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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인공이 컨셉충이면 곤란한가요-73화 (73/389)

◈73화 처음부터 (8)

이전까지 우리의 이동 방식…… 그러니까 이동 장소를 결정하는 방식은 이랬다.

바람손이 말했던 위치를 최종 목적지로 잡되, 이동하는 과정에서 산채를 찾으면 거길 겸사겸사 잡고 간다.

그러나 새로 밝혀진 비푸릿의 위치는 과장 좀 더해서 바로 코앞이었다. 사람들의 숨통을 트기 위해 돌아갈 필요 따윈 조금도 없다.

다시 말해, 떨거지 잡느라 돌아가느니 대가리 치는 게 더 효과적인 거리라 이 소리다.

뭐, 100% 확신할 수는 없다니까 그곳에 꼭 비푸릿이 있진 않겠지. 그렇지만 어차피 들렀을 경로긴 매한가지다.

작정하고 준비한 다음으로 간다 해서 손해는 없다. 비푸릿이 없다고 해도 성은 성이고, 그런 성을 공략하려면 준비해야 하긴 매한가지니 말이다.

“진짜 바로 가실 건 아니죠?”

그렇기에 나는 우리끼리서 다짜고짜 닥돌하자는 이야기를…….

“새벽에 출발한다.”

냈다. 농담이 아니라 진심으로.

“상대는 성 하나를 점거한 상태라고요! 진짜 이대로 가실 겁니까? 본대는요!”

당연히 데브가 기겁했다.

“저, 악마기사. 제가 보아도 이건 본대와 합류해 싸우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본대와의 거리도 이제 이삼 일 거리입니다.”

“기사 나리, 조금만 인내심을 가져 보죠. 어떤 악마가 버티고 있을 지 모르잖습니까요. 물론 탈출한 자들이나 잠입시킨 자들로 하여금 얻은 정보들이 있긴 하지만, 그것도 일부에 불과하고…… 돌다리도 두드려 보고 건너야 하는 판국에 막무가내로 가는 건 좀…….”

나는 합당한 의견을 제시하는 이들을 보며 속으로 긍정했다.

그래, 나도 그게 정석이라는 건 알아. 이건 따지고 보면 공성전 콘텐츠니까.

그리고 보통의 공성전은 지형과 쪽수, 무기 빨이다. 파티로 비벼 볼 그런 게가 아니란 소리다.

“이 순간에도 악마가 태어나고 있겠지. 그런데도 내게 하루 이상의 시간을 내주라 말하는 건가?”

그치만 들어봐. 놈들이 악마를 소환했고, 할 거라 쳐.

또 하급 악마가 주력이라 쳐보자. 그 말은 즉슨 물량전이란 가겠단 소리겠지? 그리고 물량전은 양측 병력 소모가 심하지?

근데 우리가 동원할 병력이 많니 뭘 하니. 거기에 쟤네가 악마를 소환한다는 건 결국 섬주민을 제물로 갈갈한단 소리와 동일하다.

싸움이 길어지면 길어질수록 희생되는 목숨은 더 커진단 소리다! 그리고 이런 퀘스트에서 민간인 사망 증가는 뭐가 될 수 있다?

GAME OVER가 될 수 있다…….

크라켄 같은 레이드 보스급을 부른다면 그건 그것대로 문제였다.

내가 나서서 상대한다고 쳐도 휘말려 죽게 될 모습이 벌써 눈에 선했다. 산채에서 몇 번 봤던, 새로 발명된 듯한 투척형 저주 항아리가 나와도 마찬가지일 테고.

“하지만…….”

“나약한 것들은 방해다.”

즉, 돌아돌아 말했지만 본대에 합류하길 기다려 봤자 피해만 더 확대된단 소리다. 내 말은.

그리고 아군 피해가 너무 크면 게임은 이렇게 말하겠지. ‘어림도 없지, 다시!’

허, 그 꼴이야말로 어림도 없다. 절대 원트해.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정면으로 가면 나리라도…….”

물론 이 인원으로 갈 경우도 단점이 크긴 하다. 바람손은 무력이 안 되니 무쓸모임은 둘째 쳐도, 정면 돌파는 나라도 무리거든.

“아크메이지가 네놈에게서 무엇을 본 건지 모르겠군.”

그렇지만 정면 돌파가 아니라면? 잠입 및 암살이라면? 이건 꽤 승산이 있다고 본다.

아무렴, 도망쳐 나왔다지만 전 아유 힌 관련자(고위)들이 여기에 있는데. 설마 그들만 아는 비밀 통로가 하나 없겠어?

“아유 힌의 재경과 경비대장은 어디 있지.”

“예?”

