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주인공이 컨셉충이면 곤란한가요-65화 (65/389)

◈65화 신이 있다면 (8)

“이봐, 아크메이지.”

“왜 그런가?”

“지금 생각난 건데, 대현자 한 명 파견해 주기로 한 건 어떻게 됐지?”

“크흠. 여기 왔지 않나.”

“……?”

“…큼.”

“…설마 당신?”

“크허험.”

“이 쓰레기가─.”

어떻게 자크라티 사람들과 교단이 휴전을 했나 싶을 즈음. 그리고 그들이 나를 따라잡아 다음 적의 본거지에 도달했을 즈음.

아크메이지가 계약 문제로 바람손에게 멱살을 짤짤 잡혔다.

마법사 한 명이 눈치 없이 토해 낸 말─파견되기로 한 대현자가, 재촉해 줄 아크메이지의 부재를 틈타 계약을 쌩깠단다─이 아니었다면 지금까지 잡혀 있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혹은 그래. 바람손이 루완인지 루윈인지 하는 도시에 구원을 요청하러 부하들 절반을 보내지 않았다면 그쪽 일행에게 욕으로 두드려 맞았을지도.

“위약금 지불하지 않으면 죽여 버리겠어.”

“…그 대현자의 발명품을 팔아서라도 지불할 테니 걱정말게.”

그래도 돈의 힘은 위대했다. 바람손은 어떻게든 화를 참아 냈다. 훌륭한 인내심이었다.

콰앙!

“오…… 드디어 상황이 정리된 듯하군.”

“…악마기사만 아니었어도 댁은 죽었어.”

“…그에게 감사를 전해야겠군.”

물론 저 대화에서 드러나다시피 그 인내심에 제 활약이 영향을 끼치긴 했다. 암, 단신으로 산채를 무너트리는 사람을 보면 없던 인내심도 조금은 생겨날 테다.

“이러고도 살 수 있을 것 같─!”

“주제 파악을 잘하는군.”

나는 이번 산채의 보스─이걸 보스라고 해도 된다면─의 목을 붙잡고 바닥에 처박았다. 이 거리와 이 자세라면 쟤가 저주 항아리를 던져도 반응해서 대응할 수 있다.

“이런 짓을 해 놓고 살기를 바라지 마라.”

“끄흡!”

거기에 사람들은 목이 졸리거든 보통 제 목을 조르는 것을 떼어 내기 위해 노력하는 법이라.

이번 적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대상은 목을 그러쥔 제 손을 붙잡고 마구 긁거나 내 눈을 노리려 들었다.

우드득.

“커억!”

다만 상대의 패착은 그거였다. 내가 놈보다 힘이 셌다. 그리고 놈의 목을 한 손으로만 쥐어, 다른 손으로 놈의 저항을 부러트릴 수 있었다.

양팔이 스크류처럼 뒤틀린 자가 신음소리만 내며 완전히 제압되었다.

“어휴, 위험한 걸 허리에 달고 다니시네.”

한편, 내 근처로 다가온 데브는 겁도 없이 제압된 이의 허리춤에서 무언갈 쏙 빼냈다. 가로림량의 요새에서 보았던 항아리였다.

그놈이 그걸 던질 땐 자리에 있지도 않았던 것 같은데, 언제 봐뒀는지 모르겠다.

“그, 그건…… 커흡.”

보스가 부러진 팔다리를 바르작대며 손을 뻗으려 했다. 그러나 데브는 이미 물러난 상태라. 놈의 팔이 멀쩡했어도 데브를 잡을 수 있었을지는 의문이다.

“이제 심문하면 되겠습니다.”

데브의 말이 맞긴 하다. 애초에 그걸 노리고 산 채로 사로잡은 거기도 하고.

그렇지만…….

나는 컨셉을 고려해 잠시 동안 놈의 목을 지그시 내려다보며 칼자루를 어루만졌다. 대상을 끌고 가려던 이단심문관들이 잠시 움찔거렸다.

“나리?”

타이밍 맞게 말 걸어 준 거 땡큐.

나는 데브의 말에 맞춰 몸을 돌렸다. 그러자 내가 산채에 돌입함과 동시에 참격을 날려 대며 아로새긴 흔적들이 시야 곳곳을 메우기 시작했다.

신앙 앞에서 두려움을 집어넣는 이단심문관들이 내 눈치를 보도록 한 것도 저것들일 테다.

“오늘은 이곳에 자리 잡고 쉬는 게 낫겠군.”

아직 해도 안 졌는데?

