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9화 빌고 또 빌어 (7)
나는 솔직히, 항해술이 뛰어나다고 암초를 피해서 이 큰 배를 이끄는 게 가능할 거라 여기지 않았다.
그렇지만 세상엔 별의별 능력자가 있는 법이고, 게임엔 특히 그런 과장된 능력치가 흔한지라.
“이제 용울목이다!”
채찍을 주무기 삼던 모험가가 건져 올린 용아병을 베는 식으로 합을 맞추고 있자니, 그런 예고가 떨어졌다.
「서해: 용울목」
「❖ 바다에서 떠내려온 부패
∎ 용울목으로 이동하기
∎ 부정의 근원을 찾아 정화하기」
쿵!
퀘스트 갱신과 함께, 예전에 한 번 해봤던 계곡 래프팅이 떠오르는 출렁임이 곧바로 이어졌다.
“이거 진짜 장난 아닌데요!?”
여태까지 몰아쳤던 해일과 풍랑은 대체 뭐였던 건지. 물살이 빠르대서 그냥 그러려니 했는데, 이 커다란 배가 이렇게까지 휘둘릴 거라곤 생각 못 했다.
“빌어먹을, 더럽게 운행하기 힘들군! 미친 바다야!”
아니, 이걸 운행하는 게 더 미친 거 같은데.
나는 그리 생각하며 검을 들었다. 드센 너울에 용아병마저 바다 바깥으로 튕겨 나오고 있었다.
서걱!
날아간 참격이 보호막 너머로 사출되며 용아병들을 베었다.
그 대가로 내 몸이 덜컥 갑판 밖으로 나갈 뻔했으나 데브가 으아악 소리를 내며 코트 밑단을 잡고, 아크메이지가 내 발목을 잡고 이끔으로써 어떻게 다시 발을 붙였다.
배는 아직 침몰할 기색이 아니나, 롤러코스터처럼 엄청나게 흔들리고 있다. 진짜 토 쏠렸다.
보호장치를 켜서 아까처럼 발악적으로 용아병을 상대할 필요 없다는 게 그나마 다행이었다.
“마법사들 죄 기절할 것 같은데, 보호장치 괜찮은 겁니까?!”
데브의 말마따나 마법사가 기절하면 보호장치 유지가 어려워진다. 배에 탑재된 모든 기능은 마력을 연료로 작동되기 때문이다.
제한 시간이 존재하고, 마법사가 이십 명이나 따라온 것도 그 탓이었다. 마법사의 존재 의의는 때에 맞는 장치 발동 외에 살아 있는 예비 배터리였다.
“지금 것은 미리 넣어 둔 마력으로 작동되니 걱정할 필요 없다!”
물론 지금부터 방어막이나 치고 있지는 않다. 보호장치는 미리 마력을 불어넣어 둔 것으로도 움직이긴 하니까.
다만 이래서야…… 충전해 둔 마력이 다 떨어졌을 땐 어찌 될지 모르겠다.
게이지 바닥나기 전에 목적지에 도달해야 하는 레이싱 게임 같은 거 생각난다. 비록 내가 조종하는 게 아니지만.
“마법사뿐 아니라 사제들도 다 기절할, 와악!”
와중에 엄청난 덜컹거림에 데브가 잡고 있던 것을 놓치고 말았다. 그의 몸이 갑판을 주욱 미끄러지며 바다 쪽으로 떨어지려 했다.
“이 멍청한!”
보호장치의 보호막은 바깥에서 들어오는 공격만 막아 주니. 나가는 공격이나 무언가는 막지 않는다.
즉, 사람이 튕겨 나가면 그대로 바다에 빠진다. 인퀴지터와 내 손이 다급히 뻗어졌다.
“잡았다!”
“흐악!”
미우나 고우나 동료라고, 인퀴지터가 데브를 가장 먼저 붙잡고, 나까지 그를 잡고 끌어 올렸다. 데브가 갑판에 다시 올라왔다.
“사, 살았다.”
