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주인공이 컨셉충이면 곤란한가요-44화 (44/389)

◈44화 빌고 또 빌어 (2)

배는 풍랑과 식량 문제로 딱 사흘간 항해하고 그뤼 텔츠로 돌아왔다. 돌아온 항구는 떠나기 전과 크게 달라진 게 없었다.

“머리를 세는 데 시간이 걸리니 조금만 기다려 주세요.”

사흘 간 우리가 나포시킨 해적선은 8척. 배마다 대략 스물에서 마흔에 가까운 선원이 있었고, 여덟 척 다 내가 전투의 포문을 열었다.

나중에 가선 군함이 해적선에 붙기도 전에 절반 가량을 때려눕히기까지 했으니, 보수는 꽤 지급될 거라 본다.

군인과 모험가가 자신들 할 일이 하나도 없지 않느냐며 제발 살살해 달라고 빌기까지 했으니만큼, 더.

“이렇게 보니까 보수는 기사 나리가 다 싹쓸이할 것 같습니다?”

데브가 옆에서 부럽다는 둥 별소릴 떠들었다. 본인은 선장이나 부선장, 1등 항해사 같이 이름난 놈만 골라잡아 현상금을 따로 받은 주제에 말도 많았다.

“저는 정식 모험가가 아니라면서 대금을 반이나 떼갔는데.”

“모험가가 아님에도 반이나 받은 것이겠지.”

“하, 여기서 총액 꼴찌가 뭐라는 겁니까?”

“……! 난 그저 돈에 욕심이 없는……!”

둘이 티키타카 떠들든 말든 나는 길드에서 운영하는 주점의 한 테이블을 차지했다. 아무렴, 저녁 먹을 시간이었다.

“그래 봤자 꼴찌가 아니게 된답니까?”

“하, 그래도 내가 잡은 수가 더 많다.”

“다 피라미 아닙니까? 난 고위급만 잡았거든요?”

“그게 자랑인가? 숨어서 기회만 엿보다가 붙잡은 것뿐이면서!”

나는 빵을 토마토 스튜에 푹 찍었다. 질척거리는 점성이나 붉은 빛깔이 아까 길드에 넘겼던 자루─해적의 잘린 머리가 담긴─를 상기시키긴 했지만 이내 배고픔에 묻혔다.

지난 사흘 간 멀미 때문에 먹은 게 별로 없어서 너무 배고팠다.

“자랑이죠! 난전에서 기회를 엿보다 원하는 표적을 죽이는 게 쉬운 일 같습니까?”

“하, 정정당당함도 모르는 무뢰배 같으니라고!”

“싸움에 정정당당은 무슨!”

“샐러드 나왔습니다.”

부르르.

나는 드디어 나온 샐러드를 향해 포크를 들었다가 포크 끝이 얄팍히 흔들리는 걸 보았다. 쾅. 마침 인퀴지터가 책상을 후려쳤다.

“역시 비열─.”

“혀를 도려내기 전에 둘다 닥치든가 내 앞에서 꺼져라.”

밥상머리에서 뭐하니, 얘들아. 말싸움까지면 몰라, 책상은 치면 안 되지. 음식 엎어지면 어쩌려고.

“죄, 죄송합니다.”

“전 암 것두 안 했습니다.”

“네놈!”

“댁은 네놈, 네놈밖에 못합니까?”

나는 꼬투리가 잡혀 시작될 것 같은 2차전을 두고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애들 밥은 먹여야 하는데. 지극히 한국인의 마인드가 잠깐 뇌를 채웠으나, 그보단 컨셉이 우선이었다.

콱.

“우악!”

“엇!”

“내 말이, 우습나?”

나는 책상 아래로 두 사람의 의자를 걷어찼다. 데브가 첫 차례고, 상황 파악이 느린 인퀴지터가 두 번째다. 두 사람의 의자가 뒤로 넘어가며 주인을 각자의 방식으로 떨어트렸다.

“너무하잖습니까, 나리!”

“네, 네놈 때문에 나까지……!”

