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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인공이 컨셉충이면 곤란한가요-52화 (52/389)

◈52화 빌고 또 빌어 (10)

「LEVEL UP!」

시야 한쪽을 가리는 창을 두고 조용히 사유했다.

파도가 거세거든 깊이 잠수하는 게 오히려 안전하다던 말을, 이제야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고.

위는 난장판 그 자체였던 것에 비해, 수면 아래는 의외로 고요하고 포근한 느낌이 있었다.

푸르르륵.

나는 파도에 이리 치고 저리 치이느라 잠시 집 나갔던 정신을 집에 다시 집어넣으며, 숨을 뱉었다. 수포가 입밖으로 나와 저완 다르게 위로 치솟았다.

‘움직여야 해.’

손에 간신히 쥐고 있던 투헨더와, 검집에서 빠져나오기 일보 직전인 롱소드. 그리고 안쪽에 온갖 물건을 달고 있는 체격 있는 성인 남성의 무게는 저절로 뜰 수 없는 조건이다.

가라앉기 싫다면 팔다리를 휘젓든가 뭘 해야 했다.

‘움직여.’

그렇지만 이성과 다르게 몸은 쉬이 따라 주지 않았다. 회색 바다를 투과했으나 기어이 오로라처럼 산란하고 만 빛줄기라든가. 바닷속 특유의 잔잔하지만 소란스러운 소음이라거나. 먹먹하게 뭉개진 온갖 굉음 따위가…… 답지 않게 너무 다정했다.

이대로 영영 가라앉아도 좋을 만큼.

「적의를 품은 대상이 반경 30m 이내에 존재합니다.」

…그래도, 어떻게 여기까지 왔는데. 저멀리 희미하게 내가 벤 검은 용이 보이는데.

잠깐의 안온에 정신 팔려 죽기는 좀 그렇지?

나는 눈을 번뜩 뜨고 검을 고쳐잡고 몸을 돌렸다.

검고 희뿌연 사방에서 이질적인 흰 것들이 어렴풋이 보였다. 전부 용아병들이다.

다만 상황이 영 좋지 않았다. 평소였다면 아 한 방 거리지, 라고 상대했을 것들이나 여긴 수중이고, 난 숨이 부족한 상태며, HP와 마력이 둘 다 없는지라.

쿨타임 안 차서 ‘생존본능’도 못 쓰겠다, 일단 물 밖으로 나가자.

나는 황급히 다리를 박찼다. 투헨더가 너무 무거웠으나 그건 어떻게 인벤토리에 욱여넣는 걸로 해결했다. 롱소드는 용아병들을 상대할 때 써야 하니까 남겨 뒀고.

퉁퉁.

먹먹한 소리와 함께 내 다리와 팔이 해수면 밖을 향해 박차고 올랐다. 위로 올라갈수록 파도가 강해서 움직이기가 더욱 힘들었다.

“푸하!”

그리고 물 밖에 얼굴을 내민 순간, 빌어처먹을 파도가 나를 다시 안쪽으로 처박았다. 아니다. 용아병이었다. 발목에서 화끈거림이 느껴졌다.

「불굴의 정신 발동!」

“……!”

이 망할 도마뱀새끼가 기어코 내 여벌의 목숨을.

나는 부디, 불굴의 정신이 회복시켜 준 HP마저 바닥을 치지 않길 빌며 롱소드를 휘둘렀다.

칼날이 약간의 저항감을 헤쳐 가며 어떻게 용아병을 가격했다.

퍼억!

힘이 안 들어간 건지, 마력을 안 둘러서인지.

한 번의 칼질로는 용아병의 살갗이 반밖에 안 패였다. 나는 억지로 한 번 더 검을 휘둘렀다. 그제야 용아병의 대가리가 따이며 내 발목을 놓아주었다.

캬악!

그러나 용아병의 기습은 이제 시작이었다.

나는 새롭게 덤벼드는 놈의 머리를 후려치며 다급히 위에 올랐다.