나는 아크메이지의 말을 듣고 하늘을 슬쩍 올려다보았다. 조금씩 주홍빛이 뒤섞이는 게 확실히 애매한 시간이긴 했다. 소수라면 모를까 지금은 인원이 근 백 명에 가까운 상태니까.

“조사도 필요하고 말일세.”

그것도 그렇지.

아까는 급하게 정화하느라 증거품이 다 증발했지만, 목하는 아니다. 역병의 저주를 담은 항아리도 분석해야 했고, 간부급 인간들이 갑자기 벌크업한 원인도 알아내야 했다.

아무렴, 당장이야 저리 변신해도 별 체감 없다지만, 한 퀘스트의 최종보스는 또 다를 터였다.

“대체 어떻게 해야 이런 마력의 응집도를 낼 수 있지?”

“이것 봐, 단면이 거칠어. 응집이 완벽하지 않다는 거야.”

“응집이 완벽하지도 않은데 그런 형태를 갖춰서 이만큼이나 날아간다는 건가?”

“미쳤군. 다시 한번 써달라고 하면 들어줄까?”

근데 정작 마법사들이 저러고 있는데 조사 가능은 한 거냐고.

그보다 마력의 응집도는 또 뭐야? 단면이 거친 건 그냥 이펙트 아니야?

아니, 물론 가끔은 매끄럽게 잘릴 때도 있고 아닐 때도 있긴 하지만. 그게 의미가 있나.

짝짝

그때 아크메이지가 손뼉을 툭툭 쳤다. 털에 뒤덮힌 손이라 소리가 다소 텁텁했으나 그게 오히려 특징이 되었다. 마법사들 전부가 아크메이지의 것임을 깨닫고 고개를 들었다.

꼭 미어켓 같았다.

“잠깐 그것 좀 넘겨주겠나?”

“예? 예.”

아크메이지는 모인 시선을 두고 데브에게서 저주 항아리를 받았다. 무언가가 빼곡히 적힌 것도 모자라 문외한이 느끼기에도 기묘한 게 감지되는 항아리였다.

“역병의 저주를 담은 항아리. 분석할 사람 있나.”

“저요!!!”

“제가 하겠습니다!!”

…조사가 되네.

아크메이지는 신인가?

“가져가게. 깨트리면 자네 목숨이 달아날 테니 제발 조심 좀 하고.”

“허억 감사합니다!”

“나도 같이 봐!”

“이게 저주가 담긴 항아린가?”

“정교한 차폐 마법이야. 악마숭배자들 따위가 이런 걸 만들어 낼 줄은 몰랐는데!”

“안에 든 건 저주가 맞나?”

“마기 고유의 느낌은 가리지 못했어. 확실해.”

나는 이제 다른 의미로 걱정이 들었다. 쟤네 안쪽 보겠다고 마개 따거나 항아리 일부러 깨는 거 아니야?

“사로잡힌 사람들을 찾았습니다!”

“……!”

그러나 걱정은 끝까지 이어지지 못했다. 단번에 화제가 돌아갔다.

모험가들이 한 곳의 지하문을 벌컥 들어올린 채 고개를 내밀고 있었다.

“기다려!”

가장 먼저 바람손이 튀어나갔다.

“저도 가겠습니다!”

다음은 인퀴지터였다. 치료가 가능한 사제 일부가 눈치껏 그들을 따라 지하로 내려갔다. 사로잡힌 사람 중 부상자들을 치료할 요량일 테다.

물론 그들이 치료를 순순히 받을지가 문제긴 한데…… 바람손이 갔으니 어떻게든 되리라 본다. 내가 관여할 부분은 아니다.

“그럼 저도 이곳에 뭐 숨겨져 있는 건 아닌지 좀 뒤져 보러 갑니다.”

데브도 슬슬 본인의 역할을 다하러 몸을 감췄다. 할 일이 없는 건 오직 나뿐이었다.

따지자면 아크메이지도 움직이지만 않았을 뿐, 마법사들에게 합류해 마법을 조사할 수는 있으니까.

방금 전까지는 나름 내가 거의 다 일했는데 말이지.

“아, 그렇지. 용의 사체 말일세, 어떻게든 자네 몫을 챙겨 두었네.”

음, 그럼 이제 뭐 한다. 컨셉만 따지면 휴식이고 뭐고 바로 전진해야…… 악?

“최대한 많이 챙겨 주고 싶었네만…… 미안함세. 사체의 1/4 정도가 최선이었네.”

뭐라고? 내 몫을 챙겼다고? 그것도 모자라서 내 지분이 1/4이나 된다고? 그걸 진짜 나한테 준다고?

“성에 차지 않더라도 부디 봐주게.”

