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8화 이러지 말라고 (3)
「광기 게이지 1%」
「❖ 자크라티를 겨냥하는 송곳니
∎ 아유 힌 해방하기
∎ 보너스: 비푸릿 살해」
72기사 일원 세 명과 그들 바로 아래 계급의 지휘관, 그 아래 병사까지 수십을 단칼에 베어 냈는데 1%라.
초반이라서 상승세가 더딘 걸 수도 있지만, 그걸 고려해도 제법 할 만하지 않나 싶다. 생각보단 게이지 차는 양이 적다.
“후…….”
이제 연기는 그만해도 되려나. 일단 대악마는 집에 갔다고 해도 될 것 같은데.
나는 성벽 위에 서 있던 보초들과 뒤편에 서 있던 경비병 따위의 시선을 확인했다. 거기에 살아 있을지 모를 룩콴도 신경 써야 하니까…….
젠장, 대악마 집에 가는 장면을 보여 줘야 나중에 별말 안 나오겠구만. 혹시라도 이 일이 악마추종자들에게 전달될 것도 고려─대악마 모습으로 또 뻐겨야 할 일이 생길지 모르니까─해야 하고.
“크으윽.”
계산이 서자마자 내 손이 안대 낀 쪽의 눈을 짓누르며 허리를 구부렸다. 이 행위에 대충 이름을 붙인다면 ‘악마기사와 악마가 주도권 싸움 중’이라 할 수 있겠다.
물론 이유 없이 몰려오는 창피함은 오롯이 내 몫이었다.
그냥 미친놈 연기하는 건 괜찮았는데 전환 장면은 좀, 좀 버티기 힘드네. 살려면 이것도 이겨 내야 하지만.
“후.”
그래도 나는 프로 컨셉러니까! 어떻게든 버텨 냈다.
비틀대던 몸의 중심이 곧바로 서고, 허리가 꼿꼿해졌다. 대악마 연기할 때는 일부러 허리도 제대로 안 펴고 서 있기도 삐딱하게 서 있었으니 조금 신경 쓴다 하는 사람은 차이를 확연히 느낄 거다.
콰아앙!
그사이 저 멀리서 폭음이 또 한 번 들려왔다. 크아아아. 드래곤의 우짖음은 덤이었다. 아까 울음소리보다 구슬픔이 더해진 게 아무래도 애들이 잘해 내고 있는 것 같다.
하면 이왕 이렇게 된 거, 성도 청소하고 갈까.
들려오는 소리도 그렇고, 인퀴지터란 직업 자체가 버티면서 하는 난타전에 특화되어 있다 보니 합류가 좀 더뎌져도 괜찮을 터.
반면 성에 남아 있을 적들은 다르다. 성에는 해적들만 있는 게 아니라, 인신공양으로 저주나 기타 행위를 저지를 수 있는 악마계약자가 있다.
더불어 그들이 제물로 써먹을 수 있는 민간인들도.
방치했다가는 후환덩어리가 되어 돌아올지도 모른다. 지금 제거하고 가는 게 나중의 편의가 되어 줄 것이다.
하여 나는 걸음을 살짝 돌렸다. 참격을 뱉어 낸 후에도 여전히 마력이 둘러진 시미터가 끼이익, 울었다.
“잘도…….”
응? 뭐야, 아직 안 죽은 놈 있나? 성벽 위에 있던 놈들 소리라기엔 너무 근거리에서 들려오는데.
나는 돌리려던 걸음을 멈추고, 등지려던 쪽을 다시 보았다. 하면 상하체가 두 동강 난 이가 흙바닥을 긁으며 원통해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포칼로르. 혹은 비푸릿이었다.
“잘도 일을 저질러 줬구나.”
아니, 방금 퀘스트 갱신됐잖아. 왜 살아 있는 건데.
“인간 따위가……!”
나는 어이없음을 목구멍으로 삼켰다. 그와 동시에 슬며시 드는 감상은 약간의 안쓰러움이다.
얘도 나름 최종보스였을 텐데…… 내가 기습했다곤 하지만 정말 일격에 당하니 기분이 참 묘하다.
보스전이 스킵돼서 허전하달지, 좋긴 좋은데 정말 이게 끝이야? 하는 의문이 든달지.
그러나 그러면 또 어떤가? 보통의 게임이었다면 똥망겜을 외칠 상황일지언정, 지금의 내겐 오히려 좋다.
나는 광기 게이지를 고려하며 움직여야 하고, 시간이 부족해서 다급히 움직여야 하는 처지니까.
“악마 따위가, 아직 숨을 쉬고 있었군.”
