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화 신이 있다면 (5)
사태의 심각성과 다르게 상황은 이틀하고 반나절만에 좋아졌다.
사실 어제도 충분했던 것 같은데 바람손이 제발 하루만 더 경과를 보고 가자고 매달려서 말이지.
컨셉으로선 당장이라도 다른 섬에 있을 악마들을 죽이고 싶었겠지만, 안타깝게도 나는 배를 몰 줄 몰랐다. 배를 운용할 수 있는 바람손은 나와 반대 입장이었고.
그렇다고 바람손 외 선장이나 선원을 구하자니 상황이 썩 그런지라.
어쩔 수 없이 하루 빡세게 일하고 나머지는 반대기 상태로 보냈다. 본체 입장에선 굉장히 만족스러운 일이었다.
셋째 날부터 할 일이 거의 없어진 덕에 피로도 다 없앴다. 으하학.
“좀비들은 전부 사살된 듯합니다. 하나 만일을 대비해 좀비가 출몰한 구역은 격리 조치했고, 물렸으나 아직 증상이 나타나지 않은 이들은 재갈을 물린 채 감시 중입니다.”
각설하고, 곳곳의 사람들과 연락해 가며 상황을 진두지휘하던 자들이 보고를 듣고 밝은 얼굴을 했다.
아무렴 좀비 사태란 거대한 시련을 두고 방어에 성공했다 하면 누군들 기뻐할 수밖에 없을 테다. 설사 눈가엔 고단함이 짙게 드리우고, 팔다리는 피로의 무게로 축 늘어졌다 해도 말이다.
“사로잡은 해적들은 현재 심문 중이며…… 그, 저 모험가 분께서 나서 주신 덕에 몇 가지 알아낸 게 있습니다. 아, 더불어 숨어 있던 첩자도 몇 명 찾아냈습니다. 저분께서요.”
“…저분이라고 칭해지니까 기분 참 묘한뎁쇼.”
와중에 나는 데브가 뭘 했다는 걸 처음 들었다. 웬일로 따로 다니나 했더니 정보 조사 및 적 색출에 도움 주고 있었구나. 장하다 고기만두.
“그렇게 알아낸 정보로는, 악마숭배자들과 비푸릿이 손을 잡았다 합니다.”
보고하던 이는 연신 데브를 힐끔거리다가, 제대로 된 보고에 들어갔을 때 표정을 진중히 굳혔다.
“섬에 좀비를 퍼트린 것도, 악마를 데려온 것들도 비푸릿과 손잡은 악마숭배자들의 산물이라더군요.”
“그런!”
“그 미친개가 기어코!”
보고자의 말이 이어짐에 따라 참석자들의 낯도 그런 빛깔을 띠었다.
“더불어…… 그로 인해 몬타타 섬은 아주, 아주 끔찍한 상황이 된 듯합니다.”
“…몬타타에 상황을 살피러 간다던 이들의 소식이 완전히 끊겼었지. 그 원인도 이 때문일 가능성이 높겠어.”
“아무래도…… 그럴 것 같습니다.”
유일하게 표정을 지켜 낸 성주가 손짓을 했다.
“그 이들에 대한 소식은 안 들어왔나?”
“그에 대해선 아직…… 아, 아유 힌에서 무법자를 봤다는 이야기는 했습니다.”
“그런가. 하긴, 생존에 대한 집착은 누구보다 강한 아이였지. 좋아. 그 외에…… 몬타타의 현 상황은 어떻지? 아유 힌은 아직 버티고 있나? 비푸릿이 점령한 도시는?”
“아유 힌이 어떻게 됐는지는 모르겠답니다. 그리고 비푸릿이 점령한 곳은…… 도시의 인간 중 많은 이가 좀비가 되었고, 생존자들은 사로잡혀 해적들의 노예가 되었거나 제물로 바쳐지고 있다 합니다.”
“그리고?”
“성에는 비푸릿 일당의 간부들과 악마숭배자들로 추정되는 자들이 즐비하며…… 제물로 바친 주민들을 통해 악마를 소환하거나 어떤 의식을 진행한답니다.”
보고자는 그 말에 한 가지 문장을 덧붙였다.
