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주인공이 컨셉충이면 곤란한가요-57화 (57/389)

◈57화 그렇지만 (5)

“배 한 척이 접근해 온다!”

나는 하루 대부분을 잠, 식사, 가벼운 스트레칭과 운동으로 보냈다.

출항한 지 이틀이 흘렀을 땐 거기에 해적 사냥도 추가되었고.

“해적인가.”

“몰라. 그렇지만 이 바다에서 함부로 접근해 오는 배는 대부분 적이야.”

간단한 이분법이다. 다가오면 적, 아니면 지나가는 배. 해적이라고 해적기를 달고 다니진 않다 보니 생긴 구분법이기도 했다.

“비푸릿이다!”

그러나 비푸릿 휘하 해적단은 조금 알아보기가 쉽다. 구성원들 대부분이 빨간 두건 내지 스카프, 어쨌든 빨간 천을 두르고 있는 까닭이다.

“부탁하지.”

그리고 그건, 그냥 베어 버리면 된다는 의미기도 했다.

촤아아악!

마력을 죄 쏟아부은 참격이 바다 위를 가로질렀다.

“배를 그대로 베면 될 걸, 마스트만 잘라 버리는 것도 참 악취미야.”

함선에 우뚝 솟아 있던 마스트 세 개가 그대로 무너졌다. 돛이 가로로 찢겨 나가며 매끈한 단면을 보인 건 덤이다.

넘어가는 마스트와 함께, 망루에 있던 해적이 비명을 지르며 바다에 빠졌다.

“네놈의 배는 두 동강 내주지.”

“그건 참아 달라고.”

바람손이 너스레를 떨며 선장실로 들어갔다.

나는 그를 가만 보다가, 그와 비슷하게 몸을 돌렸다. 해류를 타고 운 좋게 뭍에 도달하지 않는 한, 대해에서 말라 죽을 운명들이 내 등 뒤에 남았다.

탁.

의자처럼 생긴 발판에 내몸이 얹어졌다.

메스꺼움에 투헨더를 쥔 손이 살짝 떨렸다.

“한동안 이 근해에서 해적 볼 일은 없겠는데.”

갑판에 나와 있던 모험가 하나가 그리 말했다.

과장은 아마 아닐 테다. 그제 한 척, 어제 세 척, 오늘 두 척이나 마스트를 쪼개 표류시켰으니까.

이 정도면 씨가 마른 수준까진 아니어도 절대 적다고 표현할 수 없다. 도시군과 함께 해적들을 토벌하러 갔을 때도 사흘 동안 8척 겨우 잡지 않았던가.

“그보다 비푸릿 소속만 네 척이라. 해적이 도시 하나를 먹었다고 했을 때부터 예상은 했지만 장난 아니군.”

그의 말에 돛을 관리하던 선원이 어깨를 으쓱였다.

“우리가 괜히 자크라티와 가까운 항구도시를 버리고 그뤼 텔츠까지 간 게 아니라고.”

그녀는 로프를 꽉꽉 잡아당기며 말했다.

“어지간한 항구엔 비푸릿과 연결된 패거리들이 있어.”

“그 때문에 모험가 길드에 들르려 하면 발각당해 쫒기고 싸우고 난리도 아니었지.”

그녀의 말을 받아 이은 건 또다른 선원이었다.

그는 갑판 위에 존재하던 우리에 손을 집어넣었다. 열린 문 사이로 닭 한 마리가 잡혀나왔다. 높은 확률로 우리 점심 식사가 될 거라 생각한다.

“그 정도인가?”

“어지간한 해적들은 다 비푸릿 아래로 들어갔으니 원. 그나마 두목 라홍, 푸른달 와티아, 무법자 치마와 정도가 안 들어가고 버티는 중일걸.”

“푸른달과 무법자는 사략선 아닌가?”

“맞아. 근데 사략선도 많이 넘어갔어. 사략선이란 게 약탈품 중 일부를 상납하는 것으로 목숨만은 건지게 해달라는 건데 정작 도시가 기능을 못 해서야 의미가 없잖아.”

잡아당긴 밧줄이 단단히 고정쇠에 고정되었다. 그제야 선원은 난간에서 내려왔다.

“그러니 뭐, 다들 비푸릿한테 죽기 전에 먼저 충성을 바치는 거지.”

“자네들은 왜 그러지 않았고?”