그러하므로, 나는 일말의 아쉬움도 없이 칼을 들었다.
서걱!
야바드 지방의 학살자이자 인류의 변절자인 이가 수급이 잘려 사망하는 순간이었다. 그녀가 벌이고 행해 온 일에 비하면 참 보잘것없는 최후였다.
하지만 그것을 동정하고 싶지는 않다. 게임이니까 허무하다고 욕하는 거지, 학살자의 마지막이 꼭 비장할 필요는 없다.
나는 잘려 나온 머리를 잡아 인벤토리에 쑤셔 넣고자 했다.
의뢰자가 증거품을 요구했으니, 확인하기 쉽게 머리통을 통째로 줄 요량이었다.
콱!
머리가 잘린 포칼로르의 몸뚱이가 팔을 뻗어 나를 붙잡지만 않았어도 그랬을 거다.
“흐, 흐하핫!”
아니, 그보다는 잘린 머리통이 웃는다거나, 잘린 단면에서 촉수 따위가 뻗어 나온 게 문제였던 것 같다.
사람 얼굴을 가진 문어가 탄생했다.
“……!”
와, 너무 끔찍해!
나는 발을 붙잡은 손을 걷어참과 동시에, 촉수가 내 팔을 휘감기 전 그것을 던졌다.
끼기기긱!
그것이 다가 아니다. 나는 반사적이란 말이 어울리도록 재빠르게 검을 휘둘렀다.
쏟아진 참격이 공중에 뜬 머리를 갈랐다. 갈랐지만 단면에서 가는 촉수들이 나와 서로를 붙잡으며 다시 붙었다.
내가 비위가 좋아서 망정이지, 진짜 징그러웠다.
“추악하기 짝이 없군.”
대체 본인 몸에 뭔 짓을 한 겁니까, 휴먼. 뭘 했는데 머리가 세로로 잘리고도 붙고, 분리된 몸통이랑도 다시 합쳐지는 겁니까.
“흐하하하!!”
심지어 미친 사람처럼 광소를 터트리고 있어서 더 무섭다.
나는 융합이 끝나기 전에 죽이겠다는 일념으로 참격을 연속해서 날렸다.
“소용없다. 이 땅을 먹고나자마자 착수한 작업이야말로 이 몸뚱이와 죽음을 분리하는 것이니.”
그러나 포칼로르가 웃음을 멈추며 내놓은 말마따나, 포칼로르의 몸은 촉수를 통해 상처를 복구하고, 유리된 머리와 다시 합체했다. 의미가 없었다.
「광기 게이지 2%」
그럼 저걸 어쩐다. 나는 시미터를 내려 두었다. 포칼로르의 신체 수복 속도가 그제야 빨라졌다.
“네놈이 어떻게 대악마를 또 한 번 누르고 육체를 지배했는지는 모르겠으나…… 굳이 알 필요는 없겠지.”
…정정하겠다. 신체 수복만이 아니라 변형도 같이 이뤄지기 시작했다.
“한낱 인간에게 밀려난 악마 따위, 설사 대악마라 한들 더는 존중할 필요 없을 테니!”
포칼로르의 다리 살갗이 터져 나가며 문어 다리 같은 촉수를 내뻗었다. 그것은 지들끼리 이리저리 꼬이며 꼭 사자의 뒷발 같은 것을 만들어 냈다.
앞부분은 촉수가 그대로 있되, 뒷발만 다리의 형상을 갖춘 기괴한 모습이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포칼로르의 상체는 우득우득 소리와 함께 뒤틀리며 점차 비대해졌다. 그건 더 이상 사람의 골격이 아니었다.
튀어나온 외골격이 그녀의 머리를 투구처럼 뒤덮고 끝내 뿔과 이빨을 만들어 냈다.
[내 왕국을 망가트리려는 자, 죽음만이 있으리라!]
변화한 성대의 일갈이 파동의 형태를 가지고 쫙 퍼져 나갔다.
「???│???」
「❖ 자크라티를 겨냥하는 송곳니
∎ 아유 힌 해방하기
∎ 포칼로르 제거 0 / 1」
나는 쓸모없는 설명창과 퀘스트창을 치워 버리며 검을 고쳐 쥐었다.
참격이 통하지 않는 걸 본 상태라 어떻게 대항해야할지는 감도 안 잡힌다.
둔기류 무기로 교체해서 뭉개야 하나? 아니면 약점 부위를 찾아 공략? 불로 지져 버리기?
콰앙!