허억. 입가에 물과 함께 공기 일부가 조금 들어오고, 나는 다시 수면 아래로 시야를 내렸다. 어김 없이 내게 덤벼드는 용아병들이 보였다.

콱!

기어코 한 마리가 내 오른팔을 물었다.

당연히 나는 그놈의 모가지를 따고자 검을 휘둘렀다. 끼익. 일순, 지금껏 신경 쓰지 않았던 쇳소리가 유난히 거슬렸다.

콰직!

그리고 내가 오른팔을 문 놈을 겨우 죽이고, 다음으로 덤벼든 놈을 베려 했을 때.

맑은 소리도 없었다. 롱소드의 도신이 두 동강 났다. 염병. 직검이 부러진 직검이 되는 순간이었다.

보글보글.

나는 물방울과 함께 입술로 욕을 달싹였다. 그도 그럴게, 내구도가 많이 낮아졌다곤 하나 그래도 70선이었다.

50도 아니고 70!

그런데 그게 갑자기 부러져?

부러져도 하필 지금, 이런 타이밍에?

이건 억까였다!

나는 황당함을 금치 못하면서도 우선 머리를 틀었다.

아들아슬하게 용아병이 내 머리가 아닌 물을 씹었다. 천만다행이긴 한데 이제 어떻게 하지 싶은 막막함이 순식간에 내 뇌리를 점령했다.

투헨더? 그건 대안이 못 된다. 땅 위라면 모를까 물에선 무겁고 길수록 다루기 불편한 무기에 불과했다.

그럼 부러진 거라도 들고 싸워? 돌았냐! 길수록 불편한 건 사실이지만, 남은 칼날이 10cm도 안 되어 보이거니와 롱소드는 저 부분에 날이 제대로 안 서 있다!

포르르!

나는 공기 방울과 함께 다가오던 용아병을 보고 이를 갈았다. 퍼억! 도신이 부러진 자루가 물을 가르고 날아가, 놈의 미간을 정확히 후려쳤다.

용아병의 몸이 반사적으로 틀어졌다.

좋아, 그럼 이 타이밍에 무기 든다! 나는 다급히 옷 안쪽을 더듬어 단검을 꺼내 쥐었다. 투척형이고 뭐고 이거라도 쥐어야겠다는 마지막 발악이었다.

거기에 오른손으로는 동강 났던 도신 부분을 낚아챘다. 이걸 쥐고 싸워도 되는가 의문이 들긴 했지만, 달리 방도가 없었다.

용아병 두 마리가 입을 쩍 벌리며 내게 달려들었다.

나는 왼편에서 덤벼드는 놈에게 단검을 휘둘러 위협하고, 정면에 가깝도록 오던 녀석에겐 재빨리 도신을 내세웠다.

콰직!

내 재빠른 손놀림에 놈의 주둥이가 내 몸뚱이 대신 칼날을 물었다. 콱콱! 사나운 입질은 칼날을 씹어 가며 어떻게든 내 머리를 물어뜯으려 든다.

마음 같아선 그놈 목에 단검을 박고 싶지만 빈 왼편과 등에서 덤벼드는 놈이 너무 많은지라. 나는 팔을 바들바들 떨며 단검을 휘둘렀다.

푸학.

설상가상으로 겨우 견디던 숨이 뱉어지며 산소를 요구했다. 정말 미치고 팔짝 뛸 상황이었다. 온갖 게 겹친 시야가 가장자리부터 흐려졌다.

“나리!”

풍덩!

그러나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오를 구멍은 있다던가.

엄청난 공기 방울과 함께 무언가가 내 근처 물속으로 뛰어들더니 다급히 다가왔다.

작살이 칼날을 문 채 나를 몰아붙이던 용아병의 정수리에 박혀 들었다. 작살을 휘두른 팔뚝을 따라 그 얼굴을 살피면, 제법 익숙하고 반가운 얼굴이 보인다.

