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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인공이 컨셉충이면 곤란한가요-77화 (77/389)

◈77화 이러지 말라고 (2)

“우린 드래곤을 먼저 노립니다.”

“…악마기사를 버리자는 건가?”

“현실적으로 봐요. 기사 나리는 성에 있단 말입니다.”

어떻게든 몸을 숨기는 데 성공했을까. 데스브링거는 최대한 차갑게 식힌 이성으로, 감정을 배제한 채 발언하려 노력했다.

“그리고 성에는 비푸릿과 비푸릿을 지킬 병력도 가득하죠. 그걸 뚫고 기사 나리를 찾는 게 쉽겠어요? 심지어 그렇게 찾더라도 기사 나리가 악마에게 먹힌 후라면 어쩌려고?”

그 노력은 어느 정도 효용이 있었다. 누군가를 버리자는 이야기가 술술 나왔다.

“기사 나리의 무력은 댁도 잘 알잖아요. 기사 나리 하나만을 상대하는 것도 버거울 마당에 악마추종자 무리까지 추가로 상대할 순 없어요.”

“악마기사께서 쉽게 악마에게 당할 리 없다. 그분이라면, 의식에도 저항하며 견디고 계실지도 모른다.”

“시발, 누가 그거 생각 안 해봤겠어요?”

술술 나왔지만, 그걸 말한 머리는 너덜너덜해졌다. 겨우 침착해졌던 뇌가 다시 뜨거워졌다.

“상황이 상황이잖아요. 다른 대안을 두고 불확실에 목숨을 걸 수는 없어요. 댁이 한 말대로, 여긴 적진 한복판이니까!”

데스브링거는 손을 들어 마른세수를 했다. 격앙했던 목소리는 다시 낮춰져, 힘없이 상대를 설득하고자 발언을 시작한다.

“기사 나리가 악마에게 당했든 당하지 않으셨든, 잠입계획은 실패했어요. 그렇지만, 그렇다고 해서 댁이 기사 나리를 두고 후퇴할 양반은 아니잖아요.”

악마기사를 구하러 가기엔 부정적인 변수가 너무 많다. 하물며 판돈으로 올라갈 사람이 용사임에야.

“현실을 똑바로 봐요. 우린 실패했고, 우리끼리 악마기사를 구해 올 수는 없어요.”

하므로, 본대를 기다려야 한다. 아크메이지가 대동해올 병력과 힘을 합쳐야만 악마기사를 구출할 활로가 생길 것이므로.

“…하면, 드래곤을 노리자는 말은…… 본대가 합류했을 때를 대비하고자 함인가.”

“이제야 말이 좀 통하네.”

그나마 다행인 것은, 벽창호가 위기의 순간마저 꽉 막힌 사람은 아니란 것이다.

인정할 생각은 별로 없지만…… 저 이단심문관은 납득만 시키면 그 뒤는 대화가 꽤 쉽다.

“맞아요, 그래서 노리자는 거예요.”

드래곤과 악마기사 사이의 공통점은 하나다. 두 존재 모두, 방치할 경우 본대에 엄청난 피해를 가할 수 있다.

“드래곤을 죽여 두면 피해를 절반, 악마기사가 악마를 이겨 낸다면 완전히 줄일 수 있으니까.”

다만 노리기 힘든 곳에 자리한 악마기사와 달리, 드래곤은 도시 외각에 격리되어 있다고 했다.

길잡이 겸 정보꾼으로 데려온 이의 말에 따르면 격리로도 모자라, 난동을 막겠다는 핑계로 구속까지 한 듯하고.

자리를 지키고 있을 놈들이야 있겠지만, 성보다는 나을 거라 생각한다. 구속까지 되어 있다면 아주 편하게 죽일 수 있을지도 모르지.

이 정도면 제법 도박해 볼 만할 거다.

“알았다.”

“좋아요. 그럼 경로부터 검토해 봅시다. 짜뒀죠?”

“짜뒀고 말고. 이제 결정만 하면 돼.”

데스브링거는 미리 당부해 둔 산물을 받아들었다. 토박이 넷이 머리를 맞댄 결과, 지도에는 드래곤이 위치한 것으로 예상되는 곳과 그곳으로 가는 길이 여럿 표시된 채다.

“이봐, 도적.”

“…여기 도적만 다섯 명이거든요?”

그는 꽉 막힌 이단심문관의 말에 핀잔을 주었다. 그 언짢음이 사라진 건 바로 다음 순간이었다.

“그분은, 정말 괜찮으실까.”