잠깐 생각 좀 했다고 바로 공격이 들어왔다. 포칼로르의 팔이 나선으로 휘감긴 촉수를 직선으로 늘려 제게 쏘아 버리는 식이다.
그러나 찌르기 형태의 공격은 관통 대미지를 줄 수 있는 대신 읽기 편하다는 단점이 있다. 나는 빠르게 공격 경로에서 벗어났다.
슈욱!
나선으로 꼬여 있던 촉수 중 하나가 풀려나오며 그런 나를 노렸다.
콱!
한 번 더 백스텝 밟는 것으로 어찌저찌 피하긴 했다. 한데 포칼로르의 촉수는 하나로 그치지 않아서, 나는 숨 돌릴 틈도 없이 다시 발을 움직여야 했다.
[대악마를 품은 존재도 보잘것없기 짝이 없구나. 피하기 급급하여 짐승처럼 폴짝폴짝대는 꼴이라니!]
촉수가 땅에 연달아 박히는 광경이 아슬아슬하게 내 앞에서 이뤄졌다.
내가 뒷걸음질하면 원래 있던 자리에 촉수가 박히는 그림이었다. 촉수가 단단한 건지, 땅이 무른 건지 길자란 줄기가 아주 쑥쑥 땅을 파고들었다.
[그래도 성가시기 짝이 없는 24위를 죽인 건 퍽 쓸모 있는 행동이었다. 칭찬해 주지.]
그래도 그것을 피하는 게 마냥 어렵지만은 않았다. 포칼로르가 한 번에 움직일 수 있는 촉수의 수는 7개가 최대였다.
[그래 봤자 살려 둘 생각은 없지만.]
더불어 촉수의 길이 또한 무한이 아니었다.
나는 아까부터 저 혼자 떠드는 포칼로르를 두고 촉수의 최대 길이를 재어 보았다. 어림잡아 15m. 좋은 소식은 아니지만 길이 제한이 있다는 것 자체는 나쁘지 않다.
[부정한 피와, 부정한 뼈와, 부정한 살을 바치노니.]
근데 이건 좀 아니지.
나를 멀찍이 물린 포칼로르가─촉수 길이를 확인하느라 내가 물러난 것도 있지만─주변의 시체들을 촉수로 휘감은 채 손을 모았다.
아까 나를 공격했던 촉수들은 옷소매처럼 아래로 흘러내린 채 미동도 않고 있다.
[제게 더 강한 힘을.]
지금은 변신을 마친 후니까 공격이 통하는 건 아닐까. 혹은 시미터가 아니라 투헨더로 하면 그래도 좀 먹히지 않을까.
나는 약간의 기대심을 머금고 참격을 다시 날려 보았다.
안타깝게도, 또는 당연하게도. 바라 마지않던 행복회로는 실패했다.
시체를 훼손할 수는 있어도 포칼로르에게 유의미한 타격은 줄 수 없었다. 기껏 잘라 낸 촉수 다발도 단면에서 새로운 촉수를 뽑아낼 뿐이었다.
일부러 다양한 각도로, 다양한 부위에 공격을 날려 보았지만 반응하는 곳도 없었고.
[통할 것 같으냐!]
염병. 이러면 어떻게 죽이란 거야.
나는 정말 히드라를 상대하는 헤라클레스에 빙의해서 불이라도 가져와야 하나 고민했다. 그런 내 눈을 크게 뜨이도록 한 건 바로 다음 일이었다.
“가지가지 한다 진짜…….”
뱃가죽이 가로로 갈라지는 것도 모자라 거기에 시체를 쑤셔 넣어 삼키다니.
인신 공양에 이어 식인이냐? 정말 골 때리네.
나는 구겨지려는 미간을 막지 않으며 투헨더를 굳게 쥐었다. 막기 힘든 것과 별개로, 녀석이 순순히 시체를 흡수하게 둘 순 없었다.
최소한 잘게 쪼개고 뭉갤 거다. 삽이라도 가져오지 않는 한 입에 가져다 대기도 힘들게.
[같잖은 수를!]
그 심술은 나름 효과가 있었다. 미끌미끌한 촉수로는 토막 난 시신을 쉽게 들어 올리지 못했다.
하물며 쏟아진 내장과 피는 주워담을 수도 없으니.
「광기 게이지 3%」
「광기 게이지 4%」
…물론 그게 마음 편하진 않았다. 다들 극악무도한 악인임은 알지만, 그렇다고 그 사실 하나가 내게 고인을 욕보일 권리를 주는 건 아니지 않는가.