얘들아, 내 컨셉 성질머리 알면서 왜 그러니.

나는 속으로 한숨을 되내면서도 얼굴엔 조용히 핏대를 세우고 말없이 검 자루에 손을 올렸다.

투덜대던 두 사람이 드디어 조용해졌다.

“식사 시간 동안은 휴전이다.”

“좋습니다요.”

…얘네들 사실 찐친 먹은 거 아니야?

“내가 꺼지랬을 텐데.”

별개로 휴전은 이미 늦었다. 딴 테이블로 가라, 이 똥강아지들아.

“식사 중이었…… 왜 다 따로 떨어져서 먹고 있나?”

“아, 아크메이지님.”

그렇게 식사 시간만은 고요히 보냈을까. 아크메이지가 와서는 다소 떨떠름한 얼굴로 물었다. 세 테이블로 나뉘다 못해 각각 멀찍히 자리 잡은 우리들 때문인 게 잘 보였다.

“왜는 왭니까. 저 꽉 막힌 양반 때문이지.”

“네놈도 잘한 건 없을 텐데!”

시비 거는 빈도야 인퀴지터가 높지만 싸움이 길어지는 건 데브 탓이 크니, 썩 틀린 말은 아니었다. 아크메이지는 어느 쪽이든 골치 아프겠지만.

“…뭐, 일단 거의 다 먹은 듯하니 한쪽으로 모여 주시게.”

아크메이지는 그리 말하며 내 테이블에 앉았다.

다른 데 앉으면 안 움직이려 했는데, 이걸 꿰뚫어 보다니. 역시 마법사는 컨셉잘알이었다. 너무 과대 해석해서 오해한 부분 빼고!

“자네들이 자리를 비운 동안, 일이 제법 진척되었네.”

각설하고 그녀는 차분히 그간 있던 일을 설명했다.

해룡을 신봉하는 성주는 반신반의하며 미적대고 있고, 마탑은 마지못해 나선다고 천명했으며, 그나마 신전만이 똑바로 일을 하고 있다는 이야기가 에둘러 전해졌다.

일을 개판으로 하는 게 아주 현실적이었다. 대학교 조별과제의 악몽이 떠오를 만큼.

“그래도 너무 걱정 말게. 용 사냥 계획이 확실히 세워지면, 그네들도 더이상 뺄 수 없을 테니.”

내 표정이 너무 더러워져서일까. 아크메이지는 다급히 사설을 덧붙였다.

“그렇군요. 하면 그 계획은 잘 짜이고 있습니까?”

하나 인퀴지터가 순진무구한 얼굴로 물었을 때, 그녀는 잠시 말을 잃었다. 허를 찔렸다기 보다는, 뭐라 해야 하지. 순간 현타가 온 얼굴이었다.

덕분에 나는 순식간에 상황을 파악했다. 딱 봐도 조별과제 조장 역할 맡으셨구만.

“…워낙 열악한 조건이 아닙니까. 다들 최대한 안전하고 효과적인 방법을 검토 중입니다.”

저 말은 아직 하나도 결정된 게 없단 소리다.

“그래서 말이네만…… 자네들 의견을 한번 듣고 싶네. 일선에서 용을 상대해야 하는 건 우리가 아닌가.”

이 말은 저쪽이 너무 일을 안하거나, 너무 자기들 좋은 대로 아무 말이나 했단 소리다. 그래서 보다 못한 아크메이지가 우리에게 헬프를 요청한 거고.

아마 여기서 좋은 의견이 나오면 그쪽으로 들고가 일 안 하는 놈들 입에 쑤셔 넣지 않을까.

“일단 내가 생각해 둔 건 두 가지 정도일세.”

“…와, 아크메이지님 혼자 일하셨습니까?”

“크흠. 나는 고려해야 할 게 좀 적지 않은가.”

“진짜 엄청 사리나 보네요.”

나처럼 아크메이지의 처지를 단번에 이해한 데브가 짠한 눈을 하고, 유일하게 곧이곧대로 받아들인 인퀴지터만이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쟨 아마 ‘사린다’라는 말이 왜 나왔는지도 모를 거야.

