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6화 그렇지만 (4)
바람손과 데브는 말을 타고 이동하는 내내 입술을 씰룩였다. 딱 봐도 진주에 대해 말을 얹고 싶은 눈치였다.
물론 가던 길, 이유 없이 쓰러진 나무─굉장히 큰─를 내가 맨손으로 쪼개는 걸 보고 끝내 혀 놀리는 걸 포기했다.
암. 나무를 산산조각 낸 것도 모자라, 성인 셋이 달라붙어야 옮길 크기를 혼자 들어 던지는 걸 보면 누구도 함부로 말 못 할 터였다.
부작용이 있다면 그 뒤로 가막만의 지휘관도, 그를 호휘하던 인력도 입을 조개처럼 다물었단 점이 있겠다. 모험가나 해적들도 내게 거리를 ‘더’ 벌렸고.
안 그래도 혼자 용을 잡은 것 때문에 경원하는 느낌이 있었는데, 그게 더 공고히된 느낌이었다.
그래도 뭐, 컨셉만 따지자면 옳은 일이긴 하니까.
조금 외롭긴 했지만 나쁘진 않더랬다.
어쨌든, 각설하고. 우리는 그뤼 텔츠에 도착하는 대로 성주를 찾아갔다. 약속받은 것을 받아 내기 위함이었다.
용 대가리를 보고도 이게 정말 용이 맞냐고 성주가 불신을 드러내긴 했는데…….
“성주님께서 이들의 희생을 경시하신다면, 신전은 결코 가만히 있지 않을 것입니다.”
“용 아니라고 생각하시면 별로 필요 없으시겠네요? 저희가 가져가도 되는 거죠?!”
고집 부려 따라온 사제의 발언과 눈을 빛내며 후려치기를 시도하는 마법사를 보고 결국 인정했다.
바람손은 사제와 마탑에 참견에 다소 불쾌한듯 이번 일은 고마운듯 오묘한 얼굴이다.
“아, 그렇지. 이번 일에 힘을 보탠 이들을 두고 정당한 값을 치르시는 것 또한 잊으시면 안 될 것입니다.”
아, 참고로 걱정했던 보수 문제는 신전 쪽 사제가 대신해서 요구했다.
신전 쪽 손해가 크니까 자기들 몫 받아 오기 위해서 우릴 이유로 대나 싶긴 한데, 내것도 챙겨 준다면 영 반대할 일은 아니었다.
“용을 사냥하는 데 가장 큰 공을 세운 자에게 절반의 사체가 돌아가야 함이 맞지 않겠습니까? 용을 거의 홀로 상대한 이에게 그만한 몫을 보장해야 할 것이라 사료됩니다.”
특히 내 몫을 제대로 챙겨 준다는 점에서.
“예?! 절반이요? 배의 보호막을 책임진 건 마탑입니다!”
“크흠, 배를 지원한 건 이쪽이네만…….”
그렇지만 기여도 문제로 넘어가면 아무래도 복잡해지기 마련이라. 탐욕과 손해 보기 싫다는 마음도 껴 있는 이상 결론이 쉽게 날 리 없다. 못해도 며칠은 입씨름해야 할 게 훤히 보였다.
“아무래도 결론이 쉽게 나진 않겠는데.”
그래서일까. 바람손이 입술을 살짝 깨물며 내 눈치를 보았다. 걸린 것의 가치가 가치인 데다가 내가 여기서 자리를 뜨면 거의 포기하는 셈이 되니 더욱 그럴 수밖에 없다.
“출발하지.”
“잠깐, 보상은 괜찮겠어?”
“날 신경 써줄 만큼 네놈에게 여유가 있었나?”
근데 뭐 어떡해. 계약은 계약인데.
거기에 어제 각오했던 부분이라 그렇게 막 마음 쓰이지도 않았다…… 아니 엄청 아깝긴 한데 그냥 단념했다.