“미쳤어? 비푸릿이 우릴 용납할 리 없잖아.”

선원은 정말 이해 안 간다는 눈빛으로 이쪽을 보다가, 곧 아차 했다.

“아, 너흰 육지인이지? 그러면 모를 수도 있겠네.”

“예, 모릅니다요. 그러니 좀 알려 주십쇼.”

그사이를 적절히 데브가 끼어들었다. 하여간 정보 얻을 구석은 절대 놓치질 않는 녀석이었다.

“음, 이건 좀…….”

함부로 떠들긴 좀 애매한 사항인지 선원이 처음으로 말을 흐렸다.

“그놈이 몰락할 때 내가 가장 크게 활약했거든.”

선장실로 들어갔던 바람손이 도로 나온 건 그때였다. 그의 손엔 그의 몫으로 배정된 술병이 하나 들려 있다.

“보트 한 척으로 놈의 뒤통수를 제대로 후려쳤지.”

“…그때만 기억나면 아직도 가슴이 섬찟합니다. 다들 말리는데 그걸 뿌리치고 혼자 적진에 기어 들어가는 선장이라니.”

눈치를 보던 선원이 조심스레, 그러나 금방 심드렁한 태도로 말을 툭 던졌다. 바람손이 낄낄 웃었다.

“폭풍 속을 혼자 헤쳐 나오는 것보단 껌이었지!”

“뭐라는 거예요. 폭풍을 틈타 거기에 간 거면서.”

“그러니까! 비푸릿 놈들 눈을 피해 움직이는 건 폭풍을 넘나드는 것보다 쉬웠다고!”

그러다 말고 술병을 내미는 꼴이 한 모금씩 하라는 것 같다. 주변에 있던 이들이 한 번씩 받아 마셨다.

“어쨌든 그래서 안 돼. 비푸릿 놈은 내가 충성 맹세하려 가면 옳다구나 하며 내 머릴 베어 창에 꿰어 둘 놈이야.”

“아, 그러면 어쩔 수 없죠.”

나는 거절했다. 대학교 선배가 술을 토할 때까지 먹인 이후로 술은 질색이거든.

물론 며칠 내로 마시긴 해야 할 거다. 배에서 물은 굉장히 쉽게 썩고, 술 싫어하는 나라도 썩은 물을 두고 택하라 하면 술 쪽을 고를 거거든.

그렇지만 그게 지금은 아니다. 물 썩는 걸 대비해 인벤토리에 물을 정말 넉넉히 챙겨 왔으니까.

“근데…… 그게 다입니까?”

“다지?”

위화감을 느끼기라도 했는지 데브가 은근슬쩍 더 캐물으려 들고, 나는 슬슬 일어날까 고민했다. 술 냄새에 멀미가 더 역해지는 기분이었던 까닭이다.

멀미엔 탁 트인 공간을 보는 게 좋다는데, 그것보단 그냥 침대에 엎어져 숙면을 취하는 게 편할 것 같기도 했고.

“그러니까, 음. 잘 좀 해달라고.”

한데 내가 딱 일어나려던 찰나, 바람손이 딱 나를 보며 말했다.

“내 목숨이랑…… 형제들 목숨 좀 구해 줘. 당신한테 다 걸었으니까.”

어딘가 얼버무리는 말투였으나, 그래도 답은 정해져 있다.

“대가를 받은 이상 실패는 없다.”

나는 술냄새를 피해 독실에 틀어박혔다.

* * *

⌈바람손 나리가 재촉해서 자크라티로 먼저 갑니다.

연락은 제 쪽으로 넣으십셔. 아크메이지 양반이면 연락할 방법 정돈 알 거라 생각합니다.

이번 의뢰를 두고 합류할지 말진 그쪽이 알아서 판단하세요. 근데 별로 추천은 안 함.

추신. 따라올 거면 병력이랑 물자 좀 가져올 것. 그래야 길 가다가 뒤통수 덜 맞을 듯.

추신2. 기사 나리 보수 안 챙기고 갈 것 같은데 대신 좀 받아 주면 안 돼요? 그 개고생을 하고 안 받는 건 제가 더 못 보겠음.⌋

인퀴지터는 도적이 남기고 간 말(을 옮겨 적은 서간)을 곱씹으며 몸을 웅크렸다.