“자크라티를 습격하는 데 쓰인 악마도 그것으로 소환했다는 모양입니다.”
회의장이 순식간에 활화산처럼 변했다.
“이 개자식들!”
“인간도 아니야! 어떻게 40년 전 일을 기억하면서 이 땅에 악마를 들여!”
“사지를 자르고 머리를 베어 백 년을 효수해도 시원찮을 놈!”
그 40년 전 일 모르는 사람은 지금 소외된 기분이 듭니다만…….
나는 눈살을 좁혔다. 물어볼 사람도 없고 처지도 안 되니 그냥 주어진 단서로 짜맞추는 수밖에 없겠다. 그래도 내 눈치가 나쁘지 않아서 다행이지.
“마땅히, 그러하겠지. 이 땅에 악마란 것은 흔적도 목격할 수 없는 삿된 것들이었으니.”
“그놈을 당장 죽여야 합니다!”
“당연한 말을 훌룡한 의견처럼 발언하지 말게. 그리고 자네. 그네들의 목적은 들었는가?”
“그건…….”
“왜, 섬의 지배라고 하던가?”
“…예.”
“하, 고작 땅 하나 차지하고자 악마와 손잡았나. 어디까지 추락할 셈인지…….”
성주가 고아한 미간을 와락 찌푸렸다. 기나긴 머리카락이 손빗에 뒤로 넘겨졌다가, 그대로 콱 움켜쥐는 손길에 단단히 고정되었다.
흑색 눈동자에는 새까만 불꽃이 넘실거리는 듯하다.
“그대.”
그때 성주가 분노를 미처 갈무리하지 못한 채 내쪽을 보았다.
관계자도 아닌 나를 구태여 이 회의에 부른 사람이기도 하고, 기세가 영 심상치 않아서 나는 맞받아치듯 눈에 힘을 주었다.
“가능하면 오늘 몬타타 섬으로 출발할 거라 들었네. 가로림량부터 차례로 진격한다지.”
몬타타 섬은 비푸릿 일당이 장악한 섬이고, 가로림량은 다른 도시의 지원을 받으려면 뚫어야 하는 곳이랬으니…….
그래. 아마 성주의 말대로 될 거다. 계획이 바뀐다는 소리는 못들었으니까.
그리고 가능하면 오늘 출발하는 것도 맞다. 도시 상황이 괜찮다는 얘기가 나오면 바로 출발하게 해주겠다고 바람손이 회의직전 말했으니까.
“출정 인원이 이곳에 도달한 인원과 동일하다는데, 맞나?”
별개로 이건 제 담당이 아니라서 그렇게 물으셔도 모릅니다…… 제가 아니라 바람손에게 물으십쇼…….
“식량도 사흘치만 가져갔던데. 정말 그것으로 괜찮은 것이고? 필요한 게 있다면 이쪽 사정 생각치 말고 편히 말해 주게. 최대의 지원을 내어줄 테니.”
화끈하시네. 근데 내 담당 아니라니까.
“그건 바람손과 상의해라.”
나는 어쩐지 성주 앞에서만 서면 안절부절못하는 바람손에게 일을 떠넘겼다.
그 대가로 바람손이 날 배신자 보듯 보긴 했는데…….
아니, 내가 뭘 잘못했다고. 야, 리더는 너야! 나는 리더 말 생까고 무지성 돌격만 하는 트롤 역할이라고! 근데 이제 실력은 있어서 묘하게 캐리하는 트롤!
“…그대는 진정 바라는 것이 없나? 악마라는 변수가 끼어들었으니 그에 관한 추가 계약이라거나…….”
와중에 성주 또한 나를 오묘한 표정으로─말이 오묘한이지 표정 관리 안 했으면 어처구니없는 쪽이 아니었을까 싶다─보았다.
“저 빌어처먹을 악마 새끼들을 죽일 수 있도록, 당장 배를 마련해 준다면 그건 마음에 들겠군.”
하지만? 정말로 이거 외엔 없답니다. 빠밤.
“…정말 신기한 모험가로군.”
성주가 헛웃음을 터트렸다.
“하면, 내가 무엇을 주어야 그대에게 일 하나를 맡길 수 있겠나?”
