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1화 신이 있다면 (4)
이게 맞나? 인퀴지터는 늙은 현자를 두고 차마 입술을 떼지 못했다.
야바드 지방의 사람들이 바라지도 않았는데 그들이 출정하는 것이 정말 옳은 일인가? 그저 머릿속이 복잡했다.
“40년 전, 야바드 지방은 신전을 전부 철수시키고 교단의 출입을 금지했습니다.”
그녀는 역사에 기인하여 그들이 감내해야 할 대가를 혀 위에 굴렸다.
“그러나 그곳에 나타난 악마를 관망할 수는 없습니다. 그것들을 방치하면 그곳의 모든 사람이 도탄에 빠질 것입니다. 사제로서, 용사로서 저는 그것을 두고 볼 수 없습니다.”
그리고 그녀의 사명을 뇌까렸다.
“그래서, 저는, 저는 그러니까…….”
하면 남는 것은 혼란뿐이라. 절대적인 명제 두 개가 부딪치며 마음을 어지럽혔다.
신의 말씀을 따라 악마들을 절멸시켜야 할 듯하면서도, 독선에 의해 피해 본 자들 앞에서 언제나 무릎 꿇으라던 가르침이 마음에 턱턱 걸렸다.
당연히 신의 말씀이 우선인데, 사람들의 피해를 줄이는 것이 더 중요한데, 그러한데도.
“인퀴지터.”
그것을 이해한다는 양 늙은 현자가 조심히 그녀의 손등 위에 손을 얹었다. 털이 복슬복슬한 샤기족의 손은 부드럽고 또 따뜻했다.
“교단을 증오하는 자들을 구하는 것이 옳은가, 아니면 그들의 심정을 이해하여 가지 않는 게 옳은가. 그에 대한 고민에서 정답은 없습니다. 옳고 그름도 없지요.”
“하지만…….”
“선택의 결과를 판단할 수 있는 건 당사자가 아닌 살아남은 자들뿐입니다. 결과를 받아들이고 겪은 후의 사람들만이 우리의 선택을 비판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저는, 저희는 어찌 해야 한다는 것입니까?”
“마음이 가는대로 하셔야겠지요.”
“…예?”
“정답이 없는 문제에서 답을 구하는 방법은 그뿐이지 않습니까.”
“그러다가 제가 고른 것이 틀린 것이라면, 그땐 어찌합니까?”
“정답이 없는데 오답이 어디 있겠습니까? 다만 후세가 보기에 좀 더 나았을 선택지는 있겠지요. 그러나 그건 후세의 입장입니다. 한 치 앞도 보지 못하는 우리가 미래의 판단을 알 수는 없습니다.”
아크메이지는 툭, 툭, 그녀의 손등을 토닥였다. 현자의 입에 걸쳐진 미소는 대단히 부드럽고 온화하다. 깨어난 이래 병석에 앉아 쌓인 일들을 전부 처리한 사람이라 믿기 힘들다.
“그러니 인퀴지터. 당신 나름의 최선을 고르십시오. 증오와 경멸을 직면하더라도 사람을 구하는 것, 혹은 그들의 마음을 헤아려 방관하는 것. 아니면 그 외의 다른 모든 길 중에서 하나를 말입니다.”
“…야바드인들이 저흴 반겨 줄까요?”
“글쎄요. 제가 생각하기엔, 그것 자체를 바라지 않은 것이 먼저인 것 같습니다. 별개로, 예. 그들이 적대적으로 나올 확률은 높다고 생각은 합니다만.”
“그렇습니까.”
결국 명확한 답은 없는가. 인퀴지터는 현자도 결정하지 못한 문제를 두고 주먹을 깜빡였다.
“이대로, 물러나 있을 수만은 없습니다.”
그렇지만 그녀의 선택은 이미 정해져 있었다. 단지 그것에 확신이 없었을 뿐.
“그렇습니까.”
“예.”
그러나 확신은 언제나 없었다. 그녀는 약간 머뭇거리며, 동시에 망설임 없이 답을 내놓았다.
“저는 그들을 간과할 수 없습니다.”
마탑의 조사 결과, 용의 타락은 대규모 부정 의식 때문으로 밝혀졌으니. 신전이 원인을 좀 더 추적한 끝에는 그 부정 의식의 시작 지점이 야바드 지방임을 알 수 있었다.
즉, 야바드 지방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는 알 수 없으나, 자칫 잘못했다가는 해당 지방 전체가 악마계약자들의 손아귀에 떨어질 수 있단 소리다.
