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주인공이 컨셉충이면 곤란한가요-60화 (60/389)

◈60화 신이 있다면 (3)

방어선을 형성한 채 버티기를 반나절.

밤이 되어서야 도시에서 일었던 난리는 거의 소강 상태에 다다랐다. 좀비가 퍼진 구역과 아직 안 퍼진 구역이 명확히 나뉘어 대립 중이라고 할 수도 있겠다.

“약은 더 남은 거 없어요?”

“없어. 그 인간이 주고 간 건 그것뿐이었어.”

“아쉽네요.”

악마기사가 준 마기해독제 꾸러미는 다 썼다.

악마에게 대항하던 과정에서 마기에 침식된 자가 꽤 많았던 까닭이다.

혹시 몰라 감염된 자에게 먹여 보기도 했지만, 아쉽게도 그건 먹히지 않았다. 마기 침식에 당한 사람 몇 명이라도 구할 수 있던 게 어딘가 싶냐마는.

“흐아아악! 살려 줘, 살려 줘!”

그때 좀비가 퍼진 영역으로부터 누군가가 달려왔다.

“좀비다!”

“화살 준비해!”

“물린 자국은?! 함부로 손 뻗지 마!”

“당신 물렸어?!”

생존자를 따라오던 좀비들은 화살을 맞고 나가떨어졌다. 생존자는 그사이 바리케이드에 거의 근접한 상태다.

곳곳에 치켜세워진 횃불이 사방을 밝히며 생존자의 모습을 비추었다.

“아니야, 난 아니야!”

“잠깐, 물러나! 물린 자국이 있어!”

“난 아니라고!”

아니라고 부정하지만 그 팔뚝엔 선명한 이빨 자국이 옷을 뚫고 핏물과 함께 드러나 있다.

“구해 줘!”

“안돼, 언제 변할지 몰라!”

“난 아니─ 컥!”

그러던 도중 바리케이드를 기어오르려던 이가 걸음을 멈추고 온몸을 뒤틀기 시작했다. 대응 속도와 감염 속도가 현저히 차이나지만 그 장면만큼은 40년 전이랑 똑같았다.

악마가 기생한지도 모른 채 모여든 사람들. 사제들의 강경한 격리. 부정하던 이들로 인해 벌어진 싸움. 그렇게 번져 버린 불꽃과 피, 피, 그리고 또다시 피…….

“이봐요, 이봐! 바람손 나리!”

젊은 큐어티 청년이 그의 입을 막았다. 과할 정도로 빠르던 호흡이 강제로 막히자 어지럽던 머리가 조금은 가라앉는 듯했다.

“정신차려요!”

“응, 응…… 그래야지…….”

그는 기억의 바다에서 허우적거리되, 어떻게든 이성을 잡았다. 겨우 완성된 전선이었다. 여기서 일이 터지는 걸 막지 못하면 더 큰 피해로 돌아올 게 뻔했다.

좀비로 변한 이가 기어코 방어선을 지키던 뱃사람에 의해 목이 베였다.

“어째서, 어째서 또…….”

“아빠…….”

그러나 그 솟구치는 핏물과 사방에서 들려오는 울음소리 속에서 존재하다 보면, 과거의 순간이 계속해서 눈앞에 어른거렸다.

하필 그가 슬랜드족이라서, 인간 중에서 가장 장수하는 종족이어서 더 그러했다. 차라리 다른 종족이었다면 노화에 따라 기억이 가물가물해졌을지도 모르는데.

“빌어먹을…….”

슬랜드족의 평균 수명은 150년에서 200년 사이. 바람손의 나이─53─정도면 전성기에 속했고, 기억력도 멀쩡했다.

그게 문제였다.

각인되다시피 한 그 시절의 일이 너무 손쉽게 부상했다. 13살. 그 어린 날을 비통함으로 물들였던 그 시절이 너무도 선명하게 떠올랐다.

“날아다니는 악마가 온다!”

그때 누군가가 소리를 질렀다. 공포에 잠식되던 머리가 조금은 맑아졌다.

우습지만 그랬다. 하늘을 날아다니며 불을 뿜는 악마가 저 좀비들보다 차라리 나았다.