장비 욕심이 나서 그렇지, 솔직히 상점제 검으로도 충분하긴 하거든. 상점제 옵션이 구린 건 맞는데 기존 롱소드도 초기 무기다 보니 옵 안 좋긴 매한가지라서.
“…나리가 이러면 저도 못 받겠네요. 하, 젠장.”
데브는 좀 안타깝긴 한데…… 보수가 받고 싶으면 남아서 받고 와라. 나는 못 기다려 준다.
“…그.”
“미안하단 말은 하지 마십쇼. 어쩔 수 없는 거 아니까. 그리고, 애초에 받을 거라 기대도 안했습니다. 한 게 있어야죠. 진짜 받고 싶어서 한 말 아닙니다.”
“…대신 이쪽에서 당신 몫도 챙겨 주지.”
“그건 거절하지 않겠습니다요.”
“고맙다.”
“저보단 기사 나리한테 하실 말씀이죠.”
바람손은 데브와도 타협을 보았다. 데브가 생각보다 보수에 집착하는 성미가 아니라서 다행인 건지 아닌 건진 모르겠다. 쟤도 은근 손해 많이 본단 말이지.
…보상 이렇게 될 거 예측하고 비늘이랑 이빨 몇 개 빼돌린 거 있는데 나중에 선물해 줄까. 컨셉상 줄 기회는 별로 없겠지만.
“이봐, 용 사체니 뭐니 분배는 알아서 하고, 난 약속한 걸 받아야겠어.”
각설하고 내가 사체를 포기하는 듯하자, 정확힌 내가 바람손을 따라갈 거라 말했던 상황에 바람손이 이 도시를 뜰 거라 말하자, 마탑과 성주가 옳다구나 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바람손에게 배 하나 내주는 것으로 용의 사체를 얻을 수 있다면 남는 장사라고 생각하는게 훤히 보인다.
“그렇다면 잠시 자리를 파하지요. 저분들을 배웅하고 싶으니.
덕분에 조금 지연되는가 싶던 일은 다시 일사천리로 이뤄지기 시작했다.
사제가 떠나는 우리를 배웅하고자 잠시 걸음을 함께했다.
“이봐.”
“예.”
“고마워하진 않을 거야.”
“그러실 필요 없습니다.”
머리에 깨진 상처가 있는 사제는 마른 혀로 건조히 답했다.
“그럴 자격이 없다는 건 이미 알고 있으니까요.”
이쯤 되면 신전과 야바드 지방 사이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궁금하다. 대체 어떤 사건이 있었기에 일방적으로 미워하고 일방적으로 묵묵히 감내하는 거지.
이건 뭐, 소몬보다 더하다. 거긴 부패한 사제들로 인해 민간인이 희생됐다는 게 밝혀졌어도, 피해 당사자가 아닌 이들에게까지 설설 기진 않던데.
설마 그것보다 더한 일이 벌어졌었던 거야?
“부디 보전하시길.”
“흥.”
바람손과 해적들은 그 말을 귓등으로도 듣지 않았다.
“어서 타!”
그저 성주가 내준 배에 올랐다. 선박에 대한 지식이 없으니 좋은 배인지 나쁜 배인지까진 모르겠고. 물자가 든든히 준비됐다는 건 알겠다.
“다들, 마지막이다. 그간 정말 고생 많았고…… 조금만 더 고생하자.”
“고생은 선장이 제일 많았잖수.”
“우리 걱정은 마십쇼!”
“크하핫. 그제 푹 쉬어서 멀쩡하다고요.”
바람손과 그의 부하들이 마지막으로 그네들의 감회를 나누었다. 용잡이에 함께한 것도 모자라 여기까지 함께 온 모험가들이, 그리고 나와 데브가 그것을 구경했다.
“나참, 이십 년 가까이를 이 짓하며 살았지만, 이렇게 연달아 의뢰해 본 적은 한 번도 없는데.”
