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4화 그렇지만 (2)
기실 단순히 캡슐에 갇혔다, 란 의문은 삭제한 지 좀 됐다. 지금껏 대온 어떤 핑계를 가져와도, 현실의 육체가 갈사했을 타이밍임을 부정할 수 없는 까닭이다.
외부인이 개입했다기엔 로그아웃을 시켜 주지 않은 게 이상하고.
“저기요, 시스템 씨?”
시스템에 뒷배가 있지 않을까 하는 의심 또한 가진 지 좀 되었다.
아니다. 이건 보다 오래된, 거의 처음부터 함께한 의문에 가깝다.
“저기요?”
이유는…… 별건 아니고 그냥 클리셰니까.
시스템이 주어지는 소설도 많지만 아닌 소설도 있는 만큼 심심찮게 생각해 본 정도라 보면 되겠다.
“흠. 로그아웃.”
「불가능한 명령입니다.」
“긴급 프로토콜, 캡슐 강제 종료.”
「불가능한 명령입니다.」
그러나 그 의심이 본격적이게 된 계기는 방금처럼 로그아웃과 긴급 프로토콜을 실행할 때 뜨는 메시지가 미묘하단 감상이 들었을 때였다.
보통 버그가 떠도 저런 말투로 안 된다고 하진 않거든. 실패했습니다, 라고 하지.
거기에…….
“옵션, 설정. 그래픽. 해상도 24K, 18K로 변경.”
「불가능한 명령입니다.」
“프레임. 240에서 120으로 변경.”
「불가능한 명령입니다.」
“시야 밝기 조절. 최하.”
「불가능한 명령입니다.」
“마지막 저장 지점에서 재시작.”
「불가능한 명령입니다.」
대부분의 설정에서 저런 메시지를 띄우면 어지간한 사람도 다 위화감을 느낄 수밖에 없다!
“하.”
거기에 의심 가는 구석은 이게 다가 아니다.
판정이 왔다 갔다 하는 스킬은 또 어떻지? 특히 색적스킬.
근처에 접근하고 나서야 띄운 적이 얼마나 많았는지. 일관되어야 할 시스템치곤 심각한 오류가 아닌가? 물론 이 게임은 그것 외에도 버그투성이긴 하지만, 어쨌든!
더해서 아이템 설명 뜨는 기준 또한 무분별하고, HP 하락도 그렇다.
단순 계산상으로 HP가 바닥나고도 남았을 지점이 많았는데 내가 확인 안 했다는 이유로 어떻게든 HP를 유지하는 게…….
단순 행운이라고 넘기기엔 내가 겪은 사건이 사건이라서 말이다. 이 정도 사건을 겪으면 위화감을 느낄 수밖에 없다.
“저기요, 그냥 대화 좀 하자니까요.”
무엇보다 결정적인 건 이번에 지급된 스킬이었다.
너무 노골적이어서 웃음이 나올 정도인데, 더이상 외면하는 것도 웃긴 일이었다.
“대화 좀…….”
나는 돌아오지 않는 답을 두고 한숨과 함께 허리에 넣었던 힘을 뺐다. 등이 바위에 닿고, 머리도 기대어졌다.
떡지고 소금기 팍팍 낀 머리카락이 바위에 닿으며 퍼석 풀어졌다.
뿐만 아니라 살갗에서도 당기는 느낌이나 무언가가 묻어 나오는 감각이 선연했다. 아마 소금과 모래일 터였다.
“…….”
그렇지만 정작 옷은 복원 능력 덕에 뽀송뽀송하기만 해서. 마치 안 씻고 옷만 갈아입은 기분에 나는 어색해졌다.
가끔은 이것 때문에 현실감이 들다가도 만단 말이지.
별로 중요한 것도 아니지만. 희미한 체념이 목을 조르듯 나를 압박해 왔다.
“대체 뭐 하자는 건지.”
대답하지 않는 시스템에 대해선, 글쎄. 화가 나는 건지 화보다 현타가 먼저 오는 건지 잘 모르겠다. 꼭 구별할 필요가 있나 싶기도 하고.
“이렇게 티내면서…….”
다만 그래. 물어보고 싶은 것만이 남아 머릿속에 둥둥 떠다녔다.
이곳이 게임인지, 이세계인지.
내가 왜 이곳에 불려 온 건지.
날 데려온 건 대체 누구인지.
내가 이곳에서 대체 무얼 하길 바라는 건지.
내가 지구로 돌아갈 수 있는 방법이 존재하는지, 같은 것.
‘화가 나.’
