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주인공이 컨셉충이면 곤란한가요-69화 (69/389)

◈69화 처음부터 (4)

“인간인가?”

죽음을 각오하고 배에 올랐던 해적은 무심코 그런 말을 꺼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우린, 살 수 있는 건가?”

만을 뒤덮을 정도로 거대한 방어막을 짜내는 교단의 인간도. 날개 없이 날아다니며 하늘의 악마를 전부 도살하는 인간도.

전부 사람 같지 않았다.

사람 같지 않아서, 믿고 싶었다.

“빌어먹을 교단의 인간이…….”

“하, 평소였다면 누가 태웠냐고 욕했을 텐데.”

그들은 기도하며 메이스를 단단히 붙잡은 이를 보았다.

내리꽂힌 빛기둥과 넘실거리는 금빛이 가증스럽게도 고결해 보였고, 또 성스러웠다. 교단과의 악연만 아니었다면 같이 두 손을 그러모아 기도를 올리고 있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서걱!

“아, 배가!”

“배가 침몰한다…….”

그사이 기적은 다른 곳에서도 벌어졌다.

비행하는 악마들을 짓밟으며 창공을 넘나들던 이가 배 하나를 수장시킨 것이다. 어떤 기사를 가져다 대어도 따라하지 못할 무용이었다.

“저 남자는 대체 누구지?”

“어디 소속이야?”

처음, 남자의 검에서 악마를 연상시키는 검은 기운이 뻗어나올 때만 해도 불길하다는 인상이 컸다.

그러나 그 흉악한 기운이 악마들을 넘어서 이쪽으로 다가오는 배를 쪼갠 순간, 그들은 그것을 받아들였다.

죽음의 위협에서 구해 주다 못해 적 전부를 제거해 주는 사람을 나쁘게 볼 자는 아무도 없었다.

“이건 예상 외인걸. 좀 놀랍기까지 한데.”

“서, 선장.”

그때 무법자 치마와가 그의 근처에 섰다. 현존하는 해적 중 가장 아름답다는 얼굴이 그를 보며 부드럽게 눈을 휘었다.

“어디, 다친 덴 없소?”

“예에.”

다칠 리가 있나. 사제의 기도가 펼친 금빛 막은 악마들의 공격은커녕 출입마저도 허용하지 않았다.

그들의 몸에 상처 하나 날 수 없는 구조란 이야기다.

“하긴, 여기서 다치는 놈들이 머저리일 것이오!”

그런 그의 심정을 눈치챈 무법자가 호탕하게 웃었다. 고운 얼굴과 어울리지 않은 호쾌함이었으나, 정도를 넘어서는 낯짝은 그마저도 미려하게 소화해 냈다.

무법자의 배에 타지 않는, 다른 세력 소속 해적들이 얼굴을 붉혔다.

콰앙!

그사이 하나의 선박이 또 한 번 무너졌다.

돛과 돛대가 대각선으로 갈라지고, 배의 몸체마저 쪼개지는 것이 멀리 보였다. 반으로 갈라진 단면 사이로는 물살이 들이찬다.

“으하핫. 수리야 형님의 인복이 좋다고 여긴 적이 지금껏 없었건만, 앞으로는 취소해야겠소.”

“바람손이 데려온 사람이었습니까?”

“아마도.”

“그럼 저 사제도……?”

“그렇지 않겠소?”

“왜……?”

“그거야 모르오. 그렇지만 당장 도움은 되고 있지 않소. 그거면 된 거 아니오?”

퍼엉!

또다시 배 한 척이 침몰했다. 하늘을 날아다니는 괴물은 여전히 많았으나 처음과 비교하면 절반 가량이 사라진 채다.

“아무렴, 살기 위해 뭔들 못 하겠소이까. 원한이고 자시고 지금 죽으면 의미가 없어지는 것을.”

그건 썩 틀린 말이 아니라.

그는 선장의 말에 동의했다. 그의 부모나 이웃, 마을 어른들은 전부 교단을 미친놈이고 상종해선 안 될 것들로 묘사했지만…… 당장의 목숨이 걸린 상황에서까지 그 말을 따르고 싶진 않았다.

얼굴도 모르는 할머니 할아버지의 원한보다 당장 그의 목숨이, 그의 친구와 동료, 연인의 현재가 더 중요했다.

“그러니까 본인은 저 사제가 굉장히 마음에 들─.”

쿠구구구구구!

일순, 세계가 흔들리는 듯하였다.

멀리서 바닷물이 갈라지기 시작했다.