그녀는, 그녀는 그것을 결코 용납할 수 없었다.
“비난이 날아올지도 모릅니다. 원망할지도 모르고, 어쩌면 공격을 가할 수도 있지요. 그럼에도 구하러 갑니까?”
“…그건, 저희가 과거에 저지른 죄의 대가지 않습니까. 그게 그들을 외면할 이유는 못된다고 생각합니다.”
아크메이지의 눈꼬리가 깊어졌다. 아직 서투른 인퀴지터의 눈에도 그것이 좋은 신호란 게 확 와닿을, 그런 형상이었다.
“그렇다면 인퀴지터, 이것을 명심하십시오. 결코 과거의 일을 반복해선 안 됩니다.”
“그건 당연한 일입니다.”
이것이 진정 맞는 선택인지는 모른다. 그러나 최선이다. 인퀴지터는 그런 확신을 얻은 채 일어섰다.
내일 해가 뜨는 순간, 출정이다.
* * *
나는 일곱 척의 배를 참수한 후, 새벽에 한 번 더 배를 처리했다.
새벽에 온 건 딱 한 척이었는데, 아무래도 돌아오는 배가 없으니 상황 파악하라고 한 척을 더 보냈던 게 아닐까 싶다. 정확한 건 바다에 가라앉은 작자들만이 알겠지만.
“자나?”
바다에서 배가 관측되는 즉시 튀어나갈 수 있게 성벽 위에서 눈 감고 있었을까. 바람손이 내게 다가왔다.
데브도 내 옆에서 도롱도롱 자고 있는데 얘는 체력이 뭐 강철 수준이다. 성주에게 보고하랴 상황 파악하랴 일이 많았을 텐데 자는 걸 몇 번 못 봤네.
“일어나 있네.”
너 때문에 깼다만. 나는 그런 투정은 집어넣은 채 녀석이 내 근처에 앉는 걸 보았다. 끙차. 그런 소리를 낸 바람손이 자리를 잡았다.
“그보다 모포 같은 건 못 받았어? 여기가 남쪽이라지만 밤은 좀 쌀쌀할 텐데.”
그러다 문득, 담요 하나 두르지 않은 날 보며 바람손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이 미친놈들. 아무리 외부인이라지만 도시를 도와주는 사람한테 모포 하나를 안 나눠줘? 이것들을 정말.”
아니, 그거 오해인데. 나 덮을 거 받았는데. 그냥 안 추워서 다른 애 줬을 뿐인데.
“수선 떨 거면 꺼져라.”
“…당신은 자존심이 있는 건지 없는 건지 모르겠다니까. 젠장. 당신이 해주는 게 얼만데 그 정도 편의는 누리라고.”
아 받았다니까?
나는 살풋 바람손을 노려보았다. 바람손이 결국 한숨과 함께 한발 물러섰다. 최소한 이에 대한 항의는 더이상 안 할 것 같다. 휴. 다행이다.
“…자, 그럼 이거라도 받아. 모포도 못 받았으면 먹을 것도 못 받았을 텐데. 쯧.”
대신 바람손은 내게 팔을 뻗어 무언갈 건넸다. 손에는 겉이 번지르르한 무언가가 들려 있다.
“과메기인데, 먹어 본 적 있을까 모르겠네.”
…뭐? 과메기? 없어서 못먹지!
“생선 말린 건데…… 배는 안 차더라도 요깃거리는 될 거야.”
마, 과메기를 누가 요깃거리로 먹냐. 나는 컨셉에 어긋나지 않는 손놀림으로 과메기를 받아, 입에 넣었다.
비린내가 좀 심하긴 했지만 쫀득쫀득하니 혀에 쩍쩍 달라붙었다.
여기에 마늘이랑 쪽파, 고추, 배추까지 있으면 딱인데. 김이나 미역에 싸먹어도 좋고.
나는 아쉬움을 겨우 삼키며 길다란 생선을 뜯어먹었다. 허기가 최고의 반찬이라고. 본래도 좋아하던 축의 과메기가 유독 맛있게 느껴졌다. 냠냠 굿이다.
“뭐야, 잘 먹네? 뭍사람들은 비린내 때문에 잘 못 먹는 경우가 대부분인데.”
바람손이 깔깔대며 본인 몫을 양도했다. 거절하지 않았다. 아까 모포 받을 때 먹을 것도 받긴 했는데, 그래도 포만감이 다 차진 않았거든.