만약 시스템이 일관되었다면, 그래서 내가 뒷배가 혹시 있지 않을까 하고 의심을 갖게 만들지 않았다면.
그랬다면 그냥 그러려니 살았을 것이다. 이유 없이 벌어진 일에 이유를 찾는 것만큼 무의미한 행동은 없으니까.
더구나 이전까지의 난 캡슐 속 육체로 인해 아사하는 건 아닐까 하고 노심초사하던 상황이 아니었던가?
그런 만큼 이 삶을 추가 기회로 여겼을 가능성이 크다. 불만 같은 게 끼어들 리 없다.
‘모든 게 원망스러워.’
그렇지만, 이것에 원인이 있다면 다르다.
내가 이 캐릭터에 들어와 이러고 있는 것이 누군가의 의도라면. 그리고 그것과 소통할 수 있을 것 같은 수단이 곁에 있다면…….
그때는 마냥 납득할 수 없다. 순응할 수 없다.
나는, 나는 되찾고 싶었다.
‘이 세상 전부가…….’
내가 연기하지 않아도 되고, 날 아는 사람들이 가득하며, 내게 더없이 익숙한 그 삶을.
‘전부가?’
나는 눈을 깜빡였다. 내것이 아닌 듯한 감정이 눈 깜짝할 새 사라지고 은은한 슬픔만이 남았다. 두근두근. 인벤토리에 넣어두었을 구슬의 박동 소리가 들려오는 듯했다.
“만약, 만약에.”
있잖아. 사실 여기가 게임이든 현실이든 그건 별로 상관없는 것 같아. 죽지 않고 살아갈 수 있다면 어느 쪽이든 무슨 상관이야.
내가 받아들인다면 허상도 실재가 되고, 내가 거부한다면 진실도 거짓이 되는 게 세상인데.
“내가 사탄을 잡아 메인스토리를 클리어한다면.”
그렇지만 이왕이면 게임이 더 좋을 것 같아. 리트라이가 가능할 거란 점도, 내 마음이 좀 더 편해지는 것도 그렇고 여러모로 이점이 많잖아.
무엇보다도…….
“그땐 집에 갈 수 있을까요?”
게임은 클리어하면 꺼지잖아. 그렇지?
그러니까, 그러니까…….
“제발, 제발요.”
내가 엔딩을 보면 집에 갈 수 있다는 가능성을 열어놔도 괜찮다고 해줘.
그래도 실망하지 않을 거라고, 낙담하지 않을 거라고.
시스템이 괜히 퀘스트를 띄운 게 아니라고.
“날 불러온 게 당신이라고 해도 원망 안 할 테니까.”
제발, 그렇다고 대답해 주면 안 돼?
이거 하나만이라도 좋으니까.
“…….”
나는 대답 않는 시스템을 두고 이를 악물었다. 검을 쥐고 있던 오른손이 올라와 내 눈가와 이마를 짚었다.
차디찬 금속의 온도가 나를 더 서럽게 만드는지 혹은 달래는지 알 수 없었다.
그저 차오르는 울분이 온갖 욕설로 치환되었다가, 마지막 남은 이성에 뭉개져 다시 내려갈 따름이었다.
눈가가 뜨겁고, 차갑고, 끝내 미지근해졌다.
“…시스템.”
비통함 속에서 여즉 대답 없는 시스템을 다시 불렀다.
원망은, 그래. 아직까진 없다. 답답하고, 막막하고, 배신감도 들고, 화도 좀 나지만. 그래도 원망은 담지 않았다.
아직은, 담지 않았다.
아무렴 시스템에게 뒷배가 정말 있는지 확실하지 않을뿐더러, 저것이 나를 데려왔으리란 보장도 없지 않나.
더구나 시스템은 내 아군이자 조력자였다. 위험한 순간에 스킬을 내주거나 하는 걸로 보아, 최소한 내게 호의를 가진 게 분명하단 소리다.
그런 대상을 한순간의 감정 하나 못 이겨 적대해서야 쓰나. 그건 굉장히 어리석은 행위다.
분명 그러했다.
그러하므로.
“빌어먹을, 직접 대화를 시도하지 않는 것엔 이유가 있을 거라 믿어요.”
모든 질문과 애수를 삼키며 몸에 힘을 빼었다. 토옥. 눈꼬리를 타고 흐른 것이 눈과 귀 사이의 살을 지나, 귀를 살짝 돌아서 목에 닿았다.
“저랑 대화하면 안 된다는 등의 제한이 있는 거라고, 그렇게 여겨 주겠다고요.”
그리고 손을 치우며 잠시 감았던 눈꺼풀을 떼었다. 하늘이 보였다. 은하수가 넘쳐흐르는 하늘이. 내가 모르는 세상이.