“다들 대비해!”

바람손은 검을 꼬나쥔 채 사람들에게 지시했다.

배를 해체하건 집 벽을 뜯어오건 해서 준비한 나무판자들이 사람들의 머리 위로 속속들이 올라왔다. 불이 최대한 붙지 않도록 바닷물에 적신 것들이다.

캬아아아!

그리고 날아다니는 괴물의 소리가 거의 가까워졌을 때. 콰직, 하고 미묘한 파열음이 귓속을 파고들었다.

“나리?”

그의 바로 옆에 있던 큐어티 청년의 귀가 까딱였다.

캬아─ 캭!

비행하는 악마의 우짖음이 기묘하게 꺾였다.

“잠깐만.”

바람손은 판자를 살짝 들춰 하늘을 살폈다. 악마의 몸뚱이가 밧줄에 휘감겨 한쪽으로 끌려가고 있었다.

쾅!

밧줄이 기어코 악마를 추락시켜, 바닥에 꼬꾸라트렸다. 서걱! 그 뒤에 이어지는 건 매끄러운 절삭음이다.

고깃덩이를 단칼에 베면 나는 질기고도 섬뜩한 소리가 핏물과 함께 터져 나왔다.

“나리!”

큐어티 청년이 달려 나가고, 바람손은 저도 모르게 숨을 멈췄다.

현재의 혈향과 과거의 피비린내가 뒤섞였다. 어디서 홀연히 흘러드는 재냄새는 마을이 불타는 향기인가 했다. 그때처럼, 그 순간처럼.

『수리야, 달려라. 절대 뒤돌아보지 말고 그냥 달려. 알았지?』

『아빠, 아빠는?』

『아빠는 괜찮아. 그러니까 달려, 달려!』

신전의 이단심문관들이 좀비와 산 사람을 구분하기 힘들다며 마을을 통째로 불태웠던.

아버지가 목숨 바쳐 이단심문관의 시선을 끌고 그가 빠져나갈 틈을 벌어 줬던 그 빌어먹을 날처럼.

“잠깐, 자국을 확인─.”

“저 사람은 확인할 필요 없습니다요!”

그리고, 그리고…….

『이제 괜찮다, 얘야.』

“바람손.”

그의 구원자가 숨어 있던 그를 발견하고 손 내밀었던 그 찰나와 닮도록.

『이제 넌 괜찮아.』

“성주를 구했다.”

그래도 이번엔 당신을 잃지 않았구나. 이번엔 그래도 당신을 잃지 않았어.

내 구원자, 나의 은인, 나의…….

“갈 텐가?”

“당연히.”

어머니.

* * *

골렘을 처리하고, 성주도 구하고, 골렘이 쳐들어온 길을 따라가며 깔린 적들을 죄다 정리했을까.

암센 선착장에선 설마 했던 악마숭배자들까지 발견해 그네들을 모조리 처치했다. 그외 추가 병력도 처치했고.

그런 다음 마을을 관통해서 우리 쪽 일행이 있을 곳으로 천천히 돌아왔는데…….

“…….”

나는 거무죽죽한 바람손의 얼굴을 보고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건지 궁금해졌다.

내가 없던 사이에 사람이 떼거지로 죽었나? 아까 아는 얼굴들 꽤 보였던 것 같은데.

심지어 모험가들은 자기네들한테 맡겨 달라며 다녀오라고 손까지 흔들어 줬다. 피해가 컸다면 절대 그런 반응은 나오지 않았을 터였다.

함에도 바람손은 왜 멜랑꼴리한 표정인가.

서걱!

나는 감도 안 잡히는 상황에 일단 검이나 휘둘렀다. 사람 기척이 없는 집 위로 가고일의 잘린 몸뚱이가 얹어졌다.

“사람들을 두고 와도 괜찮은 겁니까?”

“…40년 사건 이후로, 좀비 발생에 대한 대응법은 다들 숙지하고 있어. 해적이고 민간인이고 다들 단합해서 방어선부터 친 거 봤잖아.”

“그건 그렇습니다만.”

“…감염 속도가 기이할 정도로 빠르긴 하지만, 괜찮아. 괜찮을 거야…….”

