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5화 빌고 또 빌어 (3)
홀로 자유를 즐기며 보낸 시간이 하루하고도 반나절. 해룡잡이에 사용될 배가 도착했다.
방어장치에 포격장치에 뭔가 많다는데…….
그쯤 되어서 나는 이번에야말로 근딜은 다 빠져 있어야겠구나 싶었다. 계획안을 들을 때부터 예상한 사실이지만, 좁아터진 갑판을 보니 더 확실해졌다.
보편적인 레이드는 널찍한 공간에서 장판기 피해 가며 보스를 치는 식으로 이뤄지는데, 얘는 그게 가능할 크기가 아니었거든.
만일 시도하더라도, 게임 전적을 생각하면 마스트나 외판만 부숴질 것 같다. 아니면 해룡의 꼬리치기에 선체가 반으로 쪼개지거나.
어느 쪽이든 용납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근딜이 딜 넣을 타이밍 한번 잡겠다고 배가 침몰할 위험을 감수할 순 없다.
그러나 정말 문제는 그게 아니었다.
“선장은커녕 선원 구하기도 하늘의 별 따깁니다…….”
연안으로 유인을 하든 해상에서 물량전을 펼치든, 우선 용울문에 들어가야 뭘 하든지 하는데…… 용울문에 우릴 들여보내 줄 사람이 안 구해졌다.
“이 넓은 도시에 한 사람 구하기가 힘들다고?”
“응하는 자가 나온다 싶으면 실력이 없고, 실력이 있다 싶으면 억만금을 줘도 거절하는 걸 뭐 어쩝니까? 나도 염병할 노릇이라고요.”
정보길드의 도움을 구했을 데브마저 두 손 두 발 다 들었다. 이건 정말 큰 문제였다. 적어도 이 도시에선 함께할 자가 없다는 소리일 수도 있으므로.
“어째서지?”
“어떻게 해룡에게 덤비냐는 의견이 태반이에요. 바다가 망가진다고 말을 해봐도 당장 들이닥친 게 없다 보니 현실감 안 드는 눈치고.”
그나마 실력 나쁜 이들이 응한 건, 아이러니하게도 실력이 나빠서란다. 실력이 안 되니 돈이 안 벌려서, 해룡이고 자시고 먹고살려고 자원했다나.
그렇지만 우리는 그런 자들이 필요 없었다. 우리가 필요한 건 일류 선장이다.
“조금 더 알아보고 설득도 진행 중이긴 합니다만, 어쨌든 며칠 안에 구하긴 텄어요. 알아두세요.”
“아니, 고생했네. 형편이 그러한 걸 어쩌겠나. 바라는 인재상이 하늘에서 뚝 떨어지지도 않는 것을. 그래도 조금만 더 수고해 주게.”
“예에…….”
나는 그쯤되어서 그 바람손인지 뭔지는 안 나오나 의문이 들었다. 걔는 리스트에 없나?
“바람손.”
“예?”
“유명하다고 네 입으로 말하지 않았나?”
어제오늘 영상 편지 좀 남겼다고 말이 길게 나왔다. 나는 혹시 말투까지 부드러워진 건 아닌지 신경 쓰며 눈살을 찌푸렸다.
“…이명을 생각하면 그쪽도 꽤 가능성 있긴 하네요. 솔디니의 후예로 여겨질 정도면 항해술 실력은 손가락 안에 들 게 분명하니까.”
“하지만, 그는 사략선을 운행한다고…….”
“그렇죠?”
“그럼 범죄자입니다! 비록 암묵적으로 공인된 해적이라곤 하지만, 법상으로는 명백한 범죄자란 말입니다.”
인퀴지터가 말도 안 된다는 듯 외쳤다. 이젠 안 나오면 오히려 섭했을 거다.
“알 바 아니다.”
근데 내가 언제 범죄 전력 신경 쓴 적 있냐? 결과가 수단을 정당화하지 않는다고 생각은 하지만, 그건 내 생각일 뿐이다. 컨셉 자체는 결과를 내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다.
그렇다고 뭐, 본체가 이 선택을 반대하냐면 그것도 아닌지라. 입장이 입장이니만큼 사법거래는 할 수 있잖아. 이거 해결 못 하면 여기 지방이 다 나가리기도 하고.
심하게 악질이면 이거 시키고 감옥에 낼름 투옥하는 식의 융통성도 부려 볼 만하지 않나?
