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화 빌고 또 빌어 (9)
바람손은 예상했던 차가움 대신 지독한 딱딱함을 느끼며 숨을 뱉었다.
빌어먹을, 방금 무슨 일이 있었더라? 키를, 키를 붙잡고 있다가, 갑자기 무언가가 내 몸을 때려서. 차갑고 단단하지만 몸을 적시는 그것 때문에 분명…….
“신이시여.”
바람손은 비바람을 몰아내는 광휘와, 자신을 감싸는 온기에 정신차렸다. 온몸의 뼈가 부러진 듯한 고통은 점차 나아져 그의 머리를 맑게 개었다.
“제가 딛는 땅이 당신의 땅이 되리니.”
황급히 눈을 뜨면 악마기사와 함께 다니던 이단심문관에게 내리꽂힌 빛기둥을 볼 수 있다.
그 기둥으로부터 흘러나온 휘광은 사방으로 범람하며 배를 강제로 물 위에 붙들고, 바다의 삿된 모든 것을 태워 냈다.
“저와 함께하소서.”
하다못해, 이단심문관의 피눈물마저도.
“…정말, 사람인가?”
“…용이.”
아, 이럴 때가 아니야.
그는 명징해진 정신으로 자신이 마지막으로 보았던 것을 떠올리는 데 성공했다.
『배로 돌아가라.』
산 사람치고 차던 숨과 멱살을 과격히 붙잡던 손, 속삭이던 한마디와 함께 역전된 자리.
저를 배로 던지며 대신 바다에 삼켜진……
마지막까지 흔들림 한번 없던 회색 눈동자.
저를 살리기 위해 목숨을 바친 아버지와 더없이 닮아서, 서러워지기만 하는.
“악마기사, 악마기사는?!”
그는 어쩐지 말을 잇지 않는 부선장의 팔을 뿌리치며 상체를 들어올렸다. 그리고 다음 순간 말을 잃었다.
“…이봐, 이봐.”
부선장은 그를 걱정하지 않은 것도, 그를 도울 생각이 없던 것도 아니다. 단지, 그를 돕는 것보다 더 강렬한 일이 하나 있었을 뿐이지.
“이럴 거면, 배가 부숴지기 전부터 나서든가!”
살아서 용과 홀로 대적하는 인간을 목격하게 되는 일이 있을까? 해일과 폭풍, 천둥번개 속에서 타락한 용과 대등하게 싸우는 전사가 실제함을 누군가 믿기는 해줄까?
“빌어먹을, 곧 해가 진다고! 약속 지켜, 망할 악마기사!”
절망적인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바람손은 괜히 유쾌해졌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피우온, 내가 뭍으로 살아서 돌아간다면 이 날의 일을 수십 번이고 더 들어야 할 거야.”
이 광경은 세상 그 누구도, 설사 하늘의 신조차도 눈에 담아 본 적 없었을 거다.
* * *
아까 미간에 검을 박아 넣었어야 했는데.
나는 아까 간발의 차로 놓친 기회를 곱씹으며 빠르게 발을 놀렸다. 군화로 비늘을 짓밟으며 내 몸이 용의 몸뚱이를 타고 내달렸다.
바닷물과 빗물 덕분에 많이 미끄러워서, 한 걸음 한 걸음에 나름 신경 써야 했다.
캬아아악!
그때, 검은 용이 그런 나를 노리고 머리를 제 몸 위로 짓쳐들었다. 나는 다급히 발돋움을 해 그 돌진을 피했다.
비례기호(∝)처럼 꼬인 용이 빠르게 머리를 바다에 처박았다. 1분 전 이와 비슷하게 굴었다가 내게 미간을 꿰일 뻔하고 학습한 행위였다.
“칫!”
기회 한 번 놓친 게 이렇게까지 뼈아플 줄이야.
나는 나를 지나친 머리쪽에 발을 딛는 대신 본래 딛고 있던 부분에 안착했다.
머리가 수면 아래로 파고든 이상, 저쪽으로 건너가 봐야 바다 여행을 할 뿐이니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물에 잠기는 순간 내 패배가 확실시되는 만큼, 나는 어떻게든 놈의 몸뚱이를 대지 삼아 하늘에 남아야 했다.