“그러니까, 제발 이 게임을 깨면 돌아가게 해줘요.”
집이 그리워.
말하지 못한 한마디가 목구멍에 걸려서 울었다. 어떻게 글자 다섯 개가 그토록 목을 메이게 하는가 했다.
* * *
사무치는 설움을 꾹꾹 눌러 담아 다시금 눈을 가렸다. 절망에 무너지지 않게, 다시 가벼워지도록.
내가 제어할 수 없고 해결할 수 없는 사태에 비관해 봐야 망가지는 건 나뿐이니까.
또 상황이 꼭 나쁜 것만은 아니었다.
어차피 나는 컨셉에 휘둘려 반 강제로 스토리를 따라가는 상태지 않았나. 이것 외엔 달리 할 수 있는 일도, 할 만한 일도 없었고.
그러니 이번 의심은, 원래 내가 했을 일에 하나의 가능성을 더한 것에 불과하다. 시스템에 얽힌 무언가가 엔딩을 봤을 때 나를 돌려보내 줄지도 모른다는 가능성. 희망.
“…아닐 가능성도 열어 두긴 해야겠지.”
하지만 나는 실망하는 걸 별로 좋아하지 않았으므로, 부정적인 결말도 미리 헤아렸다. 시스템이 돌아갈 방법을 알지도 모른단 건 기실 내 바람에 더 가까웠으니 말이다.
“나리, 계속 거기서 쉬실 겁니까?”
그렇게 마음을 딱 정리했을까.
딱 좋은 타이밍에 데브가 다가왔다. 마을은 그새 조용해진 후였다.
“물자 지원이 오면 일부 나눠 주는 대가로 집을 받았습니다요. 거기서 쉬시죠?”
나는 표정을 고쳤다. 밤이라서 잘 보이지 않겠지만 혹시 모르지 않나.
“필, 요없다.”
근데 내 목소리 왜 이럼. 나는 무심코 대답하다가 새로 산 음료수 병처럼 꽉 잠긴 목소리에 제가 더 놀랐다. 울음기가 안 느껴서 그나마 다행이었다.
“밤에 비 올지도 모른다는데…….”
엇, 이건 좀.
데브가 별다른 눈치 못 챈 건 다행이니 넘기고, 비 맞는 노숙과 집 아래 잠이라.
나는 치열하게 고민했다. 그러나 아무리 생각해도 전자가 맞을 것 같았다.
그도 그럴게, 마을에 집이 많은 것도 아니고, 우리 쪽 인원이 열몇 명 수준인 것도 아니다. 사망자가 스물이 나와도 우리 쪽 사람은 여전히 쉰 명이 넘었다.
한데 그런 이들이 적당히 인원을 나눠서 방을 쓸 수 있을까? 마을 사람들이 집을 내줘봐야 고작 몇 채 정도일 텐데?
절대 그럴 리 없다. 분명 우글우글 부대끼며 잘 것이다. 컨셉은 그걸 절대 용납하지 않을 테고!
“꺼져라.”
하, 데브가 아까 오해 스택 쌓지만 않았어도 처마까진 노려봤을 텐데. 서럽다.
“그럼 모포라도…….”
“귓구멍이 하나 더 필요 했나?”
데브는 가세요. 악마기사는 뚝배기 깨지느니 파도 소리와 바닷바람, 빗방울을 친구 삼아 잘 거예요. 흐엉.
“…식사는 꼭 하러 오십쇼. 사냥 보낸 사람들이 하나둘 돌아오고 있으니까.”
너 때문이라도 안 갈 거거든. 흥이다.
“아직 대화 중인가?”
“이제 끝났습니다요.”
“온대?”
“그럴 리가.”
나는 바위에 몸을 누인 채 계속 밤하늘을 구경했다. 구름이 많긴 했지만 중천에 뜬 달은 잘 보였다.
“들었어, 마을에서 안 잔다며?”
나도 네가 대화하는 거 들었다. 그러니까 가라, 바람손.
“그보다 이쪽은 완전 엉망이군. 크으. 악취가 장난 아니야.”
악취가 났던가. 딴 생각하는 사이에 주변 냄새에 완전히 익숙해져서 잊고 있었다. 여기 바다는 아직 검은 용의 여파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마법사들 말로는 최소 한 달은 있어야 원래대로 돌아올 거라는데…… 많이 힘들겠어.”
바람손의 말에는 주어가 없었으나, 나는 어렵지 않게 알아들었다. 한 달. 마을 사람들에겐 기나긴 시간이 될 것이다.