나는 주먹을 콱 쥐었다.

마음에 안 들 리가 있나! 애초에 받기를 포기했던 보상인데!

너무 좋아서 순간 엄지를 추켜세울 뻔했다. 그 정도로 만족이었다.

“보안을 위해 신전에 맡겨 두었으니 본토로 돌아갈 때 챙겨가면 될 걸세. 그리고 또…… 모험가 길드에서 두 번째 수훈장을 만들어둘 테니 받으러 가라더군. 그것도 본토로 돌아갔을 때 받아 가게.”

수훈장은 별로 알 바 아니고.

쓰임새가 쏠쏠한 건 사실인데 이미 하나 있는 이상 더 받아봐야 인벤칸 낭비다.

나는 용의 사체로 뭘 할지만 대충 궁리했다. 모든 장비를 교체하진 못하겠지만 그래도 즐거운 고민이었다.

「적의를 품은 대상이 반경 30m 이내에 존재합니다.」

그때 알림이 내게 신호를 주었다. 기존 산채에 있던 적들은 전부 죽거나 사로잡혔으니 아니고, 새로 출현한 적일 가능성이 높다.

내 걸음이 서둘러 목책 근처에 다다랐다.

끼우우우우우!

기묘한 울음소리가 귀에 닿았다. 언젠가 자료 조사할 때 들어 본 종류의 울음이었다.

“마기가!”

이단심문관들이 뒤늦게 내 근처로 다가오려 들었다. 내 시야에 무언가가 들어온 건 그 타이밍이었다. 나무 기둥 틈새로 사슴 하나가 보였다.

“마기 침식…….”

보다 정밀하게 묘사한다면, 악마화되어 거죽 곳곳이 벗겨지고 살점과 뼈가 드러난 사슴이었다.

「사슴│마기에 먹혀 악마화된 가련한 짐승. 본래 풀만 뜯어먹었을 이 동물은 이제 모든 것을 먹어 치울 수 있다.」

휙.

나는 그것을 발견하는 즉시 목책을 뛰어넘었다. 조금 징그러웠지만 악마는 악마다. 보이면 제거해야 했다.

끼우우어어엉!

그에 맞춰 사슴도 내쪽으로 돌진을 시작했다. 머리 위의 뿔은 기괴하리만치 더 크고 날카로워져, 완전한 무기의 형상을 띠고 있다.

“안식을 누려라.”

서걱!

그러나 용도 잡은 내가 사슴 따위에게 질소랴!

나는 투헨더를 뽑아 목과 몸뚱이를 동시에 베고, 떨어진 머리통을 밟아 뭉갰다.

잘 익은 수박처럼 쪼개진 머리서부터 시꺼만 무언가가 으깨진 채로 모습을 드러냈다. 뇌를 파먹은 것인지 주름이 자글자글할 부위는 조금도 보이지 않는다.

“정화하겠습니다!”

검에 묻은 피를 터니 뒤쪽에서 헐레벌떡 이단심문관 하나가 달려왔다. 그이는 사슴의 시체 앞에서 무릎을 꿇더니 천천히 기도문을 읊기 시작했다.

다만 김치만두였으면 옛저녁에 끝났을 정화가 무려 3분 가량 이어졌다. 그거 하나 했다고 뺨에 땀이 맺힌 건 덤이었다.

고작 한 방울이긴 했지만, 그것의 존재 자체가 인퀴지터와 일반 사제들의 실력 차이를 보여 주는 듯하다.

“…….”

별개로 이제 어쩐다냐. 이거 아무리 봐도 타임어택 각인데.

나는 신성력 뿜뿜하는 이단심문관과 사회적 거리두기를 하며 고뇌에 잠겼다. 하늘은 슬슬 금빛이 푸른색을 이기고 있다.

“후우.”

그리고 이단심문관이 정화를 마쳤을 때, 나는 몸을 휙 돌려 산채로 돌아갔다. 내 시선이 빠르게 좌중을 훑어 데브를 찾아냈다.

“찾은 것, 있나.”

“어? 아직 하나밖에 없습니다요.”

내가 먼저 말 거는 일이 워낙 드물어서 그런가. 막 한 곳을 뒤지고 나오던 데브가 귀를 바짝 세우며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다.

“대신 사람을 어디로 보내라는 편지는 발견했는데─”

나는 데브가 주섬주섬 내민 종이를 낚아채 빠르게 훑었다. 거북손 바위 아래의 거점으로 보낼 것. 그게 단서였다.

「❖ 자크라티를 겨냥하는 송곳니

∎ 비푸릿 일당의 근거지 찾기 3 / ?