보통 조력자로 예정되는 캐릭터는 그 수준까지도 잘 안 가지만. 암, 어디 플레이어 기분 망칠 일 있나.
“하, 하지만…….”
인퀴지터가 다시 고장 나고, 아크메이지나 데브는 꽤 솔깃한 얼굴을 했다.
“생각보다 괜찮은 수일지도 모르겠네. 사략선이면 어떻게 교섭할 수 있단 소리니. 다만…… 음, 혹시 악명에 대한 것도 들어 본 적 있나?”
“사략 해적이다 보니 기본적인 악명이야 있습죠. 그렇지만 특별히 악랄하단 이야긴 못 들어 본 것 같습니다. 오히려 털린다면 차라리 바람손에게 털리는 게 낫다는 의견은 들어 봤나…….”
“무슨, 그런 의견이 있다고?”
“약간 최악 대신 차악이라는 거죠. 재물이랑 목숨 다 가져가는 사략선에 당하느니, 재물만 가져가고 인도적 대우도 보장하는 바람손이 낫다 정도의.”
물건을 가져가는 점에서 범죄자란 건 부인할 수 없지만 최악에 속하는 부류인 것보단 낫다. 최소한의 선이 있다면 거래하기도 쉽고, 심적으로도 허용하기 편하니까.
“그럼 꽤 도전해 볼 만한 선택지 같군.”
“아크메이지님마저!”
“급한 상황이 아닙니까. 그를 용서하란 게 아니라, 이 일의 피해를 먼저 생각하자는 겁니다. 해룡을 해결하지 않으면 수만의 사람이 죽어 나갈 겁니다.”
“그, 그런…….”
“그럼 그쪽에 접촉할 수단도 찾아보겠습니다?”
“부탁하네. 이쪽도 사람들에게 말을 일러 두지.”
“하, 될지 모르겠네.”
데브가 바다 건너 사람은 어떻게 찾냐며 약한 소리를 했다. 그렇지만 올라간 입꼬리를 보아하니 정말 안 될 것 같진 않다.
딸랑.
그에 맞춰 길드 홀의 문이 열렸다. 덕분에 소강 상태가 접어들었던 대화가 완전히 끊겼다.
“예, 모험가 길드 그뤼 텔츠 지부입니다.”
“여어, 사람을 하나 찾으려 하는데.”
“의뢰신가요?”
물 마실 타이밍이었지만, 목은 안 말랐으므로 나는 들어온 사람이나 힐끗 확인했다.
주변에 관심 안 갖는 게 컨셉이긴 하나, 앞을 봤을 뿐인데 눈에 들어온 건 어쩔 수 없는 법이다.
하여 보게 된 건 로브를 푹 눌러쓴 사람 둘이었다. 키는 대충 170 어림이고 체격은 좀 있어 보인다.
후드 아래론 주렁주렁 늘어진 장식 두 개가 목선 어림까지 내려와 달랑거렸다.
“의뢰까진 아니고, 혹시 모험가 중에 이런 사람 있는가 물어보고 싶어서.”
“지정 고용을 바라시나 봅니다.”
“내가 찾는 사람이 모험가라면.”
“외형을 말씀해 주세요.”
그들의 외형뿐만 아니라 대화도 어찌어찌 귀에 들어왔다. 저녁이라 그런지 길드홀이 조용한 게 탈이었다.
주점과 연결되어 있는데도 홀에 우리밖에 없어서는.
“일단, 음. 거대한 검을 등에 짊어지고 있고, 안대…… 를 썼던 것 같은데.”
한데 어쩐지 저쪽이 말하는 게 걸린단 말이지.
“검은 옷을 입고 다닐 수 있고…… 아, 그래. 결정적으로 좌우 머리색이 달랐는데! 혹시 아나?”
아무리 봐도 나잖아, 저거.
“…저분처럼요?”
“응? 어디…… 어, 그래! 꼭 저 사람…… 처럼…….”
나는 수상한 차림을 한 주제에 나를 언급하는 이를 보았고, 그쪽도 마침 나를 보았다.
끝으로 갈수록 느려진 목소리가 끝내 끊겼다가, 이내 버럭 언성을 높였다.
“찾았다!”
뭔데.
“악마기사, 아는 사람입니까?”
“이 도시에서 나리를 아는 사람이 뭔가 많습니다?”
“자네 예전에 여기서 활동했나?”
