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5화 처음부터 (10)
「이건 계약 위반이다.」
계약 위반? 무엇이?
「장난치지 말고!」
너무 크게 소리치지 마. 너무 크게 짖는 개는 오히려…….
* * *
“뭐라고요? 대악마를 깨우─.”
“자세히 말해라!”
데스브링거는 저를 제치고 사내를 명확히 대면하는 이를 보며 혀를 찰 수도 없었다. 평소에도 심통난 아이처럼 곱진 않던 벽창호의 얼굴이 무섭도록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그리고 그는 저 표정이 어느 순간에 나오는지 잘 알았다. 악마가, 그것도 아주 위험한 것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을 때 저 이단심문관은 저런 얼굴을 하곤 했다.
“자세힌 나도 모르오. 엿들은 게 다니까.”
“그럼 아는 것이라도 말해라. 이건 굉장히 중요한 일이다.”
사내는 불쑥 끼어든 이가 다짜고짜 밀어붙이니 조금 떨떠름한 눈치였다.
그러나 생존이란 목적이 있어서인지, 그는 조금 당황할지언정 혀와 입술을 멈추진 않았다.
“내가 들은 건 이 일이 성공할 경우 집 나간 대악마가 돌아온다는 것과…… 용사의 검을 빼앗아 올 수 있다는 것뿐이오.”
용사의 검. 그 단어가 무엇을 뜻하는지는 볼 필요도 없었다. 메이스를 쓰는 용사에게 검이라 할 만한 존재는 단 한 명뿐이었다.
설사 그 검의 성질머리가 고약해서 용사 말을 듣기는커녕 본인이 용사를 휘두른다 해도 말이다.
“…악마기사가 위험해요.”
“당장 그를 찾아야 한다.”
데스브링거는 드물게 인퀴지터와 합치를 맛보았다. 그다지 좋은 일은 아니었다.
이건 계획의 실패를 넘어 그 이상의 불행이 될 수 있는 사건이었다.
“이봐, 무슨 소리야.”
“계획이 어긋난 거야?”
악마기사가 성에서 날뛰는 게 보일 때만 해도 태연했던 두 사람이 심각한 얼굴을 해서일까. 변복을 마친 도적들이 슬금슬금 모여들었다.
눈치로 밥 벌어먹고 사는 이들답게, 그들은 벌써부터 데스브링거의 불안에 전염된 듯한 인상이다.
또한, 그 역시 좋은 소식은 아니었다. 사기 저하는 성공할 수 있는 작전마저도 실패시킬 수 있는 요인이었다. 어떻게든 기세를 되살려야 한다.
그렇지만 어떻게? 대체 어떻게 타일러야 한단 말인가? 당장 그마저도 그 본인의 충격을 추스르기 어려운데?
그는 바짝 마른 입술을 꾹 깨물었다.
악마기사가 해당 계획을 낼 때부터 이게 얼마나 위험한 도박인지는 알고 있었다.
다만 그들을 이끄는 게 악마기사니까, 그들 곁에 그 고강한 기사가 함께할 테니까 위험성을 크게 보지 않았다.
그 남자가 진다는 건 정말, 아주 조금도 상상가지 않았던 까닭이다.
그러나 정말 그랬나? 그 기사가 패배할 가능성은 정말 없었나?
“당장 이 자리를 벗어나야 한다.”
데스브링거는 이런 것에선 저보다 못한다 여겼던 이가 굳게 지시 내리는 것을 보며 시선을 아래로 내렸다.
그는 악마기사의 무력에 의지하는 대신, 악마기사가 준비된 적에게 얼마나 약한지 기억해야 했다.
용을 홀로 사냥해 오고 악마가 드글거리던 도심에서 당당히 걸어오던 모습 대신, 타타라에서 창백한 얼굴로 흰 침대보에 누워 있던 모습을 떠올려야 했다.
그러하므로써, 그가 떨어지는 무력으로도 이 일행에 합류할 수 있던 가치를 다해야 했다…….