참고로 우리는 딱 셋이서 성으로 이동하는 중이다.

사람들 전부가 성으로 이동하면 좋겠지만 그건 여건이 안 되니 뭐 어쩔 수 있나.

열몇 명까지라면 모를까, 백을 넘기는 인원은 나라도 커버가 안 된다. 호위 거리가 멀고 밤이라 습격에 취약하단 페널티까지 있는 지금은 더더욱.

사람들도 그걸 알고 방어선에 남았다. 아무도 불만이 없을 거다. 만약 있다고 해도…… 드러내지 않으면 없는 거지. 응.

“이번엔, 그런 대학살 같은 거 안 벌어질 거야…….”

나는 튀어나오던 좀비의 목을 베다 말고 흠칫했다.

장르가 판타지에서 좀비 아포칼립스로 바뀐 것도 가뜩이나 당황스러운데, 여기서 대학살이라?

머릿속을 스쳐 지나가는 장면에 나는 검만 괜히 고쳐 쥐었다.

배 다섯 척을 수장시켜 버린 것도 대학살에 속할까? 다소 쓸모없는 잡념은 덤이었다.

“……! 당신은!”

그때 성에서 반응이 왔다. 정확힌 성문 앞에서 진 치고 있던 인원한테서.

어두운 데다가 딱히 횃불 들고 온 것도 아닌데 잘도 봤다 싶다.

“문을 열어!”

어쨌거나 나를 알아본 병사들이 허둥지둥 내려 둔 쇠창살 문을 올렸다.

쇳소리와 함께 올라가는 철창에 바람손이 금방이라도 뛰어나갈 것처럼 몸을 움찔움찔거렸다.

“생각했던 것보단 피해가 덜한 것 같네요. 다행입니다, 바람손 나리.”

“…그래.”

그러고 보니 바람손의 형제들은 어떻게 됐으려나.

형제들을 두고 도박할 수 없다, 형제들을 구해 달라. 그랬던 바람손의 말을 여즉 기억하는데, 아직까지도 그 형제들이 누구누구인지 모르겠다.

진짜 혈육을 지칭하는 것 같진 않아서 대충 자크라티에 두고 온 사략선 동료겠거니 했는데…… 낮에 콕 집어 구해 달란 건 성주님뿐이었단 말이지?

성주님이 형제라 보기엔 단일 명사와 복수 명사의 차이가 있다. 감이 잘 안 잡힌다.

“수리야?”

그때, 누군가가 바람손의 이름을 불렀다.

“마얀!”

“수리야! 진짜 너구나!”

열린 성문 사이로 달려 나온 건 나와도 면식이 있는 이였다. 아까 부상을 무릅쓰고 성주님이 성 안에 있음을 알려 준 그 사람이다.

“돌아온 거야?”

“…그래. 도와줄 사람을 데리고 돌아왔다.”

나는 두 사람의 포옹을 피해 성 안을 훑었다. 곳곳에 횃불이 있어, 밤임에도 시야는 제법 밝았다. 아마 좀비가 다가오는 걸 쉽게 확인하기 위해서 저리 해둔 것일 테다.

“성주님은?”

“안쪽에 안전히 계셔.”

“그래……? 그거 다행이네.”

“찾아가 봐. 반겨 주실 테니까.”

“…응, 그래야지.”

그보다 뚫린 성벽을 대충이나마 메워 놨네. 나는 내가 성을 떠난 후 생겼을 바리케이드를 발견하고 나름 만족해했다.

내부 정리만 다 되었다면, 그러니까 성 안에 좀비가 남아 있지 않다면 이곳에서의 안전은 걱정할 필요 없을 것이다.

“으윽. 저게 배에서 봤던 그 괴물입니까? 성벽을 부수던?”

한편, 데브는 내가 죽인 괴물의 사체을 보고 오만상을 찌푸렸다. 이해할 수 있는 반응이었다.

본래도 보기 좋은 외형이 아닐뿐더러 오체분시된 지금, 누더기골렘은 흉함의 정점을 찍고 있었다.

“대체 일이 어떻게 돌아가는 건지. 기사 나리가 아니었다면 피해가 엄청 커졌겠습니다.”