“그보다 네 동료들은 보러 안 가나?”
“내가 왜 그래야 하지?”
“동료니까……?”
“그것들이?”
“아니면 말고. 하긴, 일시적으로 같이 움직이는 거랬지?”
그걸 또 기억하고 있네.
“그럼 내일 당장 출발해도 되겠네? 동료가 아니면 나을 때까지 기다릴 필요도 없을 테니까.”
기억하다 못해 바로 이용해 먹네.
“혹시…… 약속 잊은 건 아니지?”
나는 바람손이 부득불 내 앞에 선 이유를 깨달았다.
데브처럼 설득하러 왔나 했더니, 이 말 하러 온 거였구만. 하긴 급하댔으니까.
“잊길 바라나?”
“그럴 리가. 그럼 정말 가도 되는 거지?”
“상관없다.”
나는 망설임 없이 대답했다. 출발할 조건─배나 식량 문제─이 되나 모르겠지만 컨셉 상 거절은 처음부터 선택지에 없었다.
더불어 피로도 외엔 별 부상 없고, 피로도마저도 배에서 자면 해결되는지라 당장 출발해도 문제가 없는 상황이 맞긴 하거든.
물론 내가 아닌 다른 이들은 힘들 것이다. 특히 기절한 이래 아직 깨어나지 못한 인퀴지터와 아크메이지는 더.
“그래. 그 말 지키라고.”
근데 그런다고 내가 뺄 수는 없잖아. 컨셉도 컨셉이지만 도시 하나가 걸린 약속인데. 퀘스트도 있고.
심지어 바람손은 이 일로 동료도 둘이나 잃었다. 여기서 약속을 어기면 난 쓰레기였다. 컨셉 자체가 이미 다소 쓰레기긴 하지만, 어쨌든.
해서 그냥 둘은 어떻게든 되려니 하기로 했다. 어차피 내가 할 수 있는 것도 없었다.
보상 지급도 뭐…… 안 되면 포기하고 가든가 해야지. 돈이야 사실 크게 필요한 건 아니니까.
용의 사체도 장비 만들고 싶어서 욕심내는 거지, 목숨보다─컨셉 깨면 메이스 날아올 테니까─중요한 건 아니었고.
스토리도…… 솔직히 따라간다고 말은 하지만, 메인 퀘스트가 존재하긴 하는지 의문이다. 이거 그냥 내가 퀘스트 이것저것 닥치는 대로 깨면서 시간 보내면 진행되는 구조 아냐?
원작이랑 진행 방향이 완전 틀려져서 이젠 하나도 예상가는 게 없다.
“저희 왔어요.”
“아, 마지막 사냥팀이 돌아왔군.”
그러던 찰나, 사냥을 나갔던 선원들이 전원 복귀했다. 떠드는 걸 슬쩍 들어보면 수확물은 총 사슴 두 마리와 토끼 세 마리, 여우 한 마리다.
바람손이 그쪽으로 돌아갔다.
“이게 다야?”
“저희도 노력했다구요.”
“이걸 누구 코에 붙여?”
사슴 한 마리에서 나오는 고기양은 적지 않다.
다만 우리 측 인원이 인원인지라. 먹을 입이 이리 많아서야 부족할 수밖에 없다.
“저흰 바닷놈들이라고요.”
하기야 대부분 뱃사람들이다. 물고기라면 몰라 산짐승 잡는 건 영 낯설었겠지. 지금 잡은 사슴도 선원들이 아니라 따라간 모험가들의 공인 것 같고.
“일단 최대한 싹싹 발라 봐.”
“예애.”
나는 그쯤 되어서 인벤토리 내부에 있는 식량─비스킷과 채소 분말─를 만지작거렸다.
이걸 내줘도 기껏해야 10인분 나올까 할 텐데. 안 주는 것보단 나으려나.
근데 전달을 어떻게 해.
부스럭부스럭.
가서 툭 던져 줄까, 아니면 데브를 불러서 쑥 건네줘야 하나. 아까 바람손 가기 전에 던져 줬어야 했는데.
내가 그리 고민하고 있으니, 나와 가까운 지점에서 기척이 느껴졌다.
“고기다…….”
슬쩍 고개를 돌리면 몇 명의 아이가 보인다.
선원들이 사슴을 해체하는 걸 구경하는 듯한데, 구성원이 십 대 초반에서 후반까지 골고루였다.
“…배고파.”
“그래서 나무껍질 캐러 나왔잖아.”
“이건 싫단 말야.”
밤이 늦다 못해 새벽에 가까워졌음에도 왜 깨어 있나 했더니, 가장 어린애가 배고파서 먹을 걸 구하러 나온 거였나.