“연달아 의뢰하는 게 대수야? 누구도 이런 일엔 참여 못 해.”
옆에서 술을 홀짝이던 모험가─채찍을 다루던─가 깔깔 웃었다.
“용 사냥에 이어 해적왕 사냥이라니. 이건 반드시 수훈장 감이야.”
이미 수훈장 하나 가지고 있는 입장에선 별로 공감이 안 갔다. 데브의 눈이 데굴데굴 굴렀다.
“그러고 보니 댁들은 이 의뢰를 왜 받은 겁니까? 수훈장을 받고 싶었던 거라면 이번 일로도 충분할 거 같은데.”
그건 나도 궁금하던 바였다. 모험가들이 합류했단 사실이야 진즉 알았지만, 합류한 이유는 듣지 못했거든. 물어볼 수 있는 사정도 못 되고.
꼭 듣고 싶다까진 아니지만 호기심을 해소할 기회를 마다할 이유는 없다.
“지금 출발하면 보수도 못 받을 거고.”
“으하핫. 보수야 뭐, 길드가 대신 받아서 맡아 둘 텐데 급히 받을 거 없지! 돌아와서 받아도 충분해!”
“무엇보다 용잡이도…… 솔직히 우리가 한 게 있어야 말이지.”
모험가 중 한 사람이 그 부분을 말하며 나를 힐끗 보았다. 뺨이 따가웠다.
“물론 그 자리에 함께했다는 것만으로도 인생 최고의 업적이긴 해. 앞으로 어떤 의뢰를 받아 움직여도 이번 일을 뛰어넘기란 불가능하지 않을까?”
“불가능하지 않을까가 뭐야. 불가능이지. 난 모험가를 관두면 평생 이번 일을 떠들며 살 거야. 내가 전설에 한 손을 보탰다고 말이지.”
“그건 나도 마찬가지야. 내가 한 게 없다고 해서 이번 일이 전설이 아니게 되는 건 아니니까. ”
모험가는 거기까지 말한 후 어깨를 으쓱였다.
“단지…… 그런 거지. 이왕 전설과 함께한 거, 끝까지 하고 싶다는? 돈은 언제든 벌 수 있지만, 용을 사냥한 모험가와 함께할 수 있는 기회는 이번 한 번뿐이잖아.”
눈길은 여전히 나를 향해 있었다. 그러니까, 아마도. 뺨이 아직도 뜨거웠거든.
근데 만약 나를 안 보고 있어도 낯이 화끈거렸을 것 같긴 하다. 본래 주인공 캐릭터들이 이런 업적을 세우고 칭송받고 동경받고 그러긴 하는데, 이렇게까지 추켜세움 받느냐면 그건 아니거든.
보통 얘네는 진짜 주인공에게 박하다 싶을 정도로 대접을 안 해주는 게 다반사다.
“…그건 그렇죠.”
“난 오히려 그쪽이 더 궁금한데. 어쩌다 같이 다니게 된 거야? 같이 다니기 쉬울 것 같진 않은데.”
“좀 어렵긴 하죠. 그보다 어쩌다 같이 다니게 됐더라…….”
어, 이거! 이거는 무조건 들어야 해! 나는 아닌 척 귀를 기울였다. 돛을 올려! 출항을 알리는 외침이 귓가에 메아리쳤다.
“저도 비슷한 것 같습니다요.”
그러나 끝내 돌아온 답은 두루뭉술하기만 해서. 나는 아쉬움에 혀를 찼다. 배가 파도를 해치고 나아가기 시작했다.
* * *
“이봐, 자크라티에 도착하기 전에 어떻게 할지 이야기 나눌 게 있는데.”
그득그득 실린 물자로 저녁을 배부르게 보냈을까.
보통 잠자리에 들 무렵에 바람손이 나를 슬쩍 불렀다.
“대략적인 상황은 알려 줬어도, 자세한 건 시간상 생략했었잖아. 그에 대해 이야기하려고.”