야바드와 자크라티. 한 번도 가본 적 없지만 신전의 역사나 교리를 배울 때 거의 항상 접했던 지방의 이름이 그녀를 막막하게 만들었다.

“고민이 많아 보이십니다.”

그런 그녀에게 다가온 건 그녀가 기절해 있는 동안 몇 가지 일을 대신해 주고, 그녀가 깨어난 후엔 많은 것을 도와준 사제라.

“아, 자매님.”

인퀴지터는 자리에서 일어나 사제를 반겼다. 아무렴 그녀가 저이에게 진 신세는 보통의 것이 아니었다.

“제가, 무슨 고민이 많겠습니까. 전부 자매님이 도와주셨는 것을.”

깨어나자마자 그녀에게 들이닥친 일거리들을 볼까.

사제들의 죽음을 신전에 전달하는 것부터, 배가 망가졌단 소릴 뒤늦게 듣고 기함한 성주를 달래는 일, 피해자가 나왔으니 용의 사체를 연구용으로 넘겨달라는 마탑의 억지 대응까지.

와중에 경위서도 작성해야 했고 사망자 유족에게 보상이 돌아가도록 신경도 써야 했다. 도적이 요청했던 것처럼 악마기사에게 응당 돌아갈 보수 또한 챙겨야 했으며 용이 어쩌다 그리되었는지, 앞으로 바다가 어찌될지 분석할 인원 요청은 덤이었다.

하물며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사건을 잘 아는 당사자들은 개인 사정으로 사라졌거나 기절해 있었다. 그녀 자신은 결계 치는 데 집중하느라 상황을 몰랐고.

저 사제가 도와주지 않았다면 그녀는 아직까지도 이리 끌려다니고 저리 끌려다녔을 터였다.

“응당 했어야 할 일이었습니다.”

함에도 사제는 겸손하게 본인이 공을 마다했다. 인퀴지터의 눈매가 조금 누그러졌다.

“그보다, 정말로 고민이 없으십니까? 제가 보기엔 마음에 걸리는 것이 한두 가지 있으신 것 같습니다.”

“그건…….”

“아크메이지님께선 곧 깨어나실 거라 소식이 전해졌으니 그분에 대한 것은 아니실 테고…… 악마기사께 드릴 보수 또한 어느 정도 건진 이상 그 또한 아닐 것이니…… 먼저 떠나간 일행분들 때문이십니까?”

“……!”

정곡을 찔러오는 물음에 그녀는 차마 아무말도 할 수 없었다. 그녀의 최대 고민거리는 실제로 그게 맞았다.

“이야기는 어느 정도 들었습니다. 자크라티에 무슨 일이 있다고요.”

“…예.”

그녀는 한쪽 손에 들고 있던 편지를 무심코 구겼다. 그 뒤에 다급히 펴보았지만 구겨진 자국은 지워지지 않았다.

“…도우러, 가고 싶습니다. 그렇지만…….”

40년 전, 야바드 지방에서 대규모 악마 소환이 벌어졌던 때가 있다.

다만 그때 많은 이가 악마에게 기생당했고…… 본인이 기생당한지도 모르는 많은 이가 사제들에게 매달렸다. 살려 달라고, 구해 달라고. 악마가 몰려온다고.

정작 악마가 깃든 건 그들의 몸이었는데.

“그들이, 저흴 용납할 리 없겠지요.”

…그때 아주 많은 이가 죽었다고 그녀를 가르친 이는 말했다. 정말, 정말 많은 이가 죽었다고.

가족이 악마에게 기생당했음을 믿지 못한 이들이 사제들을 죽이고, 사제들은 살고자 그들을 죽이고, 끝내 민간인들이 포함된 대지 전체를 불태우기까지 하며…… 그렇게 대지가 검어지고 바다가 붉게 물들었다고.

“자책하지 마십시오. 그것은 인퀴지터님의 잘못이 아니지 않습니까.”

“…하지만.”

그렇지만, 흐른 피는 사라지지 않는다. 그들의 혐오도, 쌓인 증오도, 분노도 흩어지지 않을 것이다.

“…이대론 물러나 있을 수만은 없습니다.”

아마도 영원히.

“인퀴지…….”

우당탕!

“……!”

귓가에 퍼진 소란에, 누가 먼저랄 것 없이 두 사람의 고개가 동시에 돌아갔다. 시야가 닿은 곳에서 보인 건 숨을 헐떡이는 견습신관이다.