글쎄. 그가 정말 괜찮을까. 횃불이 올라온 이래, 그 어떤 폭음도 이변을 뜻하는 소란도 들려오지 않는 성에서…… 그 기사의 안위를 바라도 되는 걸까.

“…기사 나리잖아요.”

두 사람은 명백히 보이는 진실로부터 눈을 돌렸다. 스물과 스물하나. 동경하는 대상의 추락을 입에 담으며 회의하기엔 너무 이른 나이였다.

* * *

나는 새롭게 떠오른 창을 확인했다.

격노라. ‘모든 상태 이상 무효화’는 굉장히 매력적이었지만 설명 마지막 줄이 마음에 살짝 걸렸다.

특정 행동을 할수록 광기 게이지가 차오른다니. 그 특정 행동이란 건 뭐고, 게이지가 다 차면 어떻게 되는 건데?

무엇보다 이 상태 이상이 갑자기 나타난 이유를 모르겠다. 내가 화 좀 났다고 막 생성될 거였으면, 진즉 ‘절망’이나 ‘좌절’ 같은 것도 떠야 하는 거 아니야?

내가 원하지도 않았건만 마력이 줄기줄기 흘러나오는 까닭도 잘 모르겠다. 하필 악마가 있다는 설정의 팔을 기점으로 해서 더 묘했다.

“줘. 나한테.”

그렇지만 이유는 몰라도 써먹을 수는 있겠지.

“그…….”

나는 아직 0에 수렴하고 있는 광기 게이지를 확인한 후, 차마 질문하지 못한 채 입을 벙긋대는 이들을 돌아보았다.

내가 활짝 웃을 즈음엔 오른팔의 마력이 내 의도에 맞춰 더욱 활활 타오른다. 평소보다도 더 과격한 기류였다.

“싫어?”

그 상태 그대로, 세 사람 중 가장 중심에 있는 포네글자에게 다가갔다. 저보다 한 뼘 가량 작아서 30cm 이내로 근접했을 땐 고개를 좀 낮춰야 시선이 맞았다.

그마저도 포네글자가 꼿꼿이 정면을 보는 덕에 제대로 안 맞았지만, 어쨌든.

“대답 안 해?”

나는 잠깐 이렇게 제멋대로 굴어도 되나 싶었지만, 오들오들 떨고 있는 아이들을 보며 마음을 다잡았다.

민간인들이 이딴 학살 공장에 있는 것 자체도 지금 경멸스러운 마당인데, 아이들을 어떻게 여기다 계속 둬. 애들 딴 데로 옮기는 것까지만 폭군처럼 밀어붙이자.

“그레첸께서 바라시는데, 무엇이 가로막을 수 있겠습니까. 부디 원하시는 것들을 골라 가져가시지요.”

포네글자가 침착하게 대답을 내놓았다. 그럭저럭 통한 듯싶었다. 이러다가 대악마고 뭐고 지랄 맞다며 역으로 칼침 놓일 것 같긴 해도.

“그럼 아이들로만.”

“아이들, 알겠습니다.”

“옮겨놔. 탁 트인 곳은 마음에 안 들어.”

“성내 지하 감옥이 비워져 있습니다. 감옥에 분배하여 옮겨 두겠습니다.”

쓰읍. 세계관상 감옥 시설이 좋을 것 같진 않은데. 그런 곳에 아이들을 넣어 두자니 양심이 너무 아프다.

그렇지만 바깥이나 다른 곳은 일이 터졌을 때 휘말릴 가능성이 너무 크니까…… 안전을 생각하면 거기가 낫겠지.

“넌, 제법 말을 잘하네.”

나는 일부러 마력이 넘실거리는 오른팔로 포네글자의 긴 머리카락을 넘겨 주었다.

“…영광입니다.”

그제야 포네글자가 시선을 마주해 왔다. 처음 제대로 들여다본 검정색 눈동자는 문외한조차 쉽사리 읽어 낼 수 있는 야망과 그를 위한 담대함으로 꿈틀거리고 있다.

“네가 누구라고?”

그 시점에서, 나는 그녀의 이름을 다시 물었다.

야심 있는 사람에게 있어 윗사람에게 좋은 쪽으로 이름이 기억되는 것만큼 희열 느낄 일은 드물다 판단한 까닭이다.

“포칼로르입니다, 분노시여.”

“포칼로르.”

그리고 이름을 알면서 되묻는 건 보통 ‘널 좋게 봤으니 기억하겠다’를 명백히 돌려 말하는 거라.

예상대로 포네글자, 아니 포칼로르의 눈빛이 변했다. 적나라한 욕심에 내 가슴이 차가워질 지경이었다.