일행이 각자 한마디씩 떠들었지만 나는 모르는 일이었다. 사실 아는 인간이어도 로브를 저리 뒤집어쓰고 있으면 알아보기 힘든 법이고.
“닥쳐라.”
나는 한마디로 세 사람의 수다를 제압한 뒤, 내게 다가오는 이와 시선을 마주했다. 후드 아래로 보이는 입가가 씩 웃고 있었다.
“이야, 바로 찾을 줄 몰랐는데.”
“누구냐.”
나는 일관된 싸가지를 장착하며 상대의 정체를 가늠해 보았다.
솔직히 추정되는 이가 하나도 없었다. 내가 또렷히 기억할 만큼 엮인 사람은 몇 명 없는데 그중에선 저런 목소리가 없었고, 그 외의 사람은 기억에 굳이 담아 두지 않아서.
“당신에게 의뢰하고 싶은 사람?”
걸쭉한 목소리로 상큼하게 말해 봤자 전혀 그런 느낌 안 들지만, 그건 미뤄 두고.
“관심 없다.”
당장 언제 용 잡으러 가게 될지 모르는데 의뢰는 무슨 의뢰.
단기 임무라면 또 모르지만, 구구절절 사정 설명하면서 가능한 조건 나열할 성격이 아니다. 그러니 그냥 안 받는다고 하는 수밖에.
“그러지 말고 이야기는 들어 봐 달라고.”
“꺼져라.”
내 완강한 태도에 앞으로 나섰던 로브인이 뒤통수를 긁적였다. 뒤쪽에 서 있던 이는 좀 욱했는지 한 발 앞으로 나왔으나, 앞쪽에 있던 이가 기민하게 막아섬으로써 무위로 돌아갔다.
현명하고 또 고마운 선택이었다. 내가 또 걸어오는 싸움을 피할 컨셉이 아닌지라.
난 민간인이랑 싸우기 싫다.
“그럼 전 이만…….”
“부탁이야. 사람 목숨이 걸려 있어.”
대충 눈치껏 빠져나가려던 데브가 다음 말에 막혔다.
사람 목숨이라. 여기선 나도 눈을 좁힐 수밖에 없었다 걸린 목숨의 부류가 어딘지에 따라 컨셉도 무시하고 넘어갈 일이 못 됐다.
“그것도 꽤 많은.”
거기에 수가 많다니 더 어려워졌다. 내 미간이 구겨지고 인퀴지터가 똥 마려운 강아지 같은 얼굴을 했다.
“한번 들어나 보게.”
해서 아크메이지가 간지러운 곳을 긁어 주었을 때, 나는 결국 긍정의 답을 내놓을 수 있었다.
“들어만 보지.”
“좋아좋아. 그런데 좀 은밀한 이야기라서 자리를 좀 옮기고 싶은데…… 여긴 너무 탁 트였단 말이지.”
의뢰자는 그리 중얼거리곤 길드에서 마련해 주는 접견실을 빌려 오겠다며 잠시 자리를 떴다. 톡톡. 테이블을 두드리던 데브가 입을 열었다.
“저놈들, 야바드 지방 출신일 겁니다. 길게 늘어진 귀걸이, 땋은 머리, 갈색 피부는 그쪽 지역에 많으니까.”
…얜 대체 뭔데 이렇게 아는 게 많을까. 도적들은 다 이런 건가.
“그리고…… 부츠에 소금 얼룩이 있는 거나 바지가 뻣뻣한 거나, 술냄새가 몸에 배인 걸 보니까 아마 뱃사람이 아닐까 싶은데. 한쪽에 피냄새가 잔뜩 나는 걸 보면 보통 뱃사람도 아닌 것 같고.”
그냥 셜록 홈즈의 후예인가?
“지금 얻은 정보는 대충 이런데, 아직도 감 잡히는 게 없습니까, 기사 나리?”
다만 이렇게 말을 해줘도 나는 달리 생각나는 게 없었다. 야바드 쪽 뱃사람은커녕 난 그쪽 지방의 존재를 안 지도 얼마 안 된 사람이었다.
“그냥 자네의 명성을 듣고 찾아온 게 아닐까 싶군.”
역시 그건가…… 그치만 의뢰자가 직접 찾아올 정도면 보통 사건은 아닐 것 같은데. 아까 한 말도 좀 걸리고.
