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4화 처음부터 (9)
안 바르자니 반반 머리는 눈에 잘 띄는 게 사실이고, 바르자니 컨셉이 애매해서. 나는 필사적인 연기 끝에 짜증을 한가득 담은 상태로 염색약을 머리에 발랐다.
나와 눈높이가 맞는 게 룩콴뿐인지라, 결국 잠시 멈춰야 했단 건 여담이다. 데브가 아주 안도의 숨을 내쉬더라.
“약은 30분 정도 후부터 효과가 날 거예요. 물든 후에는 대략 동틀 때까지 지속될 테고. 아, 하는 김에 옷도 갈아입죠.”
“그런데 기사님은…….”
그들은 이왕 멈춰 선 김에 변장에 쓰일 옷으로 갈아입기도 했다. 순식간에 노예 넷, 간수 셋이 탄생했다.
나? 나는 절대 안 했다. 염색이야 안전권이지만 노예 변장이나 악마추종자 겸 간수 변장은 악마기사 캐입 문화의 붕괴였다. 특히 후자가.
“그럼 예정한 대로 저희가 아래쪽을 맡겠습니다.”
어쨌거나 마지막으로 미뤄 뒀던 작업마저 끝났다. 우리는 서둘러 비밀 통로의 끝으로 이동해, 각자 맡은 임무를 상기했다.
인퀴지터와 데브 포함 도적 4명은 도시를 돌아다니며 제물을 바치는 곳 및 마굴을 찾아 처리. 나와 룩콴은 비푸릿을 포함한 대가리들 죽이러 본성 탐색.
아주 완벽한 역할 분담이었다. 비록 표적의 정확한 위치를 모르고, 각자 도시나 성 내부가 어떻게 변했는지 알지 못하는 점을 더해야겠지만 말이다.
“기사님은 마법이 잘 안 듣는 체질이신가 보네요. 머리색이 아직도 안 변한 걸 보면.”
데브는 이쪽을 따라오고 싶어하는 눈치였지만, 한 명 따라올 거면 지리를 잘 아는 토박이가 낫다.
해서 내게 붙게 된 룩콴이 조용히 내게 말을 걸었다. 내 답을 바라는 건 아닐 테고, 그냥 혼잣말에 가까운 물음이 아닐까 싶다.
사실 나도 궁금한 부분이기도 했고.
진짜 나 머리색 왜 안 변함. 김치만두는 시간 되니까 모근부터 슈루룩 적갈색이 내려오던데.
“바로 가죠.”
어쨌거나 그녀는 비밀 통로 밖으로 나를 안내했다. 재경과 경비대장이 머리 맞대고 만든 지도 따윈 들여다보지도 않았다.
이미 머릿속에 있다는 양 복도를 요리조리 올바른 길을 찾았다.
“도시가 몰락하기 전에 여기에서 근무해서, 본성 지리는 좀 알아요.”
딱히 물어보진 않았지만, 알맞은 잡담이다. 나는 또 완전기억력? 그런 건 줄 알았지.
“물론 이 빌어 처먹을 악마놈들이 바꾼 것까진 모르겠지만 말이에요.”
그사이 룩콴은 잠긴 듯한 문을 손쉽게 따내더니 나를 그 안으로 이끌었다.
스륵. 문이 소리 없이 잠기고, 곧 발소리가 우리가 있던 복도로 이어졌다.
또각또각.
색적스킬 덕에 무언가가 다가온다는 사실은 알았지만 이런 식의 회피법은 또 처음이다.
물 흐르듯 숨은 후, 발소리가 지나자마자 방을 떠나는 솜씨가 한두 번 해본 이의 솜씨가 아니었다. 뭐, 거기에 문제 삼을 생각도 없고, 도움 받는 이상 엄지만 추켜세워 주고 싶지만.
“이런.”
그렇지만 그녀가 아무리 뛰어난 도둑이라도 순찰 경로나 시간을 조사하지 않은 채로 성을 태연히 돌아다닐 순 없었다.
우리는 사슬을 달고 있는 하인들을 피해 방에 숨어들었다. 우리 둘 다 체격이 장난 아닌데, 그걸 한 번에 받아 준 장롱에 치얼스다.
우리보다 몇 발작 늦게 들어온 이들이 시트를 정리하기 시작한 건 절대 치얼스가 아니고. 여기 쓰는 방이었냐?
“오늘 비푸릿 님 방 담당이 누구랬지?”