∎ 비푸릿 일당의 근거지 제거 2 / ?

∎ 보너스: 비푸릿 살해」

한 번 더 갱신되며 고정된 형태를 갖춘 퀘스트의 카운트가 쓱 올랐다.

“조심해서 올라오라고.”

“비, 빛이다…….”

“살았어…….”

비슷한 시점에, 아래로 내려갔던 이들이 사람들을 부축하며 위로 올라오기 시작했다.

천만다행으로 교단과 너 죽고 나 죽자 사태는 안 벌어진 모양이다. 그렇다고 그들의 도움을 받고 있냐면 그건 아니지마는.

“일단 치료부터…….”

하나 내겐 그거면 됐다. 말이 통할 상황이면 충분해.

“악마기사?”

“너희.”

나는 바람손을 지나쳐 막 올라온 사람들에게 편지를 보였다. 속으론 ‘이 사람들 글은 알까?’하며 아차했지만 이미 내지른 일이었다. 내가 입으로 불러 주면 그만이고.

“거북손 바위의 위치를 아는 자 있나.”

“…거북손?”

“거북손이라면…….”

내가 고압적인 태도로 말을 걸어서였을까. 사람들이 겁에 질린 채 눈치싸움을 시작했다. 내 눈썹이 까닥였다.

“그렇게 다짜고짜 물으면 사람들이 놀라잖아.”

다행히 바람손이 끼어들며 나와 사람들 사이를 중재했다. 도시는 달라도 같은 지방 사람이라서 그런가. 사람들은 바람손의 말만큼은 잘 들었다.

“거북손 바위라면, 저 언덕을 두 개 넘어가면 나오는 곳인데.”

어쨌거나 곧 내가 바라던 말이 나왔다.

이제 위치가 특정되었다. 출발할 수 있다.

“거북손 바위 아래 거점이라. 다음은 그곳이군요.”

“…답을 알 것 같지만 그래도 한 번 묻겠네. 바로 갈 생각은 아니겠지?”

“비푸릿 개자식이…… 사람들을 모아서 어쩌려고…….”

“나리, 저 아직 다 안 뒤져 봤는데.”

순서대로 인퀴지터, 아크메이지, 바람손, 데브라.

나는 편지를 데브에게 돌려주곤 걸음을 옮겼다. 데브가 팔랑팔랑 던져진 편지에 와악 소리를 지르며 손을 버둥버둥 휘두른 건 알 바 아니다.

이제부터 피로도만 최대한 조절해 가며 강행군이다! 컨셉도 컨셉이거니와 아무리 봐도 타임어택 퀘스트인 이상 진도 빨리 빼야 해!

“앗, 지금 출발하면 사람들이.”

“마계화가 벌어지고 있음이 확실된 이상 빨리 이동하는 게 틀린 건 아니네만…… 사람들이 문제로군.”

“예? 마계화 말입니까?”

“잠깐? 뭐가 벌어지고 있다고?”

“마계화라면 그거 아닙니까? 악마들 생기는 거?”

기대를 저버리지 않는 내 행동에 인퀴지터와 바람손, 데브는 각자의 반응을 보이려 했다. 지상에 남아 있던 덕에 방금 벌어진 일을 고스란히 목격한 아크메이지의 발언이 없었다면 그랬을 거다.

“…그럼 당장 진격해야 합니다. 방치할수록 이 땅이 더 위험해집니다.”

“마, 마계화가 이 땅에? 잠깐, 그럼 사람들은? 이 사람들은 어떻게 되는 건데!”

“와, 우리 이 병력으로 되는 겁니까? 아니, 그보다 나리는 진짜 한 걸음도 안 멈춰 주시네!”

새롭게 추가된 문제에 세 사람이 다른 의미로 각각의 반응을 보였다.

나? 나는 당연히 게네들 싹 다 무시하고 가는 중이다. 발견된 피해자들의 구제가 필요한 건 맞는데 내가 담당할 일은 아니잖아.

내가 할 일이 아니라면 차라리 신경 끄고 내가 할 수 있는 일에 집중하는 것이 더 낫다.

“아무래도 인원을 나누는 게 좋을 듯합니다, 인퀴지터.”

그리고 내가 할 수 있는 일중, 가장 도움이 되고 가장 잘할 수 있는 건 딱 하나다.

“제가 이곳에 남아 이들을 이끌겠습니다. 사람들의 보호도, 정화도 맡지요.”

전속력으로 전진해서 놈들을 죄다 도륙 내는 것.

“대신 세 분은 악마기사를 먼저 따라가십시오. 그게 효율적일 겁니다.”

파티가 갈렸다.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