뒤로 축 늘어진 귀가 방금 전 그의 심정을 알려 주는 듯하다. 내 심장도 데브 못지않게 떨어졌을 테지만 말이다.
“끄아아악!”
하나 안도할 때가 아니었다.
뒤이어 선원 중 하나가 마스트에서 떨어져 바다쪽으로 추락하기 시작했다.
다행히 바다 멀리로 튕겨 나가는 게 아니고, 또 추락 지점이 나와 가까웠다. 잡을 수 있다.
탁!
“흐아악!”
나는 다급히 달려 떨어진 사람의 손을 낚아챘다. 내 상체가 절반 가까이 난간을 넘어갔지만 어떻게 선원을 잡는 데는 성공했다.
“사, 살려 줘!”
“…발버둥 치지 마라!”
으아아아. 내 몸도 넘어간다!
쿵!
내 몸이 같이 넘어가거나, 젖은 손이 미끄러지기 전, 간발의 차로 배가 다시 반대쪽으로 기우뚱했다.
그 충격으로 선원의 몸이 퉁 떠올랐고, 나는 그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선원을 갑판쪽으로 내동댕이쳤다. 멍들거나 어디 부러졌을 수는 있겠지만 저 까만 바다에 먹히는 것보단 나을 거다.
“잡아!”
몸의 고통도 생존 의지는 꺾지 못하는 법이다. 선원이 미끄러지기 전 서둘러 무언갈 붙잡았다.
“이거 괜찮은 거냐구요!”
“아직 안 죽었으면 괜찮은 거지!”
이 이외에 떨어진 사람은 딱히 안 보이고. 내 속은 이제 뒤집어져서 시야도 뒤집어진 것 같고.
바람손은 용케도 키를 붙잡고 었다. 이 상황에도 키를 조절해 가며 버티다니 굉장한 놈이 아닐 수 없다.
아니면, 신발에 끈끈이라도 붙인 건가? 그걸 고려해도 코어 근육이 장난 아닌데.
“전방에!”
그때 마스트 위에서 간신히 버티던 누군가가 외쳤다.
“바깥으로 튀어나온 암초가!”
그 외침이 없더라도 이미 바람손은 키와 씨름하는 중 같지만…… 원래 배란 게 자동차나 오토바이처럼 즉각적으로 회전이 안 되는 법이다.
“젠장, 저건 부딪칠 것 같은데!”
보호장치가 어지간한 암초는 커버해 준다지만, 암초에 부딪치는 찰나간 소모되는 마력량이 어마어마하다. 기본 유지 비용에 부딪쳤을 때의 충격량을 해소하기 위한 마력이 추가로 청구되니까.
바람손 같은 선장이 필요한 것도 그 때문이었다. 용의 공격에 대비해야 할 마력을 암초에 죄다 써먹어서야 의미가 없지 않나.
“다들 꽉 잡아!”
어쨌든, 그런 이유로 나는 가만히 있을 수 없었다.
나는 배 한편에 존재하던 여분의 로프를 쥐고 다른 손엔 작살을 쥔 채 달리기 시작했다.
갑판 위를 질주하기엔 방해물이 뭔가 많아 차선으로 택한 건 난간이었다.
흔들리는 배에서 좁디좁은 난간을 밟고 뛰는 건 미친 짓 같았지만, 의외로 균형 잡기는 쉬웠다.
괜히 ‘생존본능’ 스킬이 추천해 준 게 아니었다. 욕지기가 미친 듯이 올라오는 건 다소 유감이었지만서도.
“네놈! 밧줄 잡아라!”
“에?! 아, 아! 미친!”
하나 이미 호랑이 등에 탄 형국이다. 나는 그대로 선수에 도달해 뱃머리를 디뎠다. 내 몸이 그대로 배 밖으로 뛰쳐나갔다.
꽈릉!
천둥이 요란한 검은 바다가 회색 포말을 잔뜩 뿌려대며 내 아래서 넘실대고 있었다.
“……?!”
“저 미친 기사 나리!”
“바, 바다에!”