“악마기사가 이곳에 올 것을 적이 이미 알고 있었다! 우리의 위치 역시 알려졌을지 몰라! 당장 움직여야 한다! 어서!”
“뭐?”
“이런 씹…….”
“그리고 당신, 가면서 협조 부탁하겠습니다. 나오시죠.”
하지만 그러지 못했다. 그가 보다 면밀히 상황을 파악하지 못해서, 정보를 제대로 다루지 못해서.
그러함으로써 악마기사는 그를 노리던 적의에 생생히 노출되었다. 편린만 전해 들어도 아주 노골적인 악의에, 아무런 대비 없이 그 혼자 보내졌단 말이다.
“그리고, 너.”
이제 어쩌지? 정말 악마기사가 당했으면 어떻게 해야 하지? 그 기사가 기어이 악마에게 먹혀 적으로 돌아갔다면…….
그는, 그들은 대체 어떻게 헤쳐 나아가야 해?
“이봐, 이봐! 이봐, 도적!”
모르겠다. 아무 것도 떠오르지 않는다. 작금의 그들 역시 안전한 건 아닐진데, 일단 그들이라도 목숨을 건사할 수 있게 대안을 짜내야 하는데.
태만함으로 날려 버린 기회가, 그로 인해 결정적인 위험에 빠졌을지도 모를 이가 눈앞에서 어른거렸다.
“정신, 차려라!”
그리고 뺨에서 엄청난 압력이 들어왔다. 이는 부러지지 않았으나 입술이 터지긴 충분한 힘이었다.
“바보 같은 놈! 이곳은 적진 한복판이다! 어떤 변수가 터지고 어떤 역경이 닥쳐 와도 넋을 놓지 마라! 알아들었나!”
이어서 멱살이 잡혔다. 그보다 훨씬 더 밝고 교랑한 녹안은 정면에서 그를 선명히 비추고 있다.
“정신 차렸다면 다음으로 할 일을 말해라! 나는 잠입에 능하지 않고, 이런 건 네놈이 전문이지 않나!”
그곳에 비친 그는 그 자신이 보기에도 정말 멍청해 보였다.
“…넋을 놓기는 무슨! 생각 중이었거든요?!”
“그럼 어서 말해라, 네놈 머릿속에만 넣어두지 말고!”
“아, 알았다고요. 일단 가면서 말해요.”
데스브링거는 평소처럼 이어지는 대화를 통해 차분히 심신을 가다듬었다. 패닉에서 벗어나자 드디어 그가 봐야 할 것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일단 대역 씨는 들어가지 말아요.”
적은 어떻게 악마기사가 올 걸 알았을까. 가능성은 크게 2가지다.
섬에 악마기사가 상륙한 시점부터 대비했다. 두 번째로 비밀 항구의 간자가 그들이 이곳에 올 수 있음을 알렸다.
“이봐요 아저씨. 대악마를 일깨우는 주술 준비는 언제부터 시작됐습니까?”
“그건…… 그제부터였던 것 같은데.”
그제. 이틀 전. 그들이 비밀 항구를 떠난 시점과 비슷하다. 그렇다면 아유 힌을 점거한 놈들은 비밀 항구의 첩자가 보고한 걸 듣고 부랴부랴 준비한 것일 가능성이 크다.
“그러면 우리도 알고 있겠네…….”
작전 회의 참가자 중 배신자가 있든, 엿들었거나 그들이 항구를 떠나는 걸 보고 보고한 것이든, 악마기사와 그들이 함께 떠나는 사실도 알렸을 터.
악마기사 외 침입자의 존재는 이미 밝혀졌다고 무방할 것이다.
“침입자에 대한 대비, 뭐 그런 거 엿들은 건 없어요?”
“그런 건 잘…….”
“그냥 그 비스름한 거라도.”
“없는 것 같은데…… 아, 저 개자식들이 쥐새끼들이 들어와 봤자 좀비밥이 되지 않겠냐던 이야기는 했다만.”
옳거니. 역시 알고 있었군. 다만 알면서도 그들이 이곳에 오도록 한 건…….
“간수들의 기강은 좋았어요?”