대체 무엇을 바라서─ 아니, 뻔하지. 힘과 권력, 조금 더 간다면 불로장생 같은 이유밖에 더 있겠어.

그리고 그런 건 내 알 바 아니다. 포칼로르가 야심을 가지고 고향 땅과 사람들의 목숨을 바꿔 먹은 시점에서, 그리고 사람들을 도살하는 광기의 장소를 만든 시점에서 그녀의 야망은 내가 이해할 수 없는 부류가 되었다.

내가 무슨 자격이 있어 이런 말을 하겠느냐마는, 그녀는 대가를 치르게 될 것이다.

지구의 역사 속에 있던 학살자들이 그러했듯이.

“그레첸이시여, 당신께서 즐겁게 즐기실 만한 것으로 안내해 드릴 수 있습니다.”

반면, 내 생각을 모르는 이들은 다른 의미로 엉덩이를 들썩거렸다. 특히 포칼로르와 같은 계급의 나베리우스와 비프론스는 더했다.

공포보다 대악마의 눈에 드는 게 우선인 양했다.

“용사 사냥은 어떠신지요. 도시 내에 용사가 고립되어 있습니다. 동료란 자들도 보잘것없는 벌레뿐입니다.”

다만 나베리우스가 들썩거릴 뿐 입은 열지 않은 반면, 비프론스는 다소 과감하게 나왔다.

제게 유흥이랍시고 용사 사냥을 들이밀다니. 어지간히 눈에 들고 싶은 모양이었다.

“있잖아.”

나는 아이들이 간수들 손에 이끌려 이동하는 걸 확인한 후 혀를 움직였다.

“지금 나한테 질문했어?”

의향을 묻는 것 또한 질문이다. 본인의 실수를 깨달은 비프론스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그, 그것은…….”

“비프론스는 ‘인색’께서 고른 기사입니다. 부디 화를 거둬 주시지요.”

그러나 내가 비프론스의 목을 부러트리기 전, 나베리우스가 선수를 쳤다. 새로운 정보가 들어온 건 덤이다.

“인색이 골랐다고?”

나는 ‘이걸?’하는 눈빛으로 비프론스를 내려다보며 빠르게 사고했다.

칠죄종이야 이미 반쯤 확신하던 부분이니 넘기고, ‘인색이 고른’ 이라.

좋아. 이걸로 72기사가 대악마의 선정으로 탄생하는 걸지도 모른단 사실을 알았다. 혹은 72기사 간에 세력 구도가 있다거나.

당장은 써먹을 수는 없지만 알아서 나쁠 건 없는 정보였다.

“그렇습니다.”

“그래…… 그렇단 말이지…….”

나는 그리 중얼거리며 비프론스에게 천천히 다가갔다. 고개 숙인 그녀를 중심으로 내 걸음이 한 발 한 발, 원을 그리며 돌기 시작한 건 덤이다.

“그런데, 좀 이상하지 않아? ‘분노’에게 화를 거두라는 말은.”

그녀 주위를 빙빙 돌며 그녀의 목을 벨지 말지 치열히 고민했다. 암, 목을 따면 당장의 전력 약화를 꾀할 수는 있지만, 내 입장상 그 뒷일을 고려하는 건 당연했다.

아닌 말로, 내가 비프론스를 죽였을 때 ‘어쩔 수 없지’하고 넘어갈 확률보단 ‘아군이 미쳤다! 죽여!’로 이어질 확률이 더 크지 않은가.

“부디 자비를.”

“악마에게 자비를 구하는 것도.”

물론 상태 이상 무효화 덕분에 마력폭주를 씹어 버리고 스킬을 쓸 수는 있다.

그렇지만 그걸 믿고 질러 보자니 광기 게이지가 영 마음에 걸려서 말이지.

판타지 작품 수백 질 먹어 본 짬밥으로 추론하건데, 게이지 상승 트리거로는 전투 행위가 가장 가능성 높다.

더불어 ‘광기’라는 단어의 뉘앙스상, 게이지가 다 차면 폭주나 광폭화로 이어질 것 같은지라.

이 게임이 여타 다른 게임처럼 폭주나 광폭화에 공치확치피(공격력, 치명타 확률, 치명타 피해)증가만 붙여 줬을 것 같지도 않고.

역시 함부로 움직이기 까다롭다.

“그레첸이시여, 아이들을 다 옮겼습니다.”

그때, 포칼로르가 끼어들었다. 비프론스에겐 타이밍 좋은 일이었다. 나한텐 아니지만.