“뭐, 이참에 바람손에 대해서나 물어보죠. 바람손은 그쪽 해역에서 활동하니까 여기 사람들보단 더 잘 알겠지.”
일단 들어 보기나 하기로 결정한 차다. 나는 접견실을 잡고 부르는 양반들에게 천천히 다가갔다.
“음, 혹시 몰라 묻는데 이 세 사람도 일행인가?”
“일시적이지만 같이 움직이게 돼서 말일세.”
내가 무어라 하기도 전에 아크메이지가 선수를 쳤다. 내가 일행 아니라고 하면 사정이 복잡해지니 그냥 본인이 처리한 것 같다. 나로선 오히려 좋다.
“비밀 엄수라면 걱정 말게.”
“…으음. 그래. 믿어 보지 뭐. 우리한테 선택지가 있는 것도 아니고.”
의뢰자의 결정에 동행자가 다급히 팔을 붙잡아 가며 말리는 듯했지만, 의뢰자는 강경했다. 접견실의 문이 닫혔다.
“좋아. 그럼 대화를 시작해 볼까.”
건너편 자리에 앉은 의뢰자가 가벼운 어투로 공기를 환기시키곤, 곧장 로브를 벗었다.
그러자 슬랜드족 특유의 길고 뾰족한 귀와 빛바랜 두건, 그 아래로 이어지는 장신구가 보였다. 상반신 위에 걸친 건 코트 하나라 가슴팍과 배가 훤히 드러났다.
“으, 답답해 죽는 줄 알았네.”
“……! 선, 수!”
“…잠깐, 저 사람은…….”
“괜찮아, 괜찮아. 이런 건 신뢰가 생명이잖아.”
뒤에 있던 데브가 소리 없이 입을 벌리고, 의뢰자가 실실 웃으며 동행자를 달랬다. 이어 하는 건 씩 웃으며 엄지로 본인을 척 가리키며 날 보는 일이다.
“자크라티의 수리야. 보통 바람손이라고 많이 불러. 잘 부탁한다고?”
…례?
“참고로 미리 말해 두지만 사략선 함장으로서 이 자리에 온 게 아니라, 자크라티 성주의 명을 받고 온 거니까. 신고할 생각은 말아 달라고. 시끄럽게 움직이면 안 될 사정이 있어서 그렇지, 임시 면죄부 자체는 가지고 있으니까. 원하면 보여 줄 수도 있어.”
아니 진짜 바람손?
“용건.”
솔직한 심정으론 눈을 크게 뜬 채 진짜냐고 되묻고 싶지만…… 내 컨셉은 그런 거에 당황하는 인간이 아니다.
나는 어거지로 심정을 추스르며 냉한 목소리를 꾸몄다. 뒤쪽에서 데브가 필사적으로 인퀴지터 입 막는 소리가 들린 건 그냥 외면했다.
“바로 믿어 주네?”
“거짓이라면 네놈 목을 베면 그만인데, 내가 그 이상을 궁금해야 할 필요 있나?”
“화끈해, 화끈해. 그래. 칼잡이 포부가 그쯤 되야지. 그럼 화끈한 모험가 씨, 그쪽 이름도 들어 볼 수 있을까?”
“교분이나 쌓자고 부른 거라면 나가겠다.”
“성질 급하긴! 알았어, 알았다고.”
있는 호감도도 날려 먹을 내 태도 때문인가. 나처럼 당황했을 게 분명한 아크메이지가 퍼득 정신을 차리고 뒤에서 필사적으로 내 등을 찔러 왔다.
까득.
근데 이런 식으로 눈치 주는 행위, 내 컨셉이 허용할 리 없잖아…….
“……?”
나는 검 자루에 손을 올린 채 스산히 뒤를 돌아보았다.
“죽고 싶나?”
마법사는 현명했다. 손이 거둬졌다.
“그럼, 본론으로 들어간다?”
바람손도 눈치를 살펴 가며 주제를 열었다.
“혹시 자크라티의 상황을 알아?”
“모른다.”
“그럼 처음부터 말해야겠네.”
바람손은 본인의 드롭형 귀걸이를 손가락으로 배배 꼬며 차분히 다음 문장을 지어 냈다.
“자크라티는 지금 내전 중이야. 사실 좀 오래된 내전이지.”
그는 그렇게 말하며 내가 들어 본 사건과 이름을 거론했다.