“고려하신 계획은 어떤 것입니까?”

“아, 하나는 바다에서 싸우는 것, 하나는 뭍으로 유인하는 것입니다.”

그래도 덕분에 딴 길로 새지 않았다.

아크메이지가 품에서 두루마리를 꺼내 펼쳤다. 이쪽 지방만 그려 둔 지도였다.

“유인한다면 이곳, 가막만이 좋겠지요. 양 측면이 해안 절벽으로 이뤄져 있고, 가운데 모래밭이 있으니.”

“확실히…… 양쪽에서 공격을 가한다면 효과적이긴 하겠습니다.”

“근데 유인은 되는 겁니까?”

“그래서 고민 중일 걸세. 목격담은 전해질지언정 해룡을 상대해 본 자의 기록은 전해지지 않으니. 유인이 될 거란 보장이 없네.”

즉, 해룡에 대한 정보가 외형밖에 없단 셈인가. 사용 기술이나 패턴, 가진 특성 따윈 하나도 모르는 거고?

이야 완전 헤딩팟이네. 거기에 팀원 분열을 끼얹은, 전멸하기 딱 좋은 헤딩팟.

“무엇보다 유인이라는 것은 보통 화를 돋구어 끌고오는 것일진대…… 바다에서 해룡보다 빠른 배가 있을 리 없지 않은가?”

“흐음.”

“근데 그렇게 치면 바다에서 싸우는 것도 비슷하지 않아요? 해룡이 바다 뒤집으면 싹 다 수장될 것 같은데.”

“그러니 문제인 게지.”

그녀는 어깨를 으쓱이며 만약 바다에서 싸우게 되면 그땐 물량전으로 밀고 가야 할 거라 말했다. 용을 둘러싸는 식으로 수십 척의 배가 공격을 가할 거라나.

용의 꼬릿짓 한 번에 배가 침몰할 수 있는 만큼 나름 합당한 의견이었다. 그 인력을 전부 수급해야 하는 도시와 마탑은 싫어하겠지만.

“어느 쪽이든 용에게 버틸 수 있는 배가 중요하겠습니다.”

“예…… 그래서 그 부분을 강조하니 다행히 마탑에서 배 하나를 수배해 주긴 했습니다. 카나베스 성주의 주문으로 마탑에서 직접 설계한 군함인데, 용에게 대항할 목적으로 제작된 것은 아니지만 비슷한 기능이 부착되어 있긴 하다더군요.”

카나베스는 또 어디야. 요즘 들어 자주 튀어나오는 새로운 지명에 머리가 지끈거렸다. 나는 한국 도시 이름도 다 못 외운 인간이었다.

“…하나요?”

“그런 배가 흔히 제작되는 건 아니지 않나.”

“그건 그런데…….”

“그래도 없는 것보단 낫군요. 용을 잡을 것도 아닌데 어쩌다 그런 군함이 만들어졌는진 모르겠습니다만.”

“카나베스는 야바드의 해적들로 가장 골머리를 앓는 도시니까요. 아마 사략선을 잡기 위해 건조한 것이겠지요.”

다른 건 몰라도 그냥 해적 때문에 골치 아픈 해안도시라는 건 알겠다. 그거면 되었다.

나중에 필요하면 또 언급되겠지. 해적이 연달아 튀어나오는 시점에서 어쩐지 근시일 내에 다시 엮일 것 같긴 하다만.

“카나베스 쪽은 순순히 내준답니까? 본인들이 돈을 댔을 텐데.”

“서해 전체의 일이니 마땅히 그러할 수밖에…… 라고 하고 싶네만 그렇진 않네. 아마 성주나 마탑에서 무언갈 내줘야 하긴 하겠지. 그러나 대가로 무얼 주고받든 우리가 신경 쓸 이유 무어 있겠나.”

“하긴 그거면 됐죠.”