“하, 직전엔 해적들이었던 놈들이야. 그놈들에게 기강이란 게 있을 것 같나?”
함정이거나, 해이한 경계의 결과물일 것이다. 예컨대, 그들의 이동 루트를 몰라서 대신 경비만 삼엄토록 했는데 아랫놈들이 ‘아 몰랑’하고 무시한 산물 말이다.
“좋아요.”
그리고 그가 보기엔 후자 같았다. 그들의 연기에 별 의심 없이 넘어간 것도 그렇고, 아까 경계를 서던 놈들의 태도도 썩 좋은 편은 아닌 까닭이다.
물론 그게 그들을 이곳으로 의도하기 위한 함정이었을 수도 있다. 그러나 정말 함정이었다면 도착한 이래 아무 일도 벌어지지 않는 건 어째서란 말인가.
즉, 이건 아무리 봐도 느슨한 규율의 대가다. 그들은 그 말도 안 되는 우연을 움켜쥔 행운아들이고.
“이봐요, 벽창호 씨. 이 사람한테 뭐 걸린 거 없죠? 저주라든가, 마법이라든가.”
“없다. 확신할 수 있다.”
“좋아요.”
마지막으로 길잡이가 되어 줄 양반이 악마추종자의 끄나풀이거나 자신도 모르는 사이 꼬리가 될 가능성도 덜었다.
데스브링거는 자물쇠를 들어 우리를 다시 잠갔다. 안에 있던 사람들이 버림받은 줄 알고 소리를 질렀지만 그들을 배려해 줄 때가 아니었다.
“사람들 깨기 전에 이동합니다.”
“비밀 통로로 갈 건가?”
“왔던 길은 안 가요.”
“그렇다면?”
상대가 루트를 모른다는 게 확실한 사실은 아니다. 하므로 그는 빠르게 왔던 길을 배제했다.
“미안하지만, 당신들에게 모든 정보를 공유한 건 아니라서.”
대신, 만일을 대비해 그 혼자만 전해 들은 은신처의 위치를 떠올렸다. 부디 그 은신처들을 말해 준 재경이나 경비대장이 배신자가 아니길 빌 뿐이다.
“정말 괜찮은 거 맞나?”
“작업 한두 번 쳐봐요? 퇴로는 최대한 많이. 이 짓거리 해 먹다 보면 자주 처하는 일일 텐데.”
“빌어먹을, 네놈보단 더 겪어 봤을 거다.”
“그럼 닥치고 따라와요.”
데스브링거는 다른 이들의 의견을 썩둑 자른 채 사내의 팔을 붙잡아 걸음을 억지로 맞췄다. 피죽도 못 먹은 꼴의 사내는 그의 걸음 속도를 따라오기 벅차 보였으나 한시가 급했다.
“안전한 곳부터 간 후 다음 대책을 세웁니다.”
악마기사가 그때까지 버텨 줄까. 말 못 할 불안은 목구멍 뒤로 넘어갔다.
* * *
룩콴은 둔한 통증과 함께 눈을 떴다. 촤르륵. 가는 사슬 소리가 그녀의 귓가에서 메아리쳤다.
“……!”
동시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그녀의 머릿속에선 정신이 점멸하기 전 사건이 빠르게 나열되는 중이다.
분명 그녀는 악마기사를 두고 뒤로 물러났고, 경비를 피해 집무실 같은 걸 뒤져 보려 했다가…….
“드디어 깼니, 키티?”
그녀는 인간을 한낱 짐승으로 격하시키는 멸칭을 두고 이를 악물었다. 상황은 볼 필요도 없다. 암, 그녀의 앞에는 야바드인이라면 다섯 살짜리 아이도 알고 있을 얼굴이 있지 않은가!
“해적왕……!”
바닷사람 특유의 그을린 피부와 잘려 나간 왼쪽 귀. 왼편 두피에 그어진 흉터로 인해 옆을 싹 밀어 버린 머리카락.
정체는 명백했다. 어미가 임신 사실을 조금만 빨리 알았어도 바로 낙태해서 삶아 먹었을 마귀 새끼, 비푸릿이었다.