“전 성주, 비푸릿의 도를 넘은 행위에 그의 형제인 피우온이 반기를 들고, 비푸릿에게서 기어코 성을 빼앗은 이래 계속 이어져 온 싸움이니까.”
해적 사냥 때 데브가 들려줬던 이야기였다.
“말이 내전이지, 사실 해적으로 골치를 앓는 것에 가깝긴 해. 내쫓긴 비푸릿은 대놓고 해적질을 시작했고 모든 성이 그를 공공의 적으로 선포했으니까.”
“요점.”
“비푸릿의 세력이 요즘 너무 강맹해졌어. 도시 하나를 점거하다못해 우리 자크라티 성 앞까지 진격해 올 정도로.”
이제 대충 감이 잡힌다. 내쫓긴 폭군이 세력을 갖추고 돌아와서, 그거에 대항할 무력을 찾고자 여기 온 거구만. 그중 하나로 나를 콕 집은 거고.
“다른 도시에 연락도 해봤지만, 그쪽도 형편이 여의찮긴 마찬가지야. 다들 본인들 성과 해상로 지키기에 급급해서 도움 받기가 영 어렵단 말이지.”
“…남쪽 연안에 해적이 많이 활개친다는 이야긴 들었네만, 그 정도인가?”
“그래. 도저히 도움 구할 곳이 없어서 육지로 올 만큼.”
바람손은 거기까지 말한 후 나를 똑바로 보았다. 검은 눈동자가 나를 명확히 반사했다.
“당신이 싸우는 걸 봤어. 거의 일당백의 무력이던데. 돈이라면 얼마든지 줄 테니 힘 좀 빌려주지 않을래?”
뭐라고 해야 할까. 나름 급한 사정은 맞는데 이쪽은 지방 전체가 나가리 될 수 있는 사건을 두고 있다 보니 참 미묘한 상황이었다.
“…그보다, 하나 궁금한 게 있는뎁쇼. 그런 용건이라면 차라리 성주에게 도움을 청하는 게 맞지 않습니까?”
“누가 그걸 몰라? 다만…… 야바드 지방은 사략선 운행 때문에 항구도시와 척진 곳이 많아. 내가 할 소린 아니지만.”
정말 바람손이 할 소린 아니었다. 사략선 선장이니까.
“그들이 도와줄 것을 기대하느니, 차라리 모험가를 고용하는 게 빠르지. 그들은 보수를 주면 움직이니까.”
“모험가들로 전황을 뒤집을 순 있는 겁니까?”
“나름 짜둔 계획이 있어. 그리고 당신 외에도 실력자들을 더 찾아 포섭해 갈 생각이고.”
그는 그 직후, ‘다만’으로 사설을 덧붙였다.
“당신을 먼저 찾아온 건 단지 데려갈 수 있는 인원이 많지 않아서야. 배가 그렇게 크지 않거든.”
인원이 제한됐다면 질을 따지는 것도 이해가 된다.
나를 딱 꼬집은 건 뭐…… 본인이 보기에 내가 그만큼 강했나보지. 나는 대체 뭘 보고 그런 판단을 내린 건가 싶지만.
“그래서, 어때. 마음이 바뀌었어?”
문제는 지금 형편이다. 우린 해룡이 더 시급했다. 해룡을 해결하기 위해선 실력 좋은 선장이 필요한 입장이었고.
이 일이 해결되기 전까지 나는 다른 곳에 나서기 어렵다.
“용울문, 아나?”
그러면 뭐 어떡해? 협상안을 찾아야지. 내 컨셉이 타협도 못할 만큼 빡대가리도 아닌데.
“용울문? 알기야 알지?”
“지날 수 있나?”
“흠. 좀 뜬금없는 물음인데…… 답부터 하자면, 아마도. 딱히 직접 시도해 본 적은 없지만 자신은 있어.”
“그럼 이렇게 하지. 선금을 먼저 지급해라. 그럼 네 의뢰를 받겠다.”
“어? 선금? 그건 좀…… 아냐, 현물도 가능하지? 얼마면 돼?”
“재물은 필요 없다.”
“그럼?”
“네 항해술.”
“……?”
아, 물론 빡대가리가 아닌 거지 친절하다곤 안 했다.
“용울목까지 날 안내해라.”
바람손의 표정이 기묘해졌다.
“…조금 당황스럽네. 거긴 왜?”
“해룡을 사냥해야 한다.”
“…뭐?”