…아니 난 또 그냥 화끈하게 지원해 주시는구나 어디 성주랑 비교되네 이러고 있었는데 그게 아니었잖아.
나참, 롱소드 좋은 거 하나 달라고 할까 말까 고민했는데 안 하길 잘했지. 아니었으면 눈 뜨고 코 베일 뻔.
나는 내 선택을 칭찬하며 치사한 성주님을 싸늘히 쳐다보았다.
“바라는 것에 따라 다르겠지.”
“그것도 맞는 말이군.”
성주는 내 말에 가볍게 호응하더니, 잠깐 숨을 돌렸다. 한 번의 들이쉼과 내쉼이 느린 템포로 이뤄지더니, 곧 무언가의 종이를 내밀었다.
접은 자국이 있는 종이의 한가운데엔 성주와 제법 닮았으나 묘하게 인상 다른 초상화가 그려져 있다. 그 아래에는 이름으로 추측되는 글자가 큼지막하게 박힌 채다.
“성주님!”
“저건!”
사람들이 그 종이를 보고 기함하고, 성주가 손을 들어올렸다. 순식간에 장내가 조용해졌다.
“저 목에 걸린 현상금이 1천만 갈일세. 이런 일을 벌인 이상 금액은 더 뛸 수밖에 없겠고, 악마들과 손잡은 이상 생존력 또한 쇠 멱미레 저리가라 할 정도겠지.”
나는 벽에서 등을 떼내어 테이블로 다가갔다. 종이 특유의 바스락과 팔락 사이의 소리가 울려 퍼지며 초상화가 보다 잘 보였다.
비푸릿. 아래에 적힌 글자는 그러했다.
“그렇지만 나는 더 이상 기다릴 수 없네. 그래서 말인데, 무엇이 필요한가? 무엇을 더하면 그 작자의 목을 필히 가져와 줄 수 있나?”
그러니까, 이거 비푸릿 죽여 달란 의미지?
「❖ 자크라티를 겨냥하는 송곳니
∎ 비푸릿 일당의 근거지 파괴
∎ 악마 제거 215 / ??
∎ 보너스: 비푸릿 살해」
퀘스트창도 마침 갱신되며 내 확신에 박차를 가해 주었다. 성주 피우온은 도를 넘은 그녀의 형제를 죽이기로 결심했다.
“이 땅에서 자크라티의 적을 몰아내 달라는 것과는 별개의 의뢰일세. 그러니 말해 주게. 바라는 것이 무엇인지. 내가 무엇을 걸어야 이 의뢰를 받아 줄 것인지.”
근데 문제가 하나 있어.
그래서 현상금을 준다는 거야, 만다는 거야?
나는 비푸릿의 초상화를 세세히 뇌에 박아 넣으면서도 고민에 잠겼다.
쓰읍. 현상금만 지급해 주면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콜! 외쳤을 텐데, 지금 말투가 영 애매해서 현상금 유무가 불투명하다.
뉘앙스 보면 현상금에 +a로 바라는 거 말해 달라는 거 같긴 한데…….
또 그렇게 생각하자니 이 도시 상황이 상황이어야 말이지.
1천만 갈을 어떻게 지급하게? 사비로 지급할 금액도 아니지 않아?
있다 해도 나한테 주기보단 복구 비용으로 쓰는 게 나을 것 같은데…….
“도시에 검을 만드는 기술자가 있을 테지.”
흠. 에라, 모르겠다. 본인이 준다는 거 내가 거절할 필요는 없지.
현상금 유무를 둔 확신도 뭐, 어차피 죽일 거니까. 받으면 좋고 안 받아도 그러려니 하는 수밖에는.
“물론 있네. 장인이 필요한가?”
나는 종이를 내려놓고 인벤토리 가방을 쥐었다. 테이블 위까지 들어 올려진 가방이 뒤집어진 채로 흔들리자 무언갈 툭툭 토해 냈다.
“잠깐, 나리 그거!”
“…저거 그놈 비늘 아냐?”
“돌아왔을 때 검 한 자루가 완성되어 있어야 할 거다.”
나는 용의 비늘과 이빨을 몇 조각을 테이블에 던져 두고 인벤토리를 회수했다.