그걸 왜 하필 지금 말하나 싶지만…… 자크라티에 다다라서 말할 수도 없는 노릇이긴 하니까. 지금 말하는 것도 사실 늦은 편이고.
나는 바람손이 내어준 독실을 빠져나왔다. 독실에서 자는 걸로 외면했던 멀미가 곧장 위장에 들이닥쳤다.
“자, 마지막 손님까지 오셨으니 이야기에 들어가 볼까.”
근데 이제 보니까 나만 부른 게 아니었다. 당연하다면 당연한 일이었다. 이 의뢰에 참여하는 건 나만이 아니었다.
“다들 이쪽으로 모이라고.”
바람손은 선장실 곳곳에 흩어져 있던 사람들을 한데 불렀다. 둥그러니 모인 사람들 사이엔 원형 탁자가 있다.
달칵.
곧 지도와 램프가 탁자 위에 올라왔다.
나는 한 발 물러선 채, 벽에 등을 기대어서 그 광경을 보았다. 선장실이 그리 넓지 않고 다들 눈치껏 시야를 터준 덕에 보기엔 문제없었다.
“이게 야바드 지방의 전체 지도야.”
바람손의 설명에 나는 지도를 유심히 살폈다.
지구로 따지면 필리핀과 비슷한, 섬과 섬으로 이뤄진 땅이 지도를 가득 채우고 있다. 전체적으로 알파벳 Z를 닮았다.
“여기가 자크라티지.”
그는 그러면서 한 점을 쿡 찍었다.
Z에서 가운데 대각선과 아래선 사이 여백에 점을 하나 콕 찍으면 지금 바람손이 집은 곳과 위치가 비슷할 테다.
“그리고 비푸릿이 차지한 영역이 여기 자크라티를 둘러싸다시피한 몬타타 섬이지.”
바람손은 이어 자크라티를 둘러싼 섬 무리를 한번 훑었다. 저게 비푸릿의 영역이라면 자크라티는 거의 포위된 형국이다.
다른 도시의 도움을 받기 어렵다는 말도 이제 이해된다.
“본래라면 나는 실력자들로만 구성해 이쪽에 자리한 비푸릿의 근거지를 불태우려 했어. 여기에 자리한 일당만 무너지면 루완 성의 병력이 이쪽으로 진입할 수 있게 되니까.”
“본래라면? 지금은 달라졌단 말이오?”
한 모험가의 물음에 바람손이 어깨를 으쓱였다.
“당신들의 대답에 따라 달라지겠지.”
“일단 생각해 둔 게 따로 있단 이야기네. 말해 보슈.”
“두 번째도 별로 다를 건 없어. 단지 치는 곳의 위치가 바뀔 뿐이야.”
바람손은 손가락으로 한 곳을 쿡 찔렀다. 몬타타 섬의 한가운데였다. Z로 치면 아래쪽 꼭짓점?
“거기를 치면 어떻게 되는데?”
“비푸릿의 멱을 딸 수 있지.”
…그러니까, 바로 본거지를 치자는 소리 아냐?
“물론 이건 당신들 의견에 따를 거야. 어느 쪽을 택하든 자크라티엔 활로가 열릴 테니까.”
나는 선장실 벽에 기댄 채 잠시 고민을 하려 했다. 선장실 안에 있던 사람들이 죄 내 눈치만 보지 않았어도 그랬을 거다.
어째서 모험가들까지 나를 보는 건지 모르겠다. 내가 활약하는 장소에 함께 있고 싶다는 진솔한 고백은 들었는데, 그래도 본인 목숨 걱정은 해야 하는 거 아니냐?
내가 닥돌하자고 하면 따라올 거야?
“말을 명확히 해라.”
허참. 난 몰라. 말 안 한 건 너희다.
“네가 바라는 것이 자크라티의 구원인지, 비푸릿과 그 일당의 죽음인지.”