상반신에 희푸른 사슬을 휘감은 데브였다.

포르, 포르륵.

데브가 무어라 말하려는 듯 입을 달싹였다. 사실 잘 들리진 않았다. 독순을 하기에도 시야가 여의치 않고.

대신 하나 확실하게 보이는 것은 있었다.

“……!”

나는 단검을 버리고 빈 손으로 데브를 황급히 끌어당겼다. 콰직! 오른팔이 용아병 한 놈에게 짓물렸다.

데브가 눈을 꽉 감으며 본인 몸에 감긴 사슬을 잡아당긴 건 그 다음 일이었다.

촤르르르륵!

사슬 소리와 함께 데브와, 데브를 붙잡은 내 몸이 빠르게 물살을 헤치기 시작했다. 용아병보다 조금 더 빠른 속도였다.

거기에 특별한 일이 없지 않다면 이건 배로 향하는 것일 게 분명하니…… 대체 어떻게 내 위치를 알고 여기까지 왔는진 모르겠지만 살 수 있겠다 싶었다.

그러니까, 숨만 안 모자르면.

쑥.

부족한 숨에 무의식적으로 물밖으로 향하고자 허우적댔을까. 무언가가 입에 들어왔다. 산소가 새어 나오는 물건이었다.

“……!”

데브, 이 장한 녀석!

나는 감동으로 울컥했다. 물은 질색이라면서 날 구하러 달려와 준 것도 그렇고, 센스 좋게 호흡을 대신해 줄 물건도 챙겨 온 게 너무 감격이었다.

끼야아아악!

그런데, 이 상황에 눈치 없게 끼어드는 놈이 하나 있네.

나는 보충된 숨에 다시 밝아진 시야로 아래를 내려보았다. 표적마크가 거기서 보여서였고, 소리도 거기서 들렸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그리고 미친 광경이 내 눈에 담겼다.

인간으로 치면 허리 즈음이 잘린 검은 용이, 상반신만을 움직여 나에게로 헤엄쳐 오고 있었다.

무슨 좀비도 아니고, 더럽게 징그러운 놈이었다!

아, 물론 자세히 보니 편편했던 배에 본래는 없던 다리가 쑤욱 솟아 있고, 잘린 단면에선 새로운 꼬리가 돋긴 했다.

따지자면 용아병의 모습이라고 할까. 저게 비늘 단위가 아니라 몸통을 통째로 개조할 수 있는지는 몰랐지만.

잠깐, 그렇다면 아까 바람손을 친 그것도 정말 잘린 꼬리가 용아병이 된 거였나? 슬라임도 아니고 분열 오지네.

끈질기기가 어디 영혼 쪼개서 영생 누리려던 볼 네 글자 마법사랑 똑같다.

포르륵.

어쨌거나 이대로 가만히 있으면 당할 뿐이다. 나는 공기 방울과 함께 욕하며 결정을 내렸다.

내 선택을 눈치챈 데브가 내 옷자락을 꽉 붙잡았으나 그걸 뿌리치는 건 그다지 어려운 일이 아니다.

데브가 쇠사슬에 끌려가고, 순식간에 나만 덩그러니 바다에 남겨졌다.

다행히 검은 용의 잔재는 데브가 아닌 나만을 향해 달려오고 있다. 거리는 급속도로 가까워지는 중이다.

포륵포륵.

이젠, 제발.

나는 인벤토리에서 가까스로 투헨더를 꺼내 쥐었다. 휘두르기 썩 힘들었으나, ‘생명력 전환’으로 마력을 가져오니 그럭저럭 할 만해졌다.

그 대가로 얇디얇았던 HP가 정확히 1만 남았지만, 뭐 어쩌냐 싶었다. 어차피 내겐 뒤가 없던 상황이니까.

포륵.

죽어.