* * *

나는 핏물을 퉤 뱉다 말고 눈을 동그랗게 떴다. 바다 아래서부터 검은 그림자 따위가 올라오더라니, 결국 바다가 갈라진 까닭이다.

쿠구구!

무언가가 솟구침에 따라 사방으로 밀려난 물들이 흰 포말을 일으켰다. 그 사이로 계속해서 솟구치는 것은 네 개의 다리였다.

“문어?”

내 말에 반응하듯, 알림창이 정보창을 띄웠다.

「???│???」

기대도 안 했다.

꺄아아아악!

나는 지나가던 하피의 등에 탄 채 상황을 살폈다. 하피가 비명을 지르며 날개를 빠르게 움직였다. 제 몸무게만 한 존재가 추가되자 위기감을 느낀 모양이었다.

그러나 하피가 추락을 하든 말든 알 바 아니고.

나는 허공으로 치솟은 채 꿀렁이는 4개의, 아니, 하나 늘어 5개가 된 촉수를 직시했다. 거리가 상당함에도 그 촉수의 두께가 제법 널찍하게 다가왔다.

상대의 크기가 이번에도 꽤 상당하단 증거다. 해룡만큼은 아니지만 선박 하나를 둘러싸기 충분한 덩치가 아닐까 싶다.

“크라켄 에반데.”

해룡에 이어 이번엔 크라켄인가? 물론 해당 에피소드의 절반 가량은 온 듯하니까, 이런 보스가 등장해도 이상할 건 없지만 말이지.

“크툴루 진짜 에반데……!”

이럴 거면 차라리 해룡을 한 번 더 상대하고 싶다. 그쪽은 대가리와 꼬리만 피하면 됐지, 크라켄은 피해야 할 팔이 8개, 혹은 그 이상이나 있지 않는가!

하물며 해룡은 비늘 표면이 거칠거칠한 반면 저쪽은 보기만 해도 매끈매끈했다. 몸통을 밟고 뛰는 것도 고역일 거다. 최악이었다.

“커다란 문어는 시기만 하고 맛이 없다고!”

나는 들을 사람 없다는 것을 이용해, 마음껏 속내를 표출하며 그대로 하피의 몸에서 뛰어내렸다.

서걱!

공중제비를 돈 내 몸이 나를 노리던 가고일의 모가지를 베고, 그대로 하강했다.

캬아아악!

콱!

그리곤 내 다리를 씹으려던 와이번의 이빨을 피해 그 몸을 잡고 올라탔다. 검날이 와이번의 목덜미에 박혔다.

촤아아악!

나는 냅다 와이번의 몸통을 따라 달리며 꼬리 끝까지 밟았다. 칼날이 와이번의 살갗을 가르며 나아가고, 꼬리 끝에 달해서야 끝내 멈췄다.

내 몸이 다시 허공으로 비상했다.

쾅!

“으, 으악! 하, 하늘에서!”

“칼 들어!”

몇 미터를 추락한 걸까. 내 다리가 주돛대의 활대에 안착했다. 둔중한 충격음과 함께 발로부터 꽤 탄탄한 충격이 가해졌다.

운 좋게도 아프다는 느낌이나 부상 페널티는 없다. 그거면 됐다.

“죽여!”

한편, 주돛대의 장루나 활대에 앉아 있던 해적들이 나를 향해 무기를 들고 달려왔다. 내 손이 와이번의 체액 묻은 검을 빠르게 휘둘렀다.

곧 세상에 은빛 궤적이 아로새겨지는가 하면, 초침이 한 번 움직일 시간 후에 그대로 어긋나 깨진다.

피보라가 여러 갈래로 퍼지더니 아래로 추락했다.

“시발, 뭐야. 붉은 비?”

“위, 위를 봐 멍청아!”

“적이 배에 탔다!”

“귀신 같은 놈!”

촤아악!

그때 거리가 제법 벌어져있던 크라켄의 팔이 물속으로 잠기는 듯하더니, 문어 특유의 이동법으로 물살을 가르며 다가왔다.

크라켄의 몸뚱이에 밀려난 바닷물이 파도가 되어 수면 위를 거스르고 내가 디딘 배로 다가왔다.

철썩!

거센 파도에 함선이 출렁이며 기울었다.

가로로 눕힌 원형 기둥을 딛고 있는 입장에서 썩 좋은 일은 아니었다. 칼을 망대에 박은 채 버티지 않았다면 미끄러져 빠질 뻔했다.

“뭐, 뭐야 저거! 왜 이쪽으로 다가오는 거야!”