나는 그렇게 용의 몸뚱이를 거슬러 올라 잘린 꼬리까지 그대로 내달렸다. 그리고 끝내 끝이 도달했을 때, 마력을 이용해 가며 가장 높이 뛰어올렸다.
핏줄기가 투둑투둑 내 몸을 때렸다.
파앙!
내가 온전히 추락하기 전, 대해가 갈라지며 검은 용의 벌어진 입이 치솟았다.
그러나 추락하는 지점을 정하는 건 나다.
나는 아슬아슬하게 놈의 입안을 비껴, 놈의 입꼬리에 칼날을 걸친 채 미끄러졌다.
검은 기운이 맺힌 롱소드가 놈의 살갗을 찢으며 입에 확장 공사를 가했다. 인간으로 치면 입꼬리를 귀 밑까지 찢어 버린 꼴이었다.
그그그극!
하나 마찰력과 비늘, 살갗의 강도 때문에 몸 절반을 가로 긋는다거나 할 수는 없었다.
나는 딱 놈의 주둥이 길이만큼 입가를 찢고 멈춰 섰다. 마치 영화 주인공이 된 기분이었다.
왜, 암벽등반하다가 미끄러져서, 아이스바일인가 피켈인가 하는 장비를 암벽에 박아 놓고 아슬아슬하게 멈춰 서는 주인공 같은 거 말이다.
캬아아악!!
다만 그들과 나의 차이점은 이거였다.
그들은 암벽이 살아 있지 않아서 다시 차근차근 올라가면 그만이지만, 나는 용이 나서서 나를 떨어트리려 몸부림쳤다.
내 몸이 결국 뽑혀 나온 검과 함께 추락을 시작했다.
“기사 나리!”
그러나 나는 혼자가 아니었다. 아직 침몰하지 않은 배에서─아니 저 빛은 뭐야?─나무판자가 빙글빙글 날아왔다.
첨벙!
내 추락 지점 근처에 판자가 떨어진 건 덤이었다. 발판이 생겼다.
콰앙!
충돌 직후, 엄청난 충격에 판자가 바닷물을 밀어내고 아래로 내려간 것도 모자라, 그대로 쩌적 갈라졌다.
그러나 그것이 발판의 역할을 잃기 전, 나는 창공으로 날아올랐다. 내 다음 발판은 머리가 밖으로 나온 덕에 노출된 용의 몸뚱이다.
거의 수직으로 서 있다시피 해, 밟고 서긴 어렵겠지만 내겐 다행히 검이 있다. 나는 롱소드에 마력을 주입했다.
끼이익. 롱소드에서 기묘한 쇳소리가 들려왔다.
콰직!
그래도 마력을 품은 롱소드는 그대로 비늘을 뚫고 단단히 박혀 주었다. 내가 잡고 버틸 수 있는 여지가 생긴 셈이다.
캬아아악!
다만 이번에도 용이 머리를 유연하게 틀어 나를 잡아먹으려 들었다. 이 상태엔 점프도 어려웠으나 그다지 걱정되진 않았다.
바다 아래에서 꿈틀거리는 건 비단 검은 용의 몸통뿐이 아니었다.
키아아아아!
청명한 포효와 함께 잠시간 몸을 감췄던 해룡이 등장했다.
검은 용의 목덜미가 그 입에 물리며 나를 노렸던 머리가 방향을 틀었다. 수직에 가까웠던 몸뚱이가 경사지게 기울어진 건 바로 다음이었다.
나는 암벽등반하듯 울퉁불퉁한 비늘을 잡고 몸뚱이를 기어오르듯 했다. 많이 미끌미끌했으나 이짓을 다시 해야 한다고 되새겨 보면 없던 힘도 생겼다.
그그극
나는 앞으로 기다가, 걷다가, 그대로 달렸다. 자연스레 뽑힌 검이 나와 함께했다.
마력을 휘감은 다리는 껑충껑충 검은 용의 몸을 타고 올랐다. 그렇지만 뛰어오르기엔 너무 급격한 구간이 있어, 나는 해룡 쪽에 갈아타는 것으로 고도를 높였다.