물론 이쪽도 위험성이 따르긴 매한가지다. 걔네가 바보도 아니고 대비는 해뒀을 거 아닌가. 발각이라도 되면 사방이 적이니 도망칠 구석도 없을 테고.

더구나 우리에겐 배신자가 있다. 이 사실을 배신자가 까발리기라도 했다간 그냥 호랑이 아가리로 머리를 처박는 꼴이 될 걸 안다.

그러나 반대로 배신자를 거치지 않는데 성공하면? 비밀 통로라 함은 심장부에서 바깥으로 들키지 않고 도망치는 것을 상정하는 것이니, 반대로 하면 단번에 중추를 꿰뚫 수 있게 된다.

하이 리스크 하이 리턴이라고, 이건 꽤 해볼 만한 도박이라 본다.

“재경과 경비대장은 왜…….”

“비밀 통로……?”

아무렴 수백 명의 사망 확정 대신 4명의 생존 가능성 vs 4명의 사망 가능성 대신 수백 명의 안전 확정이라면 고를 답은 역시 하나지 않을까?

적어도 나는 확정이다.

“나리, 혹시 비밀 통로 생각하시는 겁니까?”

눈치 좋은 데브가 내게 물었다. 이미 확신한 눈치였으므로 굳이 답주진 않았다. 대신 답이나 내놓으라는 듯 녀석을 노려보았다.

“당장…… 당장 안내해드리겠습니다요. 아니지, 아냐. 제가 사람 좀 데려올 때까지 여기서 기다려 좀 주십쇼.”

후드로 인해 그늘진 암록색 눈동자가 반짝 빛났다.

“보안과 잠입은 제 주특기 아닙니까요.”

많이 끌어왔으니, 이젠 진도를 확 뺄 때였다.

* * *

피로도를 위해 자정에는 잠에 들고 싶었다. 당연히 분수에 맞지 않는 바람이었다.

그래도 피로도 일부를 희생한 가치는 있었다.

도시의 책임자, 도시의 뒷골목을 꿰고 있는 정보길드 인원 등을 전부 불러모아 잠입 루트를 따는 데 성공했으니까.

배신자는…… 글쎄다. 보안에는 최대한 신경을 썼다고 생각한다. 계획 짜는 데 도움이 안 되면 토의장에서 배제하다 못해 언급조차 않았으니까.

함에도 우리의 작전이 새어나간다면 그건 어쩔 수 없는 일이 아닐까. 루트 짜는 데 필요해서 데려온 양반이 배신자란 건 처음부터 의미가 없던 게 되니까.

뭐, 어두운 이야기는 그만하고, 우리는 지원도 든든히 받아 냈다.

그도 그럴게, 물자가 부족한 상황이라지만 우리의 성공 여부는 이곳의 목숨과 직결되는 상황이다. 물자 계산을 운운할 수 있을 리 없다.

내가 인벤토리를 위시한 채 털어 가는 목록을 보던 담당자는 다소 죽을 상이긴 했어도.

“해풍이 자네 등을 떠밀길 빌지.”

“하핫, 무운을 빈다오.”

어쨌거나 우리는 우리가 어딜 가는진 몰라도 일단 새벽 출발이란 걸 아는 바람손의 배웅을 받고 떠났다.

바람손이 왜 배웅하냐고? 그거야 당연히 파티 탈락이라서다.

암, 개인 무력도 약해, 장기인 항해도 내륙에선 쓸모없어, 아유 힌 토박이도 아니라서 길잡이로 써먹지 못해.

반면 남으면 항구와 본대 사람들의 완충재는 되어 줄 수 있다. 그가 기용할 이유보다 기용하지 않을 이유가 더 많은데 부득불 데려갈 필요는 그 어디에도 없었다.

“내 몫까지 부탁한다고.”

하물며 본인마저 긍정한 상황에서야. 물론 그가 들은 말은 ‘님 무력 약해서 여기 남는게 좋겠음’ 정도지만.

근데 또 세세한 계획을 모를 뿐이지, 우리가 아유 힌으로 바로 들박할 건 눈치챈 것 같기도 해. 바람손이 나란 사람을 어지간히 파악했어야지.

애초에 새벽에 출발할 거 말도 안 했는데 타이밍 맞춰서 배웅 나온 것도 그렇고.

“바람손 나리가 과연 본대를 잘 상대해 줄까요?”

그렇지만 그것도 이제 이틀 전 일이 되었다. 걱정해 봐야 더이상 의미 없다.

“아크메이지님이 계시니 괜찮을 거라 생각한다.”

“하긴…… 마탑이 껴 있으니 문제가 막 터지진 않겠죠.”