장인 레벨이 너무 낮으면 소재 좋은 거 줘도 망한다고? 그건 성주가 해결할 일이지. 아, 바라는 거 말하라 한 건 성주님이라고.
“…이건?”
내가 떨어트린 게 아직 뭔지 파악 못한 성주가 비늘 조각을 집어들고 이리저리 돌려 보았다.
“음, 일단 알겠네. 그것 외엔 없나?”
그 말, 후회하게 될 것이다.
그렇지만 내가 후회하게 될 건 아니므로 나는 바라는 것을 추가하는 대신 조건을 좀더 확인했다.
“머리통이 온전하지 않아도 되겠지.”
“…죽은 게 비푸릿이라는 확신을 줄 수 있다면.”
“확인했다.”
계약서 작성은…… 하고 싶은데 컨셉 자존심상 먼저 꺼낼 단어는 아니라서 눈물을 머금고 포기했다.
나는 가오를 위해 돈을 모으는 거지, 돈을 위해 가오를 버리진 않겠다……!
“하면 날 부른 용건은 이게 끝인가.”
“그렇네만…….”
“그럼 더 있을 이유 없겠군.”
“잠깐, 조건은 그게 끝인가?”
퍼주는 조건이면 ‘아싸 이득’하면 되는데 이 사람들은 왜 이렇게 되물어 오는 건지.
아니면 우선 의심하고 보는 건가? 하긴 그게 좋긴 해. 너무 좋은 조건은 상대가 호구인 것보다 사기인 경우가 더 많으니까.
“나를 작작 붙잡는 것까지 추가다.”
근데 저는 전자입니다. 그러니 마음껏 뜯어 드시죠. 대신 성깔을 감당하셔야겠지만!
쾅.
내가 들어야할 것은 다 들었다 판단한 나는, 당당히 회의실을 탈주했다. 한 성의 주인 앞에서 할 짓은 아니었으나 뭐라 하는 자는 아무도 없었다.
“…그, 이쪽도 생각하고 준비한 거니까 더이상의 지원은 필요 없어요. 그러니까 저흰 슬슬 출발하러 가볼게요.”
“잠깐, 수리─.”
“가자!”
“뒷덜미 좀 잡지 말라고요!”
외려 눈치를 또르륵 보던 바람손이 데브를 들고 냉큼 나를 따랐다. 아주 귀신같은 타이밍이었다. 지금 탈출 안 했으면 회의 끝날 때까지 기다려야 했을 테니까!
“으으으윽. 이봐, 정말 저 의뢰 받을 거야?”
“네 알 바 아니다.”
“젠장…… 천만 갈은 나도 없는데!”
“저 돈까지 대신 내줄 셈이었습니까?”
“…이봐, 내가 어떻게든 천만 갈을 마련해 볼 테니까, 성주님한테 안 받으면 안 돼?”
“진짜 대신 내주려 그러네.”
데브 내 속 읽었냐? 어떻게 내 마음을 토씨 하나 안 틀리고 대신 말하지.
“앞서 의뢰한 것에 추가할 테니까─.”
별개로, 이건 좀 그래.
나는 주운 이래 잘 쓰고 있는 시미터를 뽑아 바람손의 목덜미 바로 아래에 가져다 댔다. 바람손의 손이 반사적으로 위로 올라가며 항복의 자세를 취했다.
예리한 칼날이 바람손의 살갗을 아주 살짝 베며 피 한 방울을 떨어트렸다.
“네놈의 헌신과 희생의 방향 따윈 내 알 바 아니다. 그러나 남에게 할 말을 내게 지껄이며 내 인내심을 시험하는 건 그만두는 게 좋을 거다.”
나는 최대한 음산하게, 그리고 다소 빡친 느낌을 연기하며 뇌까렸다.
조금 과한가 싶다가도 컨셉이라면 응당 이러지 않을까 싶었기에 망설임은 버렸다. 무엇보다 선을 먼저 넘은 건 바람손이었다.
“몬타타에 갈 수 있는 선장이, 너뿐이 아님을 명심해라.”