「광기 게이지 5%」
됐고, 계속 시체 능욕만 할 수는 없다. 지금처럼 계속해서 마땅한 피해를 주지 못한다면, 이 싸움은 결국 내 패배로 이어질 거다.
마력이야 회복속도가 빨라져서─이유는 모른다─괜찮다지만 광기 게이지가 아니니까.
심지어 잠깐 안 본 사이 3%나 오르기도 했고.
역시 불을 가져와야겠다.
나는 격분한 포칼로르를 향해 전진했다. 자신을 노리는 줄 안 포칼로르가 나에게 촉수 다발을 쏘아 보냈다.
그러나 공격 방식은 대충 파악해서 말이다.
스킬의 도움은 아까 받아서 쿨타임이 안 되고. 나는 온갖 비행종들과 화려하게 놀았던 시간을 되새김질하며 자력으로 몸을 움직였다.
첫 번째 촉수가 걸음을 내딛기 위해 들어 올린 발 쪽 아래에 내리꽂히고, 교묘히 피해 내디뎠을 때 두 번째 촉수가 다가왔다.
내 검이 둥글게 회전하며 그것을 잘라 내면 세 번째 촉수가 살짝 돌아 내 등을 노리고 있다.
나는 세 번째 촉수가 발사되는 타이밍에 허리를 틀었다. 휘날리는 코트 자락을 뚫은 촉수는 내 가슴팍 앞 허공을 지나 바닥까지 뚫고 갔다.
내 오른팔이 그것을 잡아 그대로 위로 휘둘렀다. 줄넘기 돌리듯 위로 젖혀진 것이 네 번째 촉수를 쳐 냈다.
다섯. 내 몸이 땅을 박차고 올랐다. 여섯. 허공에서도 유연히 비틀린 몸은 촉수를 손쉽게 피해 냈다.
마지막 일곱. 내 검이 포칼로르의 안면과 함께 촉수를 잘라 냈다.
한 바퀴 회전한 몸이 포칼로르 뒤편에 미끄러지듯 착지했다.
[이 광대가……!]
광대가 인간도 악마도 아닌 괴생물보단 낫지 않을까. 나는 사소한 딴죽과 함께 포칼로르를 등지고 달렸다. 콱! 내 다리가 성벽을 타고 오르기 시작했다.
펄럭!
코트 자락이 위로 부풀어 오르고, 나는 성가퀴를 짚었다.
내 앞에는 내 연극과 포칼로르의 변신을 모두 지켜보며 그저 벌벌 떨기를 택한 간수 하나가 있다.
“그, 침, 침!”
간수가 말 하나 제대로 잇지 못한 채로 입술만을 달싹였다. 그런 저것을 살려 두면 좋을 게 있을까?
나는 성가퀴를 뛰어넘으며 고민했다. 결과는 하나였다.
퍽!
없다. 이 도시에서 목숨을 부지해도 좋을 사람들은 이 사달에 휘말린 가엾은 시민들뿐이었다.
「광기 게이지 6%」
나는 주먹으로─검은 집어넣은 후였기에─간수의 머리를 깬 직후 고개를 틀었다. 성벽 위에는 내가 바라던 화로와 홰가 있었다.
화륵.
나는 화로의 불을 홰에 옮겨붙였다.
[도망치는 모습이 참으로 비천하기 그지없구나!]
성벽 아래엔 내가 무엇을 하는지도 모르는 이가 소리치고 있다. 참 섭섭한 말이었다.
나는 횃불을 단단히 쥔 채, 포칼로르의 위치를 확인했다. 저 정도면 닿을 수 있다.
내 손이 화로 아래, 다리 부분을 붙잡은 채 그대로 들어 올렸다. 쾅! 이어 담벼락에 다다랐을 즈음엔 화로를 공중으로 던진 후 발로 걷어찬다.
화로 안의 벌건 장작들이 튀어나가며 아래로 쏟아졌다.
[한낱 인간 따위가……!]
위에서 쏟아진 불덩이에 포칼로르가 다급히 몸을 물렸다. 그렇지만 모든 불씨와 장작을 피할 수는 없었고, 내겐 그것으로 충분했다.
포칼로르는 화상마저 단번에 회복하진 못한다. 불에 닿는 순간 몸서리치듯 꿈틀대는 촉수와 구워진 고깃덩이처럼 쪼그라든 채 복구되지 않는 살점이 그것을 증명한다.
“지글지글 구워 주지, 버러지.”
횃불을 든 내 몸이 바닥으로 내려앉았다.
「광기 게이지 7%」
넘실거리는 주홍빛이 잿빛 눈동자마저 불그스름하게 물들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