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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인공이 컨셉충이면 곤란한가요-46화 (46/389)

◈46화 빌고 또 빌어 (4)

바람손의 입술 끝이 파르르 떨렸다. 소금의 짭잘한 냄새로 다가온 적막이 잠깐 웃고 떠났다.

“…어이, 이봐. 정말 용을 죽일 수 있다고 여기는 거야?”

그건 별로 의미 없는 물음이었다.

용을 죽이지 못하면 망하는 거지, 실패를 굳이 상상할 필요 있나.

더구나 우리는 엄밀히 따지면 사탄 잡자고 모인 파티였다.

설마 사탄보다 용이 강하겠어? 용도 못 잡을 거면 이 파티는 그냥 접는 게 맞다. 최초 레이드 보스도 못 잡는 스펙으로 최종 레이드 보스 사냥에 도전하지 않듯이.

그렇다고 뭐, 이게 보통 게임처럼 ‘안 돌고 만다’라며 접는 게 가능한가? 그것도 아니다.

난 플레이어로서도, 컨셉충으로서도 선택지가 없었다. 전자는 퀘스트 취소가 안 돼서, 후자는 절대 물러날 성정이 아니니까.

“네가 길을 안내한다면.”

즉, 답은 하나였다. 무조건 된다고 밀고 나간다. 으하학.

“…그래. 어쩌면 그럴 수도 있겠지. 그렇지만 당신도 알잖아. 이 거래에서 손해 보는 건 오롯이 나라는 걸.”

물론 이게 먹힐 거라고 생각한다면, 그건 절대 아니?

바람손이 머저리도 아니고 이걸 들어줄까. 논리 전개나 인정 호소도 사람 목숨이 걸려 있단 명목으로 안 통한 게 작금인데.

“내가 그 손해를 감수하고 도박할 이유는 없어.”

오히려 나는 바람손이 차분히 나오는 게 신기할 지경이었다. 내가 한 말은 엄밀히 따지고 보면 그냥 억지에 불과하지 않나.

이런 떼쓰기에 저리 이성적으로 나오기도 힘든데, 바람손은 의외로 침착한 사람인가 싶다.

“물음이 틀렸다.”

함에도 나는 말을 멈추지 않았다.

“하루를 대가로 용잡이를 고용할 수 있다면, 이건 네놈에게 남는 장사일 테니.”

반복해서 말하지만 내 컨셉은 물러나는 성정이 아니었다…….

“…미치겠네.”

“더이상의 제안은 없다. 네놈에게 소비할 시간은 끝났다.”

그리고 너무 구질구질하게 굴지도 않는다.

나는 여기서 딱 끊기로 했다.

“…선장.”

“알아. 걱정 마.”

바람손이 그 일행과 속닥거리긴 했는데, 난 그것에 기대하진 않았다.

레이드? 어떻게든 되겠지. 내가 거래를 두고 트롤 짓한 것도 아니니 이 부분에 한해선 좀 당당하게 배째 봐도 될 거라 생각한다.

이거 실패해도 아크메이지는 나한테 뭐라 하면 안 된다.

“후, 당신의 자신감, 보통 때였다면 믿어 봤겠지만…… 나는 역시 내 형제들의 목숨을 두고 도박 같은 거─.”

딸랑딸랑.

그런데 예상했던대로 바람손이 제의를 거절하려던 순간 접견실 내부의 종이 울렸다.

3초 뒤 벌어진 일은 접견실 문이 끼익 하고 열리는 것이다.

바람손이 다급히 로브를 걸쳤다.

“저, 의뢰자분을 찾는 사람이 왔는데.”

“선장!”

“큰일 났어요!”

열린 문틈 새로 사무원이 고개를 내밀고, 그 뒤에선 아마 바람손을 부르는 듯한 목소리가 연달아 이어졌다.

“너희!?”

역시 바람손이 아는 이들인가 보다. 바람손과 그 동행자가 깜짝 놀랐다.

그리고 접견실 바깥이 잠시 시끄러워졌다가, 곧 조용해지며 대표로 누군가가 들어왔다. 제대로 된 로브를 구할 여력도 없었는지, 너덜한 천을 덮어쓰고 가슴팍에 연결줄을 단 차림이었다.

그 안으론 가슴 가리개와 붉은빛이 설핏 비치는 붕대 따위가 보인다.