“……물음에 의미가 없지 않아? 자크라티를 구하기 위해선 비푸릿을 죽여야 하는데.”
“틀렸다.”
아, 바이킹은 막 시도 지어서 문학적 소양이 높았다는데 바람손은 같은 해적이면서 이 뉘앙스 차이를 못 알아듣네.
나는 속으로 투덜대며 물러나 있던 자세를 풀고 테이블에 다가갔다. 물론 표정은 언제나처럼 얼음장을 유지했다.
콱!
그리고 단검이 지도를 뚫고 테이블에 박혔다.
꿰뚫은 지점은 바람손이 맨 처음 칠까 제안했던 그 위치다.
“네가 자크라티의 구원을 말한다면.”
나는 그런 상태에서 단검을 살살 움직였다. 약간의 마력을 주입하니 테이블이 무 썰리듯 둔하게 패이고 지도가 매끄럽게 잘렸다.
단검이 향한 최종 목적지는 물론 비푸릿이 있다는 본거지다.
“나는 이리 움직일 것이고.”
콱.
단검이 뽑혔다.
“네가 비푸릿의 죽음을 논한다면, 그 반대가 될 거다.”
말하자면 그거다. 다 죽여 주긴 할 건데 응원군이 와줄 길을 먼저 뚫느냐, 비푸릿을 먼저 조지느냐의 차이.
둘다 같지 않나 싶어도 약간 다르다. 전자는 내가 전진하는 동안 비푸릿이 도망칠 확률이 있거든. 도망칠 경우 난 안 잡아 줄 거고.
그렇다고 후자를 택하면…… 내가 비푸릿을 잡고 전진하는 동안 자크라티가 좀 더 견뎌 내야겠지.
어느 쪽이든 선택은 바람손의 몫이었다.
“…돌아 버리겠네.”
그걸 드디어 이해한 듯 바람손이 입술을 파르르 떨었다. 내가 전부 처리해 줄 걸 예상 못 한 눈치는 아닌데, 이런 선택지까지 주어질지는 몰랐나 보다.
“해적이 수백이야.”
“그래서?”
“수채도 만들었다고.”
“우습군.”
“그래도 괜찮다 이거야?”
나는 되물음을 두고 불쾌함을 연기했다. 마치 모욕을 당했다는 양, 어떻게 그걸 되물을 수 있냐는 양.
꿈틀대는 눈썹이 사납게 섰다.
“벌레가 모인다고 벌레가 아니게 되나? 괜찮지 않을 건 내가 아니다.”
나는 그리 말하곤 단검을 윶 던지듯 했다. 팅팅 소리를 내며 튕겨 나간 단도가 주욱 미끄러지며 바람손의 손 앞에 섰다.
“선택해라.”
내 재촉에 바람손이 천천히 손을 뻗었다. 다섯 손가락이 단검을 그러쥐더니, 이내 눈을 꾹 감았다.
콱!
단검이 지도를 뚫었다.
“마음 같아선 비푸릿 놈의 가죽을 뜯어 배편에 걸어 놓고 싶지만…….”
칼날이 내려찍은 지점은 응원군이 오려면 반드시 터야 하는 골목이다.
“그건 당신 도움이 없어도 언젠가 할 수 있을 것 같거든.”
결정이 내려졌다.
「❖ 자크라티를 겨냥하는 송곳니
∎ 자크라티로 이동
∎ 비푸릿 일당의 근거지 파괴」
“의뢰받았다.”
나는 꽂혀 있는 단검을 낚아채듯 회수했다. 하면서 본 지도는 좀 너덜너덜해진 상태였는데…… 음. 이 정돈 작은 심술로 넘어가자. 도시 구하면 이깟 지도 한 장이 문제야.
“말할 건 이게 단가?”
“일단은 그랬는데…….”
“그럼 이만 가지.”
무엇보다 지도 배상이고 뭐고 참았던 멀미가 올라온다. 가오라는 이름 아래 어떻게 버텼지만 이 이상은 무리야.