나를 노리고자 삭구를 타고 올라오던 이들이 외쳤다.

아군이 불러낸 생물이라곤 하나 괴물은 괴물. 그것이 다가옴에 생리적인 공포를 느끼는 것 같았다. 솔직히 모양새만 보면 이 배를 공격하려 드는 것 같기도 하고.

촤악!

쾅!

…아니 진짜 공격하려 드는데?

뭐냐, 너희 같은 편 아니야? 난 너희가 불러낸 줄 알았는데!

콰지직!

냅다 배에 들이박은 것으로도 크라켄은 부족했던 모양이다.

수면 위로 올라온 팔 여러 개가 배를 휘감기 시작했다. 난간과 뱃전 쪽 갑판이 으스러지기 시작했다.

“시발, 문어 새끼 왜 우릴 공격하는 거야!”

“우린 괜찮을 거라더니, 빌어먹을 악마숭배자들이!”

“선원들! 위치로! 전투 준비!”

“무슨 소란이야!”

아래 갑판에서 그런 대화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내가 보기에, 저 사람들도 이 상황은 예상 못 했던 것 같다.

“악마숭배자들이 있는 배에 탔어야 했는데!”

심지어 그런 말까지.

내가 앞서 베어 낸 배는 잘 모르겠으나 적어도 이 배에는 추종자들이 없는 듯하다. 나쁜 일은 아니었다.

콰직, 콰지직!

그리고 크라켄이 이 배를 공격하는 것 또한 내겐 좋은 소식이었다. 내가 딜 넣을 동안 미끼가 되어 줄 탱커가 생겼다.

나는 지지대 삼아 박아 둔 채, 아직도 꺼내지 않았던 검을 뽑았다. 팍! 나뭇조각을 튀기며 검이 뽑혔다. 스르륵. 내 몸이 미끄러졌다.

펄럭, 쿵!

흘러내리듯 떨어진 몸이 내뜻을 따라 자연스럽게 회전하며 자세를 잡았다. 갑판 한가운데 떨어진 내 몸이 시미터를 검집에 넣고, 천천히 등 뒤로 손을 가져갔다.

“……!”

“저, 저 자식이……!”

사악. 희미한 마찰 소리가 귓가에 울리고, 파괴의 트루 투헨더가 뽑혔다.

“나의 검에게 승리를, 저 하늘에 영광을…….”

새까만 마력이 지글지글 검신에 덧씌워졌다.

“악마에게 파멸을.”

앞으로 튀어나간 몸이 크라켄의 팔을 베었다. 해룡보다는 무르고 좀 더 말랑한, 마치 젤리를 써는 듯한 느낌이 묵직하게 손목을 두드렸다.

쿵!

잘린 상태에서도 꿈틀꿈틀대는 거대한 문어 팔이 데굴 굴렀다.

“잘랐어!”

“한 방 먹였다!”

따지고 보면 내 적이나 다름없는 작자들이 한순간 같은 편인 것처럼 기뻐했다. 적의 적은 일시적 아군이라는 걸 여기서 경험할 줄 몰랐다.

우오오오옹─!!

직후 바다에 기묘한 울음소리가 떨쳐졌다. 크라켄의 팔이 배로부터 일제히 떨어지며 꿀렁꿀렁 흔들어댔다.

갑판이 좀 좁긴 하지만, 진짜 보편적인 보스전 내지 레이드를 하는 기분이었다.

쾅!

그래. 냅다 여러 개의 팔을 내리꽂는 점이나, 그 와중에 피할 틈은 있다는 것 따위가!

“으아악!”

물론 해룡 레이드 때 예상했던 것처럼, 마스트나 외판이 부서지긴 했다. 덤으로 해적들도 깔려 죽었고.

근데 어차피 수장시켰을 이들이니까 별로 상관없지 않을까?

나는 갑판에 내리꽂힌 촉수들이 거둬지기 전, 빠르게 검을 휘둘렀다. 촉수 3개가 연달아 잘리며 갑판에 흔적을 남겼다.

마지막 하나는 덜 잘려서 달랑달랑거리긴 했지만, 저걸로도 일단은 안심이다. 설마 저걸로 공격하진 않겠지. 해도 별 효과 없을 것 같고.

우으으으옹

그러나 그런 내 생각은 바로 빗나갔다.

“괴, 괴물의 팔이!”

“재생한다……?”

맞다. 문어는 잘린 부위도 재생하는 생물이었지…….

나는 잘린 단면에서 부글부글 기포가 일더니, 곧 잘려 나간 촉수가 재생되는 걸 보며 할 말을 잃었다.