“없어. 어제부로 아무도 올려 보내지 말랬잖아. 못 들었어?”
“어, 어. 정말이야?”
그래도 얻을 건 있었다. 하인들은 방을 정리하며 떠들기 시작한 덕이다.
물론 말이 수다지, 언제 날아갈지 모르는 목숨을 두고 오늘은 그래도 버티겠구나- 하는 한탄에 가까웠다. 슬픔과 공포, 체념에 눅눅히 젖어 든 목소리가 먼지털이 소리에 섞여 들었다.
그쯤 되어서 나와 룩콴의 시선이 맞아들었다. 합을 맞추게 된 지 이제 하루 반나절 됐지만, 그 시선에 담긴 의미가 뭐였는지는 말없이도 알 것 같다.
룩콴의 손가락이 쫙 펼쳐지더니 엄지부터 검지, 중지 순으로 천천히 접혔다.
“청소하러 갔을 때 또 시체가 있는 건 아니겠…….”
그리고 마지막으로 소지가 접혔을 때.
덜컹!
“……!”
“끄─!”
우리는 장롱을 박차고 나가, 하인들을 하나씩 제압했다.
시꺼먼 남정네 하나에, 시꺼먼 샤기족 하나가 덤벼들자 두 사람 다 까무러칠 듯 벌벌 떨었다. 솔직히 기절하지 않은 게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나였으면 절대 기절했어.
“쉬잇. 우린 적이 아니에요.”
내가 비명 소리 나가지 않게 입을 단단히 틀어막은 동안, 룩콴이 살살 하인을 달래기 시작했다.
“비푸릿과 악마들을 죽이고, 성을 탈환하기 위해 온 사람들입니다.”
그건 꽤 효과가 있었다. 하인들의 눈이 휘둥그레지더니 소리를 죽였다. 비명 지를 기색은 더이상 아닌지라, 나는 입을 막은 손에 살짝 힘을 뺐다.
“그럼 제가 손을 풀어도 될까요? 비명 지르지 않겠다고 약속해 주세요.”
거기에 약속까지 받아서야. 하인 두 명이 우리 손에서 풀려나, 숨을 약하게 몰아쉬었다.
“두, 두 분은…….”
“우린 바깥에서 왔습니다.”
이런 부분은 나보단 룩콴이 더 알맞는 인사겠지.
나는 그것을 일찌감치 받아들이고 방문 근처에 섰다. 설득하는 사이 누군가 접근할지도 모르니 망을 서기 위함이었다.
대화 소리를 최대한 무시한 채 복도에 귀를 기울이면 아직까진 적막하단 감상이 먼저 든다.
“…래서 비푸릿의 위치라거나 그외 중요한 인물들이 머무는 장소를 알고 싶은데. 아니면 무언가 벌이고 있는 곳이라거나.”
그사이 신문은 계속되었다. 주저하던 하인들이 끝내 눈을 질끈 감고 말을 잇기 시작한 건 약 1분 뒤였다.
우리가 우선해서 얻어야 할 정보들이 술술 나오기 시작했다.
“한 놈쯤은 이쪽에 더 데려올걸 그랬군요. 그렇다면 전령을 보내서 다른 쪽에도 알릴 수 있었을 텐데.”
글쎄다. 그건 전령 역할의 명줄이 너무 위험해서 어렵지 않았을까.
우리가 운이 좋아서 마주치지 않았을 뿐, 이곳엔 악마들도 돌아니고 있을 가능성이 컸다. 그 반례가 지나오던 길 곳곳에 묻어나 있던 정체 모를 오물이고.
“일단 비푸릿은 성주가 머물던 방에 그대로 머물고 있어요. 그곳 위치는 제가 아니 경비만 어떻게 뚫으면 될 것 같아요.”
생각보다 일이 술술 풀리는데. 나는 그것에 약간의 꺼림직함을 느끼며 반대되는 감상도 살짝 품었다.
대략 ‘가는 길이 이렇게 쉬우면 보스가 더럽게 어렵단 소린데. 망했네.’ 정도의 사고였다. 아니면 뒤통수 후릴 무언가가 준비되어 있는 건 아닌가 하는 불안감 같은 거.
그렇지만 불안하다고 진입 안 할 수야 있나. 헤딩팟 주제에 빼기만 하면 그 던전은 영원히 클리어할 수 없다.
“이동한다.”
“안내하죠.”