얼핏 내려다본 대해는 너무 아득해서 번지점프대 앞에 선 기분이 들었다.
그러나 나는 고소공포증이 없어서 말이다. 이런 것쯤은 하나도 무섭지 않았다.
내 다리가 해룡의 머리를 뛰어넘어, 막 해룡에게서 풀려난 검은 용을 정면으로 맞이했다.
약간의 타이밍 문제로 검은 용을 밟지 못하고 허공에 붕 떠버렸지만, 이미 벌어진 일이니 뭐 어쩌겠나. 일단 딜부터 넣자.
끼이익!
나는 끔찍한 쇳소리와 함께하며 검에 실었던 마력을 쏘아 보냈다.
반월 형태의 참격이 검은 용의 목덜미 부근을 대각선으로 베었다. 흔히 생선 칼집 낼 때 내는 상처와 비슷했다.
캬아아악!
검은 용이 고통에 몸서리치며 그대로 바다에 몸을 누이려는 듯했다.
죽었는지는 아직 모르겠으나, 그것보단 내 사정이 좀 더 우선이었다.
아무렴, 공중에 떠 있는 내 몸이 곧 어떻게 되겠는가? 그냥 해수에 내리꽂히는 거지.
그래서야 절대 안 된다.
나는 다급히 몸에 힘을 주어 어떻게든 검은 용의 몸뚱이에 착지하고자 했다. 검은 용을 방패 삼으면 최소한 추락의 충격이 덜어지겠거니 한 판단이었다.
다행히 검은 용의 몸뚱이가 면적이 큰 탓인가. 바람의 저항인지 뭔지 알 수 없는 이유로 나보다는 느리게 추락했다.
덕분에 나는 간신히 검은 용의 뱃가죽에 착지할 수 있었고 그 상태로 하강했다.
콰앙!
예상대로 검은 용의 육신은 물과 부딪친 충격을 거의 대부분 상쇄해 주었다.
꿈틀
안타깝게도 살아 있었는지 바로 몸을 뒤집어 가며 물 아래로 스며들려 했지만.
나는 다급히 튀어올라, 운 좋게 바다 위로 고개 내밀고 있던 용아병─사실 나를 노렸던 것 같다─을 짓밟았다. 징검다리가 되어준 용아병이 물 밑으로 가라앉고, 내 몸이 해룡의 몸뚱이에 찰싹 달라붙었다.
검을 박지 않고 비늘에 매달려서인가, 해룡은 그런 나를 공격하지 않았다. 그렇다고 나를 배나 제 머리 위에 얹어 주는 등의 친절까진 베풀지 않았다.
해룡이 그대로 잠수하려는 듯, 고개를 바다에 처박고 스르릉 움직이기 시작했다. 내가 잡고 있던 부위가 막 출발한 롤러코스터처럼 천천히 위로 올라갔다.
“하아, 하.”
나는 그쯤 돼서 내 호흡이 많이 가쁘다는 걸 깨달았다.
조금, 아니 조금 많이 지치긴 했나 보다.
하기야 무리도 아니었다. 신성력 때문에 곤두박질 쳤던 HP는 이제 절반까지 차올랐고, 마력은 용에게 대항하다 보니까 거의 바닥 상태다.
고소공포증은 없다 한들 바다에 빠질 위험을 두고 상공에서 아슬아슬하게 싸우는 건 사람으로서 긴장할 수밖에 없는 일이었고.
거기에 내 원래 몸 상태가 좋았냐면 그것도 아닌지라.
몇 시간 항해로 멀미했던 게 어디 가시지 않았으면서 정신력 하나로 참고 억눌러왔다. 겨우 숨 돌릴 타이밍이 된 지금, 그 모든 게 몰려와도 이상하지 않다.
꽈악.
그래도 이걸 다시 하기는 싫으니까.
이 짓을 두 번 해야 한다고 생각하면 저절로 힘이 솟는다. 타타라 지하도 때와 비슷했다.
나, 이거 리트할 자신 없다. 그 이전에 다시 하고 싶지도 않다.