“네가 먼저 일어날 줄은 몰랐는데, 그래도 상관은 없겠지.”
가증스러운 변절자놈에게 기어코 잡혔나. 그건 아무래도 좋다.
어차피 죽음을 각오하고 합류한 길이었다. 중요한 건 저 개자식의 돛을 찢어 버릴 수 있는가 없는가였다.
그리고 저 망할 악마의 돛을 찢어 버릴 수 있는 사람은 한 명뿐이었다.
“기사님을 찾기라도 하는 모양새네.”
악마기사는, 바다 괴수를 찢고 배 몇 적을 침몰시켰던 그 고아한 괴물은 지금 어디로 갔나. 설마 그도 실패했는가?
“네가 찾는 기사님은 저기 있단다.”
그녀가 손짓하자 누군가 다가와서 얼굴을 잡았다. 고개라도 강제로 틀려 한 모양인데, 그녀는 샤기족이었다.
인간종 중에서 신체 능력 하나만은 가장 월등한 샤기족이란 말이다.
콰직!
하여 그녀는 손아귀를 거칠게 뿌리치고 역으로 상대의 손을 콱 깨물었다. 건틀릿 같은 것을 끼고 있지 않았던 모양인지 살갗과 근육이 이빨에 꿰뚫리는 것이 느껴졌다.
“끄아아악!”
비명 소리가 터져 나왔다. 시종일관 자애롭다는 양 역겹게 웃던 비푸릿의 표정이 서늘해졌다.
“치워.”
그녀의 한 마디에 무언가가 휘둘러지는 소리가 났다. 퍼억! 두개골 깨지는 소리와 핏줄기, 혈향이 화악 퍼지면 더이상 비명 소리는 없다.
털썩.
룩콴의 발치에 잘생겼었을 청년의 시체가 널브러졌다.
“잡아.”
그것에 놀랄 겨를도 없었다. 전보다 더 우악스럽고 강경한 손이 그녀의 머리통을 잡았다. 이번엔 저항할 수 없었다. 힘의 차이가 너무 났다.
“자, 잘 봐야지. 널 잡아드실 기사님인데.”
그녀는 결국, 억지로 고개를 틀게 되었다. 예상은 했지만, 강제로 보게 된 방의 한편에는 아주 끔찍한 의식이 벌어지고 있다.
“문어랑 붙어 먹었을 새끼……!”
주위에 쌓아 올려진 시신과, 그 고깃덩이에서 흘러나오는 핏물, 그 핏물을 받아마시며 계속해서 불길한 빛을 흘리는 마법진이라니.
하물며 그 마법진의 중심에는 하루 동안 제법 익숙해진 얼굴이 있다. 그리도 믿고 믿었던 악마기사였다.
“무슨 짓을 하는 거냐!”
“본래 있어야 할 자리로 돌려보내는 중이지. 그릇은 그릇일 뿐, 중요한 건 내용물이지 않니. 그릇이 주가 되어선 안 되는 법이야.”
내용물? 그릇? 무언가 감이 잡히면서도 온전히 알아듣기는 어려웠다. 마법에 대한 지식은 마탑의 전유물로서 민간에 전해지는 경우가 드물었으니까.
그렇지만 저것이 결코 좋은 일이 아니란 것만은 확신할 수 있다. 찰캉! 룩콴의 몸이 거칠게 흔들렸다. 그러나 근 190의 신장도 족쇄와 쇠사슬을 이겨 낼 수는 없었다.
“걱정 마렴. 너는 많은 걸 알 필요 없어. 그저 저 육체의 진정한 주인이 깨어나거든, 그분의 여흥으로서 죽어 주면 돼.”
빌어먹을, 그 말을 듣고도 누가 가만히 있을까. 룩콴은 저항의 강도를 더 올렸다. 그러나 수갑과 머리를 붙잡은 손길은 그 어떤 반항도 성공으로 이어 주지 않았다.
“그보다 참 아쉬워. 대악마의 그릇만 아니었어도 곁에 두면 참 좋을 얼굴인데…….”