“그보다 나는 이 말들이 신경 쓰이는데. 도착하면 그냥 숲에 풀어주는 건가?”

“그래야겠죠.”

“죽겠군.”

“아무래도 그럴 확률이 높겠지 않겠습니까요. 지금처럼 짐승들이 덤비는데.”

“살았으면 좋겠는데.”

“저는 얘네처럼 악마화나 안 됐으면 좋겠습니다. 어휴.”

참고로 비밀 항구에서 통 크게 내준 말 또한, 숲에 악마화된 짐승이 많다는 이유에서 소모품이 되었다.

본토에서도 비싼 말을, 섬에선 더 비싼 말을 소모품으로 써도 되나 싶지만 현실이 그런 걸 어쩔 수 있나. 시간이 금인데 뚜벅이로 갈 수도 없고.

역시 이 게임은 탈 것 패치가 시급하다. 사실 몇 가지 편의성도. 아니 가장 급한 건 로그아웃 쪽이.

“입 놀릴 여유가 있나 보군.”

아무튼 찔러 죽인 악마의 사체를 옆으로 던지며 말했을까. 내 읊조림에 두 만두가 합죽이를 했다.

“여긴 화장실도 함부로 못 가겠네요.”

그사이 뒤편에 선 룩콴은 내가 뭐라 말하든 너스레를 떨었다. 음, 룩콴이 누구냐고? 이번에 바람손 대신 파티에 들어온 사람이다.

“난 혼자 용변 보러 갈 생각을 한 누님 배짱이 더 놀랍수다.”

룩콴 하나만 있지 않다. 토박이라는 이점과 잠입에 능하다란 이점을 둘 다 잡은 인사로만 몇 명을 더 데려왔거든.

“몸 숨기는 걸로 밥 벌어먹는데 이것 하나 겁내서야 쓰니.”

그러다보니 졸지에 ‘아유 힌 지부’ 정보길드 소속 도적들만 5인이 더 추가됐긴 한데…… 유능하니까 넘기도록 하자.

인퀴지터가 대하기 힘들어한다는 단점도 애교로 넘기고. 맹세한 게 있어서 데브 대하듯 대하지 못하면 된 거지.

검사 1, 성기사 1, 도적 6인이라는 조합도…… 현실 비스름하게 된 상황이니까 망조합은 아니지 않을까?

“잠깐, 흔적이 보입니다.”

“이거 순찰 경로 같은뎁쇼.”

DPS(초당 대미지)는 몰라도 최소한 적의 흔적 찾기는 아주 좋아졌으니까.

“말은 이제 버려야겠습니다.”

순찰 경로까지 있다는 건 목적지가 근처란 소리고, 목적지가 근처라는 건 이제 잠입의 시작이란 이야기다.

하. 이제 진짜 뚜벅이 신세인가. 나는 데브를 보았다. 대충 너도 그렇게 생각하냐는 의미였는데, 그게 또 떨떠름했나 보다.

내 시선을 받은 이가 입술을 씰룩이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철퍽.

늪지대처럼 조성된 땅에 내 부츠가 가장 먼저 내려섰다. 뻘을 걷는 것처럼 푹신하고 질펀한 감각에 눈썹이 절로 뻗댔다.

쿵.

잠입 때문에 천갑옷을 입긴 했지만, 여기서 나 다음으로 무게가 나갈 인퀴지터가 두 번째였다.

도적들이 속속들이 말에서 내려 고삐를 회수하기 시작했다.

“도망가라.”

말들이 자유를 찾아 떠난 뒤의 흔적을 지우는 것도 그들 담당이라. 나는 그들이 자취를 더는 사이 마지막으로 스킬을 점검했다.

물론 별로 의미는 없었다. 전투스킬은 안 찍어도 쓸 수 있고, 체방공 올려 주는 패시브는 이미 다 찍었으니까.

하다못해 치료량과 속도를 올려 주는 것도 다 찍어서 말이다. 남은 건 협상과 색적류인데…….

오기 전 이미 정비했지만 오는 동안 오른 레벨이 하나 있다. 나는 그것을 색적류 스킬에 찍었다.

「침묵의 걸음│올바른 사냥꾼은 자신의 기척을 숨길 줄 안다. 발소리가 더욱더 줄어든다.」

초반엔 의미가 있나 싶어서 마지막으로 미뤄 두려 했던 계열이지만, 지금 상황에선 쓸모 있을지도 모르니까.

근데 이거 정말 효과 있긴 한 건가? 왜 내 귀에는 조금도 발소리가 줄질 않지?

나는 ‘어휴, 시스템 또 일 안하네.’ 따위의 감상을 가지며 슬슬 출발했다.