하므로, 나는 정말 마지막의 마지막 공격을 가했다. 미약한 저항감과 함께 뻗어간 검격이 분열한 용을 정수리부터 턱까지 반으로 쪼개고, 피를 퍼트렸다.

용의 피가 까맣던 탓에, 의도치 않은 암전이 벌어졌다.

* * *

아크메이지는 슬슬 폭풍이 개이는 듯한 하늘과 바다를 두고 초조하게 응시했다.

악마기사가 바다 위로 고개 내민 걸 발견했다며, 데려오겠노라 자청한 청년은 막 바다를 건너는 중이었다. 그것도 마법사들이 마력을 끌어모아 만들어 준 발판들을 징검다리 삼아서.

그리고 곧, 그 몸이 바다로 입수했다. 모험가들이 단단히 긴장했다.

“신호가 오면 당기는 거다.”

“시발, 이게…….”

쇠사슬은 용아병들 사이를 헤쳐 오기 힘들 것을 고려해 준비한 것이었다. 마법으로 급조한 것이나 성공만 한다면 두 사람을 충분히 구할 수 있을 터였다.

“왔다!”

“당겨!”

그리고 약속한 신호가 이행되었다.

모험가들이, 여력이 남는 선원들이 한마음 한뜻으로 사슬을 당겼다. 마법까지 더해지니 그 속도는 제법 빠르다.

“쿨럭, 쿨럭.”

그러나 돌아온 것이 단 한 사람임을 확인했을 때, 아크메이지는 저도 모르게 무릎을 꿇고 말았다.

“어이, 이봐!”

“아직, 아직 늦지, 쿨럭.”

누군가 청년을 부축하려 했다. 그것을 뿌리친 건 청년 본인이었다.

축 젖은 암녹색 머리칼 사이로, 녹색 눈동자가 선명히 빛났다.

처참한 상황임에도 희망을 포기하지 않은 채 여전히 기도하고 있는 인퀴지터가 그러하듯이.

“아직 늦지 않았어!”

“뭐?”

“아직 구할 수 있다고!”

“잠깐, 안돼. 용아병들이 근처에 다 다다랐다고!”

“빌어먹을, 기사 나리는 아직 살아 있단 말이야!”

“용아병들이 다가옵니다!”

하니, 그녀가 어찌 포기할 수 있을까?

용사가 피까지 토해 가며 이 배를 띄우고 적들이 다가오지 못할 성역을 유지하고 있는데.

일반인에 거의 가까운 도적이 제 목숨을 도외시한 채 위험한 일을 자청했는데.

악마기사가 인간의 몸으로 해저에서 용과 싸우고 있는데.

그녀가 어떻게.

“10초만 내게 내주게.”

방어막이 깨지던 때 내상을 입은 상황이지만, 아무래도 좋아졌다. 몸을 아끼는 것도 살아야 의미가 있는 법이니.

주륵.

“아, 아크메이지님!”

그녀는 억지로 마력을 끌어모으고 그것들을 응집시켰다. 주문을 외워야 보다 정확한 마법이 펼쳐지나, 입안이 피가 가득찬 탓에 주문은 그만 생략했다.

그래도 상관없었다.

폭격에 가까운 마력의 화살이 근해 위로 올라온 용아병들을 모조리 꿰뚫었다. 속이 진탕 뒤집어지며 피가 그녀의 흰 털을 척척히 물들였지만, 이 정도면 싼 값이었다.

“아크메이지님!”

“괜, 찮네…….”

늙은이 목숨보다 귀한 것이 저 젊은 것들이라.

그녀는 흐려지는 시야를 두고 철퍽 주저앉았다. 노쇠한 몸에 더해진 무리는 이제 더이상의 행동을 허락하지 않을 것이다.

그래도 좋았다.

문득, 대해 일부가 솟아올랐다. 구름이 걷힌 하늘사이로 스며든 빛살이 세상을 금빛으로 물들였다.

“저건…….”

“서, 설마 우리를…….”

바닷물 사이로 고개를 내민 건 용이었다.