나 다시 침대로 갈래.
* * *
바람손은 다소 얼빠진 채로 악마기사가 나간 자리를 응시했다. 자존심 때문에라도 두 곳 다 쳐주진 않을까 싶었는데 이건 뭐, 상상 이상의 결과다.
덕분에 오늘 얘기하려던 내용까지 다 까먹었다. 많지는 않아도 며칠 시간이 남았으니 다음에 전달해도 되겠지만…… 얼떨떨한 건 어쩔 수 없다.
“나참, 우린 왜 부른 겁니까요?”
그사이, 후드 청년이 슬쩍 입을 열었다. 불만은 아니고 어색해진 공기를 환기하기 위한 너스레였을 것이다. 말투에서 장난기가 느껴졌으니까.
“그럼 다른 의견을 내보시든가. 악마기사보다 훌륭한 제안을 하면 고려해 보지.”
그는 그것을 고맙게 받아들였다. 악마기사에게 압도되어 그의 주장에 수긍해 버리긴 했지만, 아까 모험가들에게 한 말도 거짓은 아니었다.
작전을 수행할 당사자들인 만큼 가능한 의사를 반영해 줄 요량이었다. 포기한다거나 시간을 끈다고 하면 물론 쳐내겠지만.
“선택권이 없잖아요?”
“무슨 소리야. 선택권 줬잖아.”
그는 다른 모험가들을 돌아보았다. 할 말 있으면 지금 말하란 의미였다.
“이견 없수다.”
“저도 좋아요.”
모험가들이 하나둘 반대 없음을 밝혔다.
“댁들은 정말 불만 없어요? 신기하네.”
“으하핫. 불만은 무슨! 이런 일이 얼마나 흔한데, 이게 싫으면 모험가 때려쳐야지.”
“높으신 분들의 의뢰를 받을 때면 이런 자리에 참석도 못 하는데, 그거에 비하면 낫지.”
“그럼그럼. 그땐 회의가 끝날 때까지 밖에서 대기했다가 일방적으로 지시받게 되는 경우도 많잖아. 우리 목숨이 걸린 임무인데도.”
“지금도 일방적으로 지시받은 건 똑같은데, 이건 괜찮나 봅니다요.”
“싸움에 나서지도 않을 작자가 명령하는 거랑, 앞장서서 싸워 줄 사람이 말하는 건 다르지.”
“하긴, 그건 그렇죠.”
“딱 보니까 이런 의뢰 많이 안 해봤구만?”
바람손은 확실히 악마기사가 저 청년을 용납하는 이유를 알 것 같았다. 농담으로 은근슬쩍 여론을 모는 솜씨가 보통이 아니었다. 저러면 속으로 살짝 불복했던 이들도 스스로가 댄 이유에 알아서 납득할 터였다.
“무엇보다, 저 양반이랑 함께하면 어떤 계획을 가도 쉽게 죽을 것 같진 않아.”
뭐…… 저런 작업이 필요하지 않을 무력이란 건 부정하지 않겠다.
“그럼, 이렇게 가는 걸로 알지. 밤이 늦었으니까 오늘은 그만 해산하자고. 할 말이 생기면 또 부를 거니까.”
아무튼, 악마기사가 자리에 빠진 이상 여기서 더 이야기 나누기도 뭐했다. 그는 선장실의 문을 열었다.
“이봐.”
그러다 문득. 그는 마지막으로 나가던 후드 청년을 붙잡았다.
“내가 계획을 짜도 그 작자가 들어줄까?”
답은 곧바로 돌아왔다.
“그냥 가진 정보만 제공해 주십쇼. 말 들을 사람이 아닙니다.”
바람손은 그 말을 듣고 푸핫 웃었다.
“그걸로 충분할까?”
“저 인간을 막는 작자가 적 사이에 있다면, 그 시점에서 어떤 계획을 들이대도 충분하지 않을걸요?”
명답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