바로 뒤에는 제 귀를 의심하는 이의 낯이다.
“잠깐? 뭐? 해룡?”
“말을 이해하는 능력이 부족한가?”
“아니, 정말로? 왜??”
사실 저게 정상인 반응이라 생각하지만, 나는 착실히 눈에 짜증을 담았다. 바람손이 어버버 말을 잃기 시작했다.
“크음. 자세히 설명하겠네.”
“맙소사. 설명까지 할 정도로 진심인 거야? 해룡을 왜 사냥하는데?!”
“그가 타락했기 때문일세.”
“…뭐?”
여기서부턴 아크메이지의 차례가 맞다. 내가 내준 틈을 기가 막히게 낚아챈 마법사가 빠르게, 조리 있는 언어로 현 상황을 전부 밝혔다.
속성 과외에 바람손과 그 동행자가 입을 쩍 벌린 건 어쩔 도리 없는 일이었다.
“아니, 아니, 무슨.”
그래. 내전을 해결하러 온 곳에서 사실 더 큰 시한폭탄이 있다면 당황스럽겠지. 세상 사는 게 원래 그래.
“…좋아, 사정은 이해했어. 당신들이 쉽게 움직일 수 있는 처지가 아니란 것도.”
다행이랄지, 바람손은 이해가 빨랐다.
“이 의뢰는 철회하지.”
그리고 손절도 빨랐다.
“나는 성을 구하기 위해 사람을 얻으러 온 거지, 목숨의 위험을 감수하러 온 게 아니야.”
“잠깐, 조금만 더 재고해 주게. 이 일은 한 도시의 일이 아니야. 자칫하면 서해 전체가 망가질지도 모르네.”
“나도 그걸 모르진 않아. 하지만 서해가 당장 파멸하는 건 아니잖아? 자크라티와 다르게! 지금 자크라티는 풍전등화나 다름없다고.”
“의뢰를 수락하겠다고 하지 않았나. 용울문만 넘게 해주면 되네.”
아크메이지의 애청에 바람손이 날카로운 웃음소리를 토해 냈다. 헛소리 말라는 게 언어로 표현하지 않아도 전해졌다.
“용울문만 넘게 해주면 된다고? 뻔뻔스럽긴! 댁들이 바다 위를 걷는 능력이 없는 이상 해룡을 잡는 순간에도 배를 몰아야 할 게 뻔한데!”
그는 아크메이지가 말 붙일 틈도 없이 다음 문장을 다다다 내보냈다.
“내 목숨은 나 하나만의 것이 아니야. 자크라티가 나를 믿고 보내 준 이상 나는 헛되이 죽을 수 없다고.”
아주 명백한 거절이었다. 비록 아크메이지는 순순히 물러나지 않았을 뿐.
“자네가 돕겠다고 하면, 마탑과 신전에서 자크라티에 원조를 바로 보낼 수 있도록 힘을 써보겠네.”
“이봐, 당신이 뭐라고 그걸 보장하는데? 그네들 엉덩이가 얼마나 무거운지 내가 모를 것 같아? 아니면 뭐, 연줄이라도 있으신가보지?”
“연줄은 없지만, 대현자로서 마탑의 한 축을 맡고 있긴 하네. 허언이 아니니 부디 믿어주게나.”
이것까진 예상하지 못했던가. 바람손의 표정이 조금 누그러졌다.
“…그래, 진짠지 가짠진 모르겠지만 대충 그렇다고 해주지. 하지만 내 의견은 여전히 달라지지 않아. 제멋대로인 마탑이 얻는 것도 없이 자크라티를 도울 거라곤 생각 안 하니까.”
물론 누그러졌다고 받아 주는 건 아니었다.
“그리고 신전…… 야바드 지방이 신전을 안 좋아한다는 건 너희도 잘 알 텐데? 차라리 마탑만 말하지 그랬어? 멍청하긴.”
이건 또 뭔 소리람. 나는 야바드 지방이 신전을 싫어한다는 소릴 듣고 눈살을 찌푸렸다.
“…….”
심지어 슬쩍 돌아 본 인퀴지터는 복잡한 얼굴을 하고 있었으니.
아깐 데브가 입막음했다 하나, 그 뒤로도 입을 안 연 건 좀 이상하다 싶었는데 혹시 이 때문인가 했다.
“됐어. 이 이상 이야기 해봐야 시간 낭비지. 나는 이만 가겠어. 모험가나 용병은 너희 말고도 많을 테니까.”