나는 눈을 부릅 뜨며 시야에 집중했다. 다행히 검은 바닷물 사이로 더 검은 암초가 살풋 보였다. 작살을 쥔 내 손에 힘이 들어갔다.
“너!”
바람손이 나를 불렀는지 안 불렀는지. 뭐, 안 불렀어도 누군가는 내가 죽으려 드나 생각하지 않았을까?
그런데 나도 안다. 이게 다소 자살 행위에 가깝다는 거.
그렇지만 이 암초로 소비한 마력이 나중에 스노우볼이 될지 어떻게 아는가!
스노우볼을 너무 많이 경험해 봐서 그런가, 할 수 있을 것 같은 일을 두고 차마 물러나 있을 수 없었다.
츠즈즈즛!
내 손에 들린 작살에 마력이 빠르게 모여들었다. 마치 새까만 벼락을 쥔 기분이었다.
쐐액!
그리고 그것을, 난 냅다 암초에 내리꽂았다.
콰앙!
일순, 바다가 원형으로 구멍이 뻥 뚫리고 그곳에 있던 물들이 바깥으로 밀려났다.
존재했던 암초는 작살이 꿰뚫고 지나간 지점부터 산산히 부서지며 수십 미터 아래까지 쪼개져 내렸다.
“저 또라이 새끼……!”
내 몸이 중력에 의해 추락하고, 잠시 밀려났던 바닷물이 빠르게 빈 자리를 메웠다. 그 해류에 배가 살짝 휩쓸릴 정도였다.
첨벙!
어쨌거나 나는 그대로 바다에 입수했다. 푸르르르. 내 입에서 나온 숨이 가맣기 짝이 없던 시야 일부를 희뿌연 공기 방울로 채웠다.
소리가 단숨에 먹먹해지고, 어렴풋이 과거의 기억이나 미련 따위가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해가 중천이야! 안 일어나!』
『아들, 등산 갈까?』
부모님이 보고 싶었다.
퍼엉!
물보라 터지는 소리와 함께 먹먹했던 귀가 뻥 뚫렸다. 단단히 붙잡은 로프가 당겨지며 내 몸이 수면 밖으로 끌어올려진 것이다.
비산하는 포말이 지독하게 아련했다.
쿵!
내 몸이 갑판과 부딪치며 얼얼한 통증을 가져왔다. 통각 수치 줄였는데도 이 정도면 이거 분명 멍들었다.
“살아 있습니까 나리!?”
“악마기사! 괜찮으십니까!”
그사이, 밧줄로 나를 낚아올렸을 두 사람이 얼굴을 들이밀었다. 어린 얼굴 두 개에 하늘이 가려졌다.
“쿨럭.”
구해 준 건 고맙다만 일단 바닷물부터 좀 빼고.
나는 기침으로 입에 들어왔던 물을 뱉었다. 입안이 짜고 셨다. 위액도 좀 올라온 모양이다.
“이 괴물 자식! 살아 있냐!”
바람손은 왜 또 시비야. 아니, 저건 시비가 아니라 찬사인가?
어쨌든 방금 전 자살 행위가 도움이 되었음 좋겠다. 나 지금 눈알이 핑핑 돌아.
나는 배에서 튕겨 나가지 않도록 두 사람의 도움을 받아 버티며 잠시 눈을 꾹 감았다. 반고리관이 바깥으로 기어나와서 팝핀 추는 기분이었다.
“…더 부술 게 있나?”
“시발, 목숨이 여러 개여서 용잡이에 그렇게 자신 있었던 거구만!”
글쎄. 나도 그랬으면 좋겠다. 이왕이면 로그아웃하는 식으로 여분의 목숨을 주면 더 좋겠지.
“해룡이다!”
그때, 어떤 선원이 그렇게 외쳤다.
나는 슬쩍 눈을 떠 앞을 확인했다. 선수 너머 폭풍이 몰아치는 바다 한가운데 기나긴 몸체가 휘영청거리는 게 보였다. 솔직히 용오름인 줄 알았다.
꽈릉!
비도 모자라 천둥이 요란하게 바다 위를 내리치기 시작했다.