“…….”
무엇보다 과메기가 맛있어.
나는 기름지고 쫀쫀한 살을 이로 으깨고 찢어 가며 삼켰다. 장갑에 기름기가 묻어 미끌미끌했지만 알아서 깨끗해질 거라 신경쓰지 않았다.
“일단, 음. 고마워. 여러모로.”
한데 입안의 생선살을 전부 삼켰을 때, 좌불안석이던 바람손이 어색하게 입을 뗐다.
“…별개로, 의뢰를 살짝 변경해도 될까? 변경한 부분도 보수는 챙겨 줄게.”
의뢰 변경이라. 대체 뭘 바꾸려는 건지.
“변경할 내용은 별거 아니야. 본래 제안했던 것 이전에 자크라티의 보호를 추가하고 싶어.”
“정확히, 어떤.”
“일단 도시 내의 악마를 전부 제거해 줬으면 해. 그리고 아까처럼 다가오는 배들은 침몰시키든 뭘 하든 해서 자크라티에 처들어오지 못하도록 해주고…… 그렇게 자크라티가 완전히 안전해졌다 싶으면 원래 계획했던 걸 하는 식으로.”
나는 그 제안에 기분이 묘해졌다.
그건 부탁하지 않아도 원래 그렇게 해줄 거였는데. 그보다 자크라티에 도착한 이상 이런 건 바람손이 아니라 성주가 담당해야 하는 거 아닌가?
나와 계약한 사람은 바람손이 맞지만, 엄밀히 따졌을 때 바람손은 성주의 대리로 나를 끌어들인 거니까.
“거기에 이제 이 모든 건 당신 자의인 거지.”
오…… 바람손이 날 담당한 게 아니라 그냥 바람손의 단독이었구나.
“진짜 자의로 해달라는 소리는 아니니까 오해는 마라? 성주에게 그런 척만 해달라는 거야. 보수는 내쪽에서 챙겨 줄 테니까.”
나는 이제 다른 의미로 기분이 오묘해졌다.
형제들 형제들 노래를 부르더니 정작 여기와선 형제들 언급도 없고. 와중에 성주 대신 본인이 대가를 치르려 하는 사략선 선장이라니.
“확인했다.”
그렇지만 속사정이 아무리 궁금한들 남에게 관심 없는 컨셉으로 무얼 할 수 있으랴. 나는 그냥 그러려니 하기로 했다. 보수 주면 된 거지 뭐.
“좋아.”
어색한 공기가 다시 차오르기 시작했다.
“…혹시 마기해독제 더 남은 거 없지?”
“없다.”
“그래.”
그러니까, 다시.
터벅터벅
그때 신발 굽 소리들이 연달아 이어지며, 성벽 위로 한 무리가 올라왔다.
피곤함들이 덕지덕지 묻은 면면을 살펴보면 아까 구해 줄 때 뵙고 더이상 볼 기회가 없던 성주가 껴 있다.
“그리 찾았을 땐 얼굴 한번 보이지 않더니, 여기 있었구나.”
성주는 힐끔 바람손에게 시선을 주더니─바람손은 눈을 데굴 굴려 피했다─곧 내게 눈길을 고정했다.
“당장 일어…….”
“그만, 자크라티의 은인께 무슨 무례인가.”
참고로 지금 나는 성가퀴에 기대 앉아 있는, 다소 불량한 자세를 하고 있다. 성주님이 오는 걸 봐놓고도 안 일어난 건 덤이고.
바람손? 바람손은 헐레벌떡 일어나서 내게 제발이란 시선을 하긴 했는데, 그렇다고 방금 기사처럼 눈치 주진 않았다. 암, 내 성깔을 며칠 겪어 봤으면 절대 못 주지.
“아깐 경황이 없어 제대로 인사를 못 했더랬지. 다시 인사함세. 나는 피우온. 부족하지만 이 땅을 이끌고 있는 이일세.”
피우온 성주는 현명하게도 내가 고개를 많이 꺾을 필요 없는 거리까지만 왔다. 그러니까, 내가 앉아서도 눈동자만 힐끔 올리면 시선을 얽을 수 있는 거리에 멈춰섰다고.
덕분에 나는 올려다본다는 감각 없이 그녀를 마주할 수 있었다.
“하고 싶은 말은 정말 많네만, 그중 가장 우선되어야 할 것은 이것이겠지.”