데브는 성 안에 있던 관목의 가지를 뚝 꺾었다. 콕콕. 나뭇잎 잔뜩 달린 나뭇가지가 누더기골렘의 사체를 찔렀다.

“혹시 비푸릿이 악마숭배자들과 계약을 맺은 걸까요?”

글쎄. 아마도 그렇지 않을까.

비푸릿 일당이 좀비에게 공격당하지 않는 것도 그렇고, 아까 항구에서 악마계약자들 여럿을 발견해 죽였으니까.

더구나 녀석들은 ‘갑작스레’ 도시를 먹을 만큼 세력이 강맹해졌다고 했다. 그 이면에 악마계약자들과의 협력이 있다면 그것도 바로 설명이 된다.

하필 내가 딱 왔을 때 터트릴 건 뭔가 싶지만.

아니 진짜 농담 아니고, 어떻게 가는 곳마다 딱 타이밍 맞게 사건이 터져. 이러니까 내가 게임이란 의심을 못 끊지. 어이가 없어서 정말.

이러다 도시 피해자 숫자가 일정 넘어가면 진짜로 GAME OVER 뜨거나 하는 거 아니야? 와. 생각만 해도 끔찍하다.

하수도 때도 용잡이 때도 다시 하기 싫었지만, 이건 다른 의미로 진절머리 났다. 그 두 가지는 내가 몸을 날리면 피해자를 딱 줄일 수라도 있지, 얘는 사람들이 잘해 줘야 해결되는 미션이기 때문이다.

아무렴, 도시의 넓이에 비해 내 몸뚱이는 하나인걸.

“낮 이후로 습격이 더 없다는 것도 이상하고…….”

나는 당장이라도 밤순찰을 돌아야말까 고민하다가, 그 말에 흠칫 손을 떨었다.

그, 추가 병력 걱정하는 거라면 게네가 있긴 했는데 말이다…… 그것도 서너 시간 전에, 내가 악마숭배자를 처리했던 암센 선착장에서 나타났긴 했는데…….

그, 항구에 도달하기도 전에 내가 게네를 몽땅 베었다. 배부터 해서 뭍까지 헤엄쳐 오던 자들까지 전부.

“에, 또 어딜 가십니까?”

…솔직히 육지에 다다르면 너무 귀찮아질 것 같았어.

그리고 그건 지금도 그렇다.

“설마, 남은 악마들도 밤새 잡으실 겁니까?”

“음? 잠깐. 당신 어디가?”

나는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피로도가 아직 60선이기도 하고 감이 영 찝찝한 게 암센 선착장을 다시 한번 가봐야 할 것 같았다. 혹은 서쪽에 있다는 까투낫 선착장이나.

“잠깐은 쉬고 가십쇼. 곧 새벽이지 않습니까.”

데브의 손이 내 옷깃을 붙잡았다. 나는 그것을 날카롭게 쳐냈다. 데브도 순발력이 좋아서 잽싸게 손을 빼긴 했는데, 닿기는 약간 닿은 것 같다.

“나리.”

“내게 참견 마라.”

그거 조금 맞았다고 멍드는 거 아니겠지. 캐릭터 근력이 워낙 좋아서 약간 걱정이 된다. 그렇다고 살살 치진 않았겠지만.

“이봐, 성주님은 뵙고 가야지.”

“쓸데없는 일에 낭비할 시간은 없다.”

바람손의 제안도 쳐내며, 나는 쌓아 둔 가구를 밟고 올랐다.

바리케이드 너머로 낮에 한 번 갔던 길이 보였다. 내가 한 번 지나가며 죄 죽여 버린 악마의 흔적은 덤이다.

“좀 쉬란 이야기거든? 댁의 체력이 아무리 좋아도 휴식이 쓸데없는 일 같진 않은데.”

그건 맞지. 맞는데…… 컨셉이 허용 안 하는 걸 어떡해!

무엇보다 던전처럼 분리된 공간에 있다면 모를까, 시가지에 좀비랑 사람들이 섞여 있다니까 좀 불안했다.

막, 엄청나게 겁난다기 보단 과제 남겨 두고 자는 느낌? 마감 앞두고 감기 걸린 느낌?