“저거 죽일 수 있는 거 맞지?!”
“당연한 소리, 지껄이지 마라!”
악에 받친 듯한 바람손의 외침이 들려왔다. 나는 그에 반사적으로 화답했으나, 속내는 전혀 그렇지 못했다.
와, 엄청 크다. 저거 배 한 번 치면 보호막 다 까지는 거 아냐? 이거이거 정말 가막만까지 끌고 갈 수 있나? 리얼로?
레이드가 너무 현실적이어서 눈물이 다 나네요.
“마법사들에게 마력포 가동을 준비하라고 전해라!”
“와악, 이 미친 사제가!”
인퀴지터가 갑판에 달린 입구로 데브를 던져 넣었다. 과격한 방식이지만 그것만큼 빠르고 안전한 것도 없긴 했다.
나는 비틀비틀 선수에 섰다. 멀리서 보이는 용이 끼아아아 울더니 곧 이쪽에 시선을 주었다.
“…….”
거리는 멀었으나 기이할 정도로 그 얼굴이, 몸체의 윤곽이, 모든 것의 형태가 세세히 보였다. 이 일의 근원이라기엔 비참할 정도로 아름다운 괴물이었다.
예컨대 흐리터분한 하늘과 검은 바다 속에서도 선명하리만치 빛나는 비늘이라든가, 이마 쪽에 곧게 뻗은 산호색 뿔 두 쌍 같은 것, 날개처럼 장식처럼 얇고 은은하게 빛나는 지느러미 따위가.
그리고 진주와 같은 눈이 나를 보았다. 그런 것 같았다.
용의 코 아래서부터 이어지는 수염이 나풀나풀 흔들렸다.
「해룡│서쪽해의 지배자. 태곳적 짐승. 신수. 그것을 부르는 이름은 많으나, 직접 목격한 자는 드물다.」
“저, 저게 용…….”
“해룡이시여…….”
죽여야 할 대상이라기엔 너무도 신비롭고 현묘하기만 한 존재라. 본래 그들을 숭배하던 일부 선원이 흐느끼며 전의를 꺾었다.
해룡을 숭상하지 않던 모험가와 마법사 일부도 압도되었는지 침음을 삼킬 따름이다.
“시발, 정신 차려!”
퍼엉!
그러나 사람들이 마음이 꺾이기 직전, 바람손이 욕설을 짓씹으며 그들을 다그쳤다. 용 근처의 수면이 솟구치며 무언가가 추가로 나타난 건 바로 직후의 일이었다.
콰직!
용의 목덜미가 솟오른 것에 덥썩 물렸다. 아름다운 비늘이 깨지며 핏물을 터트렸다.
“요, 용!”
용을 문 것의 정체는, 우습게도 같은 용이었다.
비록 덩치가 좀 더 작고, 불길한 탁색의 비늘과 한쪽이 기괴하게 꺾인 검은 뿔을 가졌으며, 그 지느러미는 찢어지고 갈라져 볼품없었다 해도.
그 또한 분명 용이었다.
문득, 산채에서 봤던 벽화─성체와 새끼가 같이 그려져 있던─가 생각났다.
“…부정이 느껴집니다.”
“타락한 건가, 용이?”
각설하고, 사건의 범인이라기엔 큰쪽은 너무 우아하고 고매하다 싶더라니 진짜 범인은 이쪽이었던가 보지.
「???│???」
역병귀 때에 이어 또다시 물음표가 가득한 창이 떠올랐다. 이걸로 확실해졌다. 우리가 정말 잡아야 했던 건 저놈이었다.
끼아아아!
그사이, 목덜미를 물린 해룡이 비명을 토하더니 그대로 몸부림쳐 검은 용을 떨쳐 냈다. 그리곤 그대로 바다에 들어가 버렸다.
검은 용 또한 해룡을 쫓으려는지 입수하며 몸을 감춰 버렸다.
졸지에 우리만 폭풍부는 바다 위에 남겨졌다.
“…저곳으로 가라.”
나는 눈을 가늘게 접었다가 빠르게 바람손을 채근했다.