하인분들에게 얻을 걸 다 얻었다 판단한 우리는 바로 자리를 떴다.
협조해 준 이들에게 약간의 성의─라고 해봤자 식량 조금이다. 뺨이 너무 홀쭉한 게 신경 쓰이더라고─를 보인 건 덤이다.
“역시 상층 경비가 꽤 삼엄하네요. 이 위부턴 벽을 타고 오르지 않는 한 경비와 마주칠 수밖에 없겠어요.”
각설하고, 얻은 정보를 토대로 우리는 성주방을 노렸다. 성주방과 연결된 비밀 통로가 없던 건 아니지만 그쪽은 확인해 본 바, 이미 철폐된 후였다.
이젠 진짜 쌩으로 돌파하는 수밖에 없다.
“어떻게 하시겠어요?”
글쎄. 잠입 및 암살 게임도 아니겠다, 기도비닉으로 성주방까지 다다를 것을 기대했던 적은 없지만…….
나는 간질간질한 오른팔을 두고 주먹을 쥐락펴락했다.
“네 몸은 네가 챙기도록.”
“네?”
“여기서부턴 나 혼자 간다.”
지도는 나도 봤고, 성주성 위치도 어딘지 아니 길잡이는 더이상 무용하다. 반면 룩콴은 전투에 썩 도움이 될 것 같진 않아서 말이지.
룩콴이 있다고 비푸릿 암살이 정말 은밀하게 이뤄질 가능성도 적어 보인다. 암, 상대는 악마숭배자와 손잡고 도시를 먹은 놈이 아닌가.
분명 대비를 해놨을 테고, 그건 소요 사태로 번질 거다. 하면 난전에 불리한 룩콴은 두고 가는 게 맞지.
“…알겠습니다.”
다행히 룩콴은 고집이 센 부류도, 자신이 꼭 함께여야 한다고 여기는 부류도 아니었다. 그녀가 순식간에 어둠에 녹아들었다.
이제 내 타임이었다.
만두들이야 어차피 도시 내에서 임무를 수행 중이겠다, 성에서 소란 끈다고 피해 가진 않겠지.
* * *
“나리가 드디어 일 친 모양인데요.”
성 곳곳에서 이는 횃불은 이변을 알리기에 딱이니. 노예 우리로 다가가던 데스브링거는 혀를 끌끌 찼다.
“비푸릿을 찾으신 모양이군.”
“찾기 전에 그냥 들이 엎은 것 같은데…….”
“방금 뭐랬나?”
“댁 옷이나 어서 갈아입으라고요. 노예인 척은 더이상 할 필요 없으니까.”
“…그러지.”
그는 벽창호를 말로 내쫓곤 바로 노예 우리에 달라붙었다.
“당신들은……?”
“잠시만 기다리십쇼. 구하러 왔으니까.”
아무렴 탈출하던 노예와 그걸 붙잡은 간수인 척 연극까지 해서 겨우 알아온 위치고, 경계를 서던 이들에겐 수면제 폭탄을 날려 가며 가까스로 번 시간이었다.
멍 때리며 보낼 시간은 없다. 수면제 효력이 언제 끝날지 몰랐다.
“우리를 구하러 왔다고?”
“모든 사람을 구하는 건 당장은 무리입니다요오.”
잠입에 능한 그들마저도 도시 내에 돌아니던 좀비를 피해 조용히 움직이는 게 힘들었다. 여기서 사람들이 더 더해지면 절대 무리다.
그는 그 지점을 명확히 하며 설명을 시작했다. 다행히 노예로 잡힌 이들 중에선 리더라 할 만한 이가 있어 대화가 술술 풀렸다.
“해서, 부탁드리려는데…….”
“걱정 말게. 이 망할 악마들을 몰아내기 위해서라면 모든 협조할 테니……!”
“좋아요. 그럼 길안내를 위해서 이쪽 사람과 위치를 교대할 사람이 필요한데…….”
“내가 하지.”
데스브링거는 리더역을 자청하던 이를 힐끔 살폈다. 면도할 시간조차 없어 진흙이 엉겨붙도록 내버려 둔 수염과 떡진 곱슬머리라.
전형적인 야바드 지방 사람이라 따라하긴 어렵지 않을 것 같다. 그 증거로 노예 옷을 입고 있던 이 중 체격이 가장 비슷한 이가 벌써 변장을 준비하고 있었다. 수염만 붙이면 별 티도 안 날 거다.