데브 말대로 그거면 되긴 하다. 우리가 돈 내는 거 아니면 별로 알 바 아니지. 암암.

“여기 아크메이지님 계십니까?!”

그때 누군가가 길드홀 문을 거세게 열어젖히며 들어왔다. 아크메이지와 복장이 비슷한 게 마법사가 아닐까 싶다.

“나를 찾아왔는가?”

“아! 계셨군요!”

어린 마법사는 다급히 다가와 무언가를 내밀었다. 여러 개의 종이쪼가리였다.

우리는 보는 척도 안 하는 게 어지간히 중하고 다급한 사안이 실려 있지 않을까 싶다.

“이런…….”

그리고 그건, 아크메이지의 찌푸려진 미간으로 증명되었다. 백사자의 기나긴 갈기가 부드럽게 흘러내렸다.

“무슨 문제 있습니까?”

“용이 아무래도 용울문 안에 있는 것 같습니다.”

사실 아크메이지의 미간을 보지 않아도, 어린 마법사가 하고 간 귀엣말을 들어서 알았지만.

“예?”

“용이 그곳에서 발견되었던 걸 고려해 그곳을 우선시해 수색해 달라곤 했는데…… 그게 정말이었던 모양입니다. 용울문 내부로 들어가진 못했지만, 그 안에서 부정이 흘러나오는 게 확실시됐다는군요.”

“잠깐만요, 거기 제정신이 박힌 뱃사람은 얼씬도 안 한다 그러지 않았습니까?”

“…그래, 자네 말이 맞네.”

“그럼……?”

“선장을 구해야겠지.”

별개로 나는 내 예감이 하나 들어맞았음을 인지했다.

“용울문도 들어갔다 나올 수 있는 선장을.”

용울문이야 이름부터 대놓고 나 특별 장소요 하고 있으니 제쳐 두고. 아무리 봐도 바다의 전신 후예인가 뭔가 하는 걔, 데려와야 할 기색인데.

“해룡을 상대하는 것도 자살 행위나 다름없는데, 평생을 바다에 산 뱃사람들도 얼씬 안 하는 곳에 가는 게 정말 맞는 겁니까……?”

“확실한 건 아니니 앞서서 걱정 사두진 말게.”

“가능성이 높담서요.”

“그건 그렇네만.”

“하, 설마 두려운 건가?”

“그럼 안 두렵겠습니까? 난 댁들처럼 특별한 힘이 없거든요?”

“…담력 없긴.”

역시 게임에서 허투루 캐릭터를 만들었을 리 없다. 그렇게 궁예질 성공을 두고 자찬하고 있자니 데브가 창백한 안색으로 머리를 잡았다.

내가 보기엔 그냥 지상에 남으면 해결될 일 같은데, 쟨 은근히 사서 고생하는 것 같다.

“자네는 지상에 남아도 되네. 자네를 무시하는 건 아니나, 자네의 적성은 사람을 상대하는 것이지 해룡 같은 존재와 맞서 싸우는 건 아니지 않는가.”

“…그건, 그렇습니다만.”

“대신 자네에게 맡기고 싶은 건 있네.”

“……?”

“사람을 찾거나 쫓는 것에선 자네가 나보다 한 수 위 아닌가. 나도 백방으로 알아보겠네만, 자네가 날 도와주면 더 수월히 사람을 찾을 수 있을걸세.”

아크메이지의 말에 데브의 입가가 다소 미묘해졌다.

“그거야 제 전문이긴 합죠. 근데 그거면 됩니까?”

“그거면이 아니라 그것이나 되는 거지. 선장을 찾지 못하면 우리는 시작도 할 수 없을 걸세.”

“…알겠습니다. 애초에 제가 해야 할 일이기도 하고.”

“보수는 부르는 대로 지급할 것이며, 보호장치가 탑재된 배가 있으니 자잘한 암초는 버텨 낼 거라 꼭 전달해 주게.”

“그러면 좀 쉽죠. 걱정 마십쇼.”

데브는 그 말과 함께 자리에서 일어섰다. 녹색 후드 자락이 한 번 나풀거렸다.