“…이 일이 해결되기 전까진, 이 도시에서 원하는 바를 이루긴 어려울 걸세. 실력이 있다 하는 자들은 용잡이에 동원될 가능성이 크니.”
“뭐?”
“성주도 비슷한 입장일 걸세. 용울문에서 가장 가까운 도시는 그뤼 텔츠고…… 이 일을 방치했을 때 피해를 가장 먼저 볼 것도 이 도시니까.”
“…지금 날 협박하는 건가?”
“그럴 리가 있겠는가. 나는 그저, 자네가 시간낭비하지 않았으면 하는 마음에 조언했을 뿐임세.”
세간에는 그런 걸 보통 협박이라고 합니다만…….
나는 딴죽을 잘게 쪼개 위장에 넣었다. 누가 뭐래도 나는 아크메이지가 이겨야 이득이었다.
“젠장…….”
바람손이 아크메이지의 얼굴에 죽빵을 날리고 싶단 표정으로 잘근잘근 입술을 씹었다.
한 무리를 대표하는 사람치고 표정 관리엔 썩 재능이 없나 보다. 아니면 그만큼 초조하든가.
“…차라리 이건 어때. 너희가 자크라티를 먼저 도와 문제를 해결해 주면 나도 너흴 돕겠어.”
대략 1분만에 바람손이 역으로 대안책을 제시했다.
다른 도시로 간다는 선택지도 있을 텐데, 그것보단 여기서 해결을 보고 싶은 듯하다.
“그러면 서해가 더 망가질 걸세. 자크라티의 문제는 하루이틀로 해결될 게 아니지 않는가.”
다만, 아크메이지의 말대로 근시일 내에 해결되지 않을 거라는 게 문제였다. 빠르면 며칠 안에 해결될 수도 있지만 어쩌면 장기화될 수도 있단 거다.
그리고 그 시간이면……
「어차피…… 이대로 있어 봤자 저희에겐 죽음만이 기다릴진대…….」
「그런데 왜 우리 엄마는 못 구했어요?」
작은 마을은 더 못 견디고 사라질지도 모르지. 사실 지금도 충분히 시간 끌었고.
“그럼 용은? 용도 하루이틀만에 잡힐 일인가?”
“그건…….”
그렇다면 슬슬 내가 나설 차례인가.
순서가 문제지, 서로를 번갈아 돕는 것 자체는 저쪽도 긍정적인 것 같으니까.
그러니 뒤로 순번이 밀려도 괜찮다는 확신을 주면 된다. 걸릴 시간이 걱정이면 그 시간이 오래 걸릴 게 아님을 알려 주면 된다고.
“아니, 애초에 잡을 수는 있긴 해? 용을 죽일 수 있는 게 가당키는 하냐고!”
그리고 그건 아크메이지보다 내가 적합했다. 정확힌 내 컨셉이.
“가당치 않을 이유가 뭐지?”
“뭐?”
“묻겠다. 용울문까지 얼마나 걸리지.”
“하, 지금 말했을 텐데. 먼저 우리를 돕지 않는 한 거래는…….”
“얼마나 걸리냐고 물었다.”
목소리를 내리깔되 또박또박 강조해서 물었다. 거기서 무언가를 느꼈는지 바람손이 이으려던 말을 끊고 나를 똑바로 보았다.
“여기서 출발한다면 하루도 안 걸리겠지.”
“확신하나?”
“거리가 얼마라고? 난 서해 전체를 외웠어. 확신해. 절대 하루 이상 안 넘겨. 그냥 갔다 오기만 하는 거면 반나절로도 충분하다고.”
“그럼, 나도 반나절이다.”
“뭐?”
지금이 제일 중요하다.
나는 나를 세뇌하듯 선언했다.
“이 도시에서 출발해, 용을 잡고, 이 도시로 다시 돌아오기까지.”
레이드 환경상 근접 딜러는 활약 못할 것이니, 헤딩팟이라서 전멸각 씨게 섰다느니, 사실 용잡이 환경도 구성되지 않았느니. 그깟 문제는 전부 외면했다.
“반나절, 아니 왕복이니 하루면 충분하다. 네가 고한 항해 시간이 틀리지만 않단 가정하에.”
왜냐면, 컨셉충은 그런 거 신경 안 쓰니까!
그러니 뒷일을 부탁한다, 미래의 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