“좋아요, 저 양반이 당신인 척할 겁니다. 주변 사람들도 협조 부탁드립니다.”
“걱정 마세요.”
“그보다, 아까 의식 장소를 불태운다고 했던가?”
철컹.
데스브링거는 우리의 문을 기어코 따내, 열었다.
“그런데요?”
“그것보다 더 큰 문제가 있네.”
“뭐죠?”
“놈들이 드래곤을 소환했어. 그뿐만 아니야. 무언가, 성에 무언가 의식을 추가로 벌이고 있네. 듣기로는 어떤 대악마를 일깨우는 주술이랬는데─.”
그의 손에 들려 있던 자물쇠가 바닥으로 툭 떨어졌다.
“네?”
* * *
“적─ 커흡!”
소란스럽게, 그러나 조용하게.
나는 복도에 있던 모든 작자를 죽여 나가며 천천히 전진했다. 성주방이 있는 복도가 내 마지막 길로가 된 건 30분도 채 흐르지 않은 후였다.
“무기 들어! 적이다!”
이미 늦었다. 나는 성주방 앞에서 경계를 서던 놈의 목덜미를 잡아 우그러트렸다.
슬슬 시신이 발견되며 소란이 이는 듯하지만, 그건 어쩔 수 없다. 내게 이목이 쏠리면서 도시에 드리워진 감시의 눈이 느슨해지길 비는 수밖에.
“비푸릿 님을 당장 피신─.”
내 발이 복도를 수직으로 가로지르며 순식간에 한 놈을 벽에 박았다.
마력을 머금은 발이 직격하자 허리가 꺾이다 못해 벽에 처박히고, 뼈와 내장이 으스러지다 못해 살갗이 터져 일부 피를 쏟았다.
그렇지만 잔인이고 자시고 아직 세 놈 더 남았다. 내 손이 다가오던 검을 쳐내고 그놈의 목을 역으로 잡았다. 우득 소리와 함께 부러진 목뼈는 그 육신을 거대한 고깃덩이 내지 무기로 만들어 주었다.
퍼억!
목 부러진 육체가 허공을 가르자 두 놈이 맥없이 튕겨져 나갔다. 내가 다음으로 할 일은 고작 넘어진 두 놈의 목에 칼을 박는 것뿐이었다.
콰앙!
지원이 오기도 전에 성주방을 향하는 문이 열렸다. 그리고…….
“이런, 이런.”
짝. 짝. 짝. 공기 터지는 듯한 박수 소리가 암흑 속에서 흘러 나왔다. 불길함이 내 발목을 붙잡았다.
“생각보다 이른 방문이군. 제물이 이리로 올지도 모른단 소식은 그제 들었는데 말이야.”
나는 그 직감을 굉장히 신뢰했기에, 당장 발을 떼려고 했다.
암, 배신자가 벌써 꼬질렀든 뭐든 간에 상대방은 이미 오래전에 내 침입을 알고 있었다. 하물며 도망가는 대신 평상시를 연기하면서까지 내가 오길 기다렸고.
그건 결코 좋은 소식이 아니었다.
“그래도 완성은 되었어.”
그러나 이미 늦은 모양이다. 발밑에서부터, 저 복도까지. 성의 벽면마저 훑듯이 붉고, 또 붉은, 그리하여 기어코 먹색으로 변질될 것 같은 빛이 흐르기 시작했다.
하수도 때와 비슷했다.
“나도는 건 그만할 때야, 그레첸.”
시발, 이걸 2번이나 당하네. 그나마 이번엔 사슬 튀어나오지 않는 게 위안인가? 응?
“이렇게까지 해줬는데, 설마 그릇을 못 삼키는 건 아니지?”
위안은 무슨. 타의로 움직임을 속박당하는 건 두 번째라도 기분 더러웠다.
하물며 그때는 사슬이라는 명확한 물질이라도 있었지, 지금은 보이는 게 없는데 결박 당하고 있지 않은가. 아주 불쾌한 일이었다.
“깨어나면…….”
털썩, 하고 기어코 무릎이 꿇렸다.
“네놈부터 다져 주겠다.”
눈꺼풀을 내리지도 않았건만, 흘러내리는 물감인 양 새까만 칠흑이 제 시야를 가렸다.
‘재미없는 짓을 하네.’
「저주!」
쨍그랑
문득 무언가 깨지는 소리가 어렴풋이 들려왔다. 암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