나는 시미터를 천천히, 점차 빠르게 거둬 검집에 다시 넣었다. 펄럭. 코트 자락이 내 움직임에 맞춰 무겁게 팔랑거렸다.
“이번엔 바람손 나리가 잘못했습니다요.”
“…그런 것 같네.”
“됐고, 빨리 가십시다. 이 이상 기사 나리를 기다리게 하면 악마보다 우리가 먼저 베일 테니까요.”
“…그래.”
정말이지, 한참만의 출진이었다.
* * *
인퀴지터는 지평선에서부터 천천히 다가오는─실제론 그녀가 탄 배가 가는 것이지만─섬을 보며 메이스를 어루만졌다.
섬으로부턴 미처 정화되지 않은 마기의 잔재가 선연히 전해져 왔다.
“배다!”
그때, 항구로부터 몇 척의 배가 출발을 시작했다. 그 배는 분명 그녀가 타고 있는 선박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백기를 올리고 신호를 보내게.”
선장의 명령에 선원들이 분주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싸울 의향이 없음을 알리는 사인이 필사적으로 배 곳곳에 올라갔다.
그리고 끝내 자크라티의 항구에서 출발한 배와 그들의 배가 근접했을 때, 교섭이 시작되었다.
“바람손과의 계약을 이행하고자 파견된 지원군일세.”
배의 모든 이를 대표해 대화에 나선 건 아크메이지였다. 하면서 그녀가 내민 것은 바람손과 작성한 계약서였는데, 아래에 찍힌 모험가 길드 인장에 자크라티 쪽 인사들이 조금 누그러진 얼굴을 했다.
위조일 가능성을 배제하진 못할지언정 모험가 길드의 인장은 조금이나마 안심할 수 있는 가치가 있었다.
“정말 마탑의 대현자인가?”
그러나 상대는 그렇게 호락호락한 이가 아니었다. 유독 날선 경계가 뱃전 위로 쏟아졌다.
“그렇다네.”
“하면 그 뒤에 입은 흰옷들은? 내 눈이 잘못된 게 아니라면 아무리 보아도 교단의 사람 같은데?”
“…그것 또한 맞네.”
아크메이지가 어렵사리 긍장했다. 다음 순간 날붙이의 섬뜩한 소리가 바다 위에 울려 퍼졌다. 전부 자크라티 측 배에서 울려 퍼진 소리였다.
“교단이 무슨 염치로 이 땅에 발을 내미려고 하는가! 당장 꺼져라!”
쏟아지는 적의는 칼날보다도 더 날카로우니.
인퀴지터는 예상보다 더 격렬한 적대심에 주먹을 꾹 쥐었다. 메이스의 자루가 손에 단단히 잡혔다.
“당장 꺼져!”
“죽여 버리기 전에 이 바다를 떠나!”
“사라져버 리라고!”
그러나 뽑아선 안 된다. 뽑을 수 없다. 그녀는 결코 과거의 일을 반복하지 않을 것이니까.
“한 번만!”
하므로 인퀴지터는 메이스를 놓은 채 앞으로 나아갔다. 교단의 문장은 박혀있지 않을지언정 그 누구보다 신의 종임을 외치는 모습에 분위기는 더더욱 흉흉해졌다.
“한 번만 이야기를 들어주십시오!”
그러나 그녀는 꿋꿋히 말을 이었다. 어려울 것도 없었다.
인퀴지터는 자신이 대속해야 할 것을 인지하고 있으되 죄책감에 빠져 주눅 들 정도로 말랑한 사람이 아니었다.
애초에 그럴 군상이었다면 악마기사와의 세 번째 마주침에서 다짜고짜 사과하지도, 관용을 배우게 해달라고 매달리지도 않았을 터였다.
“우리가 너희에게 들을 이야긴 없어!”
“압니다. 그렇지만 한 번이면 됩니다!”
요령이 없고 우직하다. 그것은 많은 순간에 단점이 되지만, 그럼에도 아주 가끔은 장점이 되어 주었다.
“필요 없다고!”
“한 번만 들어주십시오!”
그리고, 그 순간이 바로 지금이었다.
“제게, 저희에게 단 한 번의 기회를 주십시오!”
부러질지언정 꺾이지 않을 녹색 눈이 반짝 빛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