심지어 다 잘리지 않은 팔의 경우엔 새로 나다가 기존의 것과 부딪치더니 그대로 통합되기까지 했다. 그러니까, Y자로 자랐다고.

완전 미친 게임이었다!!

이럴 거면 적도 HP 표기해 줘!

콰앙!

크라켄의 팔이 나를 집요하게 노리며 배를 두드리기 시작했다.

방금 전까진 갑판을 내려치는 것이 다였으면서, 지금은 배를 부수고 뚫고 무언가를 붙잡은 채 내게 내려치는 등 패턴이 다양했다.

“칫.”

이걸 어쩐다. 당장이야 피하는 건 어렵지 않지만, 배가 침몰한 이후는 다르다. 물에 빠지는 순간 게임오버는 98% 확정이다.

아니면, 이번에도 스킬과 내 직감에 의지해 크라켄의 다리를 밟아 가며 싸워야 할까? 벌써부터 가슴이 쫄리는데.

나는 나를 향해 내리꽂히는 마스트를 피해, 크라켄의 촉수 하나를 밟았다. 군화굽에도 매끈한, 물기를 넘어서 점막이 코딩된 듯한 감각이 느껴졌다. 이거 슬라이딩 각이다.

푸욱!

나는 다급히 칼을 박았다. 주우욱. 몸이 미끄러져 내리며 크라켄의 촉수에 상처를 냈다.

그래도 시간은 소요되어서, 마스트가 배에 내리꽂혔다. 나는 그것을 밟고 빠르게 뛰어올랐다.

아무리 생각해도 크라켄의 몸뚱이를 밟아가며 싸우는 건 무리다. 아이젠 같은 게 있지 않는 이상은.

그럼 이제 어쩌지? 방법이 없나?

캬아아악!

내가 아까보다 가라앉은 배를 두고 눈을 침잠시킬 무렵, 나를 향해 희망 하나가 날아왔다.

캬악!

가고일이었다.

“……!”

…너로 정했다, 가고일!

나는 일단 생존본능을 발동해 활로를 확인한 후 마스트를 부숴 가며 강렬하게 점프했다. 나를 노리던 촉수가 사방에서 짓쳐 들어 왔지만 괜찮았다.

내 몸이 높이뛰기를 하듯 점프 도중 몸을 반바퀴 회전시켜, 등을 아래로 보였다. 특별히 높이 뛰고자 함은 아니었으나 등 아래로 차고 미끈미끈한 감각이 스쳐 지나갔다.

그리고 이어지는 건 화끈함. 가고일이 뿜은 불이 공기를 데우며 사방으로 퍼져 나갔다. 내 등을 뜨뜻하게 만든 건 더워진 그 공기였다.

그러나 성공만 한다면 이 열기 따윈 알 바 아닌지라.

나는 몸을 또 한 번 틀었다. 방금의 회전이 허리를 뒤틀듯이 한 거라면, 다음은 다리를 머리의 위치로, 머리를 다리의 위치로 바꿀 차례다.

촤악!

내 발이 가고일의 머리부터 뒷목, 등골을 따라 쭈욱 밀려 나갔다. 자칫하면 균형을 잃어 옆으로 떨어지거나 가늘어진 꼬리에 닿아 추락할지도 모르는 찰나, 내 검이 가고일의 등을 뚫었다.

캬아아악!

가고일이 비명을 지르며 몸을 뒤틀었다. 자연히 비행 방향도 바뀌며 펄럭펄럭 상승을 시작했다.

내 무게가 더해진 덕에 고도가 갈팡질팡했으나 오히려 그 점으로 인해 크라켄의 촉수가 나를 잡지 못했다.

가고일이 좀 더 높은 곳으로 올라갔다. 하피, 와이번이 날아다니는 높이였다.

“플레이어가 직접 발판을 만드는 게임이 어디 있어.”

나는 날 올려 준 가고일에게 감사를 표하고자 내장이 찢기도록 검을 휘둘렀다.

촤악!

핏줄기나 살점 따위가 공중으로 비산했다. 내 몸도 함께였다.

키악?!

와이번의 몸통을 찍으며 그 등에 안착한 내 몸이 또 한 번 공중전을 시작했다.

목표는 배 순회. 크라켄 놈이 내게 어그로가 끌린 게 맞다면, 남은 배 4척도 크라켄을 이용해 전부 수몰시킨 후 마지막으로 크라켄을 잡을 요량이다.

예컨대 작전명: 이이제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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