피로도 100 찍은 채로 하수도 뚫고 보스전 치르는 거나, 멀미를 견뎌 내며 몇 시간 다시 항해하는 거나. 둘 다 최악이었다!
나는 억지로 신경을 곤두세우며 갈아탈 수 있는 수단을 헤아렸다. 내가 밟고 있는 몸뚱이가 완전히 물에 들어가기 전에 어서 계책을 내야 했다.
“……?”
그런데 저 바다 아래, 새까만 그림자가 보였다. 새삼스러울 일은 아니었다. 용들이 잠수한 이상 물 아래서 뭐가 꿀렁대는 건 당연한 일이었으니까.
그러나 위치가 잘못되었다. 저게 저곳에서 등장하면 안 된다.
내가 아닌 배를 노려선 안 됐다.
“빌어먹을 용이!”
야! 내가 팔랑팔랑 뛰어서 피해 다닌다고 지금 못 피하는 본진 노리기냐?! 빈집 털기 하는 거냐고! 게임 정말 X같이 하네!!
나는 다급히 발판이 될 만한 걸 찾았다.
당연하지만 그런 건 없었다. 마스트의 파편은 이 망망대해를 채우기엔 너무 적은 데다가, 드센 너울은 그것들을 삼켜 버린 지 오래였다.
용? 그것들은 나를 배려하는 법이 없다. 내가 지금껏 용을 밟고 뛰었던 것은 온갖 행운이 겹쳐져서 가능한 일이었다.
나는 용이 바깥에 나오지 않으면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존재에 불과했다. 실상 지금도 바다에 빠지기 일보직전인 것처럼.
그럼, 그럼 어떻게 하지? 어떻게 해야 배 밑판을 노리고 올라오는 저것을 막을 수 있지? 어떻게 해야 저 망할 용에게 한 방을 먹일 수…….
「생명력 전환│생명력을 소모해 마력을 회복한다.
효과: 소모 HP에 비례해 마력 회복.」
별안간, 창이 떠오르며 내 시야 일부를 가렸다. 그 안쪽엔 스킬창에서 본 적 없고 특별히 상상하거나 바란 적도 없던 새로운 스킬이 적혀 있다.
“…어이가 없네.”
뜬금없이? 여기서? 새 스킬을? 공짜로 준다고?
허참. 이럴 거면 난이도를 낮추거나 합리적으로 만들든가.
상황 들이닥치고 나서야 ‘어이, 이거 써라’하고 던져 주는 거냐고.
“무슨…….”
아니면, 숨기는 건 이제 포기했다 이거야?
“베타테스트도 아니고!”
그러나 불만은 불만이고, 작금의 처지는 처지다.
로그아웃 버그도 안 고쳐 주는데 밸런스 패치가 우선이랴. 어차피 안 될 걸 안다면, 주어진 거나 제대로 써먹어야 한다.
나는 다급히 설명을 다시 읽고 머리를 굴렸다.
HP를 소모해 마력회복. 그래, 마력회복.
“…마력 죄다 쏟아부으란 거지?”
내가 사용할 수 있는 원거리 스킬은 참격이 유일하고, 시험해 본 바 참격의 사정거리는 소모한 마력에 비례했다.
비록 이 정도 거리까지 날아가는지는 확인하지 못했지만…… 선택지가 없으니 걸어보는 수밖에. 해룡의 몸도 이제 꼬리만 남아서 더이상 물러날 공간도 없고.
나는 시스템이 괜히 이 스킬을 줬을 리 없노라 믿음을 가지며 검을 들었다. 참격을 크고 길게 뻗는 덴 롱소드보다 투헨더가 유리했으므로 당연히 종류도 바꿔 들었다.
그리고 내가 밟고 서 있던 지지대가 한계에 달했을 때, 나는 최대한 앞으로 뛰며 투헨더를 횡으로 휘둘렀다.
그 어느 때보다 강렬한 기운이 대양을 가르며, 기어이 배를 뒤집으려던 검은 용에게 닿았다.
‘베었다.’
선명한 확신이 손끝에 매달린 채, 시야가 검은 바다로 가득 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