“혹시 또 따로 알아야 할 게 있습니까?”

“아, 해룡을 상대할 수도 있다는 말도 덧붙여야겠군.”

“그거야 당연하죠. 그거 외엔 없는 거 맞습니까?”

“당장은, 그렇네.”

“하면 전 자리 좀 비우겠습니다.”

곧 밤인데 지금 가나.

하긴 내가 할 말은 아니다. 지금까지 밤낮 구분 없이 움직인 게 몇 번인데. 쟤 입장에선 밤이 편하기도 할 테고.

데브가 길드홀에서 곧 몸을 감췄다.

“저희는 무엇을 합니까?”

“인퀴지터는…… 아직까지는 대기입니다. 신전이야 충분히 협력하고 있으니 말입니다. 그러니 저이를 도와 선장을 찾으셔도 되고 이번처럼 다른 일을 하고 있어도 되겠지요.”

“그렇습니까…….”

인퀴지터는 준비 과정에서 도울 게 없다는 것이 퍽 애석한 모양이나, 나는 차라리 달가웠다.

솔직한 말로 인퀴지터나 내 컨셉이나 정치 및 거래, 사람 탐색에 적합한 인재상은 아니지 않는가. 컨셉을 제한다 해도 이런 거 자신 없긴 매한가지고.

“할 말은, 이게 단가?”

“아, 자네에겐 하나 있네.”

오잉. 있다고?

“이번 일과 별도로, 만약 마탑에서 접촉해 오거든 무슨 말이든 절대 듣지 말고 받아들이지도 말게. 만약 그들이 무력을 쓰려고 하거든 공격해도 괜찮네. 앞으로 있을 모든 여정을 염두에 두고 하는 말일세. 내가 먼저 제안하기 전엔 결코 마탑에 출입하지 말게.”

…대체 왜 무력까지 언급되는 건진 모르겠지만, 일단 알았다. 근데 진짜 왜? 나 마탑이랑 원수졌어?

“그것 외엔 더 없네.”

아크메이지가 본인이 소속된 세력을 두고 왜 저리 말하는진 모르겠다. 그러나 자세한 사정을 알려 줄 의향은 없어 보였다.

그러니 뭐 어쩔 수 있나. 그냥 기억에 담아 두고 넘기는 수밖에.

대신 이제 남은 시간은 자유 시간이라고 봐도 될 것 같은데……. 선장은 데브가 데려온다고 하고, 배는 이미 준비된 데다가, 성주와 마탑, 신전도 일단은 나선다니까.

그러면 나도 자유 사냥이나 해야겠다. 저녁 먹느라 아직 수령 안 한 보수만 받으면 달리 할 일도 없었다.

나는 책상에 올려두었던 다리를 내리곤 몸을 일으켰다.

탁.

등에 매단 채로 의자에 앉을 순 없어서 잠시 테이블에 기대 둔 투헨더가 내 손에 들어왔다.

“어딜 가십니까?”

아, 이참에 인퀴지터 좀 떨어트려 놓고 가야겠다.

데브와 아크메이지가 본인들 일로 떨어진 지금, 혼자가 될 절호의 기회였다. 개별 활동이 안 되는 것도 아니고, 된다는 게 확실시된 지금 안 떨굴 이유가 없다.

“저도…….”

“네 할 일은 네 머리로 찾아라. 남에게 의탁하지 말고.”

“……!”

발언 너무 셌나? 근데 컨셉이 적당히 지랄 맞아야지.

가끔 나도 내 컨셉 해석하기가 어렵다. 과몰입할 수 있는 순간이면 차라리 편하게 대사 짜겠는데, 일상은 해석하기에 따라 천차만별이라서.

어쨌든 내 대가리로 메이스가 안 날아왔고, 인퀴지터도 따라오지 않았으니 됐다. 나는 홀가분한 걸음으로 길드 홀을 나갔다.

게임에 들어오고 나서 거의 처음으로 가지는, 안전하되 혼자인 시간이니만큼 알차게 써야 했다.