“선장, 죄송합니다.”

“잇캄?”

대표자가 들어가는 것과 동시에 사무원이 물러나서 그런가. 잇캄이라 불린 이는 눈치 보지 않고 로브를 벗으며 그대로 무릎 꿇었다.

수십 갈래로 땋은 흑발이 짧게 찰랑이고, 이곳저곳 다친 몸이 드러났다.

“배를 잃었습니다.”

“뭐?!”

서둘러 잇캄을 돌보려던 바람손이 그 말엔 경악했다.

“바다에서, 생전 처음 보는 짐승이 나타났어요. 꼭 바다악어같이 생긴 놈들이었는데, 그 녀석들이 배 밑판을…….”

“바다악어?”

“잠깐, 그 이야기 좀 더 자세히 말해 주지 않겠는가?”

바다악어라……? 잠깐, 이거 혹시 용아병인가?

“……?”

“혹시…… 뼈 같은 질감의 짐승이 아니었나?”

“그, 그걸 어떻게…….”

아크메이지의 물음에 잇캄의 눈이 휘둥그레해졌다. 정말 용아병이 그들 배를 수장시킨 모양이다. 문제는 대체 어디서 그 일이 벌어졌냐는 거고.

“용울문 근처로 갔나? 거기서 당한 건가?”

“그건…….”

잇캄이 허락을 구하는 듯 바람손을 돌아보았고, 바람손 역시 이쪽을 이글거리는 눈으로 응시했다.

“이봐, 아무래도 그것들의 정체가 뭔지 아나 본데.”

한켠으로는 창백한 얼굴이기도 했다. 핏기가 가신 낯은 꼭 백지장으로 만든 것 같다.

“내가 말하지 않았나. 해룡이 타락했다고.”

“예? 잠, 해룡이 타락?”

“그게 내 배를 침몰시킨 짐승과 무슨 상관인데?”

“그것들은 해룡의 이빨과 비늘이 변한 것일세. 보통 해룡이 자신을 지키기 위해 만들지만…… 해룡이 타락하면서 아무래도 용도가 변질된 것 같네. 우리도 탐색 과정에서 한 번 습격을 받았었지.”

나는 그즈음에서 딴생각을 잠깐 했다. 그때 인퀴지터가 막 안 만들었으면 우리가 탔던 배도 그대로 구멍 났겠네.

지난 일이지만 약간의 안도가 들었다.

“무슨…….”

“그럼 이제 내게 답해 주게. 그것들을 어디서 만났나? 그것들이 활동 반경을 늘린 거라면 이야기가 심각해져서 묻는 걸세.”

“…가막만이야.”

아크메이지의 보챔에 이마를 짚은 채 얼굴을 잔뜩 구겼던 바람손이 겨우 대답을 내놓았다. 착 가라앉은 음색이었다.

“비푸릿의 부하가 이 도시에 대기하고 있을 걸 대비해 가막만에 배를 댔어.”

가막만이라면 우리가 용을 유인하려던 그곳이었다. 용울문과 그뤼 텔츠의 딱 중간에 위치한 장소기도 했다.

“…아무래도 일이 더 심각해진 것 같습니다.”

인퀴지터가 오랜만에 입을 열었다가, 그 한마디를 뱉고 다시 꾹 닫았다. 태도가 조금 신경 쓰였으나 그 말 자체는 동감이었다.

이대로라면 용아병이 항구 바로 앞 해역에 등장하는 것도 금방일 거다.

“…선장.”

“…일단, 일어나 잇캄. 이건 네 잘못이 아니야. 나도 예상하지 못했던 일이다. 거기에 내가 있었어도 크게 달라지진 않았을 거야.”

“죄송합니다.”

“사과하지 말래도. 그보다 애들은, 많이 다쳤어?”

“와얀이 죽고…… 테만과 끄툿이 다쳤어요. 다행히 나머진 멀쩡합니다.”

“그래…….”

나는 사망자 소식에 우선 삼가 명복을 빌어주었다. 동시에 이러면 대체 어떻게 될지도 계산했다. 냉정하다고 해도 어쩔 수 없다. 이쪽도 걸린 목숨이 많았다.

“부상은 심한가? 괜찮다면 치료를 도와줄 수 있네.”

“…….”