그리고, 성주가 천천히 무릎을 꿇었다. “성주님!” 기사와 병사, 그 외 동석한 모든 이들이 기함했으나 그녀의 무릎이 차디찬 돌바닥에 닿는 것을 막진 못했다.
“모두를 대신해 감사를 전하네. 정말 고맙네.”
…나 갑자기 엄청나게 죄인이 된 기분이 들어. 내 본래 몸보다도 연세가 있으신 분 같은데 그분이 나한테 무릎 꿇은 것도 모자라 인사를 받는 내 자세는 이렇게 삐딱하다니……! 컨셉질과 별개로 내 안의 유교맨이 날뛴다!
“감사는 필요 없다. 의뢰를 따라 움직였을 뿐이다.”
그렇지만 유교보다 목숨이지.
나는 예의를 후룩후룩 말아 싸가지에 싸먹었다. 과메기보단 맛없더라.
“그렇다 해도 어찌 감사를 거둘 수 있겠는가. 그대의 헌신과 노고가 아니었다면 지금보다 더 많은 피해가 일었을 것을.”
별개로 좀 후회가 됐다. 이렇게 가시방석 대화 나누게 될 줄 알았으면 그냥 좀비 잡으러 갈걸.
도시 구역 휩쓸고 다니며 좀비와 숨은 가고일 잡다가 확보한 생존자 수가 점차 불어나겠다.
피로도 때문에 뒤지게 고생한 적도 있다 보니 사람들 데려다줄 겸, 배 오는 거 확인할 겸 2시간만 자고 떠나자 했더니 이런 상황이 연출될 줄은 몰랐다.
“염치 불고하고 그대에게 더 부탁하고 싶은 게 있네. 부디 도시에 남은 악마들을…….”
아니다. 지금 가면 되는 거 아닌가? 피로도 74면 그래도 버틸 수 있잖아!
피로도 떨어트리고 싶으면 어디 집 하나 들어가 쪽잠이라도 자면 되고. 배고픈 것도 적당히 빈집 털어서 먹을 거 주워 먹으면 끝이고.
물론 집주인한테 다소 죄송하긴 한데 좀비됐을 확률이 높으니까 그렇게 눈치 볼 건 없지 않을까? 너무 고인 모욕인가?
그치만 산 사람은 살아야지. 좀비가 안 되셨다면 제가 먹고 힘내서 구해 드릴 테니까.
어쨌거나 나는 벌떡 일어났다. 퍼져 있던 코트 자락이 올라가고 성가퀴에 기대 두었던 검이 내 손에 잡혀서 잠깐 지지대가 되어 주었다.
“배를 준비해라.”
“……?”
“내일, 감히 악마와 손잡은 놈들을 모조리 참할 테니.”
“……!”
내 말을 알아들은 듯 바람손이 허리를 바짝 폈다. 그러니까, 아마도 그럴 거다. 표정을 봤다면 보다 확실했겠지만 지금 내 몸은 바람손을 등지고 성가퀴를 향해 있어서.
“잠깐─.”
그러고보니 나 여기서 왜이렇게 많이 뛰어내리냐. 근데 돌아가기엔 너무 귀찮아. 점프 숏컷 갓겜.
* * *
부스럭.
“저 양반은 지치지도 않나…….”
아까도 본 것 같은 장면에 잠시 얼이 빠졌을까. 바람손은 며칠 동안 귀에 익은 목소리에 퍼득 정신을 차렸다. 성가퀴 아래서 웅크려 자던 청년의 목소리였다.
“으하함.”
남쪽 지방이라도 밤은 꽤 서늘하다. 해서 모포에 의지한 채 도롱도롱 잤던 청년이 기지개를 폈다.
“…뭐야 이 담요는.”
그러다 본인이 돌돌 말고 잔 모포 외 추가로 덮고 있던 담요에 물음표를 한 번. 머리를 긁적이다가 저를 발견하고 인사 한 번. 그런 후 주위를 둘러보다가 성주를 발견하고 덜컥 굳기를 한 번.
“…새벽인데 성주님이 왜 여기 계시는지.”
청년은 떨떠름한 목소리로 일단 자리에서 일어섰다. 악마기사보단 낫지만 예의 말아먹은 건 비슷비슷하다.
뭐, 덕분에 제 긴장도 풀리긴 했지만.
“들으셨죠, 성주님? 고용한 모험가가 오늘 안에 좀비들을 다 처리해 주겠답니다. 그러니 걱정 마시고 사람들에게 연락을 보내시죠.”