검정 대신 푸름을 두르고 있는, 타락하지 않은 신수.

키이이이.

명징한 울음소리와 함께 용의 입이 벌어졌다. 벌어진 입새로 붉은 혀와 무언갈 단단히 쥔 검은 것이 보였다.

좌우 색이 다른 머리카락과 가려진 한쪽 눈이 유독 선명했다.

“기사 나리!”

“악마기사!”

부정하지 않은 짐승은 손쉽게 성역으로 고개를 들이밀었다. 청년과 바람손이 겁없이 짐승의 입안으로 상체를 집어넣어 사내를 붙잡았다.

툭. 반으로 잘린 용의 머리가 갑판 위로 떨어졌다.

“이봐, 너 살아 있어?”

“나리, 나리 살아 있습니까?”

아크메이지는 감기려는 눈을 억지로 치떴다. 최소한, 최소한 가장 위험한 일에 앞장섰던 이의 안위는 확인하고 잠들고 싶었다.

“나리, 대답 좀 해봐요.”

“쿨럭.”

“나리!”

아. 역시나.

“소란 떨지 마라…….”

“나리가 할 말입니까?! 간 떨어지는 줄 알았단 말입니다!”

저 성질에 쉬이 죽었을 리 없다.

그녀는 그제야 안도하고 눈꺼풀을 내릴 수 있었다. 조금…… 조금 긴 잠이 될 것 같았다.

* * *

아, 미친.

쪼개진 몸뚱이가 3페이즈, 그러니까 용아병 부활을 또 하지 않는 걸 확인하고 수면 위로 올라가던 차였다.

숨은 데브가 준 것으로도 충분했지만, 그래도 생존 신고는 해야 하지 않겠나.

물론 가라앉는 용 사체가 너무너무 아까워서─얘넨 사체를 도축해야만 소재를 드랍하니까─쪼개진 머리를 하나 낑낑 들고 올라갔다.

잡템 안 줍는 설정이라고 버리기엔, ‘용의 부산물’이란 타이틀이 너무 컸다. 크기에 비해 의외로 가볍다는 것도 한몫했고.

더구나 내 롱소드도 딱 부러진 참이란 말이지. 이 용 대가리로 사제 검이라도 만들 수 있으면 딱 좋을 터였다.

퀘스트 보상이 있을지 없을지 확신가지 않는 이상 나는 이거라도 챙겨야 했다.

그런데 그렇게 발장구치며 끙끙 올라갔더니, 뭔 화살 같은 게 막 쏟아지질 않나.

기겁하며 회피를 위해 잠수했다가 해룡이 검은 용 분열체 하나를 갈가리 찢는 걸 목격하질 않나.

조용히 배로 가려다가 신성력 넘실대는 거 보고 울면서 파도에 몸 맡기려 했더니 해룡이 강제로 입에 물고─이때 너무 놀라서 공격할 뻔했다. 마력이랑 HP가 바닥이어서 불발로 그쳤지만─다이렉트로 배달해 줬다.

선택지 따윈 없었다.

호의는 고마운데 내 HP 큰일 났다.

“쿨럭.”

와, 야. 신성력 영역에 들어가자마자 피 나오는 거 봐라.

진짜 페널티 너무 심한 거 아니야? 어째 적한테 깎인 HP보다 아군한테 깎인 게 더 많아!

“나리!”

근데 정말? 정말 이대로 죽는다고? 내가 여기까지 어떻게 살아남았는데? 내가 어떻게 용을 죽였는데?

하, 이걸 우째…… 나는 바닥을 기는 HP창을 두고 맥없이 늘어졌다. 이렇게 허무하게 죽는다고 생각하니 힘이 빠진 까닭이다.

그러나 불행 중 다행이도, HP가 1이 된 순간 체력은 더이상 떨어지지 않았다. 두 번 떨어졌을 시간이 흐른 후에도 그랬다.