“아, 아크메이지님께서 깨어나셨…….”

“드디어 깨어나셨는가!”

“근, 근데 문제가 발생했습니다.”

“……! 건, 건강에 무슨 문제라도…….”

“그, 그게 아니라, 마탑에서 용이 타락한 이유를 찾았다고 합니다!”

“……!”

“근데 그 부정이 자연스러운 게 아니래요!”

인퀴지터와 사제의 얼굴이 딱딱히 굳었다.

* * *

아슬아슬하게 물이 다 떨어졌을 때, 육지가 보이기 시작했다. 야바드 지방이고, 자크라티가 있는 섬이었다.

“비푸릿 놈들이 양쪽에서 옵니다!”

당연하지만 섬 근처 해역을 순회하듯 도는 놈은 별로 문제되지 않았다. 내 검에 배가 그대로 양분되며 가라앉기 시작했다.

“이번엔 배를 잘랐군?”

저 망망대해야 돛대만 처리해도 놈들이 우릴 쫒아와 사건 일으킬 방도가 없다. 외려 해류에 기도만 해야 하지.

하지만 여긴 뭍 근처다. 놈들이 작은 보트를 타고 육지까지 도달하지 않으리란 보장이 없다. 그럴 경우 후환이 될 확률도 굉장히 크고.

해서 만일을 대비해 확실히 한 것뿐이다. 놈들에게 약간의 기회를 주겠다고 뭍사람들 목숨을 걸 수는 없으니까.

“귀찮아졌다.”

하지만 그런 설명을 구구절절할 필요 따위 있을 리가!

나는 나머지 한 척은 HP로 마력을 끌어올려 처리했다. 배에 있는 동안 생명력 전환을 통한 HP와 마력 교환비를 적당히 감 잡은지라 HP 조금 깎이고 말았다.

물론 그거 깎였다고 목구멍에서 핏물 올라온 건 절대 내 탓이 아니다.

“어디서 피 냄새가 나는뎁쇼.”

…저 귀신 같은 놈!

나는 안에서 올라온 피를 티나지 않게 삼키며 투헨더를 등의 거치대에 넣었다. 생명력전환은 다 좋은데, HP를 소모할 때마다 속에서 피가 올라왔다.

덕분에 피 냄새에 예민한 데브한테 몇 번이나 들킬 뻔했는지.

이미 다친 상태가 아니라면 쟤 앞에선 이거 자제해야 할 것 같다. 이번엔 딱히 선택지가 없었지만.

“피 냄새? 바다에서 나는 거 아냐?”

“…그런 것 같진 않은데.”

난 모른다. 난 모르는 일이다아.

나는 그렇게 딴청을 피우며 근처 빈 상자에 걸터앉았다.

배가 가라앉은 인간들을 외면한 채 서둘러 자크라티에 접근했다.

의뢰 목표지는 다른 곳이지만, 정비를 한번 하고 가자는 의견이 나와서 자크라티를 먼저 목적지로 잡은 거다.

“서, 선장!”

그리고 자크라티의 정경이 슬슬 윤곽을 보이려 할 때, 망루에서 경계를 담당하던 선원이 비명을 질렀다.

공포와 당황이 뒤섞인 목소리가 배를 감싼 긴장을 찌르자 사람들의 표정이 굳었다.

“말해!”

바람손이 다급히 선원을 채근했다. 하지만 망루에선 쉽사리 다음 말이 이어지지 못했다.

“젠장, 대체 뭘 본 거야?!”

해서 선원 일부가 뱃머리에 달라붙고 일부는 삭구를 타고 망루로 올라가려 들었다. 나는 그냥 깡으로 중앙 갑판에서 도시를 슬쩍 봤고.

“괴, 괴물이.”

어렴풋하던 도시의 모습에 드디어 초점이 맞았을까. 망루의 선원이 더듬더듬 말을 이었다.

“괴물이 도시를…….”

“…뭐?”

내 눈에 도시 성벽을 무너트리는 괴물이 보인 건 바로 다음 순간이었다.

「누더기골렘│인간의 뼈와 근육, 살점을 엮어 만든 누더기에 악마가 깃든 괴물. 그것의 탄생에는 수십의 목숨이 들어가나, 그것의 죽음에는 수백의 목숨이 필요하다고 한다.」

악마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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