그도 용의 위용에 압도되긴 했으나 배를 조종하는 게 더 시급한지, 겨우 정신 차린 선원들을 닦달해 배를 어떻게든 움직이고 있었다.
“뭐?”
“용이 나온 곳으로 가라했다.”
용이 커서 상대적으로 잘 보인 거지, 용과 우리 사이의 거리는 멀다. 공격을 위해서라도 용이 있던 자리에 다가갈 필요가 있었다.
더구나 이건 바람손과 선원들을 위한 행위일 수도 있다.
지금 깨달은 건데, 저 덩치의 존재가 바다에 잠수하려면 저 금방엔 암초가 없어야했다. 있더라도 저치들이 바다 안에서 싸웠다면 죄다 부서졌을 확률이 크고.
어차피 용이 밖으로 나올 때까지 대기해야 한다면 암초밭보다 저기가 낫다.
“……!”
내 말에서 무엇을 느낀 건지, 바람손의 눈이 조금 커졌다. 그리곤 이내 키를 단단히 붙잡았다.
“다들 정신 똑바로 차려!”
배가 다시 급류를 해치기 시작했다. 거친 물살에 곡소리가 다 나왔지만 배는 결코 멈추지 않았다.
“……! 물살이 약해졌다!”
“용울문 안쪽은 암초가 없었던 건가…….”
과연 내 예상이 맞은 모양이다. 용들이 날뛰던 자리엔 정말로 암초가 없거나 적었다.
일단 바람손과 선원의 반응을 보면 그런 것 같다. 이유 없이 물살이 약해졌을 것 같진 않으니까.
하지만 해류가 약해졌다고 상황이 전부 해결된 건 아니다.
용은 아직 바닷속이었고, 수면 위로 나온다고 해도 그것을 포격해서 유인하기까지 남은 일이 산더미였다.
“……! 아래에!”
별안간 누군가가 비명에 가까운 소리를 지름에 반사적으로 배 바깥을 내려다보았다. 짙은 물 아래, 더욱 짙은 그림자가 우리를 지나치고 있었다.
“어, 어어어어!”
“난간 잡아!”
그리고 곧 수면이 한쪽만 높아지는가 하면, 검은 용이 바다 바깥으로 고개를 내밀고 만다. 물론 그 대가로 우리 배가 뒤집어질 뻔하긴 했지만.
탁.
그런 느낌에서 이 기회를 놓칠 순 없다.
“작살!”
나는 빠르게 중앙 갑판에 있던 누군가를 재촉했다. 얼빠진 얼굴의 모험가가 반사적으로 작살을 내게 전달했다.
“주돛을 어서 돌리고 순풍장치 가동해!”
내 의도를 눈치챈 바람손이 황급히 배를 돌릴 준비를 했다. 아주 현명한 선택이었다.
“지금 쏴!”
바람손의 신호와 함께 검은 벼락을 두른 듯한 작살이 날아갔다.
콰직!
그것은 그대로 검은 용의 비늘을 뚫고 그 살점을 파고들었다. 설마 안 통하는 건 아니겠지 하던 불안감이 해소되는 순간이었다.
끼에에에에!
그러나 공격이 너무 잘 먹혀도 너무 잘 먹힌 모양이다. 해룡보다 훨씬 탁하고 소름끼치는 울음소리가 상공에 울려 퍼지더니, 새빨간 눈이 우리를 돌아보았다.
그 눈이 분노로 이글거린다고 생각한다면, 꼭 기분 탓만은 아닐 것이다.
“…작살.”
“나리, 이거 맞는 거 맞죠?”
“내놔.”
근데 뭐, 우리 원래 어그로 끌어야 했잖아.
원래 계획은 배에 있는 포격장치로 놈을 후드려 패는 거지만, 모로 가든 도로 가든 가기만 하면 되는 법이다.
외려 이게 더 좋을 수도 있다. 마력포 작동도 마법사의 마력이 드니까.
그 마력으로 방어막과 순풍장치를 유지하는 데 쓰는 것이 목숨을 위한 길임은 말할 것도 없다.