“늙어 처먹은 주제에 어린 남자를 밝히니 참 좋겠군.”
곱고 잘생긴 남자는 죄다 잡아가 제 침실에 끌어들이는 만행은 이미 이 땅에 자자하다. 그들이 조금만 실수해도 죽어 나간다는 것 역시.
룩콴은 경멸을 담아 침을 뱉었다. 망할 마귀 새끼의 얼굴까진 못되어도 옷자락에 침이 튀었다.
“감히…….”
바스락.
비푸릿의 눈이 회까닥 돌아가기 직전, 얇고 바스러진 기척이 일었다.
회색과 검정색, 두 가지로 나뉘어 있던 머리카락이 오롯이 검정색으로 물든 건 바로 다음 순간이었다.
일으켜 세워지는 상체에 맞춰, 뿌리부터 머리카락의 끝까지. 물에 퍼지는 잉크 방울처럼 까만 흑색이 백과 흑의 경계에 걸쳐져 있던 색을 모두 잡아먹었다.
“아아, 드디어.”
마치 악마가 그를 지배한 것처럼.
“72기사 중 하나, 포칼로르가 ‘분노’를 배알합니다.”
룩콴은 괜히 염색약을 검정색으로 했다고 생각했다. 이 땅에 가장 많은 머리색이 검정색이어서 고른 색이었건만, 하필 이 타이밍에 착색이 완료되다니.
“제물을 준비하였으니 마음껏 탐닉하시지요.”
…그런데 정말 착색일까? 염색약이 효력을 발휘하기 시작할 시점은 지나도 한참 지났다. 마법이 잘 안 듣는 체질이었어도 이미 색이 바뀌고 남았을 때였단 말이다.
한데 깨어나는 타이밍에 맞춰 머리색이 변한 게, 정말 그 여파일까?
“아.”
그러던 찰나, 깨어난 이가 드디어 첫 소리를 내었다. 갓 태어난 아이처럼 무력하고 죽어 가는 이의 단말마처럼 짧은 소리였다.
이어 철갑에 둘러싸인 팔이 올라가며 머리를 짚었다. 골이 당길 때 으레 하는 동작이었다. 허공을 응시하는 막연한 시선이, 구겨진 눈살이 그 추측을 좀 더했다.
“혹 머리가 아프신지요. 강제로 깨어나신 여파일 수도 있으니 진찰 좀 해보겠습니다.”
룩콴이 미처 신경 쓰지 않았던 한쪽 벽면에서 누군가가 튀어나왔다. 그림자처럼 서 있던 그것은 누가보아도 악마추종자란 걸 알 수 있는 차림새였다.
“일단 제 손을 잡고 일어나시─!”
푸욱!
“컥!”
악마추종자가 악마기사에게로 손을 뻗어 부축을 시도했을까.
그것을 잡고 일어남과 동시에, 악마추종자의 등판을 뚫고 무언가가 삐죽 나왔다. 피 묻은 칼날이었다.
장내의 모든 이가 몸을 쭈뼛 세웠다.
“있잖아.”
그리고 그 속에서 주도권을 손쉽게 가져간 이가 드디어 입을 열었다.
“내 몸에 남이 손 대는 걸 내가 별로 안 좋아하거든.”
우습게도, 참으로 나긋나긋한 음성이었다.
“그러니까 다음부턴 주의해 줄래.”
고작 하루뿐이지만, 악마기사가 절대 저리 말할 일 없음을 맹세할 수 있을 만큼 나긋나긋한 음성 말이다.
“흐응.”
칼날이 뽑힘에 따라 악마추종자의 몸뚱이가 바닥으로 추락했다. 룩콴의 희망도 마찬가지였다.
저 마귀 새끼들이 무슨 짓을 저질렀는지는 몰라도 악마기사는 더이상 그들의 편이 아니게 됐다. 그들에게 나아갈 활로는 더이상 없을 것이다.
“대, 대악마시여, 왜…….”