흑표범 형태의 샤기족─룩콴을 마지막으로 본격적인 잠입의 막이 올랐다. 목적지는 성 자체가 아니라, 성벽 근처 어딘가에 있다는 비밀 통로 입구다.

“놀랍군…… 이런 건 상상도 못 했는데.”

통로의 흔적을 더듬은 도적이 이것저것 치우고 매만졌을까. 금세 입구가 열렸다. 그것을 본 이들 중 가장 날것의 반응은 인퀴지터의 것이었다.

“교단에도 이런 거 한둘쯤은 있을 텐데, 이단심문관이나 돼서 모르시나 보네요.”

같이 움직이곤 있지만 앙금이 완전 사라진 건 아닌지라. 도적 하나가 은근슬쩍 먹이려는 말을 꺼냈다.

“맞다. 들어 본 적 없다.”

“…당당하십니다?”

“합당한 이유가 있으니 안 알려 주신 것일 텐데, 내가 당당하지 않을 이유가 무어 있지?”

“…….”

그렇지만 우리 애가 좀 한결같아야지. 데브가 음소거한 상태로 바들바들 웃었다. 도적들의 대표 격이던─같은 집단이 아닌지라 명령권까진 없어 보이더라─룩콴도 피식피식 웃는 중이다.

“자자, 쓸데없는 데 힘 빼지 말고.”

그녀는 물 먹이려다가 역으로 먹은 이의 등을 툭툭 치며 입구를 가리던 작업을 마무리했다.

「아유 힌: 성벽 개구멍」

「❖ 자크라티를 겨냥하는 송곳니

∎ 적에게 점령된 아유 힌으로 이동

∎ 아유 힌 해방하기

∎ 보너스: 비푸릿 살해」

드디어 퀘스트도 갱신되었다.

“이동합시다.”

통로 입구 겸 출구에서 아무리 작업을 쳐봐야 그곳에서 계속 알짱거리고 있으면 아무 의미 없다.

우리는 통로 안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토굴에 불과했던 길은 안으로 갈수록 지반이 달라지더니, 끝내 돌을 쌓아 만든 인공길로 바뀌었다.

“불 받을 수 있을까요?”

숨이 텁텁한 게 산소가 적다는 게 몸으로도 느껴진다. 그런 공간에서 기름 등불 쓰다가 질식사할 일 일 있나.

우리들은 가진 기름 등불을 전부 버렸다. 대신 룩콴이 내게 받아간 건, 접속한 이래 내가 요긴히 써먹은 전등이다.

단어 그대로 전기를 쓰는 건 아닌데, 나름 마법 아이템이라고 산소 안 잡아먹는다. 이런 상황에 딱이었다.

“나리랑 댁은 가면서 이것 좀 받으십쇼.”

룩콴과 도적들이 길을 찾는 사이, 데브는 우리에게 무언갈 넘겨주었다.

“이건 체취를 지우는 약입니다. 이건 하루동안 머리색을 물들이는 약이고요. 이건 구출된 사람들에게 얻은 노예옷인데, 노예가 깨끗하면 어색하니까 가면서 검댕이 좀 묻힙시다.”

그, 기도비닉이 목적이긴 하지만 만일을 대비해 변장하잔 이야기가 나오긴 했었다. 나야 뭐 쟤네들끼리 알아서 하겠거니 하며 방관했고.

근데 엄청 본격적으로 준비했구나 데브야…….

“나는 할 게 있나?”

“댁은 가만히만 있으면 됩니다요.”

탐탁지 않을지언정 전문가는 전문가다. 인퀴지터는 전문가에게 일임한 채 조용히 지시를 따라 얌전히 걸었다.

걸음걸이를 맞춰 가며 분장을 시작하니, 하얀 찐빵 같던 얼굴이 금방 꼬질꼬질해졌다. 옷은 깨끗한데 얼굴만 저러니까 또 웃기다.

“머리색도…… 아, 좀 흔들림 없이 걸어 봐요. 그것도 못합니까?”

“최, 최선을 다하고 있다!”

“정수리, 정수리 좀!”

데브와 인퀴지터의 키 차이가 그리 크지 않은 탓에, 데브는 머리약을 발라 주는 내내 까치발을 들고 걸었다.

어디 앉아서 진득하니 시간을 가졌다면 좀 편했겠지만, 안타깝게도 그럴 시간이 없었다.

그도 그럴 게, 마법으로 만들어진 머리약도 착색되려면 시간이 좀 걸린단다. 그렇다고 성 문턱에서 1시간을 더 끌 수는 없는 노릇이지 않나.

“기사님도 잠시 괜찮을까요?”

근데 이거 나도 해야 한단 소리는 못 들었어. 갸아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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