그는 기사들이 청년에게 시비 걸기전, 너스레를 떨며 끼어들었다. 물론 성주와 시선은 절대 마주치지 않았다.
아무렴 이제껏 살아남은 형제들을 통해 말을 전해 온 이유가 뭔데. 도통 정면으로 마주할 자신이 없어서가 아니었나.
“보고받으셨겠지만 람차반 선착장에서도 사람들이 방어선을 형성해 버티고 있을 거예요. 그 외에도…….”
“수리야.”
바람손은 몸을 흠칫 떨었다.
오래 전에 그리도 자주 불렸고, 어른이 된 후론 단 한 번도 들어 본 적 없던 그의 이름이 귓속을 파고들었다.
“고생 많았다. 그리고…… 고맙구나.”
그는 여유로운 척하며 돌렸던 몸 그대로 멈춰 섰다. 성주님의, 아니 피우온의 얼굴을 제대로 볼 자신은 없었다.
“그때도, 지금도. 정말로.”
지금 봤다간, 눈에 잔뜩 맺힌 눈물 방울이 후드득 떨어질 것 같았다.
“해, 해적 새끼한테 뭐가 고맙단 거예요. 전 그냥 당연히 보수를 보고 한 것뿐이거든요?”
그는 갈라지는 목소리를 억지로 쥐어짜 냈다. 옆에서 “그건 제 말투인데…….” 라는 딴죽이 들려온 것 같지만 알 바 아니었다.
“이 도시가 망하면 제 근거지도 없어지니까 도운 거라고요. 알았어요? 그러니까 어서 도시 정비나 하세요. 전 의뢰받은 대로 비푸릿 놈들까지 처리하러 갈 테니까.”
수하들이나 형제들 앞이라면 모를까, 성주와 그 기사들 앞에서 눈물을 보일 생각은 없다.
그는 평소보다 더 삐딱한 느낌의 큐어티 청년을 붙잡고 서둘러 반대쪽 계단을 통해 성벽을 내려갔다. 청년은 대단히 불쾌한 눈치였지만, 그래도 성주의 시야 안에서는 그에게 항의하지 않았다. 고마운 배려였다.
“아오, 뒷목을 왜이렇게 세게 잡아요.”
“아, 미안.”
그렇게 성주가 그들을 볼 수 없는 곳까지 후다닥 이동했을까. 그는 자리에 바로 쪼그려 앉아 손에 얼굴을 묻었다. 손바닥이 금세 축축해졌다.
“미안해…….”
“…어휴.”
청년에겐 정말로 미안하다. 그렇지만 지금 우는 것엔 죄책감보다는 차라리 환희에 가까울 감정만이 그득해서.
“아, 젠장. 쪽팔리게…….”
빌어먹을 형제들아. 먼저 간 형, 누나, 동생 놈들아.
방금 봤냐, 봤냐고. 어머니가, 해적이 된 놈들은 다신 얼굴 볼 생각 말라던 어머니가 내 이름까지 불러 주신 거 봤냔 말이야.
“우는 게 뭐가 쪽팔려요.”
“바닷사람은 우는 거 아니야…… 넌 뭍사람이라서 모르겠지만.”
“지랄하네.”
“나한테 욕했냐 지금?”
“댁이 악마기사도 아니고 내가 말 가릴 이유 있어요?”
“차별하는 거 봐라.”
바람손은 지금껏 그를 위해 희생한, 자크라티를 구하기 위해 죽은 형제들을 떠올렸다. 그리고 그가 너무 늦어서 구하지 못한 이들을 상기했다.
빌어먹게도 미안했다. 그렇지만 동시에 안 미안했다.
“…악마기사한테 말할 거야.”
“댁이 어린앱니까? 그거 쪼르르 이르게?”
“새끼, 뱃사람은 이런 거 안 잊어.”
“당신만 쪼잔한 거겠죠!”
성주가 그의 이름을 불러 줬다는 건, 그들의 이름을 불러 준 것과 진배없으므로.
우리의 이름이 불려진 순간, 죽은 이들은 더없이 만족했을 것이므로.
“…고맙다.”
“나 말고 기사 나리한테 말하라고요.”
“그 양반은 감사를 안 받잖아.”
“그러니까 그 양반한테 말하고 차이라고요.”
이 빌어먹을 도시의 성주를 향한, 그들 형제의 짝사랑은 그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