* * *

“선장, 괜찮은 겁니까?”

“안 괜찮을 게 뭐있어.”

사내는 그리 말하며 키를 조정했다. 달조차 구름에 가려져 어둑어둑해진 상태에, 바다도 그리 다정한 편이 아니었으나 하늘에 닿은 항해술은 배를 교묘히 해안 절벽 만에 집어넣었다.

가막만. 이 지방 사람들은 존재를 다 알고 있으나 굳이 쓰지 않는 장소였다.

“나 못 믿냐?”

“선장의 항해술은 언제나 믿죠. 제가 물은 건 다른 부분입니다.”

“새끼, 닻이나 내려.”

그는 낄낄 웃으며 본인의 머리에 얹어진 삼각모와 두건을 잠시 벗었다. 오랜 항해로 떡진 머리가 잠시 바깥 공기를 쐬었다.

그사이 배는 연안에 완벽한 정박을 행했다.

“좋아. 다들 고생했다. 조금만 더 힘내자. 형제들이 기다리고 있지 않냐.”

어둠은 말 전하길 좋아하는 존재라, 그는 목소리를 낮추어 응원을 전했다. 소리는 나지 않았으나 분명 선원들로부터 화답이 돌아왔다.

“예정했던 대로 너흰 배를 지키고, 가자 갑판장.”

“네.”

그는 작은 보트를 내려 뭍으로 은밀히 이동했다. 많은 손해와 희생을 감수하고 시도한 일이 막바지에 다다라서인가. 혹은 며칠 전까지 비푸릿의 추적을 따돌리느라 밤을 지새웠던 까닭인가.

노를 젓는 손이 몇 번 땀에 미끄러졌다.

“제발 그 용병이 도시에 남아 있으면 좋겠는데…….”

“음? 아, 그때 그거 말하시는 겁니까?”

“그래…….”

사내는 며칠 전 비푸릿과의 불화에 끼어든 군함을 떠올렸다. 정확힌, 그 군함에서 해적선으로 넘어가 종횡무진 날뛰던 전사를.

“한 사람으로 전황이 바뀌진 않을 텐데요.”

“나도 알아. 그렇지만 상황에 꽤 도움이 될 거란 건 틀림없잖아. 쭉정이 여럿보단 그런 놈 하나가 낫지. 무엇보다 돈으로 고용할 수 있을 것 같고.”

도망치던 와중에 슬쩍 본 거라 확실하진 않다. 그렇지만 해군의 배에 있되 군복을 입지 않았으니 필시 모험가나 용병일 것이다.

군함에 새겨진 마크는 도시 그뤼 텔츠의 것이니 귀항했다면 그뤼 텔츠에 있을 테고. 그러니까, 귀항한 후 어디로 떠나지 않았다면 말이다.

“돈은 충분하니 만날 수만 있으면 되는데…… 해룡이 우릴 가호하실지 모르겠군.”

“분명 있을 겁니다.”

“그래, 그러길 빌어야지…….”

사내는 배가 모래사장에 닿는 걸 느끼며 일어섰다.

“그렇지 않으면 형제들을 볼 낯이 없으니까.”

그뤼 텔츠로 갈 시간이었다.

* * *

“……? 부선장!”

한편, 사내가 떠난 배의 갑판.

마스트 위 공간에 있던 선원이 선장을 대신해 지휘를 맡은 이를 불렀다.

“뭐야?”

“저기 수면에…… 상어 같은 게……?”

“뭐?”

“아니, 바다악어인가……? 잠깐, 배로 다가온다!”

부선장은 그의 보고에 이유 없이 짙은 불안감을 느꼈다. 바다악어란 이름에 겁을 먹은 것은 아니었다. 그저 그의 오랜 항해 생활이, 생존을 위해 투쟁해 온 시간이 직감의 형태로 경종을 울린 것이었다.

“…다들 작살들어!”

쿵!

정체 모를 짐승들이 배의 하부 갑판을 두드리기 시작했다.

1