“걱정 말게. 이런 걸로 빚을 지우진 않을 테니. 그저 인간으로서 도리를 다하려는 것뿐임세.”

“…부탁하지.”

이렇게 되면 저쪽은 사람 구하는 게 문제가 아니라 돌아가는 것부터가 문제인데. 배를 구하려고 해도, 배가 어디 한두 푼인가? 쉽게 구할 순 없을 거다.

만약 배를 구한다고 쳐도 그땐 데려갈 사람 구할 돈이 부족해질 테고. 저측 입장에선 최악 그 자체다.

“제가…….”

“잠시만 기다리시지요.”

그사이, 부상자가 접견실 안쪽으로 이동되고, 아크메이지가 나서려는 인퀴지터를 말렸다. 아까 신전에 대한 적대감을 드러낸 것 때문인지는 아직 모르겠다.

“제가 하겠습니다.”

“부탁하겠네.”

대신 데브가 나섰다. 의사가 아닌데 잘 치료할 수 있겠나 싶었으나, 의외로 데브의 치료 솜씨는 무척이나 좋았다.

거기에 아크메이지의 마법까지 더해지니, 두 사람의 상처가 빠르게 처치되었다. 신성력으로 행한 치료보단 느리나, 최소한 악화될 일은 없어 보인다.

“…….”

치료되는 부하들을 보던 바람손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형제들의 목숨을 걸고 도박하긴 죽어도 싫었지만…….”

그리고 치료가 끝났을 때, 그는 내 앞에 섰다.

“이봐. 진심으로 다시 물어보겠어. 정말…… 정말 용을 잡을 수 있어?”

문득, 이것도 스토리 전개를 위한 보정일까 싶어졌다.

“내가 협조하면, 해룡을 잡고 자크라티를 도우러 와줄 거냐고.”

그런 거라면 조금 잔인하다는 생각이 든다. 개인의 충동을 이끄는 것과, 반드시 그리해야만 하는 상황을 만드는 건 많이 다르니까.

“말했을 텐데.”

그러나 대답을 안 할 수도 없다.

“하루면 족하다고.”

나는 여상스럽게 답을 토해 냈다.

“그래, 그랬지. 하핫.”

바람손이 이마를 붙잡은 채 웃었다. 실없는 웃음이었다. 듣는 사람도 힘 빠지는, 어딘가 슬픈 구석이 있는 웃음.

사람을 다 치료한 아크메이지가 막 일어서 우리 쪽을 보았다.

“설마 대가만 홀랑 빼먹고 입 씻는다거나…….”

“날 모욕하지 마라.”

“모욕인가. 좋아. 그럼…… 마지막으로 내가 확신을 가질 수 있게 뭐라도 보여 주지 않겠어? 용을 잡을 수 있다는 억지를 증명해 보란 소리야.”

그건 나름 정당한 요구였다. 하다못해 투자를 권할 때도 무언가 그럴싸한 그래프와 예상전망을 제시하는 법이니까.

다만 증거로 댈 만한 게 당장은 없단 말이지. 건물이라도 반 쪼개면 믿어 주나?

“단신으로 악마 수백 마리를 잡고 악마계약자 수십을 참살했다면, 대충 믿을 만하지 않습니까?”

별안간 데브가 한마디를 슬쩍 얹었다. 바람손의 눈이 가늘어졌다.

“그건…… 굉장한데. 그래도 좀 애매해.”

“참고로 전적이 아니라 하루만에 벌인 일입니다.”

“뭐? 세상에 그걸 해내는 인간이 어디 있어?”

“여기 있잖습니까.”

나는 좀 떨떠름해졌다. 그건 좀…… 경우가 다르지 않나?

“집채만 한 드래곤도 두 합에 때려잡았고.”

내가 언제…… 아, 너커. 걘 너무 허무하게 잡혀서 드래곤이란 실감이 별로 안 난단 말이지.

“그거 하나로 길드 훈장도 받았는데. 나리 함 꺼내 보시죠.”

나는 저번에 사무관이 요구했던 때와 비슷하게, 벌레 씹은 얼굴로 인벤토리를 뒤졌다. 인벤토리 낭비라 여겼던 수훈장이 의외로 요긴하게 쓰이는 것 같다.

“진짜네…….”