키이이!
쐐액!
어쨌든 간에, 나는 2타를 날렸다. 공기를 가르며 쇄도한 그것이 또 한 번 검은 용의 몸뚱이에 박혔다.
이왕이면 머리를 노렸는데 파도와 순간 올라온 욕지기 때문에 타점이 흐트러져서 목덜미 쪽에 박혔다.
캬아아악!!!
그래도 어그로는 착실히 끌렸다. 검은 용이 분노한 것처럼 포효하며 달려들기 시작했다.
“으아아!”
“온다!”
용은 긴 목을 이용해 우리 배를 삼키려들었다. 물론 그 정도로 입이 크진 않았으므로, 갑판 위를 쓸듯이 와앙 물어 보려는 의도가 더 컸을 거다. 그것만으로 갑판에 우글우글 있는 인간들 수십이 잡아먹혔을 테니까.
그러나 안 그래도 큰 표적이 다가와 줬는데 이 기회를 놓쳐서야 쓰나.
나는 방어막을 믿고 용에게 작살을 던졌다. 나를 본받은 이들도 함께였다. 선원이고 모험가고 할 것 없이 수십 개의 작살이 허공을 날았다.
키아아악!
쾅!
나와 인퀴지터, 누군지 모를 양반이 던진 작살이 여린 속살─입안─에 꽂히고, 용의 돌진이 약간 틀어졌다. 배를 둘러싸고 있던 막이 그 어떤 때보다 선명한 빛을 발하며 용을 빗겨 냈다.
“으아악! 배 흔들린다!”
방어막이 배와 거리를 두고 생성되어서 그나마 다행이지. 방어막에 뭐가 부딪쳐도 배가 흔들리진 않으니까. 물론 파도는 별개였으므로 완전히 안 흔들리진 않았다.
용이 일으킨 작은 해일이 외판을 넘어 갑판을 적시고, 사람들은 억지로 균형을 잡아가며 작살을 던졌다.
다만 대부분의 공격은 비늘에 튕겨 나가는 데 그쳤다. 인퀴지터는 그래도 비늘을 부수던데.
“……! 마력이!”
“보호장치의 마력이 이번 한 번으로 1/4이나 달았습니다!”
한데 안쪽에서 그런 비보가 전해졌다.
최고의 선장을 모셔 옴으로써 암초로 인한 마력 소비를 최소로 했음에도, 아껴 온 마력이 한 번에 뭉텅이로 날아간 거다.
“어떻게든 버텨! 어떻게든 가만막까진 돌아가야 해!”
그래도 뭐 어쩌겠나. 살려면 어떻게든 마력을 쥐어짜 내서 마력막을 유지하고 순풍장치로 배를 빨리 나아가게 하는 수밖에.
“……! 바다에서!”
그러나 불행은 하나만 오지 않았다. 깨지고 떨어진 비늘 조각에서 용아병이 태어났다. 작살질 하나면 처리될 것들이나 계속 저런다면 성가시기 짝이 없을 테다.
방어막을 아껴야 하는 지금 더더욱 귀찮은 존재들이기도 하고.
“막아! 무조건!”
“접근 못 하게 해!”
너커가 너무 약해서 레이드보스도 약하면 어쩌지 싶었는데, 약하긴 개뿔.
환경이 너무 열악해서 난이도가 수직 상승했다. 비늘 깨지는 거 보니까 흔들리는 땅만 아니었으면 금방 잡을 것 같은데!
“어어어어!!”
근데 여기서 바다가 추가로 흔들렸다. 퍼엉! 갑판에 또 한 번 물을 끼얹다 못해 배를 옆으로 전복시킬 뻔한 주범은 굳이 볼 필요도 없다.
캬아아아악!
아까의 복수라도 한다는 양, 해룡이 검은 용의 목덜미를 물었다. 삽시간에 시작된 괴수 대전이었다.
레이드고 뭐고, 제발 새우 같은 우리 배 빼고 고래 싸움 해달라는 말이 혀끝에 대롱대롱 매달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