“그래?”

하, 그래도 아이들 목숨 벌이는 했으니까 지금은 넘길까. 다급해서 아이들만 구했지만 여기 민간인도 아직 여럿 남아 있으니까.

문제는 저들까지 내가 먹겠다 나섰을 때의 반응인데─.

콰과과과과과광!!

별안간 엄청난 폭음이 귓구멍을 때렸다. 귀가 먹먹해질 정도는 아니지만 대신 거리감이 느껴졌다.

최소한, 성 내에서 터진 건 아니다.

“무슨!”

깜짝 놀란 세 사람이 주변 부하들에게 이것저것 지시를 내렸다. 상황 파악을 위한 지시였다.

나베리우스에게서 무언갈 들은 비프론스는 포칼로르와 함께 내 눈치를 보며 장내를 벗어나기까지 했다. 구태여 잡진 않았다. 무슨 일이 벌어진 건진 나도 알아야 했다.

크아아아아아아!!!

그런데 폭음에 이어 들려오는 포효는 대체 뭔지. 그건 무척이나 사납고 거친, 그러나 분명 생명체가 내는 소리였다.

“설마 드래곤이……?”

나베리우스가 내 근처에서 뇌까렸다. 그제야 퍼즐 조각이 좀 보였다.

“애완동물 관리에 실패한 거야?”

아까 애들 보고 드래곤에게 바칠 제물이니 뭐니 하더니만, 그 드래곤에게 뭔일이라도 터졌나 보지.

“그, 큰 문제는 아닐 것입니다. 드래곤에 대한 방비는 철저히…….”

“신성력이!”

나베리우스의 변명은 끝까지 이어지지 못했다. 성에 가려져 도시를 볼 수는 없어도, 하늘 저편에서 내리꽂힌 빛기둥만큼은 잘 보였다.

“…용사?!”

악마가 바글바글한 도시에서 신성력으로만 이뤄진 빛기둥이 생길 일이 뭐가 있을까. 내가 보기에 답은 하나뿐이다.

내 새끼들 잘 살아 있구나! 내 입꼬리가 진심을 담아 올라갔다.

“일이 꽤…… 재밌어졌네.”

이렇게 되면 상황은 좀 달라지지. 나는 광기 게이지와 그것이 미칠 영향에 대한 고민을 버렸다.

인퀴지터가 드래곤 레이드를 시작한 마당에, 내가 가만히 있을 필요는 더이상 없다.

“거기 너.”

“예, 예!”

“포로 목 따는 것 좀 멈추게 해.”

보다 정확히는, 가만히 있어선 안 된다.

암, 레이드에선 쫄이 합류하려 들면 막는 게 정석이다. 이후엔 인퀴지터 쪽 도우러도 가야 하고.

“예, 예? 아, 아아 되물은 게 아닙니다! 당장 따르겠습니다!”

나는 72기사 세 놈 몰래 그 다음 급쯤 되어보이는 놈들로 하여금 피 모으는 작업을 중단시켰다. 그리곤 병사들에게 명령을 내리는 나베리우스 곁에 다가가 어깨동무를 했다.

“가자.”

“…모심에 미흡하여 귀찮음을 드린 것이 아닌지 걱정됩니다.”

“너도 제법 눈치가 좋아.”

“과분한 말씀, 평생 안고 가겠습니다.”

여기서 죽이면 내가 배신했다는 거 알고 간수들이 다시 사람들 목을 벨지도 모르니까, 가면서 죽여야지.

나는 나베리우스의 지휘를 방해하며 포칼로르와 비프론스가 간 길을 따랐다.

그리고 성을 벗어나 도시로 통하는 성벽 입구까지 다다랐을 때.

나는 어깨동무를 풀고 나베리우스를 보내 주었다. 나베리우스가 내가 뒤처지는지도 모르고 포칼로르와 비프론스을 따라잡았다.

그들은 이상을 느끼고 달려온 간부 인사─경비대장이나 뭐 그런 작자들─와 대화를 나누고 있다.

“포칼로르. 상황은 어찌 되었지?”

“나베리우스? 성에 남지 않고 어찌…….”

그리고, 그들과 세 걸음 떨어진 곳에서.

“그레첸께서 동하신 듯─”

서걱!

“─한?”

평소보다도 더 거칠고, 거대한 참격이 내 전방 30m를 베어 냈다.

밤을 넘어 새벽으로 향하는 하늘은 달조차 없이 검어, 솟구치는 핏줄기들마저도 가려 주었다.

「광기 게이지 1%」

칠흑의 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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