바람손이 훈장을 손 위에서 조금 굴리더니 곧 돌려주었다. 반은 믿고 반은 안 믿고. 어중간한 심리가 그의 얼굴 위를 둥둥 떠다녔다.

“의심스러우면 다른 사람에게 물어보셔도 됩니다요. 타타라에서 있던 일이라고 하면 말하는 사람이 한둘쯤은 있을 테니까.”

“하, 그렇게까지 자신한단 말이지…… 좋아. 그럼 한번 믿어는 볼까.”

그러나 그에겐 선택지가 그리 많지 않았다. 아무래도 결정이 내려진 듯하다.

“선장…….”

처음부터 함께하며 이 상황을 전부 이해하는 동행자도 그를 끝내 말리지 않았다. 그저 안타까운 눈을 할 뿐.

“하, 내가 이딴 도박판에 내 목숨과 부하들을 판돈으로 얹게 될 줄은 몰랐네. 심지어 자크라티까지…….”

그쯤 되어서 바람손이 나를 노려보듯 했다. 굳이 피하지 않았다. 남발한 공수표에 대한 부끄러움이나 불안감은 없다.

“반드시, 말 지켜야 할 거야.”

뭐어, 사실 아예 없는 건 아닌데, 저쪽이나 우리나 선택지가 없는 마당이잖아. 티 내봐야 사기밖에 더 떨어지나.

뒷감당을 해야 할 미래의 나야 굉장히 고달프겠지만…… 그거야 컨셉에 갇힌 시점에서 이미 정해진 미래였다.

그러니 직진! 무조건 직진이다! 뒤 같은 거 보지 마! 어차피 없으니까!

“이봐, 현자!”

“말하게.”

“아까 선금으로 내 동행을 말했지? 거기에 조건을 더하지! 아까 본인 입으로 말했잖아, 자크라티에 미리 원조가 갈 수 있게 힘써 보겠다고. 못해도 대현자 한 명은 파견해야 해. 그게 내 첫 번째 조건이야.”

“마땅히, 그러하겠네.”

“그리고 신전은 빼. 거기 도움은 안 받아.”

“…그것도 알았네.”

“두 번째로 우리들에 대한 보호. 신고하지 말란 소리가 아니야. 비푸릿에게서 지켜 달라는 거지. 안 그래도 겨우 포위망을 뿌리치고 이곳에 도착한 건데, 이런 큰일에 참여하면 내 위치가 그쪽 귀에도 들어갈 거 아냐?”

“이해했네.”

“세 번째로, 자크라티로 돌아갈 때 우리가 쓸 배와 식량.”

“더 있나?”

“최후로…… 혹시 내가 죽거든 내 부하들을 자크라티로 데려다 줘야 해.”

“걱정 말게. 반드시 약속하지. 바란다면 모험가 길드의 공증을 받아서라도.”

아까와 다르네 저쪽이 더 불리해진 상황이지만…… 첫 번째 조건 외에는 그다지 어려울 것도 없는 조건이었다. 거기에 첫 번째도 아크메이지가 알아서 할 일이니.

우리 입장에선 손해가 없다. 아, 아예 없진 않나. 이거 끝나면 나 강제로 야바드 지방까지 가야 하니까.

…따라오겠지? 씁. 아니 안 따라와 주는 게 오히려 좋은가. 그럼 컨셉질 그만둘 수 있는데.

뭐, 안 따라올 리가 없지만.

“좋아, 그럼 결정됐으니, 해룡잡이가 어떻게 진행되는지 들어봐야겠어. 근데 그 전에 내 일행에게 상황을 설명해 주고 싶은데.”

“얼마든지. 이참에 자리를 옮기지. 저들도 휴식을 취할 필요가 있지 않나.”

“그거 고맙네.”

어쨌거나 이걸로 선장을 구했다. 치열했던 선장 구하기 거래의 끝이었다.

「❖ 자크라티를 겨냥하는 송곳니

∎ 자크라티로 이동」

그 대가로 새 퀘스트가 생긴 건 뭐, 어쩔 수 없고.

“그럼 시간도 아낄 겸, 가면서 대략적인 상황이나마 듣겠어. 계획 정돈 있을 거 아냐?”

…근데 퀘스트가 생기면 뭐하냐. 아직 위기가 안 끝난 것을.

우리 계획 아직 안 짜였는데, 망했다 헤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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