이건 뭐, 병 주고 약 주고도 아니고. 마지막 양심인가? 신성력에 피가 깎일지언정 1 이하는 되지 않는단건?

정말 할 말이 많지만 하고 싶지 않아지는 설정이다.

“소란 떨지 마라…….”

“나리가 할 말입니까?! 간 떨어지는 줄 알았단 말입니다!”

그래도 당장 죽지 않는다면 조금 안심이니까. 나는 늘어지듯 컨셉에 이입했다.

“해.”

마침 날 부축한 사람중 하나는 바람손이었다.

“아직 안 졌겠지.”

아까 말하는 거 내가 못 들었을 줄 알아? 나 약속 지켰다.

하루 지연된 시점에서 의미 없는 약속이긴 해도. 어쨌든 용 자체는 반나절만에 잡았다고.

“…그래, 빌어먹을. 아직 지지 않았어. 지지 않았다고…….”

나는 바람손이 헛웃음을 터트리는 걸 보았다. 나름 보람은 있었다.

“망할, 전설을 써서 기분이 좋으시겠어?”

보람은 있었는데…….

야, 나 지금 발견했는데 아크메이지 왜 실려 가고 있냐. 그리고 인퀴지터는 빛기둥에 갇혀서 뭐하고 있는데? 사제들은 왜 다 기절해 있고?

우리 돌아갈 수는 있는 거냐??

“요, 용이!”

그때 사람들이 웅성웅성대며 소리를 질렀다. 덜컹. 배가 들리는 듯한 소리는 덤이었다.

“물고기와 거북이들이 배를 나르고 있어…….”

“…뭍까지 데려다 줄 셈인가?”

“세상에, 해룡이 배를 이끌다니…….”

…뭔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용이 어떻게 해주긴 하나 본데.

「❖ 바다에서 떠내려온 부패

∎ 부정의 근원을 찾아 정화하기

∎ 그뤼 텔츠로 귀환」

그럼 진짜 집에 갈 수 있는 건가. 와 다행이다. 여기서 못 돌아간다고 했다면 나 울었어.

“사제님!”

“심문관님!”

그때 인퀴지터가 풀썩 엎어졌다. 배를 휘감던 광휘가 사라졌다.

“아뜨뜨!”

“함부로 건드리면 안 됩니다!”

“신이시여…….”

열기가 피어오르는 몸으로 숨을 몰아쉬는 이는, 내가 모르는 어떤 고생을 한 것 같다. 그리고 그게 아마 이 배를 지켰던 게 아닐까 싶고.

“…짜증나지만, 인정해야겠네. 신전도 나름 도움이 된다는 거.”

그렇지 않고서야 바람손이 저런 말을 할 리 없다.

“뭐 나름 용사 양반이니까요.”

“…뭐? 용사?”

“됐고, 나리. 이번엔 가서 제발 좀 쉽시다. 제발요.”

“야, 말은 끝까지 해야지!”

“댁은 키 안 봅니까? 운전대 안 잡아요?”

“키가 박살 났는데 보기는 무슨!”

어쨌거나, 나는 그 시점에서 레이드가 정말 끝나긴 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비록 초장의 계획은 온데간데없어져 버렸지만, 바라던 바는 다 이뤘으니까.

“그래.”

“……?”

물론 도시에 가서도 할 일이 좀 산재해 있을 것 같긴 한데. 당장 바람손도 도우러 가야하고.

“조금, 쉬지.”

그래도…… 오늘은 좀 쉬어도 되겠지.

“…나리 아니군요. 저는 안 속습니다요. 나리가 절대 쉬자는 말을 할 리가 없잖습니까.”

“…….”

“하, 기분 좋을 때 사람 힘들게 하지 말고 어서어서 들어가시죠? 정말이지, 껴야 할 때를 모르는 사람이네.”

“너 갑자기 뭔 소릴 하는 거야?”

“댁은 몰라도 됩니다.”

…하, 인생 썩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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