“나도 고기…….”
“안 돼. 저분들이 잡은 거잖아.”
나는 거기서 속절없이 무너졌다.
애들 배곯는 거 너무 싫다! 저번에는 그래도 우리가 나눠 준 고기가 있어서 먹는 걸 보기라도 했지, 이번엔 우리 먹을 양도 부족해서 안 줄 거 아냐!
벌떡.
나는 그 시점에서 얼굴을 구길 대로 구긴 채 척척 걸어갔다. 방향은 애들이 숨어 있는 곳이다.
용 대가리? 뭐 용 대가리에 발 달린 것도 아닌데 조금 놔둔다고 문제되진 않을 거다. 가장 문제 되는 마법사들도 다 꿈나라 갔고.
그러니 괜찮다.
“그래도 얘들아 조금만 참자. 아침이 밝으면 성에서 사람이 온댔어. 밥도 나눠 주신댔고.”
“그럼 내일부턴 매일 밥 먹을 수 있어?”
“그건…….”
“나 배고파아…….”
와중에 들려오는 대화는 뭐이리 서글픈지.
하루 머무는 값으로 물자를 가지고 딜을 했다지만, 그게 많을 리 없다. 한 달은커녕 며칠 단위겠지.
“혀, 형.”
그때, 한 아이가 나를 관측하는 데 성공했다. 아이의 손이 저보다 큰 이의 옷자락을 흔들었다.
“헉, 들켰다.”
“화, 화나신 건 아니겠지…….”
아이들이 겁먹은 목소리로 달달 몸을 떨었다. 그렇지만 의외로 도망가는 아이는 나오지 않는가 했다.
담력이 넘쳐서라기보다 너무 무서워서 굳은 쪽에 가까워 보이지마는.
“힉!”
나는 그 중 제일 큰 녀석을 보았다. 시선이 마주치자 아이가 벌벌 떨며 “저, 왜?” 하고 살살 물어 왔다.
그에 인벤토리에서 막 꺼낸 자루를 툭 던졌다. 자리 차지할까 봐 소분 안 해둔 건데, 지금보니 아주 현명한 선택이었다.
소분한 거 일일이 손바닥에 얹어 주면 모양새가 깨지잖아.
“……? 나리 거기서 뭐하십니까?”
“어, 어?”
저편에서 데브가 내 하는 양을 보고 고개를 쭉 빼밀고, 갑자기 자루를 건네받은 소녀는 당황해서 이상한 소리만 내었다.
당연히 나는 설명하지 않았다.
“애들은 또 왜 데리고 계십니까요.”
데브가 쫄래쫄래 이쪽으로 다가왔다. 잠깐 사이 자루 안을 본 소녀의 눈이 휘둥그레 커졌다.
“이, 이, 이건.”
“애한테 뭘 주셨길래 애가 이렇게 놀…… 에?”
“머, 먹을, 먹을 게…….”
조오아. 일단 먹을 거 건네줬고.
이대로 마을을 가로질러서 숲으로 간다. 밤새 뒤지다보면 뭐 하나라도 잡히겠지.
어차피 바람손도 밤에 출발하진 않을 테니까.
“먹을 거야?!”
“우리 주신 건가?”
“진짜? 먹는 거야?”
“나 배고파아.”
“아, 안 돼. 얘들아! 함부로 먹으면…… 아잇, 옷 잡아당기지 마!”
“나리, 아니.”
소녀가 주위 아이들에게 시달리는 사이 데브가 다소 나를 ‘저거 뭘 잘못 먹었나’란 느낌으로 봤다. 물론 뚝배기 깨질 걱정은 하지 않았다.
지금까지 내게 필요 없는 아이템, 다급한 이들에게 나눠 준 전적이 몇 번인가. 이번 것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즉, 캐붕 아니다!
“…같이 가요. 정말이지. 아까 같이 갔으면 좀 좋습니까?”
“꺼져라.”
“에이, 그러지 말고…….”
나는 투헨더를 유려하게 뽑아, 뒤를 돌아봄과 동시에 바닥에 박았다. 투헨더의 칼날이 데브의 발가락 바로 앞에 박혔다.
“꺼지겠습니다.”
참고로 이건 저번처럼 데브가 사슴 두 마리 얹고 오는 일 없도록 못 따라오게 말리려는 거니까 말이다.
절대 아까 배에서 당한 악마 빙의 이슈 때문에 기분이 상해서는 아니다. 아, 아무튼 아니다.
내 다리가 숲 깊숙한 곳으로 향하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