 달빛이 시미터의 잔재를 조금 비춰 주었다.
저번과 다르게, 얘는 뚝 부러진 정도를 넘어 도신 전체가 산산조각 나 버린 채다. 이제 칼날이라 부를 만한 것조차 붙어 있지 않다.
[모든 것이 내 게 되어야 하는데, 그러기 위해 사탄과 헬렐에게 꿇은 무릎인데.]
칼날이 없는 검은 더 이상 쓸모없다.
나는 칼자루만 남은 검을 내던졌다.
[왜?]
그리고 내 앞에 있는 것을 눈에 담았다. 일직선상에 있던 모든 것들이 어긋난 채 벌어져 있는 게 보였다.
포칼로르의 반신도 마찬가지였다. 그녀의 왼쪽 어깨부터 아랫몸뚱이까지가 깔끔하게 잘려 있었다. 촉수가 유리된 육신을 어떻게든 붙이려 했지만 재생 속도는 아까와 천지차이다.
[나는, 나는 패배하지 않는다.]
함에도, 포칼로르는 포기하지 않았다. 그녀의 팔이 들어 올려지며 나를 내려치려 들었다.
[나는 절대로 권좌에서 내려오지─!]
내려치고자 하기만 했다.
[익, 이익!]
그녀의 팔은 내게 닿지 않았다. 무언가에 막힌 양 허공에서 부들대는 꼴이 아주 보기 좋았다.
[어째서, 어째서!!]
절규하는 소리가 꽤 감미롭다. 조금 더 들어도 되려나.
[모든 건 나의 것이 되어야만 했는데!!]
아니, 그러진 말자.
‘이제 성을 청소하면 되겠네.’
「광기 게이지 48%」
아직 죽여야 할 게 많이 남아 있지 않나.
「❖ 자크라티를 겨냥하는 송곳니
∎ 아유 힌 해방하기
∎ 포칼로르 제거 0 /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