실제로 퀘스트 항목에 악마제거가 남아 있는 만큼 할 일이 남아 있는 것도 맞긴 하고.

어쨌거나 이 미묘한 조마조마함이 썩 마음에 들지 않는다. 밤사이 사람들이 너무 죽여서 리트라이하게 될 것 같은 가능성은 더욱 끔찍했다.

이런 심정으로 계속 있느니 그냥 좀 더 일하고 만다.

“만약 내가 의뢰한 것 때문에 무리하는 거라면…….”

“무리?”

나는 몸을 틀어 뒤를 돌아보았다.

“날 모욕하는 건 용납하지 않는다.”

“…그래, 방금 건 사과하지. 그런데─.”

“그만두십쇼. 악마가 등장한 이상 기사 나리는 아무도 못 말립니다.”

데브가 끙차, 하며 바리케이드에 올랐다. 따라올 생각인가 보다. 상대가 상대인 이상 이쪽에 남는 게 좋을 것 같은데 말이지.

“안 말릴 테니 따라가는 건 허락해 주십쇼.”

근데 뭐 본인 의사가 저런 걸 어떡해. 나는 몸을 도로 틀어 바리케이드의 가장 높은 곳을 밟았다.

“배다!”

누군가가 그리 외쳤다.

“남쪽에서 배 일곱 척!”

“……!?”

남쪽은 비푸릿이 점거한 섬이 있는 뱡항이니. 저기서 오는 배가 아군일 리 없다. 즉, 일곱 척 전부가 처리해야 할 적이다.

“어쩐지 습격이 없다더니…….”

왜 나쁜 감은 항상 들어맞는지. 신이 있다면 이래선 안 되는 거 아닌가.

아니면 피해를 덜려고 일부러 내가 있을 때 발각되게 했다거나? 다른 곳에 있었으면 소식을 전해 받기까지 시간이 더 걸렸을 테니까.

“나리─!”

휙!

각설하고 이제 움직일 차례다. 나는 바리케이드에서 내려와, 건너편 성벽 쪽으로 달렸다.

어쩔 수 없었다. 내가 통과하려던 구멍은 딱 북쪽에 나있었고, 적이 발견된 곳은 남쪽이었다. 보려면 남쪽 성벽을 올라서 시야를 터야 했다.

타닥, 탁

코트 자락이 뒤로 확 젖혀지며 내 다리에 마력이 둘러졌다.

그리고 빠르게 돌진하던 몸이 성벽에 다다랐을 때, 나는 그대로 뛰어 벽면을 타고 올랐다. 예컨대 수직 달리기다.

펄럭!

그리고 중력이 속력을 이기기 전, 내 손이 성벽의 가퀴를 붙잡고 몸을 끌어올렸다. 뻣뻣한 코트 자락의 소리가 밤의 적막을 타고 조용히 퍼졌다.

“……!”

성벽 위에서 경비를 서던 초소병들이 소리 하나 못 낸 채 기겁하고, 나는 성벽 위에서 바다를 훑었다. 밤바다는 매우 어두웠지만 달이 밝아서 배가 어렴풋이 보였다.

아직, 거리가 꽤 남았다. 저것들이 도달하는 속도보다 내가 포구를 밟는 게 더 빠를 것을 확신할 수 있을 만큼.

“너. 전해라.”

“예, 예?”

“지원은 필요 없다고.”

성가퀴를 디딘 내 다리가 굉음을 내며 성벽 아래로 뛰어내렸다.

병사가 윗사람에게 말을 전하지 않을 걱정이나, 전달받은 윗분이 내 말을 믿지 않고 병력을 보낼 걱정은 하지 않았다.

만약 그리하더라도 헛걸음 하는 건 그들일뿐더러…….

“몸 조심하십시오!”

병사들의 반응을 보면 알겠지만, 그들은 나를 믿고 안 보낼 가능성이 높았다.

아무렴, 아까 나보다 배를 먼저 발견하는 바람에 병력을 파견했다가, 도리어 내가 배 다섯 척을 수몰시키는 광경을 구경만 하고 간 사람들이 같은 짓을 또 저지를 리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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