죽어 나간 악마추종자가 이전까지만 해도 숨죽인 채 벽 앞에 서있었듯이, 비슷하게 대기하고 있던 누군가가 입을 열었다.
그것에 악마기사의…… 아니 그 몸을 차지한 것이 고개를 기울였다.
“지금 내게 질문한 거야?”
이 와중에 목소리는 참 좋네. 그녀는 체념한 채 가벼운 농담거리나 찾았다. 빈말은 아니었다.
지금까지야 목소리 속에 담긴 지글지글한 감정과 첨예하게 벼려진 살의 따위가 먼저 다가오는 통에 목소리를 제대로 인지할 일 없었지만…….
“재밌네.”
그 모든 것이 싹 걷힌 목소리는 제법 다정하고 부드러운 미성이 맞았다. 목소리 하나만으로 사람의 호감을 살 수 있을, 그런 류의 것.
신경질이 아로새긴 주름과 근원 모를 분노가 박아 넣었을 그늘이 사라진 얼굴도 돌아보면 비슷한 느낌이었다.
창백한 뺨에 더없이 맑고 해사한 미소가 어리니 참 앳되고 수려한 청년만 그 자리에 남아 존재했다.
악마추종자를 찔러 죽이며 뺨에 튄 피만 아니었다면 목가적인 얼굴이라 평했을지도 몰랐다.
“부, 부디 용서를.”
“난 관대하니까, 그래. 받아 줄게.”
“아……! 감사합니다, 감사합─!”
그렇지만 그런 것은 결국 겉껍데기에 불과하다.
푸욱!
“받아 주고 말고.”
“컥!”
또 한 명을 찔러 죽인 이가 나긋나긋한 미소를 핏물에 절여 버린 채 주위를 돌아보았다. 그의 손에 들린 단검에선 벌건 살점이 얄팍하게 묻어 나온다.
모순되어서 더없이 끔찍한 광경이었다. 생리적인 공포가 송송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그러니까, 음. 네가 뭐랬더라…… 포르투갈?”
“…포칼로르입니다.”
“그래, 포칼로르. 혹시 화났어?”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이 성, 이 도시에 있는 모든 것이 그레첸을 위해 준비된 제물인 것을요.”
“그래, 그래…….”
그사이, 악의의 집합체가 만족한다는 듯 더욱 곱다랗게 웃었다.
“그럼 이것도?”
그리고 끝내, 그것의 시선이 그녀에게 닿았다.
“물론이지요.”
죽음이 정말 코앞에 다다랐음이 느껴졌다.
“흐응, 고양이네?”
다가온 이가 왼 손등으로 그녀의 오른쪽 뺨을 살짝 훑었다.
바란다면 아까처럼 손을 씹을 수도 있겠으나 룩콴은 차마 그러지 못했다. 무형의 기가 그녀의 몸을 억누르고 있는 기분이었다.
가만히 있는 것 외에 할 수 있는 게 없다. 공포가 그녀의 핏줄기를 타고 흐르며 온몸을 장악하고 말았다.
“이 성도 나를 위한 거랬지?”
“그럼요.”
“그래, 그렇단 말이지…….”
비푸릿과 저것이 대화를 나누었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는 글쎄. 고개만 들면 마주칠 얼굴이나 차마 바라볼 용기는 없었다.
“난 고양이가 좋아…… 그러니까 풀어 줘.”
그리고, 난데없는 명령이 떨어졌다. 죽음을 기다리던 심장이 다른 고동으로 뛰었다.
“예? 푸, 풀어 줍니까?”
“…지금 내게 질문한 거야?”
“당장 풀어 드려라.”
짤랑, 하고 열쇠가 다급히 족쇄에 꽂혀 들었다. 그와 함께 드는 건 ‘혹시’란 이름의 여린 희망이라.
룩콴은 악마기사의 얼굴을 서둘러 올려다보았다.
“술래잡기야, 고양아.”
기대는 곧바로 꺼꾸러졌다.
“30초를 기다리는 동안 최대한 멀어지지 않으면…… 죽여 버릴 거야.”
그곳에는 처음부터 검고 불길한 기운을 두른 악마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